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6)
을 위한 세계는 없다-76화(76/817)
〈 76화 〉 전학생을 위한 우연 (6)
* * *
***
아카데미의 밤은 고요했다.
야간 순찰을 하는 경비원들의 발소리는 침묵을 깰 만큼 크지 않았고, 밤바람이 수풀을 흔드는 소리는 밤을 깨울 정도로 길지 않았다.
편입생이 몰고 왔던 소란이 거짓말인 것처럼,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정적을 깬 것은 기괴한 목소리였다.
“…오늘, 성녀가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마치 수십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징징 울리는 목소리.
“모든 것은 선지자의 예언대로.”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주변의 가로등이 껌뻑거리고 날벌레들이 픽픽 죽어 나갔다.
비현실적인 광경을 본 달빛이 슬쩍 목소리의 주인을 비췄으나, 어둠 사이로 드러난 것은 속이 보이지 않는 두꺼운 로브뿐이었다.
“이제, 미뤄두었던 계획을 다시 시작하겠다. 반대하는 자가 있는가?”
밤의 어둠 사이에는 기괴한 목소리의 주인 말고도 몇몇 인물들이 서 있었다.
“전 반대합니다.”
그들 중 걸걸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말했다.
“…이유는?”
“만주의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예언은 이미 비틀렸습니다.”
기괴한 목소리의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만주의 일은… 선지자의 예언과 상관없다.”
“왜 상관이 없습니까? 본래 예언대로라면, 성녀는 여름방학 때나 만주에 갔어야 하잖습니까. 멀쩡한 만주가 아니라, 이미 불타버린 만주에!”
중년 여성은 답답한 듯 언성을 높였다.
“그거뿐입니까? 오늘 아카데미에 도착한 편입생은 또 어떻습니까? 잘난 예언 속에 언급이라도 있었습니까?”
편입생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어둠 속에 있는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기괴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예언의 그물은 성글기 그지없지만, 놓치는 것이 없다. 녀석은 정체를 숨기고 있을 뿐, 분명 예언 속에 존재한다.”
“…헛소리입니다.”
“에이바, 너는 어찌 믿음을 잃었느뇨?”
이름이 공개된 중년 여성은 움찔 몸을 떨었지만, 입을 멈추지는 않았다.
“우리는 교단이 아닙니다. 믿음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을 봐야 합니다. 편입생이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대체 왜,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벌였단 말입니까?”
“…안타깝고 또 안타깝도다. 에이바, 지구의 악귀들과 너무 오래 어울렸구나.”
기괴한 목소리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주변의 어둠이 일렁거렸다.
퍽! 보이지 않는 압력을 버티지 못한 가로등이 터져버리고, 일대를 뒤덮은 어둠이 더욱 진해진 그때.
“…잠깐, 잠깐. 사제님, 고정하시지요. 에이바의 말도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가벼운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제님은 편입생의 정체를 짐작하고 계신 듯한데, 저희에게도 가르침을 나누어주시지요.”
“….”
“의심 앞에서 굳건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건 사제님처럼 신실한 자뿐입니다. 아시잖습니까?”
그 음산한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사제라 불린 자가 내뿜던 압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쯧, 믿음 없는 것들…”
사제는 작게 혀를 찬 뒤, 설명을 이어나갔다.
“떠올려보라, 편입생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으며,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편입생이 무엇을 해왔는지 알고 있었다.
성녀가 입학식에 나타나지 않은 순간부터, 그들의 모든 관심은 북만주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정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가? 그는 성녀를 지키기 위해 성기사단에서 파견한 비밀 호위다.”
“비밀 호위?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예언에 이르길, 타락한 성기사단의 방패는 아카데미에 숨어서 성녀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편입생은 만주에서부터 성녀를 보호하고 있지. 두 연결고리가 우연이겠는가?”
허점이 많은 논리였으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종교인들이란 으레 그런 법이라서? 아니, 그 가설이 정말로 그럴싸하게 들린 탓이었다.
편입생의 위업은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용병이 성녀와 함께 용을 쓰러트리고, 용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무슨 신화 속 용사도 아니고.
