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54)
을 위한 세계는 없다-754화(754/817)
EP.754 황금, 꿀, 달러, 그리고 샷건.(3)
***
서울, 올림피아 선수촌.
복구 작업에 열을 올리는 서울 도심과 달리, 선수촌은 하늘 위에 뜬 달만큼이나 조용했다.
인질을 노린 쿠데타군이 선수촌을 공격하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지만, 지금 선수촌을 지키는 일단의 군사 덕분이기도 했다.
제국 기사단.
변경백 전쟁 시절처럼 위풍당당한 전신 갑옷 대신 현대적인 군복에 각반과 금속 건틀릿만 찬 모습이었지만, 허리에 달린 검은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상기시켜줬다.
물론, 하늘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여명의 시선은 냉담했다.
그는 황제와 제국이 기사단장님과 산초를 어떻게 내버렸는지 알고 있었다.
제국의 자랑이자, 황제의 검이었던 기사단은 사라졌다. 지구 열강에 굴복한 황제가 직접 부러트렸으니까.
부러진 검을 다시 이어 붙인다 한들, 예전의 날카로움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황제에게 염치라는 게 있다면, 기사단의 이름만이라도 다른 걸로 해야 했다.
그런 여명의 감상을 증명하듯, 선수촌을 지키는 기사단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제대로 된 초인이 네 명에 무장한 병력이 스물 남짓.
무장 상태만 보면 어지간한 중소 용병단보다 나았으나, 그뿐이었다. 개 중에서 여명과 검을 나눌 수 있을 만한 강자는 한 명이 전부였다.
현재 여명의 실력이라면 컵라면에 물을 붓고 면이 익기 전에 전부 처리할 수 있는 수준.
굳이 신경 쓸 게 있다면 한국군 정도였는데…
“한국군이 안 보이네요?”
여명의 뒤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시스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설마 장관이 병력을 뺀 건 아닐 테고… 여명 또한 살짝 의아해 하자, 시리가 나름의 답을 내놨다.
“아마, 기사단 파견 관련해서 외교적인 문제가 있던 거 아닐까요?”
“외교적 문제라면?”
“TV에서 형부 이야기만 나와서 그런 것도 있지만… 따로 제국 기사단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아마 제국에서 한국의 허락도 없이 기사단을 파견한 거 아닐까요?”
“….”
하긴, 무장한 초인을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이나 보내는 게 정상은 아니었다. 그것도 바로 얼마 전에 쿠데타가 벌어진 나라에서.
성기사단이 그랬던 것처럼 호위 핑계를 댔겠지만, 지르지스를 비롯한 성기사단도 일단은 한국 정부에 통보한 이후에 왔다. 제국 기사단과는 경우가 달랐다.
아무튼, 시리의 예상대로 제국이 멋대로 기사단을 보낸 거라면… 외교적 무례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한국 정부가 항의의 의미로 호위를 붙여주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웠고.
뭐, 이유야 뭐가 됐건 간에, 여명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한국군이 호위하는 삼 황자가 빨갱이에게 당했다! 는 말보다는, 제국 기사단이 빨갱이에게 뚫렸다는 쪽이 더 나을 테니.
제국의 정치적 위신이 똥통에 들어가겠지만, 죄책감은 없었다. 선공은 제국이 먼저였으니까.
어쨌거나, 기사단의 병력 배치를 확인한 여명은 투명 망토를 벗으며 말했다.
“따로따로 나눠서 한 번에 정리하자. 내가 지붕으로 내려가서 중앙 대기조를. 시스는 외곽 경계조, 시리는 입구로 가.”
두 자매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투를 준비하는 시리와 달리, 막내는 따로 질문을 꺼냈다.
“형부, 기사들 죽이면 안 되죠?”
“응. 가능하면 살려서 제압해줘. 혹시라도 위험할 거 같으면 후퇴하고.”
“옛 썰!”
막내는 알겠다는 듯 경례를 올렸다. KGB로 변장했는데 미국식 경례라니… 쓴웃음을 삼킨 여명은 그대로 아래로 강하했다.
그리고 탁! 가벼운 소리와 함께 옥상에 착지한 그는 그대로 마나를 퍼트렸다.
기사단 초인들의 감각이 처제가 아닌 자신에게 쏠리도록.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침입자다!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초인들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여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삼 황자가 있는 숙소를 향해 내달렸다.
계단을 내려가, 황자가 있는 방으로 직행.
