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68)
을 위한 세계는 없다-768화(768/817)
EP.768 도금의 도시, 약탈의 길. (5)
***
“당장 침입자를 확인해!”
독화의 붉은 눈동자가 깨진 유리창을 훑는 가운데, 분노한 목소리가 울렸다.
“투명화라니. 대체 어떤 새끼가…!”
소리치는 건 이마가 넓은 백인 남자였는데, 그는 퍽! 바닥에 굴러다니는 유리를 걷어차며 성을 냈다.
“제기랄! 빨갱이들은 뭐하고 다른 새끼가 미끼를 물고 지랄이야! 이 엿 같-.”
그때, 독화가 그의 말을 끊었다.
“…다른 놈이 아니다.”
“뭐?”
공산당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할 기민함, 단번에 몸을 날리는 결단력, 그리고 고성능 투명 망토까지.
투명 마법부터가 전문적인 마법사만 쓸 수 있는 판에, 이 정도 투명 망토를 가진 사람은… 독화는 자신도 모르게 픽 웃으며 말했다.
“빨갱이가 맞을 거다. 우리가 기대하던 빨갱이는 아니지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한다는 말이다. 아니, 살짝 속도를 높이는 게 좋겠군. 모스크바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을 테니.”
“….”
남자의 눈빛이 뒤통수를 찌르건 말건, 독화는 깨진 유리창 너머 도시를 바라보았다.
토막 난 신의 이름을 딴 도시, 그 위로…
“…태양이 떠오른다.”
피처럼 붉은 태양이.
***
같은 시각, 아폴로 시티 도심.
쇠미리와 일행들은 페로루가 말해준 ‘오크들의 임시 거처’를 찾아가고 있었다.
도시가 생각보다 넓은 탓에 일행들은 꽤 오랫동안 걸어야 했고,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시리의 경우에는…
“시리도 세티처럼 신명을 각성하게 되겠지? 어떤 신일까?”
“다른 건 몰라도, 언니처럼 모래 흘리는 신은 아니면 좋겠어요. 청소하기 어렵거든요.”
…같은 이야기를. 그리고 라쉬크의 경우에는…
“라쉬크는, 여명을 어떻게 생각해요?”
“외모는 둘째치고, 남편감으로는 영 별로야. 여자도 너무 많고.”
“….”
“걔랑 결혼 생활하면 피곤할 게 뻔해.”
결혼 생활까지 상상한 거 보면 충분히 남자로 보고 있는 거 아닌가? 미리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나중에 스스로 자각하는 편이 더 재밌을 테니까.
뭐, 아무튼.
한참 동안 도시를 가로지른 일행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당연히 어디 뒷골목에 있을 거라는 일행들의 예상과 달리, 오크들이 마련한 임시 거처는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있었다.
아폴로 시티가 자랑하는 아샤 최대의 복합 물류 터미널.
커다란 창고형 건물이 모여 있는 터미널은 지구의 유명 물류 센터들을 압도할 정도로 거대한 동시에, 진보적이었다.
터미널 우측에는 최신 화물철도를 오가는 열차들이 가득했고, 좌측에는 그보다 많은 트레일러 트랙터가 기계 신호를 따라 하역장과 도로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비료길이라 불리는 아샤 최대의 무역로의 종점다운 모습.
거기다 터미널 곳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직원 중 절반이 오크와 드워프라는 걸 보면, 오크들이 숨어있기에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물론, 여자 세 명과 까마귀 한 명이 숨어들기엔 적절하지 못한 곳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터미널 입구 앞에서, 내부를 둘러보던 미리가 말했다.
“담장을 넘는 방법도 있지만… 경비랑 CCTV가 문제네요.”
그녀의 말마따나, 물류창고의 경계는 삼엄했다. 군사 건물을 개조한 거라 그런가? 일정 범위마다 깔린 CCTV는 물론이고, 다른 곳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감시탑까지 서 있었다.
초인인 그녀들이 작정하고 숨어들면 못 숨어들 것도 없었지만, 걸릴 때가 문제였다. 가능하면 안전한 방법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미리가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가운데, 까마귀 형태로 담장에 앉아 있던 코르부스가 말했다.
“본인이 혼자 들어가서 오크들을 찾아오는 건 어떻겠소?”
미리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만약 수인 탐지견 같은 게 있어서 들키시면… 리스크가 너무 커요.”
코르부스가 수인들을 모조리 모아 남부로 가기 전까진 수인들 또한 이곳에서 일했을 터.
