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55)
을 위한 세계는 없다-755화(755/817)
EP.755 황금, 꿀, 달러, 그리고 샷건.(4)
***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황녀가 전화를 걸어와서? 아니, 그보다 앞서 나온 자기소개 때문에.
‘시크릿 소사이어티의 지도자?’
시크릿 소사이어티에는 지도자가 없다. 그들의 태생부터가 그러했다.
반 지구라는 깃발 아래 아샤 분리주의자, 제국 독립운동가, 심지어 동네 피자가게 사장 등 온갖 사람들이 뭉친 잡탕 모임.
다양성과 양이 그들의 장점이었고, 제대로 된 수뇌부가 없어 내부 파벌들끼리 따로 노는 게 그들의 단점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단점도 아니었다.
지구의 강대국들이 지구를 반대하는 조직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아무리 발톱이 날카로운들, 머리가 없는 맹수는 위협이 되지 않는 법.
지구와 싸워야 한다는 무장 투쟁파만큼이나, 지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자강론자들이 그만큼 많은 덕분이었다.
그런데, 지도자라고?
믿기 어려웠다. 세간의 정보는 물론이고, 작가의 노트에도 적혀 있지 않은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여명은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그가 워낙 운명을 많이 비튼 까닭이었다.
세상이 시나리오대로 흘러갔다면, 황녀는 죽은 사람이었다. 동 궁정백 비코프가 발사한 핵의 불길 아래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겠지.
그게 지구에 있던 삼 황자를 제외한 모든 황족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여명이 핵을 막았고, 황녀는 살아서 이렇게 전화를 걸어왔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진 순간, 휴대폰 너머 황녀가 말했다.
-먼저, 동생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플레이어… 라고 하던가요? 당신께서 동생이 개인 호위로 삼으려던 그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동생은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
플레이어까지 알고 있다고? 여명은 모든 걸 안다는 듯 속삭이는 황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예지였다. 성녀처럼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붉은 별의 정체나 지금 상황을 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여명은 곧장 마음속에서 예지란 단어를 지웠다.
그는 운명에서 벗어난 자였다. 성녀의 예지도 못 보는 자신을 뻐꾸기가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면 다른 가능성은….’
여명은 고개를 돌려 처제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지부장과 삼 황자의 입을 막아.’
KGB 요원으로 변장한 두 소녀는 진짜 KGB라도 되는 양, 곧장 그 명령을 이행했다.
“자, 잠깐, 살려주기로 했… 읍! 읍!”
지부장이 발악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박철이 대관절 황녀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그러냐는 듯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두 사람을 제압한 시리와 시스가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여명은 황녀가 들을 수 없도록 휴대폰을 막은 뒤 말했다.
“죽여.”
처제들은 진짜냐고 묻지 않았고, 박철 또한 막지 않았다. 여명이 손바닥을 흔들어 ‘하는 척만’ 하라는 신호를 보냈으므로.
물론 그걸 보지 못한 삼 황자와 지부장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리와 시스가 각자 불의 검과 니퍼(?)로 두 사람의 목을 노린 순간.
-꼭 피를 보셔야겠습니까?
휴대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감시하고 있었나. 여명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마나를 펼쳤다.
딱히 걸리는 건 없었다. 물리적인 감시 카메라도, 어떤 마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공위성으로 보고 있을 리는 없고… 여명은 화악! 마나 위로 주가시빌리의 아지랑이를 토해냈다.
그렇게 유형화된 살기가 방을 뒤덮자, 지부장의 몸에서 조금 전까지 느껴지지 않던 미세한 마나가 느껴졌다.
역시 감시 중이었나.
짧게 입술을 씹은 여명은 처제들에게 말했다.
“기절시켜.”
처제들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시리는 간단한 전류 마법으로 지부장을 기절시켰고, 시스는… 니퍼로 삼 황자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결국 쓰는구나, 니퍼.
잠시 꿈틀거리는 삼 황자를 내려다보던 여명은, 기절한 지부장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에서 마나가 느껴지는 곳, 그러니까 뒤통수와 목덜미 사이를 확인했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그곳에는 작은 꽃 문신이 있었는데, 문신의 꽃봉오리 내부에 아주 작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걸 본 시리가 말했다.