황자가 있는 곳은 여명이 쓰던 VIP 방이었던 만큼, 길을 잃을 걱정도 없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VIP룸이 있는 층에 도착하자마자, 계단 앞에 서 있던 이름 모를 기사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마나가 가득 담긴 움직임을 따라, 제국 기사단의 검이 섬뜩한 빛을 반사했다.
하지만 그 위세에 반해, 그의 검술은 다분히 수비적이었다. 아마 다른 기사들이 모일 시간을 벌 생각인 듯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여명은 일반적인 적이 아니었다.
기사단의 검과 무장 혈청이 교차하는 순간, 여명은 손목을 살짝 튕겨 그의 검 손잡이 끝, 그러니까 폼멜을 때렸다.
!
다음 순간, 기사는 맥없이 검을 놓쳤다. 굴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음에도, 그의 눈동자 위로 비치는 건 당혹감뿐이었다.
“뭣?”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명의 일격은 제국 기사단 검술을 달인 수준으로 알아야만 할 수 있는 기예였으니까.
“대체 어떻-?”
여명은 내가 기사단 전 단장이랑 대련도 하고, 부단장이랑 같이 수련도 했다고 대답하는 대신, 반대편 주먹을 휘둘렀다.
빠각! 정통으로 턱을 맞은 기사는 짧은 신음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진 기사를 뒤로한 채 복도로 들어서는 순간, 반대편 복도 입구에서 두 명의 기사가 튀어나왔다.
“기습이다!”
우렁차게 소리친 두 기사는 여명에게 달려드는 동시에, 권총을 뽑아 방아쇠를 당겼다.
지구 무기에 익숙한 건지, 사격 자세가 몹시 정교했다. 여명은 맞사격을 하는 대신, 염동력으로 보답했다.
지이잉! 총알과 보이지 않는 힘이 교차하고, 단번에 승자와 패자가 정해졌다.
“크흑! 이 비겁한!”
승자는 당연히 여명이었다. 설마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제압될 줄은 몰랐던 건지, 염동력에 붙잡힌 기사들은 계속 총을 쐈다.
탕, 탕!
어깨와 옆구리에 총알이 박히긴 했지만, 고작 권총탄으로 주가시빌리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여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콱! 염동력으로 기사들의 목을 조였다. 두 명의 기사가 축 늘어질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걸로 세 명째.
기절한 기사들을 바닥에 내던진 여명은 곧장 삼 황자가 있는 숙소의 문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남은 기사는 문 너머에 있었다.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마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자가 황자의 호위 중 가장 강한 자라는걸.
‘어디, 실력 좀 볼까.’
무장 혈청을 쥔 여명은 곧장 쾅! 숙소 문을 걷어찼다.
종이처럼 찌그러진 문 너머로, 검기가 번뜩였다. 조금 전 기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일격.
검기를 버티지 못한 문이 반으로 토막 나는 가운데, 여명은 검을 피하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진짜다.
다시 붙인 검도 일단 검은 검이란 건가. 기사단에 대한 감상을 수정한 여명은 갈라진 문 사이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노회한 기사가 검을 휘두르며 호통쳤다.
“감히! 이곳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 알고!”
기사의 검은 그대로 여명을 노렸다. 상대적으로 좁은 숙소 입구를 최대한 이용하겠다는 듯, 좁은 곡선을 그리는 검.
쩌엉 – !
무장 혈청을 휘둘러 검을 막아 낸 여명은 확신했다. 노련하다. 조금 전 복도를 지키던 기사들처럼 일격으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기사단에 이런 사람이 남아 있을 줄이야.
흥미를 느낀 여명은 무장 혈청을 휘두르며 그를 밀어붙였다.
“이놈!”
노기사는 당황하지 않고 그에게 반격했다. 굴하지 않는 기사 특유의 굳건함과 좁은 입구가 합쳐지며 잠시 동수를 이뤘지만-
“주, 주가시빌리!?”
-여명이 대놓고 주가시빌리를 내뿜기 시작하자 금세 균형이 깨졌다. 주도권을 빼앗은 여명은 그대로 기세를 몰아 쾅! 기사의 몸을 후려 찼다.
“크헉!”
바닥을 구른 노기사는 곧바로 자세를 다잡았다. 떨리는 손으로 검을 붙잡은 그는 숙소 내부를 보며 소리쳤다.
“황자님! 공산주의자의 기습입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아니, 피하지 않겠다.”
