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63)
을 위한 세계는 없다-763화(763/817)
EP.763 황금, 꿀, 달러, 그리고 샷건.(12)
***
론 후보 입장에서, 이번 오해는 타당했다.
그는 올턴을 통해 여명이 붉은 별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KGB와 싸우는 등 기존 공산주의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밀턴 둔을 통해 바로 오늘 여명이 엘프들을 찾아갔다가 한바탕 싸우고 왔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였다.
데메론드에게 직접 샷건을 맞고, 입술에 피가 나도록 처맞았다나? 데메론드의 딸을 보쌈해간 게 아니고서야,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차기 서기장을 노리는 공산주의 내부 파벌 싸움.
아샤의 공산주의자들, 엘프, 그리고 붉은 별… 오랫동안 억눌려온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었으나, 그 힘은 분산되어 있었다.
그들이 힘이 하나로 합쳐진다면, 냉전을 다시 열어젖힐 만큼 강대한 세력이 되겠지. 하지만 그들은 결코 합칠 수 없다. 무너지기 직전의 소련 지도부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이 만든 공산주의란 그런 것이었다.
단 하나의 당, 한 명의 서기장이 모든 걸 지배하는 구조.
서기장의 실종 이후, 29회 소련 전당대회에서 스탈린의 후계자를 뽑지 못한 일이 그것을 증명했다. 빨갱이들이야 스탈린을 대체할 사람이 없어서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권력자들의 내전 때문 아니던가.
베리야, 예브게니, 등소평, 호네커… 누구 하나 권력을 잡지 못했고, 지리멸렬한 내전은 소련의 붕괴로 이어졌다.
붉은 별이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터.
실제로 붉은 별의 행보는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한국과 대립 과정에서 일본의 공산당을 손에 넣었고, 종말 교단을 무너트리면서 차원문을 가진 한국에 대한 커다란 영향력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제는 황녀와 접촉해 제국이라는 힘마저 등에 업었다.
변경백이란 명분을 두르고 합법적으로 아샤 공산주의자들을 토벌하겠다는 음흉한 수작이 틀림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론은 감탄했다.
붉은 별의 행보는 제국주의 시절 영국에 비견될 정도로 음흉하고, 효율적이었으니까.
어쨌거나, 그런 상황에서 여명이 제국의 대리인도, 새 변경백도 아닌 개인의 입장으로 유니콘과 접촉해 자신을 찾아왔다?
상식적으로 붉은 별의 입장으로 왔다는 게 가장 타당한 설명이었다.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는.
그러나 여명은 상식을 벗어난 존재였고, 그의 예상은 이번에도 틀렸다.
“뭔가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저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물론, 론 또한 그리 상식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아, 그런 컨셉인가? 알겠네. 이곳에서 나누는 대화는 모두 용사와 나누는 대화라고 생각하지.”
“….”
“자, 어서 앉게.”
차마 화를 낼 수 없던 여명은 슬쩍 메이커를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붉은 별의 정체에 놀라긴커녕 시리와 옷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메이커는 KGB와 여명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봤다. 만에 하나 그녀가 그걸 미국에 알렸다면, 그는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으리라.
여명은 그녀를 의심하는 대신, 여태껏 자신의 비밀을 지켜줬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아무튼, 여명은 한 번 더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을 내뱉은 후 론의 맞은 편에 앉았다.
고급스러운 나무 탁자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향 덕분인지, 여명은 조금 침착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전당대회에서 자작극을 벌이려는 이유가 뭡니까?”
론 후보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그는 의외라는 듯 다리를 꼬며 되물었다.
“거기서부터?”
“예, 거기서부터.”
“흠…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네. 그냥, 미국 선거의 전통 놀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지.”
“전통 놀이요?”
“저놈 빨갱이다. 저놈 친구가 소련 스파이다… 뭐, 그렇게 상대 후보를 빨갱이로 낙인찍는 것 말일세.”
“….”
빨갱이랑 협력하면 빨갱이 낙인이 아니라 진짜 빨갱이인 거 아닌가?? 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여명은 애써 말을 삼켰다.
때마침, 그의 고향인 한국에도 똑같은 전통 놀이가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론은 계속 말했다.
“최근, 빨갱이들의 부활 조짐이 보이잖는가. 분명 반이종족 정책과 함께 빨갱이 논쟁이 이번 선거의 핵심 쟁점이 되겠지. 그래서 미리 선공을 해둘 생각이네.”
“…전당대회에서 엘프에게 공격받은 후보가, 빨갱이일 리 없다?”
“바로 그 말일세.”
“….”
미친놈인가? 고작 그딴 이유로 엘프를 끌어들였다고?