이만한 시설이라면 수인들이 물류 창고의 음식을 훔치거나 강도질할 걸 대비해 수인들을 감시하는 시설도 있을 게 분명했다. 코르부스가 그런 거에 걸리진 않겠지만,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다.
역시 리스크가 가장 적은 시리가 들어가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그때.
라쉬크가 스윽 손을 들었다.
“내가 뒷문을 아는데, 그쪽으로 갈래?”
“…예?”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암시장 관계자들이 들어가는 길이 하나 있거든.”
미리는 그걸 왜 지금 말하냐고 따지지 않았다. 여명과 손을 잡은 후, 라쉬크가 암시장과 손을 끊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라쉬크만 괜찮다면야, 안내해주세요.”
“따라와.”
그렇게 라쉬크를 따라 담장을 빙 돌아 터미널 뒤로 향하길 잠시.
라쉬크는 직원용 출입구로 보이는 작은 입구 앞에 멈췄다. 입구 경비실에는 피곤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일행을 보자마자 귀찮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입니다. 돌아가세요.”
그러자 라쉬크가 크흠, 헛기침한 뒤 말했다..
“시카고 피자는 피자가 아니다.”
뜬금없는 말에 일행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오르는 가운데, 중년 여성이 미간을 구겼다.
“뭐요?”
“시카고 피자는 피자가 아니라고.”
무슨 암호인가? 미리가 라쉬크와 중년 여성을 번갈아보는 사이, 중년 여성이 푹 한숨 쉬며 손을 움직였다. 경비실 난간에 가려져서 보이진 않았지만, 미리는 그게 호출기를 누르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무튼,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라쉬크가 살짝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암시장 암구호가 바뀐 건가?”
중년 여성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라쉬크의 위아래를 훑었다.
“시카고 피자 구호는 한 달 전에 이미 폐기됐다.”
“…원래 분기마다 바뀌지 않나?”
“그거야 암시장 주인 마음이지.”
“….”
라쉬크는 당황한 듯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미안, 일이 꼬였네.”
미리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라고 따지려는 순간, 탓! 누군가 경비실 위에 착지했다.
사시미처럼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꽁지 머리의 동양인.
초인인 게 분명한 남자는 허리에 걸린 일본도를 만지작거리며 일행들을 내려다봤다.
“빨갱이들이 미국의 코털을 건드린 날에, 암구호를 틀린 멍청한 침입자라. 참으로 공교롭군.”
“…공교롭긴 하지.”
여기서 싸우면 나가리인데. 라쉬크는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손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저기, 내가 지금 변장하고 있어서 그렇지, 암시장 관련 인사 맞거든? 나 구더기 공주야. 암시장의 구더기 공주!”
“핑크 데스?”
“…구더기 공주라고 새끼야.”
동양인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거짓말할 대상을 잘못 골랐군. 핑크 데스는 지금 드워프 재벌 아래에서 일하는 중이다. 이런 곳에 올 리가 없지.”
“아니, 그건 맞는데, 지금 사정이 있….”
“증언은 감옥에서 듣겠다.”
스르릉- 일본도가 뽑혀 나오고, CCTV가 일행을 피해 옆으로 돌아가는 순간, 미리가 갑자기 짝! 손뼉을 쳤다.
“독고! 당신 이름 독고 맞죠?”
“…뭐?”
“KGB가 시카고 비밀 경매장을 습격하던 날, 그곳을 호위하고 있었잖아요. 맞죠?”
쇠미리가 여명의 꿈을 관음… 아니, 공유할 때 봤던 남자. 그는 여명이 시카고 경매장 창고에 몰래 숨어들었을 때 싸웠던 남자였다.
적절한 순간에 장만 어르신이 끼어든 덕분에 크게 피를 보는 일은 없었지만, 중요한 건 그가 장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어떻게?”
독고의 표정이 묘해지는 가운데, 미리는 기꺼이 장만의 이름을 팔았다.
“그 날, 장만 어르신이 경매장을 찾았으니까요.”
“….”
“저희는 장만 어르신의 명령으로 오크들을 찾으러 왔어요.”
장만의 이름을 들은 독고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는 여전히 일본도를 놓지 않은 채로 물었다.
“…모카 딕 어르신의 명령이라고? 증명할 수 있나?”
미리는 곧장 귀에 걸려있던 환상 마법을 풀었다. 길쭉한 귀를 드러낸 그녀는 빠르게 말했다.
“이거면 될까요?”
“…엘프?”
“예, 저는 세계수 혁명단 소속 엘프입니다. 저는 칠레에서 어르신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고요.”
