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49)
을 위한 세계는 없다-749화(749/817)
EP.749 복수 너머에서 (6)
***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한국인들은 하루가 다르게 나라를 복구했다.
서울은 벌써 끊어진 다리와 무너진 도시의 잔해를 전부 치우고, 재건축을 시작할 정도.
행정부를 비롯한 사회 곳곳이 복구되는 속도 또한 빨랐다. 이 나라의 수뇌부를 차지하고 있던 애국자들이 떼죽음을 당한 탓에 온갖 곳에 공백이 생겼으나, 의외로 실무진이 많이 살아남은 덕분이었다.
능력은 있지만, 애국자들에 가입하지 못했던 사람들.
그들은 빠르게 망가진 시스템을 복구했다. 그리고 그 모든 복구 작업 뒤에는 김규원 대통령의 영도가 있었다.
물론, 쿠데타를 극복하고, 종말 교단에서 한국을 구한 불세출의 대통령… 같은 이미지는 없었다.
첫 번째로 김규원의 정치 인생이 워낙 지저분한 탓이요.
두 번째는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교단의 끄나풀이었는데 대통령만 멀쩡할 리 없다는 합리적인 의심 탓이었고.
마지막으로 이때다 싶어 권력을 노리는 승냥이들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규원 대통령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복구 작업을 시행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천여명의 지원 덕분에.
-대통령님이라면 잘 해내실 겁니다.
뭐 대단한 말도 아니었다. 공식적인 기자회견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저 지나가듯, 언론에 흘린 말 몇 마디.
-전 그분을 믿습니다.
누군가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또 누군가는 ‘대통령이 추방되면 재미없을 것’이란 뜻으로 해석했다.
물론, 가장 흔한 해석은 천여명이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국민들은 대체로 흔한 해석을 선호했고, 김규원 대통령의 지지율을 본 승냥이들은 곧바로 도망쳤다. 적어도 여명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었다.
이쯤 되자, 가장 멍청한 사람조차 한 가지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의 다음 권력은 천여명에게서 나온다.
김규원 대통령은 개헌을 통해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멋들어진 표현을 헌법에 넣을 생각인 듯했지만, 그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게 바로 천여명이었다.
욕심 많은 인간들과 몇몇 지식인들은 그깟 초인 하나에 온 국민이 들썩인다며 불만을 토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쌓인 국민적 호감도 호감이었지만, 그는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용을 타고 전국을 날아다니며 교단의 악마(?)와 싸우고, 시민들을 구한 영웅.
온갖 증언과 증거가 쏟아진 덕분에 언론 플레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전투가 더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돈과 힘, 그리고 야심을 가진 사람들이 천여명을 찾아갔다.
문제는, 천여명이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는 것.
사실, 그가 어디 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병실을 나선 뒤, 대통령을 만난 그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기자회견 날짜를 잡아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온갖 무지렁이들이 개소리를 떠들어댔을 게 분명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실제로 사이비들은 ‘천여명은 우리의 신께서 보내준 용사’라고 떠들고 있었고.
전국적 구호 활동을 벌이는 성녀가 사이비 교주에게 총을 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뭐, 아무튼.
야심가들은 기자회견 날짜까지 가만히 손만 빨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가진 모든 걸 이용해서 천여명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천여명, 이 시대의 마지막 드래곤 라이더! <세계 용 전문 협회> 의 전문가들을 모시고 천여명 선수가 어떻게 드래곤 라이더가 되었는지 알아봅니다! 오늘 오후 9시 JBS 방영.》
《난세가 영웅을 부르는가, 아니면 영웅이 난세를 부르는가? 천여명은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 쿠데타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그날의 업적을 밝힌다! 신문은 언제나 고려 시보!》
노골적인 용비어천가를 불어 재끼는 언론.
[대월 그룹은 천여명 선수의 올림피아 결승전 광고비를 회수하는 대신, 천여명 선수의 이름으로 복구 사업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피해를 보신 국민들께 애도를 표합니다. 우리 삼덕사는 천여명 선수와 함께 복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우선 돈부터 살포하는 기업들.
