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61)
을 위한 세계는 없다-761화(761/817)
EP.761 황금, 꿀, 달러, 그리고 샷건.(10)
***
미국의 전당대회는 단순히 대통령 후보를 결정짓는 정치 행사가 아니었다.
선거라는 꽃을 피우기 위한 봄의 훈풍인 동시에, 미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축제.
당연하게도, 전당대회를 앞둔 시카고의 밤은 시끌벅적했다.
시카고의 화려한 조명이 밤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고, 삼삼오오 모인 당원들과 그 당원들에게 뭔가를 팔아먹으려는 상인들이 거리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개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핫도그 판매상도 아니요, 수인 인형 옷을 입은 시민도 아니었다.
팻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손에 들린 널찍한 나무판, 혹은 종이 위에 글자가 적힌 팻말.
청소 도구함을 끌고 건물 뒤편 마구간으로 가던 여명은 흥미롭게 팻말에 적힌 문구들을 눈에 담았다.
[론을 백악관으로!]처럼 상투적인 내용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총이 아니라 빵을 원한다!] 혹은 [초인은 특권 계층이 아니다! 초인 우대 철폐!]같이 정치적인 의견이 담긴 팻말도 있었다.개중에는 [수인과 결혼 합법화! 사랑은 종을 뛰어넘는다!] 같은 정신 나간 팻말도 있었는데, 수인 인형 옷을 입고 있던 바로 그 양반이 든 팻말이었다.
‘…스승님을 모시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네.’
수인 애호가들을 보며 여명이 질색하는 사이, 젊은 드워프들이 맥주통이 달린 커다란 트럭을 끌고 거리에 나타났다.
-시민 여러분! 무료 맥주가 왔습니다!
-미국인이, 미국의 보리로, 미국 공장에서 만드는 맥주!
-어 시원하다!
차량과 노점상 사이로 파고든 드워프들은 그렇게 소리치며 공짜 맥주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규제에 익숙한 한국인인 시리가 ‘저거 주류법에 걸리지 않아요?’ 라고 중얼거리는 가운데, 드워프들의 복장이 여명의 관심을 끌었다.
모자, 티셔츠, 신발, 심지어 들고 있는 맥주잔에도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가 박혀 있었다.
민주당의 전당 대회에 민주당 상징인 당나귀 대신 굳이 성조기를 들고 온 이유? 뻔했다. 드워프가 미국인이고, 애국자라는 걸 알리기 위한 몸부림.
하지만 그다지 잘 먹히는 것 같진 않았다. 무료 맥주를 마시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 사이사이로, 눈살을 찌푸리며 드워프들에게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보였으니까.
‘이종족에 친화적인 민주당 당원들조차 이 정도인가?’
여명은 새삼 미국의 반 이종족 분위기를 실감했다. 그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지만,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였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프로파간다로 써먹을 때는 언제고, 결국은 이방인 취급인가.
냉전이 낳은 또 다른 비극이었다. 씁쓸함을 삼킨 여명은 그대로 거리를 벗어나 전당대회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온갖 트럭과 짐들이 오가는 곳에서 마구간을 찾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던 여명의 고민과 달리, 유니콘의 마구간을 찾는 건 참 쉬웠다.
[유부남, 유부녀 등 성관계 경험자 접근 금지.]저런 표지판이 걸린 간이 건물이 세상에 둘이나 있을 거 같진 않았으니까.
거기다 간이 건물치곤 상태가 꽤 좋았다.
조립식 나무 벽부터가 마감이 잘된 고급품이었고, 말이 머리를 뺄 수 있는 창문과 지붕에는 척 봐도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대통령 후보 정도 되면, 애완동물을 위해 저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건가….”
감탄인지 비꼼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여명은 청소차를 끌고 마구간으로 다가갔다. 느긋한 발걸음을 따라 마구간 입구가 보일 때쯤.
어색한 자세로 빗자루를 들고 있던 미리가 입을 열었다.
“여명, 이대로 다가가도 괜찮겠어요?”
“왜, 무슨 문제 있어?”
“그, 유니콘한테 여명은 좀….”
미리는 차마 뒷말을 꺼낼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아니, 내가 뭐 어때서? 여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유니콘은 없을 거야.”
“예?”
그러자 미리는 물론이고, 시리 또한 갸웃거렸다. 여명은 자신만만하게 빗자루를 흔들며 말했다.
“아까 우리한테 일 준 청소부들의 태도를 생각해 봐. 좀 싫어하는 눈치였잖아?”
“…좀이 아니라 많이요.”