“감시와 도청 마법 같아요. 엄청 복잡해 보이는데… 어딘가 익숙하네요?”
그녀는 이거랑 비슷한 걸 어디서 봤더라- 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거나, 여명은 다시 휴대폰에 대고 물었다.
“그쪽이 진짜 황녀라는 증거는?”
-의외의 질문이로군요. 당연히 천여명과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실 줄 알았는데.
“이미 알고 전화한 거 아닌가? 괜히 말장난으로 시간 끄는 건 관심 없다.”
-제 예상보다 훨씬 직설적인 걸 좋아하시는군요. 그러면 저도 바로 대답하겠습니다. 삼 황자의 휴대폰에 누님이라고 저장된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
여명은 황녀의 전화를 강탈한 다른 인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말했듯, 그건 그냥 의미 없는 말에 불과했으니까.
“원하는 게 뭐냐.”
-제 동생의 안전과… 대화입니다.
“그쪽과 할 말 없다.”
-제가 어떻게 당신의 정체를 알아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응, 관심 없어.”
-….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진심이었다. 그의 정체를 어떻게 알아냈을지 뻔했으니까.
붉은 별이 처음 등장한 시카고부터, 일본과 호주, 그리고 한국까지. 여명은 시크릿 소사이어티의 인맥과 정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CIA나 다른 정보조직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이었지만… 천여명이 가는 곳마다 붉은 별이 나타나다니. 그 사실을 아는 시크릿 소사이어티에는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낸 거나 다름없었다.
점조직의 한계, 그리고 소사이어티와의 친분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으나, 이렇게 뒤통수를 때릴 줄이야.
하긴, 언제나 선의가 보답받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악행은 반드시 보복해야 하는 법.
장모님께 효도나 해볼까. 여명이 푸른 쥐의 라이벌인 시크릿 소사이어티를 박살 낼 계획을 떠올리는 가운데, 황녀가 말했다.
-갑작스러운 책봉 때문에 불쾌하셨겠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 동생이 말했듯, 그건 이 황자를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궁여지책이 아니라 계책이겠지. 너희만 이득을 보는 계책.”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점,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여명은 그녀의 말을 끓었다.
“황녀,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적인 수사로 귀를 더럽히는 건 여기까지만 해.”
-…천여명, 저희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 너희가 책명 같은 헛짓거리를 안 했다면.”
-….
휴대폰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는 조금 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다음 서기장을 결정짓는 싸움에서, 저희가 당신의 지원군이 되어드리겠습니다.
“…?”
뭐? 여명은 물론이고, 옆에서 엿듣고 있던 시리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오르건 말건, 황녀는 계속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비코프를 꺾지 않고선 소련의 유산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저희 제국이 비록 힘을 잃었다고 해도, 여전히 껍데기는 남아 있습니다. 황제의 공인을 받은 공산주의자와 그렇지 못한 공산주의자. 이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
-그러니 이번 책명은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변경백이란 감투를 쓰고 북방으로 가서 비코프를 쓰러트리신 뒤, 변경백령이 된 북방에 새로운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시는 겁니다.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명분은 확실합니다. 아시다시피, 변경백령은 정치적으로 황제조차 건드릴 수 없는 땅입니다.
“잠깐, 잠깐만.”
-현재 비코프가 장악한 땅 외에 다른 땅도 기꺼이 내드리겠습니다. 책명에서 정확히 어느 땅을 하사하는 언급하지 않은 건 그런 이유입니다. 여기서 제 사견을 말씀드리자면, 이미 공산주의자가 자리 잡은 발투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를….
더는 참지 못한 여명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나 공산주의자 아니야.”
-…?
“….”
-거짓말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 쪽에선 이미 다 알고 있….
“진짜 아니라고.”
-…??
“…내 손에 죽은 공산주의자가 몇 명인지 알면, 절대 그런 말 못할 거다.”
-…???
침묵.
휴대폰 너머로 흔들리는 숨소리가 일렁거리는 침묵.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황녀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여명이 먼저 쐐기를 박았다.
“아니라고.”
-어…….
황녀는 당황을 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요?
***
속임수인가?
충격에서 벗어난 황녀, 이미나 히라리아가 처음 떠올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휴대폰 너머의 여명의 태도는 완고했다.