-이영익(‘전 인천시장’) : 인천에는 서해에서 수 백 년마다 용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저는 이 전설 속의 용이, 바로 천여명 선수를 뜻한다고 봅니다. 인천의 아들! 인천의 용! 천여명! 괜히 인천의 야구팀 상징부터 용인 이유가 다 있다, 이 말입니다!
-박기태 (‘함흥시장’) : 천여명 선수가 태어난 곳이 인천이긴 하지만, 현재는 함흥 홍 씨의 사위 아닙니까? 천여명 선수는 현재 입원 중이신 홍용완 의원님의 뒤를 이어 함흥시의 지도자가 되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함흥시의 국민 모두 그걸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양을 떠는 정치인들까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들은 은둔 중인 천여명이 자신들의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며 동네방네 천여명을 찬양했다.
정작 그 꼴을 본 천여명은….
“어우, 진짜.”
참지 못하고 TV를 꺼버렸다. 그러자 옆에서 국밥을 먹고 있던 세티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여명, 인기도 좋네.”
“이딴 인기 필요 없어.”
여명은 투덜거리며 국밥에 다대기를 풀었다. 뽀얀 국물이 붉게 물드는 가운데, 세티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다 닥치게 할까?”
“…어떻게?”
“그야 뭐, 아직 남아있는 아빠 쪽 인맥으로?”
“….”
세티의 아버지, 홍용완 의원은 놀랍게도 죽지 않았다. 다른 애국자들처럼 머리가 터지긴 터졌는데, 옆에 있던 모낙랑 덕분에 초인으로 각성했다나 뭐라나.
그렇게 얻은 초인의 재생력과 응급치료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뇌에 문제가 생겨서 팔다리는커녕 입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라나.
애국자들에 소속된 사실이 까발려지고, 몸까지 망가졌으니 홍용완의 정치 생명… 아니, 인생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홍용완 의원이 키워 놓은 함흥 홍씨 파벌은 전부 세티에게 매달리는 상태였다. 애국자 파벌로 찍혀서 사라지느니, 여명과 인연이 있는 세티에게 들러붙자는 생각이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괜히 그쪽이랑 엮였다가, 대통령의 잔당 처리에 방해만 될라.”
“반대로 생각해서, 내가 잔당들을 모아서 한 방에 대통령에게 넘겨줄 수도 있겠지.”
“….”
거기까진 생각 못 했네. 여명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인천에서 만났던 순박한 소녀는 어디 간 거야….”
“제미니 시티에서 어른이 됐지.”
“….”
제미니 시티? 거기서 뭘… 아.
세티가 야한 농담을 던졌다는 걸 깨달은 여명은 스윽 시선을 돌렸고, 세티는 꺄르르 웃은 뒤 다시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여명은 그녀를 따라 붉은 국밥을 떠먹으며 물었다.
“성녀는 뭐해?”
“깍두기 국물 부어줘?”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성녀.”
세티는 깍두기 그릇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전국에서 구호 활동 중이야. 아마 우리 중에 가장 바쁠걸.”
그 사이에 첩실 회의… 아니, 용사 회의를 열 정도로 체력이 남아돌긴 하지만. 세티가 뒷말을 삼키는 가운데, 여명은 다른 일행들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어느새 국밥 한 그릇을 통째로 비운 세티는 뼈해장국을 추가한 뒤 설명을 시작했다.
“미리는 성녀를 따라 같이 구호 활동 중이야. 아무래도 엘프 공주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까.”
“…그래, 엘프 건은 밝히더라도 나중에 밝혀야지.”
“그리고 살로메는… 라쉬크랑 같이 괴수 군인을 사람으로 되돌릴 연구를 준비하는 중이야. 만탑산에서 찾은 자료는 이미 마탑행 기차에 실렸다더라.”
좋은 이야기였다. 여명이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세티는 계속 국밥을 먹으며 말했다.