그러자 독고는 고민하듯 눈썹을 씰룩거리다가, 무전기를 들어 어디론가 연락했다. 정확한 내용은 들을 수 없었지만, 아마 일행을 안으로 들여도 되냐고 묻는 듯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독고가 이내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허가가 떨어졌다. 들어와라. 단, 내가 직접 너희를 감시하겠다.”
“예, 그정도는 괜찮아요.”
곧 경비실을 지키고 있던 중년 여성이 놀란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쇠미리를 필두로 일행들이 터미널로 들어가는 가운데, 라쉬크가 작은 목소리로 미리에게 물었다.
“저기… 칠레에서 활동했으면, 대체 몇살이야?”
“….”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아악!”
미리는 화내지 않았다. 웃는 얼굴로 라쉬크의 발을 밟긴 했지만.
“농담도 잘하시네요. 라쉬크 언. 니.”
***
터미널 내부는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트레일러트럭의 매연, 화물 열차의 쇠 냄새, 그리고 쉴 새 없이 물자를 나르는 노동자들의 땀 냄새까지.
이곳을 오가는 화물들이 아샤의 피라고 한다면, 이곳의 노동자들은 아샤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저임금에 시달리는 심장.
미리는 착잡한 눈으로 지나가는 노동자들을 바라보았다.
암시장 인원들이 주변을 꽉 잡고 있는 건지, 노동자들은 일행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묵묵히 짐을 나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들의 눈에서는 미래에 대한 기쁨이 느껴졌다.
뭐지? 미리디스는 살짝 충동적으로 물었다.
“저기, 노동자들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나요?”
앞서가던 독고는 힐끗, 노동자들을 훑으며 대답했다.
“최근 수인들이 집단으로 도시를 떠난 덕분에, 일반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랐다.”
움찔,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까마귀가 깃털 하나를 떨어트렸다. 미리는 떨어지는 깃털을 붙잡으며 재차 물었다.
“오, 어느 정도나요?”
“시카고에서 구걸하는 거지보단 적고, 아샤의 노동자 평균보다는 많이 받게 됐지.”
“….”
거지보다 적다는 말에 미리가 침묵하자, 독고가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질문했는지 모르겠지만, 총파업이나 시위처럼 공산당 같은 소리를 할 거면 입 다물어라. 어르신의 손님만 아니었어도 모가지를 잘라버렸을 테니.”
공산주의자들에게 적대감이 있는 걸까? 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가 실려 있었다. 미리는 의아해서 되물었다.
“공산당이 뭔가 잘못이라도 했나요?”
“잘못? 하. 빨갱이들이 가장 잘하는 걸 했지. 당장 오늘만 해도….”
독고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목적지에서 먼저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까닭이었다.
“독고, 잘못 기른 개새끼처럼 손님한테 으르렁거리는 짓은 그만둬라.”
욕설에 가까운, 아니, 진짜 욕설이었지만, 독고는 반박하기는커녕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를 따라오던 일행들 또한 입을 다물었다.
어쩔 수 없었다. 물류 창고 내부 건물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수인화 한 코르부스와 비교될 만큼 우락부락한 몸, 그리고 그런 몸에 딱 맞는 고급 맞춤 양복을 입은 미국인.
“올턴 주지사…?”
“날 알고 있다면 자기 소개는 필요 없겠군. 빨갱이 아가씨.”
미리는 주변에 함정이 있는지 확인하며 물었다.
“잠깐, 당신이 왜 여기에 있죠? 암시장은….”
“좆만 한 밀수꾼 새끼들이, 내 허락 없이, 시카고에서 암시장이나 비밀 경매장을 운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주, 주지사가 직접 밀수를…?”
“주지사쯤 돼야 할만한 일이지.”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지껄인 올턴은, 그대로 꾸깃- 시가를 구기며 덧붙였다.
“괜히 위성에 찍힐 건덕지 만들어주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여명은 여기 없어요.”
“나도 눈깔이 있어서 안다. 어차피 너희랑 같이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찾아오겠지.”
“….”
“내 시간은 귀하지만, 기꺼이 기다리마. 너희가 우리 상대 후보의 얼굴에 똥칠을 해준 덕분에, 비서가 써준 연설을 읽을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미리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주지사가 등을 돌려 창고로 들어갔다. 잠시 그의 등을 노려보던 미리의 어깨에 코르부스가 내려앉았다.
“문제가 생기면 본인이 수습하겠소. 일단 따라가 보시오.”
말하는 까마귀를 본 독고가 놀라건 말건, 미리는 주지사를 따라 건물에 들어갔다.
그리고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주지사의 말처럼 여명이 그들을 찾아왔다.
멀쩡한 건물 천장을 완전히 박살 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