-그놈의 빨갱이 타령. 지겹지도 않나.
눈을 깜빡이던 황녀는, 재빨리 옆에 놓인 마도구를 확인했다.
지진계처럼 종이 위에 파동을 그리는 마도구는 목소리에서 심박수를 읽어내는 아샤식 거짓말 탐지기였다.
그 탐지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진짜 아님.
‘???’
황녀는 머리에 망치를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탐지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레몬 빛 눈동자가 향한 벽에는 여러 종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인천의 국밥집에서 얻어낸 증언, 붉은 별의 위치, 그리고 청소부들의 이력서 사진까지.
그래, 저 종이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천여명이란 인물에 대한 자료였다.
황녀는 통화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이미 몇 번이고 확인한 자료를 다시 훑었다.
…
……
…
[최하층 노동자 출신.]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자력으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딴 것을 확인. 전근대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 부족으로 원하는 교육을 받지 못해 사회에 깊은 불만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됨.] [세계수 혁명단과의 커넥션. 한국 쿠데타 당시 코드 네임 새싹 공주와 데메론드의 왼팔을 확인.] [KGB를 계승한 푸른 쥐와의 커넥션 확인.] [서기장의 무술인 주가시빌리와 피눈물의 환상을 계승.] [드레이테리얼 지하에서 주가시빌리간의 결투 흔적을 발견. 아샤 공산당 제 1 서기 비코프와 천여명의 전투로 보임.] [미국에서 블라디미르 숙청 사건을 통해 옛 소련 잔당과 접촉했을 것으로 추정.] [종말 교단과 다섯 신 교단 양측 모두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임. 아마 공산주의자 특유의 무신론적 세계관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 중.] [소련제 무장 혈청 보유.] [스탈린의 방울, 베리야의 구슬 등 다수의 소련 특수 무기 사용 흔적 확인.] [소련제 인공 성물을 적어도 한 개 이상 보유 중. 스탈린의 훈장이란 의견도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여 모조품으로 추정 중.] [드워프 재벌 그룹을 테러. 현재 둔간 중공업은 내부 권력 싸움을 통해 천여명 지지파가 권력을 잡은 것으로 보임.] [민주당 내부 극단파인 올턴 주지사와 전투. 촬영 카메라를 의식한 행동과 후에 발생한 지지도 상승을 보았을 때, 자작극으로 추정 중.] [옛 중화인민공화국의 특수군 흑묘군 출신인 만박불통과 세 번 이상 접촉, 모종의 방법으로 그의 진의 무술을 배운 것으로 보임.] [몇몇 발언을 통해 공산주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 중.] [일본 공산당과 접촉, 충성을 얻어낸 것으로 보임.] [최근 스미토모 그룹의 계열사 분리 작업과 천여명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임.] [성녀와 두 차례 이상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논쟁한 적 있음. 성녀를 폭행하는 모습을 보아 교단과의 사이는 좋지 않은 것으로 보임.] [그가 파순을 통해 이용하는 일명 ‘쇠똥구리’는 소련제 인조인간으로 추정 중.] [현재 모스크바의 노멘클라투라들이 그를 노리고 병력을 준비하는 중.] [천여명이 한국에서 손을 잡은 김규원 대통령과 박철 기자 모두 학생 운동 출신으로, 한국 땅에선 좌익으로 분류됨.] [성도에서 벌어진 ‘재난’과 관련되어 공산주의자 사이의 내분이라는 의견에 따르면 차기 서기장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임.] [현 KGB 수장 킴 필비는 비코프와 떨어져 천여명을 지지 중.]…
……
…
시크릿 소사이어티가 모은 모든 자료가, 그리고 그녀의 두뇌가 말하고 있었다.
붉은 별… 천여명은 공산주의자라고.
그래서 책명을 내렸다. 천여명에게 아샤 공산주의를 통합할 기회를 주고, 그 대가로 황태자를 구하고, 제국의 영광이니 뭐니 지껄이며 지구와 전쟁을 벌이려는 미친 오빠를 막기 위해서.
완벽한 계획이었다. 적어도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윈-윈 계획이었다. 그랬을 터인데…
휴대폰 너머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자, 잠깐!”
