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65)
을 위한 세계는 없다-765화(765/817)
EP.765 도금의 도시, 약탈의 길. (2)
***
“작전대로 가겠소.”
그렇게 말한 코르부스는 곧장 등을 돌리고, 세관 바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일행은 미리 준비한 대로 대형을 갖추고 세관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선두는 당연히 코르부스. 그 뒤로 미리와 시리, 라쉬크와 딜라, 그리고 최후미를 여명이 맡는 돌파 대형.
-침입자가 탈출한다! 막아!!
세관의 확성기에서 미군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미리가 작은 완드를 꺼냈다. 평소에 그녀가 들고 다니던 세계수 결정이 달린 완드 대신, 암시장에서 구한 군용 완드.
마감처리도 안 된 쇳덩이에 가까운 물건이었고, 실제로 최저입찰가로 만든 완드였으나, 미리의 순수한 마나는 그런 완드로도 어렵지 않게 바람 마법을 일으켰다.
사아앗 – !!
휘몰아치는 바람이 마치 장벽처럼 일행을 덮었다. 그건 노골적인 엘프식 마법이었고, 눈치 빠른 미군은 곧바로 마법을 알아봤다.
-제기랄, 엘프다! 세관에 엘프가 들어왔다!
이보다 더한 빨갱이 인증이 있을까? 세관을 지키는 군인들은 당황하면서도 빠르게 총부리를 돌렸다.
하지만 재빠른 행동과 달리,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달리는 일행 주변에 세관을 이용하는 민간인들이 있는 까닭이었다.
-쏘지 마!! 병신들아, 사격 금지!!
-시발, 초인군은 뭐 하고 있어?!
비명 같은 군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건지, 일단의 군인들이 세관 건물을 뛰어넘으며 등장했다. 상당한 수준의 에어 도미넌스가 틀림없었다.
여기까진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군인들이 일행을 덮치기 직전, 미리는 바람 마법으로 민간인과 군인들을 동시에 밀어내며 소리쳤다.
“불!”
다음 순간, 시리가 준비하고 있던 마법을 바람 마법 위에 덧씌웠다.
화르륵!
시뻘건 화염이 일행의 머리 위로 펼쳐졌다. 바람을 만난 불이 언제나 그렇듯, 불길은 커다란 불기둥이 되었다. 화염이 얼마나 크게 치솟았는지, 민간인과 세관원들은 물론이고 날아오던 군인들조차 움찔, 발을 멈출 정도였다.
-화재 경보! 화재 경보!!
곧바로 이어지는 확성기의 경고.. 하지만 불기둥에 화상을 입는 사람도, 세관 건물에 불이 옮겨붙는 일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시리가 펼친 건 화염 마법이 아니라, 환상 마법이었으니까.
시간을 벌기 위한 눈속임.
당장 불기둥 속에서 멀쩡하게 달리는 여명이 그 증거였다. 뻔하지만 확실한 수법이었고, 일행들은 세관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눈속임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 가까이 접근했던 초인 중 하나가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소리쳤다.
-이런 썅, 가짜 불이다! 겁먹지 말고 제압해!!
이번에는 딜라와 라쉬크 차례였다.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달려드는 군인들에게 던졌다.
동그란 쇠구슬들. 그걸 본 미군들이 발작했다.
-빨갱이 불알이다!!
괴수를 토해내는 베리야의 구슬, 혹은 대규모 폭발을 일으키는 스탈린의 구슬.
둘 중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던 군인들이 급격히 물러나는 가운데, 세관 감시탑에서 총성이 울렸다.
탕- 탕- 탕-!!
발사된 총알은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며 구슬을 꿰뚫었다. 샤프슈터, 혹은 그와 유사한 필중 무술이 틀림없었다.
“이래서 미군이랑 싸우기 싫다니까!”