“우리 자매들은 이곳저곳에서 봉사나 촬영을 하면서 각자 얼굴 파는 중이야. 나중에 교단의 인조인간이라는 걸 들켜도 무사하려면, 대중의 호감을 얻는 편이 좋으니까.”
“….”
나머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코르부스는 현재 가까운 곳에 까마귀인 척 숨어있었고, 라쉬크는…
“…크흐!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 추가!”
…바로 옆 테이블에서 술국을 안주 삼아 소주를 비우고 있었다.
특유의 분홍 머리를 피눈물의 환상으로 가려놓았음에도, 그녀의 외모와 독특한 분위기가 합쳐져서 주변의 시선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하긴, 누구라도 여자 혼자 소주를 다섯 병이나 비우는 걸 보면 신기하긴 하겠지.
아마 나중에 술 때문에 사고 한 번 치지 않을까?
여명이 쌓인 소주병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세티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인물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용 남매는 각각 만주와 한강에 있어.”
“…한강에?”
붉은 용, 오르세 타불이 만주에 있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그의 친우, 드워프 왕의 무덤이 있으니까.
하지만 라날이 한강에? 대체 왜?
여명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오르기 무섭게, 세티가 설명했다.
“다리 복구하는 자재를 옮겨주기도 하고… 서울 시민들에게 마스코트 취급을 받으면서 이것저것 먹을 걸 받아먹고 있는 모양이야. 한강의 용이라나? 아직 언론에는 안 떴지만, 인터넷에서는 반응이 뜨거워. 조금 전에 방송에 나온 용 전문가도 라날을 보러 한국에 왔을 정도라니까?”
“….”
한강의 용이라니.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안전한 거 맞지? 밀렵 위협은 없지?”
“응, 국민의 생명을 구한 용인데, 아무리 뻔뻔해도 밀렵은 못 하지. 단지….”
“단지?”
“음료 회사에서 고소가 들어왔어.”
푸흡, 여명은 입에 넣던 국밥을 뿜었다.
“뭐???”
세티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보여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스마트폰을 꺼내 유명 SNS에 접속했다.
SNS의 화재의 영상 코너 맨 위를 장식하고 있는 건, 라날의 영상이었다.
다리가 무너지는 위급한 순간, 한강에서 솟구친 용이 다리의 붕괴를 막는 극적인 영상.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뒤지지 않는 그 영상 속 라날은 카메라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펩시는 콜라가 아니다! 한국은 해군에 코카콜라를 보급하라!!]영상은 거기서 끝났고, 여명의 침착함도 거기서 끝났다.
“….”
이거 내 탓인가?? 미친 용을 하수도 바깥에 풀어놔서 이렇게 된 건가?? 할 말은 잃은 여명이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세티가 수저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하필 이 영상이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라서… 음료 회사 주식에도 영향이 왔다더라.”
“….”
“장만 어르신 말로는 용은 보호종이라 고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데… 뭐,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어.”
“…그러면 이건 진짜로 고소가 된 뒤에 생각해보자.”
이놈의 자본주의란 정말이지… 하다 하다 용까지 고소하네. 여명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뒤 국밥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곧 세티가 시킨 뼈해장국이 나왔다. 여명은 청소부 형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국밥 등뼈의 살을 발라주었다.
그걸 본 라쉬크가 ‘하다하다 고기까지 발라주네. 달아서 이가 썩겠다.’ 라고 투덜거리고, 여명이 ‘라쉬크 것도 발라 드려요?’ 라고 대답할 때쯤.
부끄러운 듯 수저를 깨작거리던 세티의 시선으로,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박 기자님.”
딸랑! 국밥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온 건 한 쪽 팔이 없는 외팔이 기자였다. 터덜터덜 여명의 옆자리에 앉은 그는, 살을 발라주는 여명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거 참, 지극정성이구먼.”
“그럴 가치가 있는 여자니까요.”
“….”
라쉬크가 우웨엑- 헛구역질하고, 세티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리건 말건, 여명은 발라낸 살을 세티의 앞 접시에 수북이 쌓으며 말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왜, 내 국밥 살도 발라주려고?”