하지만 사실 그 용병의 정체가 성녀의 비밀 호위였다면? 이 모든 게 배교자들의 음모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정보망을 가동해 더 자세히 조사해봐야겠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아직도 계획에 반대하는 자가 있는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무언은 곧 긍정이었고,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예언대로, 아카데미는 불탈 것이다.”
“…언제 시작하시겠습니까?”
“오늘, 날이 밝는 그 순간부터.”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어둠 속의 인물들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렸다.
모두가 발소리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가운데, 에이바라 불린 중년 여인만은 우두커니 서서 사제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남았느뇨.”
“사제님의 말처럼 편입생이 성녀의 비밀 호위일 가능성도 있지만…”
“….”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가 예언 속 운명의 주인일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운명의 주인. 그 단어를 들은 사제가 고개를 돌렸다. 어둠보다도 검은 눈동자가 에이바를 바라보았다.
“…지구인은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더러운 빨갱이의 피가 섞인 성녀가 그러하듯이.”
여태껏 내뱉은 말 중에서 가장 확신에 찬 목소리.
에이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부서진 가로등을 올려다봤다.
깨진 전구가 간헐적으로 불씨를 토해내고 있었다.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피를 토해내듯이.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사제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주먹을 쥐었다.
파직.
그것을 끝으로, 밤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
성녀는 침대 위에 놓인 교복들을 보며 입술을 두들겼다.
동복 두 종류와 하복 두 종류, 체육복, 그리고 히잡과 어깨 망토 같은 종교적인 의복들까지.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제공한 교복들을 하나하나 들었다 놨다 하며 고민했다.
‘어떻게 입어야 하지…’
SNS에서 본 것처럼 위는 동복, 아래는 하복을 입어볼까?
아니면 드라마에 나왔던 연예인처럼 동복 치마 바지에 하복 블라우스를 입을까?
조금 엉큼한(?) 자료에선 아카데미 잠옷과 수영복을 이용한 패션도 있었지만… 그걸 입고 등교할 수는 없었으니 논외로 치고.
아무튼, 성녀는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교복 조합을 고민하다가 등교 10분을 남기고 간신히 교복을 정했다.
네이비 컬러 바탕에 은색 포인트가 들어간 외투에 깔끔한 주름치마.
로드 하우 아카데미의 표준 동복 조합이자, 어제 세티가 입고 있었던 바로 그 복장이었다.
복장을 확인한 성녀는 다섯 신의 사제를 상징하는 새하얀 어깨 망토를 걸칠까 말까 고민하다가, 빨리 등교하라는 사감의 외침을 듣고 나서야 방을 나섰다.
다행히 그녀처럼 아슬아슬하게 등교하는 학생이 많은 탓에 혼자서 학교로 달리는 일은 없었다.
물론, 안대를 차고 어깨 망토를 두른 그녀가 누군지 알아본 학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긴 했다.
평소라면 조금 주눅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지금의 성녀는 그런 관심조차 마냥 좋았다.
그녀는 당당하게 걸었다. 1학년 본관 건물이 가까워 질때마다 가슴이 콕콕거리는 게,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아카데미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세티나 여명은… 먼저 등교했으려나?’
그녀는 유일… 아니, 유이한 친구들을 떠올리며 본관 정문을 넘었다.
여명은 몰라도, 성실한 세티는 분명 일찍 등교했겠지.
어제는 세티가 규율부란 곳으로 끌려간 탓에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지만, 오늘은 반드시 회포를 풀어야…
‘어?’
그녀가 복도로 들어선 그 순간, 나란히 걸어가는 두 명의 여학생이 보였다.
사근사근한 태도로 뭔가를 떠들어대는 금발의 소녀와 조용히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흑발의 소녀.
‘세티…’
두 사람을 지켜보는 성녀는 자기도 모르게 울컥한 감정을 느꼈다.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은 성녀가 그렇게나 꿈꾸던 아카데미 생활 그 자체였으니까.
아니 물론 세티가 그녀 말고 다른 친구를 사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뭔가…
그녀가 낯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부르르 떠는 사이, 세티가 그녀를 발견했다.
성녀는 언제 서운함을 느꼈냐는 듯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세티는…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친밀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의례적인 인사.