기겁하는 라쉬크와 딜라 모두 미국 정부에 쫓겨본 몸이라서 그런가, 꺾이는 총알을 보자마자 쇠구슬을 던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물론, 두 사람이 던지는 건 진짜 베리야의 구슬도, 스탈린의 구슬도 아니었다. 그냥 비슷한 모양의 쇠구슬일 뿐.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샤프슈터 사수는 쉴 새 없이 구슬을 저격하며 총알을 낭비했고, 일행은 그사이 세관 동쪽 입구에 도착했다.
두꺼운 철문으로 이루어진 세관 입구는 이미 닫혀있었는데, 코르부스는 속도를 줄이긴커녕 오히려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차기.
!!!!
수인 최강이란 위명을 증명하듯, 코르부스의 발차기는 두꺼운 철문을 찌그러트렸다. 뒤따르던 라쉬크는 물론이고, 미군조차 기겁할 정도.
정작 코르부스는 어떤 감상도 없이 찌그러진 문 사이에 생긴 틈으로 몸을 날렸다.
뒤이어 미리, 시리, 딜라, 라쉬크가 차례대로 문을 넘는 사이, 처음 몸을 날렸던 초인들이 기어코 검을 휘둘렀다.
가장 후방에 선 여명이 나설 차례.
그는 컴비네이션 건에 마나를 불어 넣어 가장 가까이 접근한 미군의 검을 막아냈다.
쩌엉!! 여명과 무기를 맞댄 미군의 몸이 충격파를 이기지 못하고 날아갔지만, 그들은 전사가 아니라 군인이었다. 곧 날아간 미군의 빈자리로 다른 미군이 파고들고, 필중의 총알이 여명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훈련된 군인들의 합공이 그의 몸을 압박하고, 푹! 앞에서 날아온 총알이 무릎 뒤쪽에 명중한다.
여명이 굳이 맨 뒤에 남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최후방은 미군의 공격을 온전히 받아내야 하는 자리였으니까.
그리고 여명에겐 미군의 공격을 받아낼 실력이 있었다. 거친 호흡이 몇 번 오고 갈 찰나 속에서 그는 몸으로 파고드는 총알을 무시하고, 미군들의 합공을 전부 떨쳐냈다.
그 와중에 얼굴 변장에 칼을 맞아 숨겨진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킴 필비!?
그의 가짜 변장을 알아본 미군이 나오기 무섭게, 여명은 코르부스가 벌려놓은 문틈으로 몸을 날렸다. 날아온 총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
아무튼, 세관을 벗어난 그가 도심으로 달리려는 순간.
콰아아앙!!!!
세관 서쪽에서 폭발과 함께 커다란 불기둥이 솟구쳤다. 미리디스와 시리가 만든 가짜 불기둥이 아닌, 진짜 불기둥.
여명은 단번에 불기둥의 정체를 알아챘다. 코드명 7MZh3… 속칭 스탈린의 솔방울이라 불리는 마도구가 딱 저런 불기둥을 만들어냈으니까.
하필이면 그가 세관에 온 이때, 스탈린의 솔방울이 터졌다…?
이게 단순히 우연일까? 여명은 불길함과 황당함을 반반씩 삼키며 일행이 도주한 방향으로 내달렸다. 세관 감시탑에서 여전히 총알이 날아와 몸을 꿰뚫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내달렸을까?
여명은 혼란스러운 도로를 지나 세관에서 한참 떨어진 도심 창고 지대의 골목에 도착했다. 일행과 미리 말을 맞춰둔 합류 지점이었는데… 그곳에서 여명을 기다리고 있던 건,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후줄근한 노동복을 입은 열댓 명의 아샤인들.
코르부스를 비롯한 일행과 멀찍이 떨어져 이쪽을 힐끗거리던 아샤인들은, 여명을 보자마자 기쁘게 소리쳤다.
“반갑습니다! 동무!”
“오, 스탈린이시여! 우리를 가호하소서!”
“동무가 군인들의 관심을 끌어준 덕분에 피해 없이 물건을 탈취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말을 내뱉은 건 비교적 어려 보이는 남자 오크였는데, 그는 쪼르르 여명에게 다가와 꼬질꼬질한 손으로 기다란 종이를 내밀었다.
