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67)
을 위한 세계는 없다-767화(767/817)
EP.767 도금의 도시, 약탈의 길. (4)
***
“저희 부족이 마법사의 협박 때문에 인신매매했던 아이들, 기억하십니까?”
인신매매와 아이들.
그건 함께 묶여선 안 되는 단어였고, 듣자마자 딜라를 제외한 일행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특히 시리는 혐오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닦달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일행의 리더인 여명이 침착한 까닭이었다.
여명은 담담하면서도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억한다. 너희가 내게 한 약속도.”
오크 부족과의 약속.
시작은 마경의 벌레 마법사였다. 녀석은 주변 오크 부족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상납금을 강요했고, 오크 부족은 상납금을 맞추기 위해 인신매매까지 손을 댔다.
플레이어를 죽인 여명이 마경에 조난 당할 때까지, 계속.
마경에 떨어진 여명과 세티는 인신매매를 시도하는 오크들을 제압하고, 마경의 마법사를 때려죽였다. 오크들 또한 모조리 죽일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다른 길을 제시했다.
인신매매의 죗값을 치러라.
세티와 여명의 분노 앞에서, 오크들은 죽음 대신 죗값을 치르겠노라 약속했다.
솔직히 지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이 직접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눈앞의 오크는 약속에 대해 말했다.
“예, 용사님과 부인께 약속한 대로, 저희는 인신매매로 팔려 간 아이들과 사람들을 추적했습니다.”
“….”
“드레이테리얼로 팔려 간 사람들은 드레이테리얼의 유일한 궁정백이 된 발라구가 모두 구했지만, 그 외에 북부 도시로 팔려 간 사람들을 추적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발라구의 말로는 저희 말고 다른 오크 부족이 유통한 사람들까지 다 찾으려면 앞으로 삼 년은 더 걸릴 거라더군요.”
다른 오크들이 팔아먹은 사람들까지 추적 중이라고? 여명은 살짝 놀랐다. 선의가 또 다른 선의로 이어지는 경험은 희귀했으니까.
아무튼, 거기까지 말한 페로루는 스윽-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한데, 추적 중에 이상한 점을 하나 찾았습니다.”
“아이들?”
“예, 유독 아이들이 가족과 찢어져 따로 북부로 팔려간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제야, 여명도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들만 따로 팔려나갔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보편적인 경우에서, 인신매매로 노예를 사는 목적은 노동력이었다.
힘을 쓰긴커녕 관리가 힘든 아이들은 그다지 가치 있는 상품이 아니었다.
물론, 모든 노예가 노동력을 위해 쓰이는 건 아니다. 특히 아이는 입양이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구에도 입양할 아이가 넘쳐나는 판에, 굳이 아샤인이나 오크를 입양할 이유가 있을까?
‘입양을 제외하면 남는 가능성은….’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역겨운, 차마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이유를 떠 올렸다. 옆에 있던 코르부스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미간을 구기며 딱! 소리 나게 부리를 다물었다.
그 소리를 신호 삼아, 오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갈래로 나눠져서 아이들을 추적하던 저희는… 팔려나간 아이들이 한곳으로 모이는 걸 눈치챘습니다.”
왜 최악의 예상은 틀리진 않는 걸까. 여명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아이들이 모였다는 곳이… 여기 아폴로 시티인가?”
“예, 모두 이곳으로 유통된 걸 확인했습니다.”
유통이라니. 여명은 오크의 단어 선정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진실은 때때로 불쾌한 법이었다.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이들을 이곳으로 모은 게 누구지? 공산당?”
엘릭서를 만들기 위해 엘프를 갈아버린 미친놈이 있는 판에, 빨갱이들이라면 아이들을 갈아 넣고도 남으리라.
하지만 오크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공산당에 잠입했지만… 공산당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미국… 같습니다.”
그러자 라쉬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같습니다, 는 또 뭐야?”