…?
세티와의 재회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슴 뭉클한 대화도, 포옹도 없었다. 세티는 친구와 함께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복도에 남은 성녀는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손과 세티가 사라진 교실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녀의 머리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끼긱거렸다. 혹시 악몽을 꾸는 건가?
“멍하니 뭐 하고 있냐?”
그렇게 굳어있기를 잠시, 익숙한 목소리가 성녀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여명.”
그녀는어울리지 않게 말쑥한 교복 차림의 여명과 마주했으나, 칭찬도, 인사도 할 수 없었다. 입이 열리지 않는 탓이었다.
“어… 그게… 어…”
나 차였어 라는 말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그 뒤로 온갖 험악한 말들이 연달아 떠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입을 다물고 교실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교실의 뒷문을 여는 순간, 팔짱을 낀 세티가 그녀를 반겼다.
슬쩍 올라간 입꼬리, 장난기 가득한 푸른 눈동자.
“요.”
“….”
“오랜만.”
세티가 팔짱을 풀고 양손을 내밀자마자, 성녀의 마음속에서 왈칵,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너, 너 설마… 나 놀리려고…”
“성공했어?”
“이… 이…! 나쁜 년아!”
성녀는 와락 세티의 품에 안겼다. 교실에 있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의 몸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진짜, 진짜 보고 싶었어…”
“…난 딱히 보고 싶지 않았어.”
“또, 또 그런 말 한다!”
성녀에겐 안타깝게도, 감격스러운 상봉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가 세티의 교복에 얼굴을 비벼대기 시작할 때쯤, 여명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꼭 문 앞에서 그러고 있어야겠냐?”
***
아카데미 보안관리부라는 정식 명칭 대신, 감시탑이란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는 곳.
거대한 탑 모양의 건물 꼭대기에는 중앙 보안실이라 불리는 방이 존재한다.
아카데미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는 물론이고, 네 개의 섬 전체를 아우르는 색적 마법을 관리하는 장소.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방이라고 평가받는 곳이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중앙 보안실에서 4층 아래에 있는 일반 경비원 숙직실에서 폭발이 일어난다면?
중앙 보안실로 이어지는 마나가 끊어지고, 섬의 색적 마법이 일시에 무력화될 것이다.
물론, 무력화되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보안실에 상주하고 있는 마법사가 금세 마법을 복구하겠지.
그러나 복구에 필요한 시간은 아무리 짧아도 5분 이상.
5분이면 천지를 뒤집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존은 딱히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존이 몸담은 조직이 판단은 그랬다.
“…존? 표정이 왜 그래? 자네 무슨 일 있나?”
두꺼운 가방을 만지작거리는 존을 보며, 동료 경비원이 물었다.
존은 그를 보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이 가방 안에는 어마어마한 폭탄이 들어있고, 그걸 터트려 숙직실은 물론이고 저 위에 있는 보안실까지 뒤흔들 거라고 말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김 주임님. 얼마 전에 손자 보셨다고 했죠?”
“우리 손자? 딸을 닮아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근데,그 이야기는 됐고 우선 자네 상태부터 좀…”
“…지금 당장 관리부 바깥으로 나가세요.”
“뭐? 존, 대체 왜 그러는 건가?”
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제님의 말마따나, 지구의 악귀들과 너무 오래 어울린 게 틀림없었다.
“시발, 내 말 안 들려? 지금 당장 나가라고!”
그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숙직실의 다른 경비원들을 겨눴다.
김 주임을 비롯한 경비원들은 어, 어 당황하면서도 그를 제압하려 들지 않았다.
다행히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숙직실 바깥으로 나가는 게, 다른 부서에 있는 초인을 부르려는 심산으로 보였다.
하긴, 존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게 아무도 다치지 않는 방법이었으니까.
쾅!
그렇게 경비원들이 전부 나간 걸 확인한 존은 숙직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겨우 이걸로 다른 경비원들이 무사히 폭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눈앞에서 죽는 꼴을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폭탄 가방을 열었다.
“제국 독립 만세.”
누구도 듣지 않을 유언을 마지막으로, 숙직실이 폭발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