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70)
을 위한 세계는 없다-770화(770/817)
EP.770 도금의 도시, 약탈의 길. (7)
***
주지사와의 믿음직한(?) 거래가 끝난 직후, 여명은 일행과 오크들을 데리고 건물을 나섰다.
터미널 전체가 주지사의 눈치를 보는 건지, 조금 전 그가 부순 건물 주변에는 사람은커녕 접근 금지 웨빙띠가 둘러져 있었다.
무슨 조폭도 아니고… 정치인이 이런 식으로 물류를 틀어쥐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멀리서 건물을 부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좋아졌다.
보험금 때문에 건물을 때려 부수는 주지사에게 상식을 바라는 것만큼 한심한 짓도 없을 테니까.
아무튼, 여명이 터미널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뒤따라오던 키란 씨족의 오크들이 제안했다.
“따로 알아둔 곳이 없으시면, 도시 바깥에 있는 저희 아지트로 모시겠습니다.”
여명은 반사적으로 마경에서 봤던 천막과 낙타를 떠올렸지만, 정작 오크들이 끌고 온 건 거대한 트레일러가 달린 최신식 6기통 트랙터 트럭이었다.
아니, 낙타는 어디 가고 이런 걸…
일행이 살짝 놀란 눈으로 트럭을 올려다보자, 가두두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습니까? 세 왕국, 일곱 도시에서 사람을 구조한 트럭입니다.”
“….”
“은인께서 주신 돈으로 구매한 겁니다.”
가두두와 오크들은 뭔가를 기대하는 눈으로 여명을 바라보았다. 여명은 웃으며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멋지네요. 여러분을 믿은 제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기쁩니다.”
정답이었던 걸까? 오크들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여명이 오크들을 살려줄 때 예상한 것과 조금 다르긴 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자, 트레일러에 타시죠. 아지트로 모시겠습니다.”
그런 여명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두두와 오크들은 트럭 뒤에 달린 트레일러의 문을 열고 일행을 안내했다.
물류용 트레일러 내부에는 물건 대신 사람을 위한 담요와 접이식 천막, 그리고 각종 구호 물품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TV에서나 보던 UN 구호 트럭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제대로된 구호 트럭이구려.”
트레일러 안을 본 코르부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미리를 비롯한 일행은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트럭에 올라탔다.
그리고 쿵! 두꺼운 트레일러 문이 굳게 닫힌 직후, 트럭이 출발했다.
덜컹거리는 트럭 소리를 따라 오크 부족의 꼬맹이가 ‘말하는 새다!’ 라고 떠들며 코르부스를 콕콕 찌르길 잠시.
난감해하는 코르부스를 구경하던 여명은 문득 옆자리에 앉은 가두두를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발라구는 요즘 어떻습니까? 드레이테리얼의 궁정백이 됐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발라구, 그건 드레이테리얼에서 여명을 도운 고자 오크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건지, 가두두는 곧장 말을 쏟아냈다.
“예, 녀석이 궁정백이 됐습니다. 그것도 드레이테리얼의 유일한 궁정백이지요.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드레이테리얼의 범죄조직들을 깡그리 해체하고 일자리를 늘리고 있습니다.”
“…발라구, 그 친구가 일을 좀 잘하긴 했죠.”
“예, 그래서 지금은 도시 전체에 활기가 가득합니다. 이 속도면, 미완성이던 도시가 오 년 내로 완공될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 미완성 콘크리트 덩어리가 오 년 내로? 여명은 적어도 십 년은 걸릴 거라고 지적하는 대신, 조금 더 현실적인 질문을 꺼냈다.
“도시를 운영하는 돈은 어디서 충당하고 있습니까? 혹, 돈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투자를….”
그러자 가두두는 황망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또 은혜를 베풀려 하시다뇨. 은인께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은혜라면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주셨습니다.”
“하지만 도시 운영에 돈이 많이 들 텐데요.”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전임 궁정백의 추천으로 발라구가 새 궁정백으로 책봉 받을 때, 제국 황가에서 많은 돈을 투자했습니다.”
“…제국 황가?”
그렇게 여유 있는 양반들이 아닐 텐데? 여명의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의심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제국이 나섰다니, 참 다행이군요. 하지만 혹, 다른 조건이 있진 않았습니까? 뭐, 드레이테리얼의 철도 독점 사용 권한이라든가….”
“아뇨, 그런 건 없었습니다. 조건이라고 해봐야 그, 뭐시냐… 드레이테리얼 지하에 있는 옛 소련의 시설을 봉쇄하고, 황가에서 직접 관리한다는 게 전부였습니다.”
“….”
“발라구 말로는 이 황자가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와서 직접 보고 갔다고 합니다. 참, 소련이 망한 지가 언젠데, 황가는 아직도 소련이 무서운가 봅니다.”
가두두의 해석은 그럴싸했다. 어디까지나, 드레이테리얼 지하에 소련의 무기가 가득 쌓여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이 황자….’
핵미사일이 있다는 걸 알고 간 걸까, 아니면 단순히 소련의 벙커를 보기 위해 간 걸까?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고.
