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7)
을 위한 세계는 없다-77화(77/817)
〈 77화 〉 전학생을 위한 우연 (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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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하우의 금요일 1교시 수업은 언제나 같은 곳에서 열린다.
고대 그리스의 극장을 닮은 거대한 원형 교실.
마법사고 초인이고 상관없이 같은 학년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한자리에 모여야 한다는 창립자의 의지가 담긴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학생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모습은, 로드 하우의 특이한 전통 중 하나였다.
물론 겉모습만 특이할 뿐, 수업 자체는 특별할 게 없었다.
생활과 윤리, 초인과 사회 같은 공통 과목 수업을 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래서 몇몇 학생들이나 교직원들은 이런 비효율적인 전통은 없애는 게 낫다고 말하는 모양이었지만…
그 광경을 마주한 여명의 감상은 달랐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평범한 학교는 고사하고, 또래들과 한자리에 모인 경험조차 거의 없는 여명이었다.
그런 그가 학생들 사이에 앉아 교단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뭐랄까…
기분이 묘했다.
공항이나 기숙사에서 학생들의 관심을 받던 때와는 또 다른 기분.
작업반장님께서 검정고시가 아니라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라고 하셨던 이유가… 이런 기분 때문이었을까?
이제는 알 수 없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의도로 말씀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여명의 상념이 길어질 즈음, 교실의 앞문이 열리며 깔끔한 정장 차림의 여성이 들어왔다.
그녀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교실을 울릴 때마다,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작아졌다.
여명 또한 다른 학생들처럼 선생님께 시선을 집중하던 그때.
“도덕 과목 담당인 제미니 선생님이야.”
옆자리에서 대뜸 그녀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리니 우울한 표정의 소년이 책상에 턱을 괴고 있었다.
바오닉 레락.
여명의 기숙사 룸메이트이자, 유명 가문 출신답지 않게 방을 돼지우리처럼 쓰던 녀석.
“MIT 마법학부 출신이시고, 깐깐하지만 좋은 분이야. 또 보이는 것처럼 아카데미에서 알아주는 미인이시기도 하고.”
“….”
“웃긴 점이 하나 있는데, 저 선생님 약혼자 이름이 글쎄 후치…”
그는 묻지도 않은 정보를 술술 내뱉으면서, 힐끔힐끔 여명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여명의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펴보려는 것처럼.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여명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눈을 마주치자, 녀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궁금해할까 봐 알려준 건데… 불편하게 했나?”
“아니. 알려줘서 고맙다.”
어색한 침묵. 바오닉이 뭔가를 고민하는 표정을 짓건 말건, 여명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성녀의 이마를 밀어내고 있는 세티와 어떻게든 몸을 비벼보려는 성녀, 그리고… 마법으로 귀를 숨긴 엘프.
성검을 따라 아카데미에 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하필 세티와 룸메이트일 줄이야.
무슨 생각으로 로드 하우에 입학한 건지 모르겠지만… 부디 계획과 엮이는 일이 없기를.
여명의 짧은 상념이 지나가는 와중에 세티가 그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언제봐도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
여전히 성녀를 밀어내면서, 그녀는 조용히 입술 모양으로 속삭였다.
점심, 본관, 뒤편.
여명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로 잠시 은근한 눈빛이 오고 갔다.
다시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만주에서 틈틈이 문자를 주고받긴 했지만…여명의 처참한 문자 실력 덕분에 중요한 내용 말고는 제대로 된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했으니까.
‘…황금 옥새에 대해서도 말해야겠지.’
여명은 금제를 풀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가 보여줄 반응을 기대하며 교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 1학년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어느새 교과서를 펼친 제미니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했다.
***
현대 초인과 사회 윤리.
제미니 선생님의 수업은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수업내용부터 수업방식까지 뭐 하나 익숙한 게 없었지만, 오히려 그 덕에 새로운 걸 배운다는 실감이 났다.
UN에 가입한 대다수의 현대 국가들은 상해와 폭행죄에 있어 초인에게 더욱 엄격한 기준을…
마이애미 테러 이후 제정된 국제 협약에 따라, 예외적인 상황에서의 무술 사용은…
다큐멘터리 너머로만 보던 진짜 아카데미의 교육.
여명이 자기도 모르게 수업에 집중하고 있던 어느 순간, 고개를 돌리던 제미니 선생님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여명의 얼굴을 알아본 듯 작게 눈썹을 씰룩이다가, 그의 책상에 아무것도 없는 걸 보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 혹시 옆자리에 교과서가 없는 학생이 있다면, 교과서를 함께 보도록 합시다.
이 넓은 교실에 교과서가 없는 학생은 바로 어제 온 성녀와 여명뿐이었다. 두 사람을 콕 찝어 말하지 않은 건 그녀의 배려심이겠지.
바오닉의 말마따나, 좋으신 분인 듯싶었다.
아무튼, 여명은 옆자리에 있는 세티와 교과서를 함께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세티는 이미 성녀와 함께 교과서를 나눠보고 있었다.