뭐지? 여명이 그가 내민 물건을 자세히 보니, 그건… 지도였다.
최북단 성도 아래, 최남단 마경 위, 아샤 중부 지역을 뚝 잘라 그려놓은 듯한 지도였는데, 그곳에는 뭔가를 표시하듯 붉은 점 몇 개가 찍혀있었다.
진짜 뭐지? 여명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라쉬크의 분홍색 눈동자가 반짝이는 사이, 오크가 덧붙였다.
“이걸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약속한 모스크바의 지원군만 오면 됩니다!”
모스크바…? 여명은 새삼 무언가 아주, 아주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아폴로 시티.
시카고 차원문 너머에 세워진 도시는 여명이 그동안 지나쳐 온 아샤의 도시들과는 근본부터가 달랐다.
계획적으로 주거 지역부터 지어진 제미니 시티나, 이승만 동상부터 세워진 승만 시티와 달리, 이곳에 가장 먼저 지어진 건 병영이었으니까.
아샤 침략을 위해 지어진 군사 기지.
그것이 아폴로 시티라 불리는 도시의 근본이었고, 이 도시는 겔차 왕국 토벌전과 대 엘프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의 병참을 담당하며 자신의 근본을 증명해왔다.
화약과 강철, 그리고 피를 양분 삼아 자라난 땅.
이 살벌한 땅이 평범한 도시가 된 건, 지구 국가들이 아샤에서 군사 활동을 자제하는 내용이 담긴 몰타 발표 이후였다.
혹자는 이것을 두고 아샤와 지구가 쌓은 평화의 증거라고 말했지만, 글쎄.
정작 도시 곳곳에는 여전히 옛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화학 가스를 만들던 공장은 간판만 바꾼 채 비료를 생산하고 있었고, 여러 빌딩 옥상에는 냉전 시대의 대공 포탑이 잠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선명한 흔적은 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창고였다. 군용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일반적인 창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창고.
여명 일행이 자칭 ‘동지’들의 아우성을 따라 도착한 곳 또한 그런 창고 중 하나였다.
세관에서 한참 떨어진, 질소 비료가 가득 싸인 창고.
끼이익 – ! 녹슨 문을 열자마자 축축한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일행을 안내한 오크가 소리쳤다.
“동무! 잘 오셨습니다! 이곳이 우리 아지트입니다!”
“….”
“아, 물론, 저 비료 더미가 기지란 건 아니고… 내부에 제대로 된 공간이 있습니다.”
외부인을 데리고 온 게 즐거운 건지, 아니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즐거운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빨갱이들은 여명 일행을 내버려 두고 먼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반대로, 뒤따라온 여명과 동료들의 표정은 영 아니었다.
특히 라쉬크.
그녀는 여명이 빨갱이들을 따라가기로 결정한 직후부터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주접을 떨던 평소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여명은 굳이 그녀의 고민을 방해하지 않았다.
덕분에 여명에게 항의하는 건 미리의 몫이 되었다.
“여명, 꼭 따라와야 했어? 쟤들이 누군지 알고?”
“나도 딱히 따라오고 싶지 않았어.”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여명이 작게 뒷말을 덧붙이자, 미리 푹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마따나, 저 빨갱이들은 그대로 죽을 상황이었으니까.
상대는 미군이었다. 세계 최고의 군대. 그들이 스탈린의 솔방울을 터트린 빨갱이들이 도망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추적이 시작됐고, 빨갱이들의 정체가 궁금했던 여명은 그들을 살리기로 했다. 그러니까, 총알을 가득 맞아가며 미군의 시선을 끌었다.
덕분에 옷 곳곳에 구멍이 나고, 애꿎은 도로를 망가트렸지만… 뭐, 아무튼.
여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일단 살려야 저 사람들의 정체가 뭔지, 뭘 꾸미는지 알 수 있을 거 아냐.”
반박할 말이 없었던 걸까, 미리는 괜스레 심술을 냈다.
“세티가 있었으면 한 놈만 챙기고 나머지는 다 죽게 내버려 뒀을 거예요.”