“그게, 도심 외곽 산업 지구에 있는 건물로 아이들을 태운 차량이 들어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확인했는데… 저희 능력으로는 건물의 주인을 알아내는 건 무리였습니다.”
이번에는 여명이 물었다.
“…그런데도 미국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 아이들을 태운 차량을 운전하고 있던 사람이… 미군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
비밀을 털어놓은 페로루가 ‘의심받기 전에 당으로 돌아가야 한다’ 며 자리를 뜬 직후.
미리가 물었다.
“저 오크가 한 말을 믿어? 미국이… 아이들을 납치했다고?”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라니?”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오크가 가져온 스팸 파이를 크게 뜯어 한입 베어 물었다.
당연히 괴식일 거란 예상과 달리, 파이는 의외로 먹을 만했다. 뭐지? 베어 먹은 자리로 파이의 속을 확인해 보니, 계란과 야채 사이에 스팸이 박힌 평범한 고기파이였다.
나눠 먹어도 나쁘지 않겠는걸. 여명은 접시를 꺼내 파이를 나눠 담으며 말했다.
“우선, 누군가 아이들을 모은 건 사실일 거야. 오크들이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게 미국이 그랬다는 증거는 아니지. 미군으로 변장한 녀석일 수도 있으니까.”
꽃밭에서는 나비로 변장하는 법이라고, 미군의 앞마당에서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른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어쨌거나, 여명은 미리를 비롯해 다른 일행에게 파이를 나눠주며 말했다.
“그래, 그럴 확률도 있겠지.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건, 아이들을 모아서 뭘 하고 있는지야.”
미리는 시리의 얼굴을 슬쩍 확인한 뒤 말했다.
“…인체실험이라도 하는 걸까?”
최악의 경우였지만, 여명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부정한 건 라쉬크였다.
“미국이 아이들로 인체실험을? 내가 장담하는데, 미국은 그런 짓 안 할걸.”
어딘가 확신에 찬 목소리. 미리는 파이를 내려놓고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야, 내가 미국 연구소 출신이니까?”
“예?”
“미국이 인체실험을 하고 싶었으면 굳이 차원문 너머가 아니라, 미국 외진 곳 어딘가에 흑인이랑 난민들 모아다가 했을걸? 왜 쓸데없이 이런 곳에서 인체실험을 하겠어?”
“…본토에서는 비밀 연구를 하기 어려우니까요?”
“무슨 소리야? 당연히 차원문 너머가 더 힘들지. 정부 혼자 몰래 진행할 수 있는 본토 연구에 비해, 차원문은 민간 사업자도 끼어 있잖아. 당장 장부 조작부터가 어렵다고. 핵실험처럼 오염이 심한 거라면 모를까, 본토가 무조건 쉬워.”
“….”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이 꼬맹이들로 뭘 실험하겠어? 아이 전용 백신을 만들 것도 아니고, 뭐, 아이의 내장을 괴수의 내장으로 갈아치우기라도 할 건가? 근데 그거라면 그냥 한국 정부를 윽박질러서 교단의 비밀 자료를 뜯는 편이 쉽지 않나?”
미국이 벌인 인체실험의 당사자라서 그런 걸까? 라쉬크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여명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미국이 종말 교단도 아니고… 굳이 그런 실험을 할 필요는 없죠.”
냉전도 다 끝난 마당에, 걸리면 욕 먹을 짓을 왜 하겠는가? 하지만 여명 일행이 예상하지 못한 이유가 있을 가능성도 있었-
그때, 파이에는 입도 대지 않고 있던 딜라가 슬쩍- 손을 들었다.
“저기… 미스터 샌드위치?”
“응? 딜라, 왜? 파이 말고 샌드위치 만들어줘?”
“예, 샌드위치 만들어주세…! 가 아니라, 그… 아이들 관련해서 하나 의견을 내도 괜찮을까요?”
“…네크로맨서의 의견이야?”