여명이 숙소로 들어와 보니, 삼 황자는 화려한 검을 든 채 똑바로 서 있었다.
“큰형님이 빨갱이에게 납치당했는데, 나까지 빨갱이 손에 잡힐 수는 없다. 제국의 황족으로서, 차라리 여기서 죽음을 택하겠다!”
그렇게 말한 황자는 자신의 목에 검날을 가져다 댔다.
죽기는 염병. 여명은 떨리는 삼 황자의 손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노기사는 벅찬 얼굴로 황자를 바라보았다.
“황자님…!”
“미안하네. 달루안 경, 나와 함께 죽어주게.”
“예, 황자님! 이 늙은 목숨, 황자님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나이다.”
감동… 해야 하는 순간인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거, 내가 나쁜 놈인 건가?’
그 의문에 대답하듯, 삼 황자가 고함쳤다.
“이 간악한 빨갱아! 네가 비록 우리의 몸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언정, 정신은 꺾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쁜 놈 맞네. 고개를 끄덕인 여명은 진짜 나쁜 짓을 저지르기로 했다.
“제국의 영혼을 보여주겠-!”
그리고 삼 황자가 무어라 입을 털려는 찰나, 여명이 신성을 풀었다.
“케프리.”
그러자 빛이 터져 나왔다. 섬광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설마 빨갱이가 이만한 빛을 내뿜을 줄 몰랐던 노기사와 황자가 동시에 질끈 눈을 감은 순간.
빠각!
여명이 두 사람의 턱을 후려쳤다.
사심을 가득 담아서.
***
“어억…!”
삼 황자는 고통 속에서 깨어났다. 어찌나 강하게 맞은 건지, 턱이 덜덜 떨리고 정신이 흐릿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고통 속에서 의문을 떠올리던 그는, 뒤늦게 기절하기 직전 상황을 떠올렸다.
“부, 붉은 별…!”
삼 황자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들자마자, 붉은 별과 눈을 마주쳤다.
“뭐.”
꽁꽁 묶인 채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황자와 달리, 붉은 별은 익숙한 자세로 숙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삼 황자는 그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기사들! 제국 기사들은 어떻게 했지!?”
황자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걱정이 가득했다. 붉은 별은 시큰둥하게 숙소의 방을 가리켰다.
살짝 열린 방문 너머로, 짐짝처럼 쌓인 기사들이 보였다.
“이놈…! 너희 빨갱이들에겐 최소한의 양심조차 없는 거냐? 어찌 망자를 저리 짐짝처럼…!”
“안 죽였다.”
“내 반드시 복… 응?”
안 죽었어? 황자는 한 번 더 기사들을 확인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의 코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사후경직이 아닌, 호흡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왜…?”
붉은 별은 귀찮다는 듯 턱을 괴며 말했다.
“네가 계속 헛소리를 지껄이면 죽이겠다.”
“이, 인질로 삼았구나…! 이 개자식…!”
형님이 납치될 때와 똑같은 수법인가! 삼 황자는 황태자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고통받는 기사들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들을 다 죽인다 해도, 나는 형님처럼 순순히 따라가지 않을….”
“좀 닥치라고.”
붉은 별이 인민의 망치를 뽑아 들며 말하자, 삼 황자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명예의 명 자도 모르는 빨갱이 자식. 아무리 그래도 망치로 사람을 때려죽이겠다고 협박하다니…! 삼 황자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 박살 난 숙소 입구로 붉은 머리의 여인이 들어왔다.
삼 황자는 혹시 아군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지만, 아니었다. 기절한 기사들을 질질 끌고 들어오는 사람이 아군일 리 없었으니까.
“형ㅂ… 아니, 붉은 별 동지. 이걸로 주변 기사들은 모두 마무리했습니다.”
“잘했소. 넷째 동지. 그런데… 막내 동지는 어디 갔소?”
“아, 그게, 음… 막내 동지는 외곽에서 접근 중이던 사람들을 잡으러 갔습니다.”
“민간인?”
“아닙니다. 그들은 삼 황자의 숙소 방향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관련자가 틀림없습니다.”
그때, 삼 황자가 발작했다.
“이놈들! 멈추어라! 그들은 민간인이다! 황자인 나에게 청원할 것이 있어서 찾아온 아샤인들이란 말이다!”
“….”
이 새끼, 거짓말 더럽게 못 하네. 여명이 염동력으로 발버둥 치는 삼 황자의 입을 막길 잠시.