성녀가 세티를 일방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에 가까웠지만…
누가 봐도 여명과 교과서를 함께 볼 상태는 아니었기에, 여명은 옆자리의 바오닉에게 교과서를 함께 보자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성녀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소녀가 슬쩍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저랑 같이 볼까요?”
미리디스. 인천에서 만났던 요정 공주.
그녀는 여명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성녀와 세티를 지나 여명의 옆에 앉았다.
이대로 호의를 거절하기도 뭐 했고, 무엇보다 할 말이 있어 보였기에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겨우 교과서 가지고 뭘요.”
공주는 기다란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교과서를 내밀었다.
여명이 교과서를 살피는 사이, 엘프 공주가 펜을 들어 교과서 끝자락에 글을 썼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귀여운 글씨로 적은 인사. 그녀는 작게 미소지으며 펜을 내밀었다.
[잘 지냈지. 그쪽은?]여명은 펜을 받아 답변을 쓴 뒤, 다시 펜을 돌려줬다.
[그럭저럭? 근데 그거 아세요? 리메는 교직원으로 취직했어요. 중앙 섬에서 정원사를 하고 있죠.]리메? 아, 그녀를 호위하던 그 은발의 엘프를 말하는 건가?
딱히 알고 싶은 일은 아니었기에, 여명은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지구에 잘 적응하고 있다니 다행이네.] [잘 적응한 걸까요? 모르겠어요.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도 세티뿐이고…]공주는 잠시 펜을 두들기다가, 슬쩍 여명의 얼굴을 확인한 뒤 글자를 써 내려갔다.
[이름, 쇠똥구리. 가짜? 진짜?] [진짜.] [그럼 지금 이름. 가짜?]여명은 잠시의 고민도 없이 답글을 썼다.
[천여명, 쇠똥구리. 둘 다 진짜.]뭐? 펜을 받으려는 여명의 손이 멈칫 굳었다.
설마… 쇠똥구리의 쇠가 성씨인 줄 알고 그런 가명을 지은 건 아니겠지? 그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무시하며 답했다.
[이름이 그게 뭐야?] [이상한 이름인가요?] [지구인 기준으로? 당연히 이상하지.] [쇠똥구리보다?]여명은 답글을 쓰지 않고 애꿎은 펜을 손가락 위로 굴렸다.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탓이었다.
물론 그가 생각하기에 쇠똥구리가 쇠미리보다는 나았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명은 다시 펜을 들었다.
[단순히 안부를 물을 생각은 아닐 테고, 내게 요구할 게 있나?]그의 답글을 읽은 미리디스… 아니, 쇠미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용병이 아니시지만, 한 가지 의뢰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내가 거절한다면?] [거절할 수 없는 보상을 드리죠.]보상? 여명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쇠미리가 자신만만하게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는 순간.
교실의 공기가 변했다.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불길한 변화.
교실에 있는 모두가 그 변화를 느끼고 거의 동시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그때.
웨에에에에엥!!
섬 전체에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
작가, 바오닉 레락은 비상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씹었다.
다른 학생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지금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스토리가 진행된다고? 갑자기 왜?’
프롤로그도 진행되지 않고, 만주도 이미 해결되지 않았나.
‘근데 대체 왜 1장은 그대로 진행되는 건데?’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지금 울리는 이 경보음은 분명 아카데미에 숨어든 시크릿 소사이어티의 첩자들과 ‘교단’의 사제가 벌이는 테러의 전조가 틀림없었다.
프롤로그의 비극을 겪은 아카데미는 테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우적댈 테고.
그 사이 학생들이 학살당하는 미래를 예지한 성녀가 주인공과 함께 테러를 막아내는 게 1장의 피날레인데…
‘혹시, 성녀가 아카데미에 있어서?’
바오닉는 고개를 돌려 성녀를 바라봤다.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헤실헤실 웃으며 홍세티의 품에 안긴 푼수 같은 모습.
그가 알던 성녀와는 전혀 다른 꼬락서니였으나, 그래도 성녀는 성녀였다.
이렇게 1장이 시작된 이상… 그녀는 분명 스토리대로 움직이리라.
‘스토리대로라면…성녀가 예지를 끝내고 처음 찾는 사람이 주인공이야.’
바오닉은 꿀꺽 침을 삼킨 뒤, 성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여러분! 실제 상황입니다! 모두 침착하게 대피소로 이동하세요!
제미니 선생님이 학생들을 대피시키고, 교실에 있던 모두가 긴급 대피소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계속.
하지만 성녀는 예지는커녕, 세티의 손을 잡고 쓸모없는 이야기를 재잘거릴 뿐이었다.
교복은 어떤 조합이 이쁘더라, SNS에서 본 화장품이 어쩌고, 북쪽 섬의 맛집이 저쩌고…
그렇게 헛소리로 시간을 허비하길 한참.
학생들이 들어찬 대피소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바오닉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주인공이 없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