“예.”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딜라가 파이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까, 라쉬크가 말한 땅의 기쁨이란 열매 이야기를 듣고 나서 떠오른 건데요, 인신 공양 비법 중에는 사람을 거름 삼아서 영약의 성장을 촉진하는 비법이 있어요.”
“…뭐?”
사람으로 뭘 해? 여명의 표정이 사나워지자, 딜라가 급히 덧붙였다.
“무, 물론 저는 해본 적 없고요. 어디까지나, 그, 이론상 그런 게 있다는 거죠.”
여명은 여전히 사나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미국과 네크로맨서가 협력할 때, 그 이론이 미국에 넘어갔을 가능성은?”
“현대의 네크로맨서들에게는 사장된 이론이라, 거기까지는 저도 잘….”
“….”
아까운 시체를 풀떼기에게 주다니, 낭비잖아요? 딜라가 네크로맨서다운 변명을 덧붙이는 사이, 여명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딜라, 만약 그런 짓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면… 감지할 수 있겠어?”
“…이미 도태된 기술이라, 대충 200m 정도라면 감지할 수 있어요.”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코르부스가 말했다.
“일정을 조금 뒤로 미뤄야겠구려. 당장 가서 확인하시겠소?”
“예, 저랑 딜라 둘이서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시오. 그동안 우리는….”
거기까지 말한 코르부스는 쓰윽- 라쉬크와 엘프, 그리고 시리를 훑으며 덧붙였다.
“오크들을 만나러 가보겠소.”
***
얼마 뒤, 아폴로 시티 외곽 지대.
온갖 차량과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의 점심시간은 여느 지구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시끄럽고, 혼잡했다.
-스팸 음식점으로 갈까?
-거긴 오크 놈들이 바글거리잖아.
-보오리- 빵! 매애엑 콜!
배고픈 발걸음을 옮기는 노동자들과 그들에게 맥콜과 보리빵을 파는 드워프, 그리고 식당과 패스트푸드점에서 풍겨오는 기름진 음식 냄새까지.
여명은 딜라와 함께 그 활기찬 풍경 속에 녹아들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의심의 눈초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 CCTV를 피해 걷던 여명은 걸음을 돌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골목으로 향했다.
녹슨 철제 담장과 ‘관계자 외 접근 금지’라고 쓰인 간판이 널브러진 뒷골목.
CCTV는커녕 인기척도 없는 골목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여명은 과거에 군사기지로 쓰이던 건물을 개조한 산업지구 외곽에 도착했다. 초행길이라 그런지 잠시 길을 헤매기도 했지만, 오크가 말한 건물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넓은 산업지구에서 초인이 지키는 건물이 두 개나 있을 거 같지는 않았으니까.
군사용 건물답게, 아름다움보다는 실용성에만 집중한 네모반듯한 건물.
그곳에서는 선명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졌다. 어림잡아도 다섯 이상. 이쪽이 탐지되지 않는 선에서 느낀 게 이 정도니, 못 해도 두 배는 더 있을 게 분명했다.
‘정말로 미국이 이런 짓을 벌이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여명은 투명 망토를 꺼내 딜라에게 내밀었다.
“여기, 투명 망토부터 써. 최대한 걸리지 않는 범위까지 접근할 테니.”
“넵.”
딜라는 순종적으로 여명의 명령을 따랐다. 누가 보기 전에 재빨리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두 사람은 천천히 건물로 다가갔다.
한데, 건물과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했다.
‘보안이… 왜 이렇게 허접하지?’
입구는 뻥 뚫려 있었고, 접근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일부러 경비를 서지 않는 것처럼.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곳에 있는 초인들이 미군이 아닐 가능성이었다. 미군의 보안이 이렇게 멍청할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미국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곳에 초인을 짱 박아둔단 말인가?
의문을 따라 다음으로 떠오른 가능성은 함정이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대체 누구를 낚기 위한 함정이란 말인가?