녀석들을 쫓아간 이시스… 아니, 막내 동지가 숙소로 들어왔다.
“붉은 별 동지! 내래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잡아 왔슴네다!”
“잘했소, 막내 동ㅈ… 엇.”
여명은 정색했다. 어쭙잖은 시스의 서북 방언 때문에? 아니, 시스가 개 목줄 비슷한 줄을 걸고 끌고 온 두 사람 때문에.
만주 난민들을 이끄는 시크릿 소사이어티 서울 지부장과… 박철 기자.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을 짓고 있던 박철은 붉은 별을, 정확히는 여명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끌고 온 시스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막내 동지? 녹색…?”
이런 시발. 남들이 듣지 못할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은 박철은 푹-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랜만이오. 붉은 별…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것이오?”
너 여기서 뭐 하냐.
“오랜만이군. 박철. 그쪽이야말로 왜 황자를 만나러 온 거지?”
기자님이야말로 뭐 하는 겁니까?
“나는…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여기, 시크릿 소사이어티 지부장님과 함께 황자님을 보러 왔소.”
박철의 대답이 너무 솔직했던 걸까, 지부장이 화들짝 놀랐다.
“그걸 말하면 어떻…!”
“저 친구는 다 알고 있으니까, 괜히 숨기지 마시오.”
박철의 말을 들은 지부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진짜냐는 듯 여명을 바라보았고, 여명은 적당한 대답을 내놨다.
“만주 난민들 상황은 좀 나아졌나?”
“…!”
지부장의 표정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떨리는 몸까진 억누르지 못했다.
‘속였다.’
여명이 그렇게 확신하고, 시리가 기절한 기사들을 방으로 끌고 가는 가운데, 그는 다시 박철을 바라보았다.
“막내 동지, 박 기자를 풀어주시오.”
“옙!”
막내는 이 연극이 어지간히도 재밌는지, 웃음을 참으며 박철을 풀어줬다. 지부장과 삼 황자가 당황하건 말건, 박철은 하나만 남은 손목을 풀며 물었다.
“붉은 별, 정말로 여기서 뭘 하는 것이오?”
연기 시작한 김에 계속할까? 여명은 슬쩍, 삼 황자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오늘 발표된 책명, 자네도 들었겠지.”
계속합시다.
“천여명을 변경백으로 책봉하는… 그거 말이오?”
“그래, 천여명을 우리 공산주의자들과 싸움 붙이기 위한 그 저열한 술수 말이지.”
여명이 이곳에 온 이유를 꺼내자, 삼 황자가 대뜸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 지레 겁을 먹고 달려들었구나! 붉은 별이란 이름도 별거 아니군그래!”
“….”
“너희 빨갱이들은 이제 끝이다! 새로운 변경백이 너희를…!”
그때, 시스가 조금 전까지 박철을 묶고 있던 줄을 스윽, 들어 올리며 말했다.
“붉은 별 동지, 명령만 내려주시라요. 내래 저놈 모가지를 콱! 묶어서 창가에 대롱대롱 걸어놓겠습네다!”
“….”
“아니면, 이빨을 몽땅 뽑아다가 평생 죽만 먹게 하는 건 어떻습네까?”
처제, 그런 사악한 표정을 지으면 연기가 아니라 진심 같잖니? 저기, 삼 황자랑 지부장이 동시에 쫄아서 고개 돌리는 거 안 보이니?
애써 속마음을 삼킨 여명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다음에도 또 지껄이면, 마음대로 하시오. 막내 동지.”
“알겠습네다!”
크흠, 여명이 헛기침하는 사이, 박철이 다시 대화에 물꼬를 텄다.
“그… 오늘 책명에 대해, 그, 질문부터 하는 건 어떻겠소?”
“질문?”
“서로 오해가 있을지도 모르잖소.”
붉은 별을 설득하는 척, 질문을 뽑아내기 위한 말. 박 기자가 이렇게 눈치가 좋았나? 여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호응했다.
“질문이라… 궁금한 게 있긴 했지. 천여명은 진짜 변경백 혈통인가?”
박철은 곧장 삼 황자를 바라보았다. 시스의 눈치를 보고 있던 그는 용기를 짜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책명에 적힌 대로, 그는 230년 전 변경백이었던 폴 히라리아의 후손이다.”
개소리였다. 여명은 슬쩍 시스를 보며 말했다.
“막내 동지. 우선 앞니부터 뽑게.”
그러자 시스가 주머니에서 니퍼를 꺼냈다. 아니, 저건 또 언제 챙긴 거야?
