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58)
을 위한 세계는 없다-758화(758/817)
EP.758 황금, 꿀, 달러, 그리고 샷건.(7)
***
여명이 ‘꿈’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하자, 숨어 있던 엘프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뭐, 준비라고 해봤자 일행들을 방으로 안내해주고 베개와 담요를 가지고 와서 바닥에 잠자리를 만들어주는 게 전부였지만.
아무튼, 시리가 ‘진짜 코피가 날 때까지 때렸냐’는 질문을 던지다가 미리에게 쫓겨나고, 코르부스에게 딱 달라붙은 라쉬크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 직후.
데메론드가 피우던 시가를 재떨이 위에 올려놓은 후,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준비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와라.”
데메론드는 그대로 눈을 감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잠든 게 분명한 모습이었으나,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잠자는 중에도 약점이 보이지 않는 고수의 풍모였지만,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TV 채널을 돌리자마자 ‘아직 안 잔다 이놈아’ 라고 말하던 작업반장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뭐, 어쨌거나, 여명이 리메가 펼친 이부자리 위에 앉자마자 미리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위험하면 깨어 나라느니, 그런 이야기는 안 할게요.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알겠죠?”
여명은 대답보다 더 확실한 행동으로 화답했다. 그러니까, 그녀의 이마에 조심스레 입술을 맞췄다.
지켜보던 엘프들이 질색하건 말건, 미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똑같이 이마에 입을 맞췄다.
“힘내요.”
그렇게 미리가 뒤로 물러나고, 여명이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잠깐.”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엘프가 그를 불렀다. 데메론드의 왼팔… 이름이 카란로르였던가.
여명이 갑자기 뭔가 싶어 바라보자, 그는 연녹색 액체가 담긴 병을 들고 다가왔다.
병에 담긴 건 아마 술인 듯했다. 병뚜껑을 열자마자 싸한 냄새가 코를 찔렀으니까.
그는 대뜸 유리잔에 술을 따른 뒤, 여명에게 잔을 내밀며 말했다.
“마셔라.”
“어… 이게 뭡니까?”
여명이 잔을 받으며 묻자, 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우리의 고향 숲에서 난 영약과 약초로 담근 술이다.”
“갑자기 이건 왜?”
꿈속에서 무슨 효과라도 있는 건가? 여명은 살짝 기대감을 품고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마셔둬라. 대장한테 맨정신으로 처맞으면 수련이 아니라 고문이 될 테니까.”
“에이, 아무리 그래도 사위인데 설마 그 정도로 하겠….”
거기까지 말한 여명은 카란로르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대통령 궁에서 독가스를 뿌리던 때 보여줬던 살벌한 표정 대신, 동정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뜻하는 건 하나였다. 진짜 뒤지게 맞겠구나.
“….”
여명은 덤덤하게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엘프의 술은 생각보다 훨씬 독했다. 나름 술에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술을 넘기자마자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았다.
뭐, 맛과 향은 나쁘지 않았다. 여명은 단번에 술잔을 비우고 카란로르에게 잔을 돌려줬다.
“대장 성격상, 죽이지는 않을 거다. 반쯤 죽이긴 할 테지만.”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이네요. 여명은 피식 웃은 뒤,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옅은 호흡을 따라 긴장을 풀고, 근육을 이완시킨 여명은…
눈을 감았다.
***
다시 눈을 뜬 여명이 처음 마주한 건 숲이었다.
압도적인 크기의 숲.
고개를 뒤로 젖혀야 꼭대기를 볼 수 있을 만큼 드높은 나무들, 작은 언덕처럼 솟아오른 뿌리, 그리고 발바닥 아래를 채운 낙엽과 이끼들.
숲 특유의 짙은 공기가 정수리를 쓸고 지나가는 가운데, 여명은 꿈이 보여주는 장소가 어딘지 눈치챘다.
‘엘프의 숲….’
수폭을 맞기 전일까, 후일까? 알 수 없었다. 여명은 처음 보는 광경을 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데메론드를 발견했다.
작은 묘목 앞에서 뻐끔뻐끔 시가를 피우던 그는 덤덤하게 여명의 위아래를 훑고 있었다.
여명이 꿈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다른 엘프들과 달리, 그는 놀라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당연한 표정으로-
“-잠깐, 목에 건 그건 뭐지?”
목? 여명은 턱을 내려 목에 걸린 물건을 확인했다. 그의 목에는 식물의 덩굴로 만들어진 너덜너덜한 끈이 걸쳐있었다.
그건 세계수의 덩굴을 엮어 만든 끈이었다. 여명이 환골탈태하기 전, 육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세계수가 직접 꼬아서 만들어준 끈.
여명은 그 끈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제 몸에 문제가 있을 때, 세계수께서 주신 끈입니다.”
그전에 있던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세계수께서 저와 미리의 관계를 반대하시길래, 불을 지르고 칼질도 했다는 말을 엘프 앞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옳은 선택이었다. 전후 사정을 다 생략했음에도, 데메론드는 피우던 담배를 콱! 반으로 접어버릴 만큼 화를 냈으니까.