오크가 미군과 짜고 자신을 낚으려고 했다? 미국이 바보도 아니고,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이런 허접한 함정이 아니라, 그냥 닉슨을 보냈으리라….
복잡한 고민을 삼킨 여명은 딜라를 확인했다. 투명 망토에 가려진 그녀는 감지에 집중하고 있는 듯 길게 심호흡하고 있었다.
“찾았어?”
“아뇨,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인신 공양도, 다른 네크로맨서의 비의도… 아예 뒤틀린 마나 자체가 없습니다.”
“…혹시 모르니, 조금만 더 접근해 보자.”
딜라는 이번에도 순종했고, 두 사람은 곧 건물 외벽에 딱 붙을 수 있을 만큼 접근했다.
잠시 후, 딜라가 한숨처럼 말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미 모든 작업이 끝났을 가능성은?”
“족히 수십 명의 아이를 쥐어짰으면 당연히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잔향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
진짜 뭐지? 여명은 잠시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뭔가를 결심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갈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예? 하지만 미스터 샌드위치, 그건 너무 위험….”
“진짜 아이들이 있는지, 있다면 무사한지만 보고 올게.”
그렇게 여명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딜라가 물었다.
“왜 그런 일을 하십니까?”
“뭐?”
“미스터 샌드위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들입니다. 굳이 이런 위협을 감수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딜라의 말은 타당했다. 인신매매로 팔려 온 아이들이 여명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망토에 가려진 딜라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불어온 바람에 투명 망토가 살짝 일렁거릴 때쯤. 그가 말했다.
“딜라, 개는 왜 자기 귀를 긁지?”
“…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으면 뭐든지 하나?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 있다고 해서, 개가 뛰어내리던가?”
“그건….”
“정답은, 귀가 가렵기 때문이지.”
“….”
“딜라,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아니야. 하지만 내가 보는 앞에서 애들을 비료로 쓴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더러울 정도의 상식인은 되지. 아마 이대로 이 도시를 떠나면 엘프 숲까지 가는 내내 기분이 더러울걸?”
“참으로… 원초적인 이유십니다.”
여명은 픽 웃으며 덧붙였다.
“원래, 모든 선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지.”
“꼭, 성녀님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부부는 닮는다더니, 역시….”
“…?”
뭐 인마? 여명이 무겁게 침묵하자, 딜라가 황급히 덧붙였다.
“…실언했습니다.”
“알면 됐… 아니, 됐고. 혹시라도 분위기가 이상하면 도망쳐. 합류 지점은 처음 묵었던 여관. 알겠지?”
“예.”
깊이 고개를 숙이는 딜라를 뒤로한 채, 여명은 그대로 건물의 침투 경로를 찾기 시작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침투 경로는 넷이었다.
정문, 뒷문, 창문, 그리고 옥상.
우선 정문은 제외. 아무리 보안이 허접하다고 해도 정문이 뚫릴 정도는 아니었다.
열린 창문은… 없고. 뒷문으로 들어가자니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순간 걸릴 게 뻔했다.
남는 건 옥상뿐. 여명은 건물을 올려다보며 턱을 슬었다.
벽의 외벽을 타고 옥상으로 침투한다? 옥상의 입구가 닫혔는지 열렸는지도 모르는데, 괜히 벽을 타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여명은 벽을 타지 않고도 옥상에 올라갈 방법이 있었다. 그는 투명 망토 내부에 아주 얇은 얼음 발판을 띄웠다.
여명은 하나하나, 계단을 밟듯 발판을 밟으며 위로 올라갔다. 다른 초인들이 감지할 수 없도록 발을 떼는 순간 발판이 녹아내리게 만들고, 다시 발판을 만드는 세밀한 작업을 무수히 반복해야 했지만, 여명의 재능은 그것을 가능케 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조차 감탄할 그 재능을 얼마나 뽐냈을까? 이윽고 여명은 건물 옥상에 도착했다. 드넓은 건물 옥상에는 흑인 남자 한 명이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다행히 초인은 아니었다.