“응, 아마 우리가 높은 분들이 찔러 넣은 낙하산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 거야.”
“청소부에게 낙하산도 있어요…?”
무슨 회사 부장이나 이사도 아니고, 청소부에? 시리가 당황 반, 놀람 반으로 중얼거리자, 여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부도 엄연히 규율이 존재하는 직업이라고. 당장 예정에 없던 사람이 추가되니 업무 분담도 꼬이고, 애써 구분해 놓은 자리 배치도 망가지잖아?”
“….”
“이런 곳을 담당하는 관리자가 그런 걸 내버려둘 정도로 멍청하겠어? 당연히 아니겠지? 그래서 일부러 우리를 이런 곳에 보낸 거야. 어차피 전당 대회 끝나면 볼일 없는 하청이니까. 다른 청소부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치워 버리는 거지.”
“어… 그러면 유니콘은 왜 없어요?”
“고작 낙하산 골탕 좀 먹이겠다고, 높으신 분의 애완동물을 위험에 처하게 할 리 없잖아?”
어느새 마구간 앞에 도착한 여명은 툭- 문을 두들기며 덧붙였다.
“그리고, 유니콘을 이렇게 무방비한 곳에 가져다 둘 리도 없지. 처녀가 와서 물어보면 비밀이란 비밀은 다 토해낼 텐데, 정치인이 그런 걸 감당할 수 있겠어?”
“하지만… 그게 민주당 후보의 캐치프레이즈잖아요? 유니콘을 애완동물로 키울 정도로 청렴하고 거짓을 모르는 정치인.”
“미리. 너는 캐치프레이즈를 진짜로 실행하는 정치인 봤어?”
“….”
그거야 여명이 한국인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미리는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같은 한국인인 시리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여명은 보란 듯 간이 마구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정말로 없네요?”
미리의 말마따나, 간이 마구간 내부는 깨끗했다. 바닥에는 똥은커녕 발자국조차 없었고, 물통과 먹이 통은 텅 비어 있었다.
여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봐, 내 말이 맞지?”
“….”
“작업반장이 부를 때까지 쉬고 있자.”
그렇게 말한 여명은 곧장 마구간으로 들어가 인벤토리에서 접이식 의자와 탁자, 그리고 물이 담긴 주전자를 꺼냈다.
“커피? 아니면 차?”
손가락 끝에 주와이외즈를 일으켜 주전자를 끓이는 여명. 그에게는 전문가다운 여유가 가득했다. 마구간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대비되는 그 모습은 참으로 고즈넉했고, 미리와 시리는 동시에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저는 차요.”
“형부, 저는 그냥 뜨거운 물이면 충분해요.”
세 사람 사이로 두런두런 잔이 오가고, 수증기와 차 향기가 마구간을 따스하게 덥히길 잠시.
핫도그로 배를 채우지 못했던 여명은 컵라면을 꺼내며 말했다.
“근데, 이 유니콘을 타고 다니는 후보는 어떤 사람이야?”
미리는 그것도 모르냐고 따지지 않았다. 여명의 지식은 대부분은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것이었고 덕분에 현대 정치에는 약한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미리는 론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냈다.
“론 매케인. 유니콘을 타고 다니는 건 이미 아실 테니 넘어가고. 현 애리조나 주의 상원의원이자, 민주당의 다음 대통령 후보로 반쯤 확정된 정치인이에요.”
“….”
“집안 내력부터 말하자면… 꽤 알아주는 군인 집안이에요. 증조할아버지는 미 해군 대장. 할아버지는 베트남 전쟁 당시 태평양 해군 사령관. 그리고 아버지는 세계수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전 애리조나 상원의원이구요.”
이력부터가 범상치 않은 집안이었다. 여명은 컵라면에 물을 채우며 물었다.
“…론도 군 출신이야?”
“예,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경력은 없고, 변경백 전쟁 이후 치안 유지군으로 잠깐 아샤에서 군 생활을 했어요. 지금 기르는 유니콘은 그때 주웠다고 알려져 있고요.”
“….”
“정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고 해야 할까요? 상원의원인 아버지가 정치 입문을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에 입문해서, 아버지의 상원의원직을 빼앗았어요.”
“물려받은 게 아니라, 빼앗았다고?”
“예, 론의 아버지는 공화당이었는데, 민주당 후보로 나와서 아버지를 낙선시켜 버렸거든요.”
“….”