“…내가 아는 세티랑, 미리 머릿속에 있는 세티랑 다른 사람인가? 대체 세티를 어떻게 보는 거야?”
“제가 만나 본 사람 중에 가장 독한 여자요.”
“….”
독하다니, 어디가? 여명이 세티가 얼마나 천사 같은지 반박하려는 찰나, 앞서가던 빨갱이들 방향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 !
묵직한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여명이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자, 창고 한편에 가득 쌓인 비료 더미가 반으로 갈라지며 숨겨진 통로가 드러나는 게 보였다.
고전적인 비밀 통로.
하지만 정작 여명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는데, 통로 안쪽에 걸린 깃발이 바로 그것이었다.
붉은 배경 뒤로 노란 낫과 망치가 교차하는 상징이 그려진 깃발… 농민과 노동자의 단결을 나타낸 그 깃발은 반박의 여지 없는 공산당의 상징이었다.
라쉬크가 그러면 그렇지- 라고 중얼거리며 얼굴을 쓸어내리는 가운데, 젊은 오크가 일행을 향해 양손을 활짝 펼쳤다.
“아샤 공산당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공산당이라니. 다른 곳도 아닌, 미국의 앞마당에서?
어이가 없던 여명은 슬쩍 미리를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미리 또한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쳤나…?”
“….”
엘프조차 이렇게 말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애써 쓴웃음을 삼킨 여명은 일행을 향해 말했다.
“일단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바깥에서 기다려주세요.”
그러자 라쉬크와 코르부스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제자여, 다 같이 가는 쪽이 더 안전하지 않겠소?”
“맞아! 애초에 안전을 챙길 거면 세관에도 끌고 가지 말았어야지!”
“아니, 세관에는 다 같이 가는 편이 안전하니까 그런 거죠….”
“됐고! 같이 들어가!”
왜 저렇게 열성적이지? 잠시 의심의 눈초리로 라쉬크를 훑던 여명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다 같이 들어가죠. 문제가 생기면….”
뒷말은 굳이 꺼낼 필요도 없었다. 초인도 아닌 일개 민간인들을 상대로 문제가 생겨봤자, 여명 일행에게 위해가 될 일은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일행은 빨갱이들의 뒤를 따라 통로 내부로 들어갔다. 군용 비밀 벙커와 연결된 곳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창고의 벽과 벽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 공간.
대충 30평쯤 될까? 커다란 원형 탁자와 칠판이 놓인 공간에는 다섯 명 정도의 아샤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빨갱이 무리와 여명 일행을 보며 상반된 반응을 보여줬다.
“페로! 아주 잘했다! 믿기지 않는군. 우리가 정말로 지도를 탈취하다니!”
젊은 오크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임무 성공을 자축하는 사람과-
“스탈린의 도우심이라! 인민의 서기장을 찬양… 잠깐, 저 사람들은 누군가?”
-여명 일행을 향해 뒤늦게 경계심을 내보이는 사람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보건 말건, 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방에 들어오는 동안 어떠한 보안도 없는 게, 전형적인 초짜들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증명하듯, 페로라 불린 젊은 오크가 여명 일행을 소개하는 것 또한 초짜스러웠다.
“동지들! 의심할 필요 없습니다! 이분들이 없었으면 이번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뭐?”
“놀라지 마십쇼! 이분들은… 모스크바에서 오신 지원군입니다!”
모스크바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빨갱이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들은 조금 전 적의는 어디 갔냐는 듯, 놀란 눈으로 여명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명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왔다고 한 적 없었으니까. 그저, 모스크바에서 왔냐는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했을 뿐.
이런 초짜들이 어떻게 미군이 있는 세관을 공격한 거지? 황당함을 삼킨 여명은 비밀 기지 중앙,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탁자 앞에 서서 말했다.
“이 지부의 대표는 누구냐? 앞으로 나와라.”
킴 필비의 얼굴로 말하는 여명에게는 묘한 위엄이 있었다. 놀란 빨갱이들이 서로 눈치를 보길 잠시. 사람들 뒤편, 기지 구석에 있던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지부의 대표는 나일세.”