운이 좋아.
여명은 남자가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옥상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노렸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이윽고, 끼익-! 남자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여명은 염동력으로 문을 아주 잠깐 고정한 뒤 문을 건넜다.
앞서 문을 연 흑인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침입.
여명은 남자의 발걸음이 멀어지길 기다린 뒤,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돼서야 계단을 내려갔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얼마나 내려갔을까? 여명은 초인들의 기척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건물의 중앙쯤에 위치한 방.
방으로 가는 길에는 총기로 무장한 무장 경비들이 서 있었다. 물론, 미군으로 보이는 증거는 없었다.
녀석들의 복장을 확인한 여명은 가볍게 그들을 지나쳐, 방문 앞에 섰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마나로 강화한 그의 청력은 방 내부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지난번에 했던 말과 다르지 않소? 분명 초인도 뭣도 아닌 무지렁이들이 오기로 했을 터인데! 킴 필비라니!
-그의 등장은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다.
-웃기는 소리! 킴 필비와 KGB가 지난 수십 년간 모스크바를 섬겼던 걸 우리가 모를 것 같소?
-그가 섬긴 건 모스크바가 아니라 베리야다.
-말장난 마시오! 베리야의 뒷배가 모스크바의 노멘클라투라들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니오!
킴 필비, 초인도 뭣도 아닌 무지렁이들… 그건 오늘 아침 여명이 세관에서 벌인 일이 틀림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여명이 숨을 죽이는 가운데,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그자가 놓고 간 상자 때문에, 온 언론에 비상이 걸렸소! 대선 후보에게 돈을 뿌려? 감히 그깟 연극으로 우리 대선에 개입하려 하다니!
-다시 말하지만,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다.
-니미 씨발, 좆 까는 소리는 화장실에서만 해! 이 사건으로 그분께서 얼마나 곤욕을 치를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
-그분뿐만이 아니지, 당장 내일이라도 10강이 올 건수란 말이다! 이걸 어떻게 할 거냐!
-10강? 메이커와 알파 원은 대선 후보를 지키고 있…
-이 나라에는 10강이 셋이다. 이 머저리야!
-브라우닝은 모스크바의 해적들이 날뛰는 아덴만에 있다. 오귀스트가 프랑스에 복귀해 아덴만으로 향하지 않는 한, 그는 오지 못한다.
침착하게 설명하는 목소리… 어딘가 익숙했다. 어디서 들었더라? 여명이 의아함을 삼키는 가운데, 다른 목소리가 버럭 소리쳤다.
-해군이 가만히 있다면 그렇겠지! 군공에 미친 물개 새끼들이 브라우닝의 존재를 용납할 것 같나?!
-해군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다. 모스크바의 예브게니는…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우리 물개들은 수틀리면 제독도 자살시키는 개 또라이 새끼들이란 말이다!
제독을 자살하게 만들어? 여명은 본능적으로 옛날에 봤던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클린턴 정부 시절 미 해군 내의 성 문제와 그걸 개혁하려던 제독의 자살이 엮인 다큐멘터리.
제독을 자살시키는 해군이 둘이나 있을 리 없었으니, 이건…
‘…진짜 미군이었어.’
그러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여명이 한 번 더 귀를 기울이고, 미군인 듯한 남자가 한 번 더 소리치는 순간.
-잠깐.
익숙한 목소리가 대화를 끊었다.
-불청객이 있군.
-뭐?
들켰다. 싸워야 하나? 아니, 여기서 싸우는 건 하책이었다.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여명은 곧바로 문에서 떨어진 뒤, 복도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쨍그랑! 창문을 깨고 아래로 떨어지는 여명의 시야로, 문을 열고 나온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그는, 주가시빌리처럼 붉은 눈을 가진 남자였다.
‘…독화.’
파순과 같은 옛 지배자이자, 드워프의 복수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주가시빌리.
녀셕이 왜 미군과 함께 있는 건지, 여명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