“어머니를 만났다… 우리 따님과 관련된 이유겠군?”
“…예. 아주 사소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사소한 오해…? 그게 뭔지 알려주겠나? 지금 나도 사소한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말일세.”
“….”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나신 거지. 여명은 슬그머니 마나를 끌어 올리며 고민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유가 좀 많아야지.
아무튼, 데메론드는 분을 삭이려는 듯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래, 뭐… 그분께서도 다 뜻이 있으시겠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
“열매는 열매의 길을 갈 뿐. 천여명, 준비 됐나?”
“예, 준비됐습니다.”
여명의 손바닥에서 무장 혈청이 뽑혀 나오자, 데메론드가 옆에 있던 묘목을 콱! 붙잡아 뽑았다. 데메론드의 힘 때문인지, 묘목은 단번에 뿌리까지 뽑혀 나왔다.
뭐지? 여명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데메론드는 가볍게 뿌리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직후, 그가 나무에 마나를 불어넣자, 갑자기 뿌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자라난 뿌리는 서로 뒤얽히고, 엉키고, 꼬이며 어떤 형상을 만들었는데, 여명은 금세 그게 무엇인지 알아봤다.
검. 그건 문자 그대로 나무뿌리로 만들어진 목검이었다.
‘혹시, 훈련용 검을 꺼내신 건가?’
여명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데메론드가 자세를 잡았다. 손잡이를 머리 옆까지 올리고, 칼끝을 비스듬히 땅으로 향하는 자세.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한 자세였다. 여명은 자연스럽게 선공을 양보하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시작.”
다음 순간, 데메론드와의 거리가 확! 좁혀졌다. 여명의 반응속도가 그의 검에 반응한 순간, 목검이 그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자세 때문에 마치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모습이 되었고, 목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 또한 그러했다.
!!!
첫 격돌과 동시에, 여명은 자신의 안일함을 깨달았다. 데메론드에겐 목검도, 방어 자세도 상관없었다. 상대는 스탈린조차 인정한 한 종족의 최강자였다.
그의 전신은 대량 학살 무기와 비견되는 살인 무기였고, 모든 자세가 공방 일체였다.
콰지직! 무장 혈청이 막아낸 검기 중 일부가 튕겨 나가며 주변의 나무를 할퀴었다. 거대한 나무가 기우뚱- 기울어지는 가운데 여명은 주가시빌리를 사용했다.
옳은 선택이었다. 직후, 데메론드의 검기가 그의 팔을 두 동강 내버렸으므로.
판단할 시간은 없었다. 여명은 잘린 팔을 재생하는 동시에 반대편 손으로 무장 혈청을 뽑아 휘둘렀다. 쩌엉! 허리를 노리던 목검과 무장 혈청이 충돌하며 주변의 공기가 전율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데메론드는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점점 더 빠르고, 치명적이게.
여명은 검을 휘두를수록 올가미에 묶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상대를 압박하는 엘프 검술의 극의라 할만했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검술을 배우는 입장이었다면 이 순간을 오랫동안 음미했겠지만, 이건 검술을 겨루는 대련이 아니었다.
잘린 팔을 재생한 여명은 곧장 화산쇄설을 피워냈다. 그의 검과 팔에 불씨가 피어오른 바로 다음 순간.
콰앙 – !!!!
폭발이 데메론드를 덮쳤다. 하지만 이 폭발로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란 여명의 예상은 빗나갔다. 데메론드는 그냥 맨몸으로 폭발을 무시했으니까.
‘아니 뭔-?’
그냥 맨몸으로 버텼다고? 여명은 놀라움을 삼키면서도 착실하게 다음 수를 펼쳤다.
시작은 알파 빔. 번쩍! 기습적으로 붉은 광선이 여명의 눈동자에서 튀어나왔다.
당황을 유도할 생각으로 사용한 무술이었으나, 데메론드는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고 검으로 빔을 쳐냈다.
‘검으로 막을 수 있는 거였어?’
알파 원과 싸운 경험이 있다지만, 이게 된다고? 여명은 뒷걸음질 치며 다음 수를 펼쳤다.
이번에는 주와이외즈. 화르륵! 갑작스레 피어난 불길이 데메론드의 얼굴을 뒤덮었다.
눈을 가리고 공세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격이었으나, 데메론드는 멈추기는커녕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검과 검이 충돌한 순간 불길에 휩싸인 얼굴을 휘둘러- 쿵! 여명의 머리에 박치기를 날렸다.
‘미친.’
여명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며 급속냉각 주문을 외웠다. 사아악! 검과 검이 격돌한 찰나, 섬뜩한 냉기가 무장 혈청을 타고 데메론드의 목검을 뒤덮었다.
데메론드는 얼어붙은 검을 놓는 대신, 한층 더 검기를 끌어올렸다. 세계수의 마나를 닮은 반투명한 검기는 힘으로 냉기를 밀어냈다.
‘이걸 그냥 힘으로 떨쳐낸다고??’