아니, 생각해 보면 이게 정치인 평균에 가까웠다. 당장 그가 아는 정치인 중 가장 정상에 가까운 김규원 대통령조차 또라이에 가까웠으니까.
여명이 애써 표정을 숨기는 가운데, 론 후보가 계속 말했다.
“반이종족 여론은 짊어질 수 있네. 오크와 수인은 어차피 차원문을 넘을 수 없고, 드워프들은 애국자들이니까. 하지만 빨갱이 몰이는… 솔직히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막을 수 없을 걸세.”
“….”
“공화당 놈들과 케네디, 그 미친놈이 매카시 밑에서 배운 전통 놀이 실력은, 우리 당의 여론 대응팀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수준이니.”
그럴싸한 말이었지만, 미국 정치 분야에 어두운 여명은 확신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에겐 미국 정치에 빠삭한 엘프가 한 명 있었고, 여명은 곧장 미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 인간이 하는 말이 진짜야?’
‘네, 놀랄 정도로 솔직하게 말했어요.’
눈빛으로 미리와 의견을 나눈 여명은 다시 론 후보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직접 마주한 론 후보는 그리 마음에 드는 인물은 아니었다.
혼혈 유니콘으로 사기를 치는 것도 그렇고, 지레짐작하거나, 대화에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모습도 그렇고… 모든 게 전형적인 정치인의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적어도 그는 정치인이었다. 닉슨 같은 괴물이 되기엔 아직 부족한, 거래와 대화가 통하는 정치인.
탁, 탁-
잠시 탁자를 두들기며 생각을 정리한 여명은 마지막으로 그를 떠봤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닉슨과는 다른 길을 걸으시려나 봅니다?”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콧수염 독재자와 싸우겠답시고 핵무기에 예산을 낭비할 생각 없네. 우주 경쟁이라면 또 모를까.”
론 후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은근히 닉슨에 대한 생각을 떠보려던 여명이 무안할 정도로 확고한 대답이었다.
단순히 붉은 별 앞에서 냉전의 얼굴이라 불리는 닉슨을 칭찬할 수 없어서 하는 립서비스는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겐 신이나 다름없는 스탈린을 콧수염 독재자라고 부른 것부터가 그랬다.
‘….’
여명은 꽤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가 진짜 닉슨과 관련 없을지, 미래에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엘프와 손을 잡는 또라이가 닉슨과 운명의 편이 될 리 없었다.
여명에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우연히 만난 인연이 이 정도면 보물을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직접 만나 보길 잘했어.’
판단을 끝낸 여명은 슬쩍 일행을 바라본 뒤, 다시 론 후보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는 뭔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여명은 탁, 탁자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결정했습니다. 용사의 이름으로, 당신께 투자하겠습니다.”
“거래나, 협력이 아니라 투자? 좋아, 어디 들어보지.”
“…우선, 전통 놀이를 막아드리겠습니다. 자작극보다 훨씬 좋은 계획으로. ”
“더 좋은 계획?”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다룰마가 원하는 것처럼 변경백의 이름으로 그를 지지하는 건 하책이었다. 미국인에게 새 변경백과 친하단 건 별다른 세일즈 포인트가 되지 못했으니까..
기껏해야 다섯 신 교단 지지율이나 올라가리라.
그러면 시카고를 구한 게 자신이라고 밝힌다? 이미 브라우닝과 성검이 해결했다고 거짓말을 한 상태에서 진실을 밝혀봐야 하책.
진짜 상책은 따로 있었다.
여명이 투표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양당제인 미국 투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 표가 아니라 상대의 표인 법.
내 표를 늘리면 한 표 차이지만, 상대 표를 깎으면 두 표 차이다. 그러니까…
“상대 후보 면전에 빨갱이 낙인을 박아주겠습니다. 잘난 전통 놀이를 하지 못하도록.”
“…멋진 계획이지만, 어떻게?”
여명은 자신의 얼굴에 피눈물의 환상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빨갱이의 이름으로 그에게 달러를 후원할 겁니다.”
그 말이 끝난 순간, 변장한 여명의 얼굴을 확인한 론 후보는 크게 웃었다.
거래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
론 후보와 헤어지고, 몇 분 뒤.
시카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마구간 안에서, 메이커가 입을 열었다.
“동생,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정치… 특히 이 나라 정치와는 안 엮이는 편이 좋을걸.”
“…그렇다고 빈손으로 나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잖습니까.”
“걱정은. 동생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으면, 내가 적당한 수준에서 무마하려고 했어.”
“대선 후보가 직접 엘프를 끌어들여서 테러 자작극을 벌이는 걸 알았는데, 이걸 어떻게 무마합니까?”