“재밌는 건, 아버지는 공화당 내부의 민주당원이라고 불릴 만큼 진보적인 데 반해, 그는 민주당 내부의 공화당원이라고 불릴 만큼 보수적인 사람이란 점이죠. 뭐, 덕분에 보수 텃밭인 애리조나를 빼앗을 수 있었지만요.”
아버지의 상원의원직을 빼앗고, 고향의 지지 정당까지 반대로 바꿨다? 확실히, 걸물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여명의 감상은 차가웠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아닐 거 같네.”
“정치인들이 다 그렇죠. 뭐.”
“그런 정치인 중에서도 특출나게 계략에 익숙할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동맹은커녕,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여명은 올턴 주지사를 떠올리며 미리의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내일 직접 보고 판단… 아, 저는 라임즙 넣어 주세요.”
“….”
“없으면 레몬이라도….”
여명은 군말없이 라임을 꺼내 즙을 짰다. 시큼한 냄새를 따라 그의 연인들은 어째 식성에 하나씩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세티의 대식이나, 성녀의 깍두기 국물 등등, 그나마 살로메가 편식 안 하고 잘 먹긴 하는데, 어느 날 덜컥 채식주의자가 될지 몰랐다….
살로메가 들었으면 벌컥 화를 낼 생각을 떠올린 여명은, 여유롭게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여유도 오래가진 못했다. 젓가락질하던 시리가 불현듯 이런 질문을 꺼낸 탓이었다.
“형부, 근데 전당 대회에서 유니콘이 형부를 알아보면 어떻게 하죠?”
“응?”
“그, 형부는 유니콘 왕자의 뿔로 만든 손잡이의 주인이잖아요. 다른 유니콘이라면 알아보지 않을까요?”
우라간의 무기, 혹은 용사의 무기. 쿠데타 당시 세티가 사용하던 그 무기는 현재 여명의 인벤토리 속에 잠들어 있었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지구에서 자란 유니콘이라며, 웬만큼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이상 못 알아보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캐치프레이즈일 가능성이 높잖아요? 그냥 멀쩡한 유니콘을 데리고 다니는 거라면 어쩌죠?”
그러게? 여명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민했다. 그리고 라면 면발이 살짝 불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냥 유니콘한테 직접 물어보자.”
명쾌한 답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손잡이를 꺼내진 않았다. 만에 하나 유니콘의 기운을 다른 사람이 감지하면 귀찮아지므로.
눈치 빠른 미리가 방음 마법을 펼치는 사이, 여명은 투명 망토를 팔 위에 뒤집어씌우고 뿔을 꺼냈다.
[사악한 주인이여, 오랜만이로다.]이제 더 이상 ‘동정이여’라고 부르지 않는구나… 여명은 슬퍼해야 할지, 아니면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을 삼키며 물었다.
“오랜만에 만난 김에 질문 하나만 하자. 혹시, 주변에 다른 유니콘이 있으면 나한테서 너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까?”
[다른 유니콘? 이 타락하고 방자한 땅에 나의 동포가 있단 말이냐?]“있다고 치고. 느낄 수 있을까?”
[흠….]우라간의 손잡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라면 면발이 퉁퉁 불어 터질 때까지, 계속.
이 자식 설마? 뒤늦게 녀석이 원하는 게 뭔지 깨달은 여명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유니콘의 침묵이 더 길어지기 전에, 라면 국물을 마시고 있는 시리를 불렀다.
“처제, 잠깐만 손 좀.”
“네?”
시리는 살짝 당황하면서도 곧바로 손을 내밀었고, 여명은 그녀의 손에 유니콘의 뿔과 투명 망토를 건넸다.
여명의 예상대로, 유니콘은 시리의 고운 손바닥 위에 쥐어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처녀여, 나의 사악한 주인에게 전해주게. 다른 유니콘이 있다고 해도, 나의 기운은 느끼지 못할 거라고.]“….”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미리가 웃음을 터트리고, 시리가 눈을 껌뻑이길 잠시.
시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유니콘이란.”
이러니까 클린턴한테 유해 마수로 지정됐지. 시리가 형부에게 다시 뿔을 돌려주려는 찰나.
유니콘이 뒤늦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하나 더 말해주자면, 나는 몰라도 바이콘 여왕… 그녀의 기운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뭐?”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꽃향기는 멀리서 맡기 어렵지만, 악취는 곧바로 맡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노라.]“….”
그럼 못 만나겠는데? 여명이 그렇게 말하려는 찰나.
마구간 문 너머에서, 정체 불명의 소리가 들려왔다.
우웨에엑 – !!
소리 크기를 보아, 문 바로 앞에서 들리는 소리가 확실했다. 놀란 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연 순간.