“아뇨, 남자한테는 안 해줍니다. 형들한테 이런 건 여자랑 어린애들한테만 해주는 거라고 배웠거든요.”
“…나도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지만, 형들의 조언이라는 건 대부분 쓸모가 없어. 특히 여자에 관한 건 더더욱.”
꽃뱀에게 털린 기자의 조언이라. 여명은 그의 충고를 한 귀로 흘려버린 뒤, 박철이 먹을 국밥을 하나 더 주문했다.
박철은 분주히 움직이는 국밥집 아줌마, 정확히는 시크릿 소사이어티의 요원을 보며 말했다.
“세 시간 전에, 부산항으로 CIA 요원들이 입국했다.”
“…모스크바의 요원들보단 늦었군요.”
“뭐, 거리가 거리니 말이지… 의외로 가장 먼저 움직인 건 프랑스였다. 이틀 전에 개성 차원문을 넘어온 아샤인들… 내 성물로 확인해 보니, 외인부대 소속 친구들이 꽤 섞여 들어 왔어.”
“….”
“중요한 건 아니지만, 올림피아 인도 코치팀 중 몇 명이 자네를 찾고 있는 듯하고.”
여명은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이렇게 두문불출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였으니까.
“강대국들이 자네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했어. 그것도 꽤 노골적인 관심을.”
박철은 하나만 남은 팔로 탁자에 턱을 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자네와 접촉해 한국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려는 거겠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암살, 혹은 인질 확보.”
“그건 기자님의 의견입니까, 아니면 장관님의 의견입니까?”
“종군 기자로서의 경험일세.”
“….”
“소위 강대국이란 녀석들은 말이지, 자신들의 걸림돌이 될 존재를 용납하지 않아.”
이번에는 남미에서 종군기자 생활을 한 베테랑 기자의 조언이었다.
곧, 국밥을 오물거리던 세티가 덧붙였다.
“여명은 아직 걸림돌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고요.”
“그래, 그렇지… 하지만 이대로 여명이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백악관이나 엘리제 궁전의 누군가가 천여명이 한국에 남을 생각이 없다고 오해할지도 모르지.”
박철의 말에는 뼈가 들어있었다. 여명은 박철과 똑같이 턱을 괴며 말했다.
“제가 한국에 남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혀야 한다, 그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가 아무리 강한 초인이라도, 국가의 보호를 받는 것과 받지 않는 건 천지 차이야.”
“….”
여명은 짧게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기자님은, 제가 한국에 남아주길 바라십니까?”
“아니.”
“…?”
의외의 답변이었다. 여명의 눈썹이 휘어지자, 박철이 하나 남은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는 할 만큼 했어. 이 나라가 자네에게 여기서 뭔가를 더 요구하는 건… 염치없는 짓이지.”
“….”
“까놓고 말해서, 이 나라는 자네의 헌신에 보답할 수가 없어. 돈이고 자원이고 전부 상처를 치유하기에도 빠듯하지. 그러면 남는 건 애국심인데… 애국심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건, 좆 같은 소리라고 생각하네.”
민주화 운동으로 형을 잃은 동생의 말. 여명은 그의 목소리 속에서 진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 뭐더라… 유명한 작가가 남긴 말도 있지 않나. 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 오스카 와일드.”
“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거기까지 말한 박철은 라쉬크의 테이블로 손을 뻗어 반쯤 남은 소주병을 빼앗았다.
가르쳐준 적도 없는 소맥을 말아 마시던 라쉬크가 눈을 부라리건 말건, 박철은 잔에 쪼르르- 소주를 채우며 말했다.
“나야 가족이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지만… 자네는 다르지 않나.”
여명이 정확히 무슨 일을 당해서 각하와 싸웠는지 모르지만, 복수라는 건 박철도 알고 있었다.
즉, 여명이 이 나라를 도운 건 복수의 과정… 아니, 그의 선량한 본성 덕분일 뿐.