살짝 당황하는 여명과 달리, 삼 황자는 기겁했다.
“차, 차라리 죽여라!”
“어차피 죽을 거, 이빨에 연연하지 마시라우.”
“이, 이 미친 빨갱이 년!”
그렇게 시스의 니퍼가 황자의 입에 들어가려는 순간. 황자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 그는 진짜 꾸, 꿀의 혈통… 잠깐! 잠깐! 사실대로 말할 테니까, 멈춰!”
시스야, 아쉬운 표정 짓는 거 연기지? 그렇지?
여명은 애써 진중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사실이 뭐지?”
“그, 저, 정확하진 않지만… 천여명은 황금 혈통을 이었을 거다.”
“…꿀의 혈통이 아니라, 황족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여명의 눈썹이 휘어지는 가운데, 삼 황자가 덧붙였다.
“배, 백 오십 년 전 형제 전쟁 당시, 살아남은 방계의 후손들이 있다. 황실이 오랫동안 녀석들을 추적했지만, 차원문을 넘어간 자들은 찾지 못했다. 천여명은 필시 그들의 후손일 거다.”
“일 거다? 이유는 그게 다냐?”
“그, 그리고 재능! 천여명의 비정상적인 재능은 그가 용사 혈통이라는 증거다!”
“….”
“무, 물론 정확한 판단을 위해… 아바마마께서 황궁 무기고에 있는 용사의 무구를 하사할 예정이다. 진짜 용사의 혈통에만 반응하는 무구들이지.”
즉, 제국에겐 여명이 진짜 변경백의 혈통이라는 증거가 없다….
‘…아무 증거도 없이, 이런 정신 나간 짓을 질렀다고?’
제국이 진짜 망한 건가? 에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여명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천여명이 책봉을 거부하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벌인 거냐?”
“그건….”
“막내 동지. 니퍼.”
“마, 말할게! 말한다고!”
“….”
“그…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사실… 이 책봉의 진짜 목적은 천여명이 책봉을 거부하는 거다.”
역시, 정치적인 음모가 있었군. 제국이 바보가 아니란 사실에 여명이 안도하는 사이, 삼 황자가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아, 그래. 현재 제국의 후계 구도에 문제가 있다.”
“후계 구도?”
“크, 큰형님이 빨갱이들에게 납치된 이후, 둘째 형님은 노골적으로 다음 황위를 노리고 있다.”
황태자가 납치된 지 얼마나 흘렀다고 황위 쟁탈전이야? 이래서 봉건 국가란. 여명은 이마를 주무르며 물었다.
“그래서, 그게 천여명과 무슨 상관이라는 거냐.”
“두, 둘째 형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구의 초인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전윤성과 천여명을 노리고 있는데… 미국인인 전윤성을 포섭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건지, 천여명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돈, 돈으로 안 되면 명예, 명예로 안 되면 권력, 그리고 권력으로 안 되면… 여자.”
“…뭐?”
“누님! 둘째 형님은 제국 황녀를 천여명에게 시집 보낼 생각이었다…! 천여명은 호색한이니 누님이라면 좋다고 받아먹을 거라고…!”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여명의 이마에 살짝 핏줄이 솟았다.
“천여명이 호색한이라고 누가 그러지?”
삼 황자는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애, 애인을 넘어서 처제들까지 건드린 놈이 호색한이 아니면 누가 호색한이란 거냐…?”
“….”
순간, 뒤에서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시스와 시리가 동시에 웃음을 참는 소리였다.
시리야, 너까지?? 여명은 삼 황자의 머리를 내려치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물었다.
“그래서?”
“나와 누님은 둘째 형님을 잘 안다. 형님은 장군이면 몰라도, 황제가 되면 안 되는 부류의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가 한 발 앞서 책명을 내렸다.”
둘째 황자가 천여명을 회유할 수 없도록, 선수를 쳤다.
“이대로 책명을 거부한다면… 천여명은 제국 황제를 모욕하고, 혈통의 의무에서 도망친 개자식이 되겠지. 당연히 둘째 형님의 제안도 물거품이 될 테고.”
그래서 그렇게 엿 같은 조건들을 달아 놓은 거였나…? 아니, 여기에는 숨겨진 의도가 하나 더 있었다.
만에 하나 여명이 책명을 받아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는 것.
어차피 여명이 공산주의자와 싸워줄 테니, 그건 그것대로 이득이었다. 변경백은 지역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대신, 중앙 정치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니까.