여명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헛구역질을 하는 뿔 달린 말과 마주했다.
“…?”
유니콘… 연신 혓구역질을 하고 있었음에도, 유니콘은 TV 속에서 보던 것만큼이나 신비로웠다.
기다란 속눈썹으로 가려진 진한 눈동자와 우뚝 솟은 노란 뿔, 그리고 청록색과 분홍색 등 화려한 색의 갈기털까지.
하지만 그 신비로움은 딱 거기까지였다.
유니콘이 기다란 코를 킁킁- 거리며 여명의 냄새를 맡은 직후.
“…!”
헛구역질이 아닌, 진짜 구토를 쏟아 내기 시작했으니까.
“우웁, 이런, 웁! 저주받을- 우웨엑!”
***
우웨에엑 – !!
유니콘이 실시간으로 청소 거리를 늘리던 순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미리였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기 전에, 재빨리 손을 뻗어 유니콘의 입을 콱! 틀어막으며 모가지를 끌어당겼다.
마나를 끌어올린 덕분인지, 아니면 구토를 참지 못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유니콘은 힘없이 마구간 내부로 끌려들어 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여명은 끓여놨던 물을 마구간 입구에 뿌린 뒤,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마구간의 문을 닫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유니콘의 흔적을 모두 지운 여명이 다시 마구간에 들어가자, 유니콘을 제압한 두 소녀가 그를 반겼다.
“유니콘이 보자마자 토하다니….”
“용사의 업적이 하나 더 추가됐네요.”
“….”
무어라 반박할 말이 없었던 여명은 축 늘어진 유니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와 눈을 마주친 유니콘은 파르르 눈썹을 떨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걸 보는 것처럼.
이거 큰일 났네.
여명은 유니콘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미리에게 입을 풀어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입이 자유로워진 유니콘은 곧바로-
“이 사악하고 방탕한 마귀여! 다섯 신께서 널 저주할 것이다!”
-라고 소리쳤다. 여명은 살짝 억울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주? 내가 뭘 했다고?”
“하! 뻔뻔함이 하늘에 닿았구나! 마귀여! 나는 알 수 있다! 네 몸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방탕의 증거를!”
“….”
“도대체 얼마나 많은 유니콘의 눈물을 마신 것이냐? 얼마나 많은 바이콘들을 기쁘게 했느냐! 네 몸에서 느껴지는 바이콘의 악취에 숨을 쉴 수가 없구나!”
“아니, 나는….”
“닥쳐라!! 너 같은 마귀의 목소리로 내 귀를 더럽히지 마라!! 이 더러운… 더러운… 빨갱이?”
빨갱이 냄새는 대체 뭐길래 개나 소나 다 아는 거지. 여명이 자기 팔뚝 냄새를 맡는 사이, 유니콘이 뭔가 깨달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 빨갱이의 향기…! 그렇구나! 너는…! 베리야로구나! 소녀를 탐하던 그 대머리가 틀림없구나!”
하필이면 베리야냐. 뭐, 베리야가 아동성애자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그래서 더 여명의 신경을 긁었다.
“아, 하늘에 계신 영원한 처녀시여! 저를 구원하소-”
더는 참지 못한 여명은 충동적으로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던 피눈물의 환상을 벗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마구간의 불빛 아래 공개되었으나, 유니콘은 침착해지긴커녕 더 크게 소리쳤다.
“갈!!!!”
“….”
“우리 혈족의 대적으로 변장하다니! 이 저주받을 흉물아! 신들조차 모욕하는 그 추악함을 보아하니, 진정 빨갱이가 틀림없구나!”
용사 혈통이 유니콘의 대적이었어?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가…?
말로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걸 실감한 여명은 바이콘의 뿔, 그러니까 우라간의 몸통을 꺼내려 했다.
‘바이콘으로 찌르면 좀 조용해지겠지.’
그런 사악한 생각과 함께 인벤토리를 열기 직전, 시리의 손에 들려 있던 유니콘의 뿔이 소리쳤다.
[동포여! 언성을 낮추어라!]과거, 만주에서 용과 싸울 때만큼이나 위엄있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효과가 있던 건지, 발악하던 유니콘은 놀란 눈으로 시리를 바라보았다. 눈치 빠른 시리는 곧바로 투명 망토를 치우고 우라간의 손잡이를 드러냈다.
“이 기운은 설마… 왕자님?”
[그래, 나다. 동포여.]“왕자님께서 어찌…? 혹, 빨갱이에게 붙잡히신 겁니까?”