도와준 걸 고맙게 여겨야지, 애국심을 팔아가면서까지 그를 이용하는 건 안 된다. 그건 여명을 선량한 각하로 만드는 일에 불과했다.
적어도 박철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냥 나랏돈이나 잔뜩 보상금으로 받고, 프랑스로 가게. 한국인들이 아무리 뻔뻔해도, 자네를 욕하진 못할 거야.”
“…나랏돈이요?”
“그, 대충 건설 업체에 사외 이사로 들어가서….”
“됐습니다.”
대통령하고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 여명은 탁, 박철의 소주병을 빼앗아 그의 빈 잔을 채웠다.
“기자님. 저는 한국에 남을 생각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그렇다고 한국을 버리는 건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인천은… 제 고향이니까요.”
“….”
박철의 눈썹이 씰룩였다.
“이제 정치적인 수사도 할 줄 아는군. 대통령이 좋아하겠어. 그 말, 곧 열릴 기자회견에서 무조건 하게.”
여명의 기자회견. 혼란한 한국 사회를 이름값, 혹은 기대감으로 억누르고 있는 마법의 단어.
박철은 다시 한번 잔을 비운 뒤 말했다.
“그래서, 기자회견에서 뭘 발표할 건가? 내 말대로 프랑스로 가는 걸 발표해도 좋을 거 같은데.”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오물오물 뼈해장국을 먹는 세티를 보며 말했다.
“아직 확실히 정한 건 없습니다.”
“대충 정한 건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 걸.”
“예, 방향은 잡아 놨습니다.”
“…음.”
그 방향이 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박철은 애써 질문을 참았다. 그건 어른이 할 일이 아니었다.
어른이란 무릇 젊은이의 힘이 돼야 하는 법. 박철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자네가 어떤 길을 가건,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불러주게.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갈 테니.”
목소리에 담긴 어른의 마음을 느낀 걸까, 여명과 세티는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일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이후 여명은 박철과 자잘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세티가 뼈해장국을 싹 비우고 추가로 내장탕까지 포장한 뒤에야 국밥집을 떠났다.
“기자회견 날에 보지.”
“예, 기자님.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말은. 해독제나 잊지 말고 보내줘.”
그렇게 박철이 비틀거리는 라쉬크의 뒷모습을 보며 술잔을 비우길 잠시.
국밥집 사장으로 변장해 있던 시크릿 소사이어티 요원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는, 황제가 될 겁니다.”
“….”
황제? 박철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사장은 문밖, 멀어지는 여명의 등을 보고 있었다.
“황족보다도 진한 눈 색과 머리카락… 거기다 용이 등을 내어주고, 성녀가 함께하니 그는 이 시대의 용사가 틀림없습니다.”
이건 또 뭐 하는 인간이야? 시크릿 소사이어티란. 박철은 국밥에 소금을 치며 말했다.
“용사라고 다 황족이 되는 건 아니지.”
“예, 황가가 멀쩡하고, 용사라는 간판만 있을 때는 그렇지요. 하지만 황가는 흔들리고 있고… 제국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과 부단장은,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말을 내뱉은 국밥집 아줌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박철을 마주했다.
“진실을 밝히는 푸른 성물의 주인이여, 진실을 아는 게 당신의 의무이니, 진실을 안다고 죽이진 않겠습니다.”
“….”
“하지만, 경고합니다. 절대로 그의 비밀을 발설하지 마십시오. 아주 작은 것이라도 꼭꼭 숨기고, 입을 막으셔야 합니다. 이미 나와 같은 의심을 하는 자가 도처에 깔렸습니다.”
어딘가 고아하면서도, 단호한 말투.
평소에 보던 시크릿 소사이어티 정보원이 아니었다. 박철은 호기심으로, 그리고 자신을 죽이지 않겠다는 말을 믿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들어 그녀를 찍었다.
찰칵! 성물의 렌즈가 변장을 뚫고 진실을 찍었고, 진실을 마주한 박철은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