여명이 이를 악물고 다음 수를 떠올리는 사이, 데메론드의 검술은 더욱 정교해졌다.
환상적인 검이었다. 그 검과 마주한 여명으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이게 강대국과 싸울 수 있는 개인의 힘….’
감탄을 삼킨 여명은 숨을 참으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이대로 계속 압박당하면 엘프 검술의 특성상 팔다리가 묶인 채 패배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대로 패배하는 건 여명의 성질에도, 그리고 이 대련의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모든 걸 쏟아붓는다.’
다음 순간, 여명은 자신이 아는 모든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천도무친, 흑익류, 혈류가속, 심지어 오만과 위선까지.
화려하다 못해 눈을 어지럽히는 각종 무술의 향연 앞에서도 데메론드는 여전히 검술 하나만을 고집했다.
하지만 심플 이즈 베스트라고 했던가? 이 상황에서도 데메론드는 여명과 동수를 이뤘다.
교차하는 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얼어붙고, 타오르고, 밀려나는 공기의 비명.
공방이 격렬해질수록 여명의 본능이 속삭였다. 이 균형을 깰 수 있는 건 진의 무술이라고.
닉슨에게 막혀 완성하지 못한 그의 진의 무술이 데메론드에게 닿을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그저 모든 것을 휘둘러 부딪힐 뿐.
‘원하는 건 전부 가지겠다.’
탐욕스러운 진의를 따라, 검은 소용돌이가 그의 오른손을 검게 물들였다. 데메론드는 흥미롭다는 듯 그것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세계수는, 그냥 큰 나무다.
증오로 점철된 엘프의 진의. 여명은 이어질 진의 무술에 대비하며 검게 물든 무장 혈청을 휘두-
-르지 못했다.
“여기까지.”
데메론드가 갑자기 손을 멈춘 까닭이었다. 항복? 아니,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검을 멈춘 여명은 약간 멍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검을 쥐지 않은 그의 왼팔은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뼈가 어긋난 건 물론이고, 피부는 딱딱하게 굳은 채 쩍쩍 갈라진 게, 마치 나무 껍질처럼 보였다.
언제 당했냐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여명은 살짝 질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장인어른의 진의 무술입니까?”
“그래.”
“이 무술… 범위가 얼마나 됩니까?”
“영업비밀이다.”
설마 수십 킬로미터가 넘는 건 아니겠지. 여명은 최악의 가정을 떠올렸으나, 고개를 저어 걱정을 떨쳐냈다. 그가 팔에 마나를 불어넣자, 뒤틀렸던 팔이 원래대로 돌아왔으니까.
여명은 탁, 원래대로 돌아온 팔을 털며 물었다.
“그래서, 어떠셨습니까? 제 실력은.”
데메론드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진의 무술은 미완성, 하지만 가진 잔재주가 많아서 대응력이 뛰어나고… 아직도 숨긴 패가 남아 있겠지.”
뜨끔, 여명은 각하가 남긴 권능과 인벤토리를 떠올리며 말을 아꼈다. 데메론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명의 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10강 중 다섯 번째 정도.”
“….”
묘하게 현실적인 숫자였다. 여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과분한 평가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데메론드는 목검을 다시 땅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변경백에게는 한참 못 미친다. 그리고 나와 호세, 알파 원. 셋 모두 너보다 강하다. 알파 원과는 싸워봤으니 알겠지. 안 그런가?”
그러면 메이커나 브라우닝, 심지어 오귀스트 어르신보다 내가 강한 건가? 여명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남자라면 참을 수 없는 질문을 꺼냈다.
“그러면… 호세와 알파 원, 그리고 장인어른 중 가장 강한 건….”
“나다.”
즉답. 데메론드는 살짝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이건 평균적인 승률만 따졌을 때의 이야기다. 주력 무술의 상성 관계 문제지. 내 무술은 알파 원에게 그다지 장점이 없고, 호세에게는 강하다. 호세는 역으로 알파 원에게 강하지.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 중, 상성을 제일 덜 타는 게 나다.”
“….”
“뭐, 진짜 승부는 그날의 컨디션, 지형, 그리고 군사 지원에 따라 갈리겠지만 말이다.”
이번에도 묘하게 현실적인 대답이었다. 여명은 불현듯, 데메론드가 다른 10강들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을 짜놨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튼, 곧 데메론드가 눈을 부라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장인어른이라고 부르지 마라. 난 아직 너와 딸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뭐라고 불….”
“동무.”
데메론드 동무? 그건 빨갱이 같아서 좀… 여명이 속으로 그런 말을 삼키건 말건, 데메론드는 가까운 나무뿌리에 앉은 뒤, 여명에게 옆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여명은 기꺼이 그의 옆에 앉았다.
‘이제 닉슨을 이길 방법을 알려주시는 건가?’
조금 전 대련의 격렬함만큼이나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데메론드는 바로 말하지 않고 잠시 뭔가를 고민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여명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천여명, 초대 용사의 후손들이 남긴 유산을 모아… 아니, 강탈해라.”
다음 순간, 꿈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