[아니, 나는 우연과 우라간이 점지해준 대로 주인을 찾았다.]“주인….”
유니콘은 설마 하는 눈으로 여명을 바라보았다.
뭐 임마. 여명이 눈을 부라리건 말건, 다시 고개를 돌린 녀석은 우라간의 손잡이를 향해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왕자님, 저는 왕자님이 어째서 그 드워프에게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왕자님이 모든 유니콘을 위해 가셨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말해주옵소서. 지금 제가 느끼는 모든 게 오해입니까? 저자의 몸에서 느껴지는 유니콘의 눈물과 바이콘의 기쁨은 거짓이옵니까?”
[그건….]“방탕한 혈통 특유의 금색 눈동자도, 빨갱이의 악취 또한 거짓이옵니까?”
[….]우라간의 손잡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으나, 여명은 굳이 그를 탓하지 않았다. 사실, 할 말이 없는 건 여명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무튼.
기나긴 침묵이 마구간을 짓누르기 전에, 미리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하아, 유니콘 씨. 어쩔 수 없네요. 사실을 말해드릴게요. 사실, 저분은…녹색 신께 직접 축복을 받으신 이 시대의 용사세요.”
“뭐라?”
“저분이 가지고 계신 건 유니콘의 눈물이 아니라, 다산의 의무지요. 바이콘의 기운은 우라간의 무기 몸통인 바이콘의 뿔 때문에 느껴지시는 거고요.”
빨갱이도 아니라고 해야지. 여명이 속으로 그런 지적을 하는 사이, 유니콘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녹색 신께 축복을…? 즈, 증거를 보여라!”
증거? 녹색 신의 성물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여명은 하늘을 바라본 뒤, 양손을 모으고 속삭였다.
‘녹색을 찬미하라. 생명과 사랑을 찬양하라.’
이 기도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다음 순간, 가지런히 모은 여명의 손에서 은은한 녹색 빛이 뿜어져 나왔으니까.
『Do It.』
“…?”
뭐라고요? 여명이 하늘 위를 바라보는 사이, 발버둥을 치던 유니콘이 얌전해졌다.
다음 순간, 녀석은 꾸벅 고개까지 숙이며 말했다.
“밀랍 산맥 혈족의 요한나 다크가 귀한 분을 뵙습니다….”
물론, 구토까지는 어떻게 못 했지만.
“우웁! 죄송합니다. 좀 떨어져 주시겠십니까?”
“….”
역시 클린턴이 옳았어. 여명이 주먹을 꽉 쥐건 말건, 미리는 유니콘의 목을 꾹 누르며 말했다.
“오늘 이곳에서 보고 들은 걸 다른 곳에서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뿔을 걸고 맹세하세요.”
“…맹세하겠습니다.”
어차피 처녀가 물어보면 다 불겠지만, 먼저 말하고 다니지 않는 게 어딘가.
어쨌거나, 미리와 시리는 그제야 유니콘을 풀어줬다. 푸르릉- 억압에서 풀려난 유니콘은 갈기를 털며 물었다.
“저주받을 용ㅅ… 아니, 녹색 신의 축복을 받으신 용사께서 왜 이곳에 오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여명은 아주 잠깐 고민했다. 처녀만 만나면 무엇이건 불어 버리는 생물에게 사실을 말해도 되나 싶은 까닭이었다.
‘유니콘을 믿느니, 차라리 빨갱이를 믿지.’
결국, 여명은 반쪽짜리 진실을 내놨다.
“전당 대회를 수호하러 왔다.”
전당 대회를 지켜? 용사가 왜? 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니콘. 여명은 여기서 거짓과 역사를 섞었다.
“전당 대회를 노리고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1968년 시카고 전당 대회… 전당 대회가 피로 물든 그날이 반복되는 건 막아야 한다.”
사실 1968년의 피의 전당 대회는 로버트 케네디 암살 사건이라는 역사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사건인지라, 적절한 예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고, 유니콘도 납득할 줄 알았는데….
유니콘의 대답은 여명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일 벌어질 불온한 움직임은 전부 론이 벌이는 자작극이니까요.”
“자작… 뭐?”
“전당 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 엘프에게 저격당하면 빨갱이 의심도 벗고, 지지도도 폭증할 거라고 했습니다.”
주지사의 심복이 장인어른과 함께 있던 이유가… 그거였어? 여명은 물론이고 미리조차 놀란 눈으로 유니콘의 입을 본 순간.
마구간 바깥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미친 말 새끼, 그걸 왜 말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