여명이 되묻자, 메이커가 미리를 바라봤다.
“여기, 엘프가 있으니 어떻게든 넘어갔겠지. 데메론드, 그 또라이 새끼가 자기 딸을 외면할 사람도 아니고.”
“….”
미리가 엘프라는 걸 꿰뚫어 보고 있으셨나. 미리가 귀에 걸린 마법이 풀렸나 귀를 만지작거리는 가운데, 여명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는 그것대로 절 도와준 사람이 곤란해졌을 겁니다.”
“드워프? 하긴, 걔들 요즘 노이로제 걸려 있지.”
고개를 주억거린 메이커는 곧 대화 주제를 돌렸다.
“흐음… 그러면 다시 첫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거, 정말로 저지를 거니?”
“예. 진짜로 할 생각입니다.”
“왜?”
메이커는 유니콘과 차를 나눠마시는 두 소녀를 보며 말했다.
“굳이 미국 정치에 끼어드는 이유가 뭐야? 진짜 서기장이라도 되려고?”
“저 공산주의자 아니라니까요.”
“그래, 뭐, 그렇다 치고. 이유가 뭐냐니까.”
“….”
여명은 서기장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미리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저는 한동안 아샤에 가 있을 겁니다. 얼마나 오래 있을지 모르겠지만… 미국 대선이란 폭풍은 절 피해 가지 않겠죠. 그래서 기회가 온 김에 대선에 한발 걸치려고 했습니다.”
직접 폭풍으로 들어갈 건지, 아니면 폭풍이 그에게 찾아오는 건지 설명하지 않았다. 메이커 또한 굳이 묻지 않고 말을 받았다.
“흐음… 미국 정치에 개입하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닉슨과 운명에게 다가간다.
여명은 그 말을 속으로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커는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이미 엎질러진 거, 하지 말란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조심해. 네가 정치에 발을 담근 걸 눈치챈 순간, 이 나라에 존재하는 모두가 너를 물어뜯을 테니까.”
“….”
“알파 원처럼 남부 꼴통 소리 듣는 정도면 다행이고… 재수 없으면 상부에서 직접 널 죽이려고 할 거야. 알겠지?”
알파 원이 오해받는 이유가 그거였어? 미국인들이란.
여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구간 창문 너머를 확인했다. 처음 왔었던 전당대회장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이ㅁ… 아니, 누님.”
“우리 사이에 감사는 뭐… 아, 마지막을 빼 먹었네. 내 입을 막는 대가는 큰 거 필요 없어. 그냥 모카 딕 전화번호랑, 지금 사는 주소만 주면 돼.”
“…예?”
“그럼 맨입으로 모른 척하길 바랐니?”
“어… 그게….”
그 순간, 덜컹! 마구간이 흔들리며 고도가 낮아졌다. 수틀리면 마구간을 추락시켜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내놔.”
여명은 운전하는 이모의 심기를 거스를 정도로 담이 크지 않았다. 그는 순순히 어르신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메이커가 환하게 미소 짓는 가운데, 여명은 마음속으로 어르신께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하지만 이제 슬슬 장가가셔야죠.
***
아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다르다.
희생양 자매의 넷째, 오시리는 떠나기 전 언니가 해준 말을 상기했다.
형부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듣자마자 으아악 미친 새끼야 라고 비명을 지르는 라쉬크 때문에?
혹은 담담하게 뭘 준비해야 하는지 묻는 코르부스 때문에? 아니, 둘 다 아니었다.
시리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건, 여명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산더미 같은 돈다발 때문이었다.
탁자 하나를 가득 채우고 바닥에 흘러내릴 정도로 많은 양의 달러.
저게 다 얼마야? 형부가 일을 저지르는 스케일이 크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이지….
그때, 여명은 부족하다는 듯 금화를 한무더기 더 꺼내 달러 위에 올렸다.
“대외적으로 빨갱이들이 성도를 약탈했다고 알려져 있으니… 이것도 추가하죠.”
성도 보물고에서 가져온 금화. 그것의 가치를 아는 시리는 합- 입을 다물었고, 라쉬크는 아예 발작했다.
“안 돼! 이 미친 새끼야!! 그게 얼마짜린 줄 알아!? 그걸 그냥 땅에 버리겠다고??”
“땅에 버리는 게 아니라, 다 작전을 위해 쓰는 돈이라니까요. 이 정도 후원금으로 미국 대선 후보랑 연줄 만드는 거면 싼 거예요. 그러니까 쓰는 김에 팍팍 쓰는 편이….”
“내 월급은 왜 팍팍 안 쓰는데?!!?”