일이 이렇게 흘러가선 안 됐다. 천여명이 이대로 자리를 떠나, 책명을 거부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당황을 삼킨 그녀는 다급히 말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시죠.”
그러자 즉시 대답이 돌아왔다.
-레닌이 만든 혁명 정부는 숙청 없이 유지될 수 없는, 미숙한 정치 체제였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 체제를 마음껏 이용한 학살자다.
“….”
평범한 부정이나, 기껏해야 스탈린 개새끼 같은 말을 들을 줄 알았던 황녀는 꾹 입을 다물었다.
현대 공산주의자에게 있어 스탈린은 신성 불가침한 존재.
그런 존재를 비난한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답지 않은 말이었지만, 레닌의 혁명을 논한다는 점에서 한없이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으므로.
하지만 탐지기는 여전히 저게 진심이라 말하고 있었다.
탐지기를 눈치채고 속이는 건가? 아니면 진짜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가 예측하지 못한 고단수의 심리전?
황녀의 고민이 길어지는 가운데, 여명이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대화는 여기까지다. 끊는다.
“아, 아직 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황녀는 휴대폰을 꽉 붙잡았다.
“천여명, 이대로 제 통화를 끊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실 텐데요.”
-뭐, 천여명과 붉은 별이 동일인이란 소문이라도 내려고?
“….”
-해 봐.
냉담한 경고.
황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급함에 협박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협박을 실행에 옮겼을 때 어떤 후폭풍이 불어올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천여명이 붉은 별이라는 게 만천하에 공개된다면, 천여명과 한국 정부 모두가 곤란해지긴 하겠지.
그를 향한 찬양이 잦아들고, 지구의 국가들은 그를 의심하고, 모스크바는 새로운 서기장을 막기 위해 발작하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종말 교단을 쓰러트린 힘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그에 비해 천여명이 덜컥 차원문을 넘어 비코프와 손을 잡는다면? 하다못해 자리를 비운 변경백과 손을 잡는다면… 모든 게 망가진다.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는 없지만, 뜯어먹을 게 있다면 잠시 싸움을 미루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리고 이 경우에, 호랑이에게 먹잇감은 제국이었다.
천여명과 붉은 별이 가진 힘과 명성은 그런 것이었다. 황녀는 자신의 실언을 되돌리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천여명이 먼저 말했다.
-황녀. 나는 정치에 대해 잘 모른다.
“….”
-그러니 나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거래를, 하다못해 부탁이라는 걸 하고 싶다면.
“천여명, 저희는-.”
-네가 가진 패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식의 장난질이 아니라, 진심을 가지고 와.
황녀는 자신도 모르게 휴대폰을 꽉- 쥐었다. 부끄러움인지, 감탄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여명이 말했다.
-난 아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당분간 한국을 떠날 거다. 내가 돌아온 이후에, 딱 한 번. 딱 한 번만 더 대화를 해주겠다.
“….”
-그때 또 다시 이런 장난질을 벌이면… 제국 전체에 대가를 묻겠다.
그의 목소리는 냉담했으나, 그 속에 담긴 무게는 황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어쩔 수 없었다. 천여명, 그는 다섯 신 교단도 끝내지 못한 종말 교단의 마침표를 찍은 사람이었으니까.
황녀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책명은… 거부하시는 건가요?”
-그건 그쪽 반응을 본 뒤에 정하겠다.
“….”
-너도 그걸 원할 테지? 너희도 그럴 생각으로 그따위 책명을 내린 것 아닌가?
정답이었다. 협상 기간을 넉넉하게 잡기 위해, 일부러 언제까지 황궁으로 오라는 언급을 배제했다.
“감사합니다. 천여명, 저희는….”
황녀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뚝- 여명은 통화를 끊었다.
황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아직 포기하긴 일렀다.
다음 수를 생각할 유예를 얻었으니, 지금은 움직일 때였다.
그녀는 잠깐의 휴식도 없이 새로운 계획에 착수했다.
천여명이 진짜 공산주의자가 아닐 경우를 대비한 계획.
그리고 얼마 후, 시크릿 소사이어티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읽은 그녀는 퍽 당황했다.
-천여명, 데메론드와 접촉하기 위해 이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