대충 70세쯤 되었을까? 자신을 대표라 소개한 남자는 얼굴 곳곳에 주름이 선명한 노인이었다. 따로 증거는 없었지만, 그는 아샤인이라기보단 지구인같아 보였다.
아무튼, 여명은 그를 향해 말했다.
“임무 보고를 듣고 싶군. 무슨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지 설명해주게.”
세관에서 폭탄을 터트린 빨갱이들은 그제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자신들을 도와준 거라고 믿고 있던 여명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하지만 대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 뒤, 다른 사람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모두 바깥에 나가 있어라. 이분과 나, 단둘이서 이야기하겠다.”
대표란 이름이 허명은 아니었는지, 빨갱이들은 모두 멈칫거리며 바깥으로 나갔다. 여명 또한 마찬가지로 일행들에게 잠시 나가 있어 달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비밀 기지에 단 둘이 남게 되자,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임무 보고보다 먼저, 자네의 정체부터 밝혀줬으면 하네만.”
“…내 얼굴도 못 알아보는가?”
여명이 변장한 킴 필비의 얼굴을 내보이며 말하자, 대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킴 필비는 현재 이곳에 올 수 없네. 모스크바가 그를 쫓고 있으니.”
“….”
그건 나도 모르던 일이었는데. 일이 꼬였군. 여명이 강제로라도 그에게서 정보를 뽑아내려는 순간,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역으로 이 늙은이가 정체를 맞춰볼까? 킴 필비로 변장한 젊은 지구인이라… 떠오르는 건 딱 한 명뿐이군.”
“….”
“붉은 별. 맞나?”
여명은 킴 필비의 환상을 지우는 척, 붉은 별의 얼굴을 뒤집어쓰며 대답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킴 필비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네. 그리고 젊은 지구인이란 부분은… 흠,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말을 높이지 않았나. 그거 때문에 알 수 있었네.”
“…?”
“아샤인들은 외모가 아닌 계급을 보고 존댓말을 한다네. 알다시피, 초인이 되면 노화가 느려지니 말일세. 다 늙은 농부보다 말을 탄 중년 기사님의 나이가 더 많은 경우도 흔하지.”
“…아.”
“참고로, 붉은 별이라는 건 그냥 찍은 걸세.”
가벼운 말투와 달리, 노인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여명의 위아래를 훑고 있었다. 붉은 별 또한 변장이라는 걸 눈치챈 걸까? 알 수 없었다.
여명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직접 피눈물의 환상을 벗지 않는 이상, 눈앞의 노인이 그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곧바로 대화 주제를 돌렸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리보프 레온티예비치 브론시테인. 그냥 리보프라고 부르게.”
리보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인 것 같았으나, 정확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여명은 굳이 의미를 묻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리보프,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도시에 공산당 지부를 세운 겁니까?”
의외의 질문이었던 걸까, 리보프는 가볍게 웃었다.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상대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
“….”
미군의 유사 군사기지 앞에서 공산주의자가 되는 건 신기한 게 아니라 미친 짓인데요?? 여명은 애써 이죽거림을 참으며 재차 질문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쪽 공산당이 대체 뭘 저지른 겁니까?”
“알고서 도와준 거 아니었나?”
“역으로 제가 묻고 싶군요. 제 계획을 도와주기 위해 온 거 아닙니까?”
“아닐세. 그랬다면 좋겠지만, 우린 그 정도 연락망이 없어.”
그거야 아폴로 시티까지 연락을 가져올 미친 빨갱이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여명은 다시 한번 말을 삼켰다.
“그럼 더 거칠 게 없겠군요. 말해주시죠. 왜 세관을 습격했습니까? 조금 전 그 지도는 뭡니까?”
몇 번의 회유, 비유, 그리고 말장난이 이어질 거라 생각한 여명의 예상과 달리, 리보프는 즉시 대답했다.
그것도 여명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엘릭서의 핵심 재료가 표시된 지도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