“…임금 협상을 잘하셨어야죠”
니가 그러고도 노동자야- 라쉬크가 그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거린 말건, 여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오늘은 모두 푹 주무세요. 내일, 전당 대회가 열리기 전에 차원문을 넘을 겁니다.”
“전당 대회를 구경하는 건 취소하는 것이오?”
코르부스가 물었다.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론 후보를 본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제자의 생각이 그렇다면 알겠소. 한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오?”
코르부스는 여명이 드레이테리얼에서 챙겼던, 소련제 총알 상자를 보며 말했다. 여명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고증은 중요하니까요.”
빨갱이 관련해선 고증을 넘어선 거 같소만… 딱. 애써 말을 삼킨 코르부스는 부리를 부딪쳤다.
“뭐, 제자가 그렇다면야… 본인은 신경 쓰지 않겠소.”
“아뇨, 스승님. 신경 써주세요.”
“…?”
“여기, 상자에 돈 담는 거 도와주셔야죠.”
“…조금 전에 푹 자라고 하지 않았소?”
“조금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수인형 말고 인간형으로 도와주세요. 괜히 상자에 깃털 들어가면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
“….”
스승은 제자의 장난 섞인 부탁을 거부하지 못했다. 인간으로 변신한 그녀는 제자와 시리 사이에 앉아, 달러를 하나하나 묶어 총알 상자에 담았다.
라쉬크가 총알 상자 속으로 사라지는 돈다발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다음 날, 민주당 전당 대회장.
해가 쨍쨍하게 떠오른 시카고에서는, 민주당 전당 대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권력이란 면에서 소련의 공산당 전당대회보다 살짝 부족했지만, 당원들의 축제라는 점에서만큼은 소련 전당 대회를 아득하게 뛰어넘은 축제의 장.
북적거리는 당원들은 객석은 물론이고 전당대회 장 밖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도로 곳곳에는 휘날리는 성조기와 당나귀가 그려진 민주당 깃발이 나부꼈다.
이번 전당대회의 주제가 ‘미국의 미래’인만큼, 전당대회를 기다리는 당원들의 열기 속에는 앞으로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런 열기에서 한 걸음 떨어져 차가운 눈으로 전당대회를 노려보고 있었다.
특히, 일리노이 주지사 올턴은 축제를 즐기긴커녕 예상 투표율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가 지지하는 론 상원의원이 경선에서 승리하는 건 필연이다. 문제는, 얼마나 크게 이기느냐였다.
주지사가 생각하기에,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민주당 내부에 단 한 명의 반대파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승리가 필요했다.
마왕이 됐다면 이런 짓거리는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는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반대파 의원에게 문자를 보냈-
그때, 대회장 내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그의 귀를 찔렀다.
-I see a red door and I want it painted black
-No colours anymore, I want them to turn black
어떤 미친 새끼가 이런 올드팝을 틀었어? 인상을 팍 찌푸린 올턴은 뒤늦게 이 노래가 론 상원의원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는 걸 떠올렸다.
설마?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 무섭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실현됐다. 어느새 론 상원의원이 그에게 찾아온 덕분이었다.
“론, 이 빌어먹을 새끼, 이 노래 니가 튼 거냐? 축가를 틀어도 모자랄 판에, 뭔 놈의 반전 노래를 틀어? 당장 가서 습격 당할 준비나 해!”
올턴이 버럭 화를 냈지만, 론은 웃는 얼굴로 그의 곁에 다가왔다.
“습격은 없을 거야.”
“…뭐?”
“내가 엘프들에게 오지 말라고 했… 잠깐, 올턴, 잠깐만. 화내기 전에 이것부터 좀 봐주겠나?”
주지사가 뭔 개소리냐는 듯 그를 노려보건 말건, 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리고 각종 보안이 걸린 그의 휴대폰에 떠오른 문자와 사진을 본 직후, 올턴의 표정이 뒤틀렸다.
“이건… 뭐지?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냐?”
“내 새로운 친구가 준 선물이지.”
“그 빌어먹을 포니 말고도 너한테 친구가 있다고? 하! 네가 한 농담 중에 가장 웃기는 농담이었다.”
“….”
그렇게 론 후보를 격추한 올턴은 와락! 그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우락부락한 그의 손에 비하면 작게 보이는 휴대폰 화면 위에는, 긴급 속보가 떠 있었다.
『시카고 차원문에서 대량의 달러와 금화 밀수 시도를 적발.』
『범인은 KGB 잔당과 그들의 수장 킴 필비?』
『구소련의 총알 상자에 담긴 돈… 최종 목적지는 공화당 대선 후보 조지프 F 케네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