‘머리 한 번 더럽게 굴렸네.’
쯧, 속으로 혀를 찬 여명은 책봉을 거부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제국의 권력 싸움 따위,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이제 적당히 삼 황자를 두들겨 준 뒤,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는데… 문뜩, 한 가지 의문이 더 떠올랐다.
삼 황자는 왜 이렇게 쉽게 진실을 내뱉었는가? 그것도 조금 전까지 죽느니 마느니 지껄이던 놈이.
잠시 황자의 눈을 바라보던 여명은, 곧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나를… 천여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삼 황자는 그 진심을 감추기 위해, 누님의 계획을 털어 놨다. 아마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는 곳까지
대체 왜? 그와 황자 사이에 무슨 인연이 있다고? 여명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가 말한 건 전부 황녀의 계획이군. 삼 황자. 황녀 말고 너의 진짜 목적은 뭐지?”
“…누님의 뜻이 내 뜻이다.”
거짓말이다. 녀석의 떨리는 호흡이, 격해지는 심장 박동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명은 황자의 눈 깊은 곳을 바라보며 재차 질문했다.
“혹시… 그가 진짜 용사 혈통일까 두렵나?”
“…뭐?”
“너희 뻐꾸기들이 돌아온 진짜 주인에게 둥지를 빼앗길 것 같아서, 그래서 두려운 거 아닌가?”
삼 황자는 발끈했다.
“뻐꾸기라고?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 더러운 소문을 주워섬기느냐? 내가 익힌 무술이, 아바마마께서 걸친 용사의 보물이 우리의 혈통을 증명하거늘!”
“….”
진심이 담긴 반응이었다. 그렇다는 건…
‘…삼 황자는 자신이 뻐꾸기라는 걸 모른다?’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싶었다.
이런 진흙탕 싸움에 엮일 이유가 없었다. 여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가운데, 가만히 있던 박철이 말했다.
“붉은 별, 들었다시피, 황자께선 천여명과 공산주의자를 싸움 붙이려는 게 아니었소. 이만하면 오해는 풀린 것 같소만….”
“살려달라고?”
“황태자를 납치하고, 삼 황자까지 죽인다면 민심이 공산당과 멀어지지 않겠소? 무릇 혁명의 근본은 민심이라 하였으니… 선처 부탁드리오.”
“….”
이거 참, 진짜 빨갱이들 대화 같네. 여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좋아. 박 기자의 얼굴을 봐서 이번은 넘어가지.”
“고맙소.”
“단! 오늘 일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면 나도 손을 쓸 수밖에 없다는 걸 잊지 마라.”
“물론이오. 지부장님, 그리고 황자님? 오늘 우리는 공산주의자와 만난 적 없습니다. 그렇지요?”
지부장은 곧장 고개를 흔들었다. 삼 황자는 무어라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저 멀리 쓰러진 기사들을 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래… 난 아무것도 못 봤다. 오늘, 내가 멍청하게 무술 수련을 하다가 방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그걸 오해한 기사들이… 실수로 총을 쐈다. 그게 전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자님.”
평화로운 해결… 은 개뿔.
‘다음에 황족을 만나면 팔을 잘라버려야지.’
되도록 만나지 말고.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숙소를 떠나려는 찰나.
오- 오- 위대한- 제-국- 이여-!
삼 황자의 휴대폰이 울었다.
“…제국찬양가?”
저딴 노래를 벨소리로 쓰다니. 여명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시스가 황자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자, 잠깐!”
놀란 황자가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휴대폰 화면을 본 시스가 정색하며 여명을 불렀다.
“붉은 별 동지. 잠깐 보셔야겠습니다.”
왜 저러지? 여명은 휴대폰을 받아 확인했다. 그리고 시스와 똑같이 정색했다.
[누님]삼 황자의 누나, 황녀의 전화였다.
“안 돼! 아, 아무 일 없었다고 맹세하겠다! 누님은 건드리지 마!”
“….”
삼 황자가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게 성을 내건 말건, 여명은 전화기를 들고 고민했다.
이대로 끝내려면 이 전화를 무시하는 게 맞았다.
맞았는데… 어째서일까? 이 순간에 전화가 온 게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삑- 삑- 삑- 짧은 보안 신호 직후, 고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천여명.
“….”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은 필요 없었다. 이어진 말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제국의 황녀이자 시크릿 소사이어티의 지도자, 이니마 히라리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