어차피 드레이테리얼 지하의 핵미사일은 여명 본인이, 지하 벙커의 물자는 비코프가 깔끔하게 챙겨서 도망간 지 오래였으니까.
뭐, 이 황자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당장 코앞에 있는 공산당과 비교하면 황도의 이 황자는 먼 이야기에 불과했다.
지금은 공산당과 CIA의 바보짓이 먼저다. 여명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순간.
트럭이 멈추며 트레일러가 흔들렸다.
덜컹!
***
덜컹!
갑작스러운 떨림을 따라, 글을 쓰던 펜촉이 미끄러졌다. 글자가 휘어지는 건 필연이었다.
펜을 잡고 있던 남자, 리보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휘어진 펜 끝을 노려보던 그는 공산당 비밀 기지 바깥, 비료가 가득 쌓인 창고를 힐끗 바라보았다.
“붉은 별… 녀석과 공명하는 건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건 피처럼 비릿한 침묵뿐.
리보프는 침묵 속에서 휘어진 펜촉을 세우고, 다시 글을 쓰… 지 못했다.
그의 뒤통수 방향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리보프.
리보프는 놀라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목소리가 들릴 줄 알았던 사람처럼, 그는 자연스레 펜을 움직이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이런 시간에.”
-작전이 꼬였다고 들었다.
“….”
-죽으라고 보낸 놈들이 살아서, 그것도 성공까지 해서 돌아왔다고.
“마침, 그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중이었다.”
리보프의 펜이 움직이며 사각, 사각- 종이를 긁었고, 예의 목소리는 그의 신경을 긁었다.
-지도는 진품이었나, 아니면 미끼였나?
“진품이었다. 꼼꼼하게도 기록했더군. 우리 쪽에서 유출한 자료와 똑같았다.”
-그렇게 아닌 척하더니. 우리 아메리카 친구들도 엘릭서에 진심이었군.
리보프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하지만 예의 목소리는 그 침묵을 다른 뜻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붉은 별은 어땠지? 비코프처럼 과격하게 미친놈인가? 아니면, 데메론드처럼 침착하게 미친놈?
우뚝. 펜이 멈췄다. 리보프는 종이에 잉크가 고이는 걸 바라보다가, 다시 펜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둘 다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평범했다.”
-평범?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주가시빌리에게 평범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다. 특히, 자연 발생 주가시빌리에게는.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리보프는 계속 글을 적으며 대답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너도 녀석과 대화를 나눠보면 알 수 있을 거다. 붉은 별은 피가 아닌 땀으로 공산주의를 배운 자라는걸.”
-….
“우리와는 세대가 달라. 냉전을 모르는 세대가 틀림없다.”
-냉전을 모르는 세대가… 벌써 무대 위에 올랐다고?“
리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이번에는 제대로 뜻을 해석한 목소리는 착잡한, 동시에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옛 시대를 위한 제물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자가 없군.
“…슬프게도 말이지.”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멋대로 붉은 별의 운명을 정한 두 목소리는, 곧장 다음 대화로 넘어갔다.
-붉은 별의 장난질로 미국 놈들의 행동이 빨라졌다. 이쪽도 속도를 높이도록.
“어느 정도나?”
-일주일. 아덴만의 해적들이 쓸려나가는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 그 이상 시간을 끌면 브라우닝이 올 거다.
“일주일… 빠듯하군. 하지만 해보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로, 옅은 피 냄새가 풍겼다.
혁명의 냄새였다.
***
킁.
트레일러에서 내리자마자, 짧게 코를 턴 여명은 오크들의 아지트를 마주했다.
도시로 향하는 비포장도로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아지트는 천막이었다. 그것도 마경에서 봤던 전통 천막.
문제는, 그 천막들이 펼쳐진 위치였다.
“트럭 주변에 천막을 펼치는 건 대체 누가 생각한 거야?”
라쉬크의 말마따나, 거의 열 대에 가까운 트럭을 기둥 삼아 대형 천막이 펼쳐져 있었다. 무슨 서커스 공연장이 생각날 정도로 커다란 크기였는데, 천막 앞에 선 가두두가 가슴을 펴며 대답했다.
“나다.”
“….”
“일족의 전통을 지키면서 트럭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지. 참 좋은 아이디어 아닌가?”
왜 여명한테는 존댓말하고 나한테는 반말하냐. 라쉬크가 그렇게 투덜거리건 말건, 가두두는 천막으로 여명을 안내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천막의 휘장을 젖힌 건 여명이 아니라 오크들을 따라다니던 꼬맹이였다.
종종걸음으로 여명을 재친 녀석은, 자신의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까마귀를 붙잡은 채 소리쳤다.
“애드라!! 이거 봐라! 말하는 새다!!”
딱! 코르부스의 부리 소리와 미리의 작은 웃음소리를 따라 여명은 휘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놀랐다. 천막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꼬맹이 때문에.
“가두두 왔다!”
“먹을 거 사왔어요?”
“사탕! 사탕!”
오크를 보자마자 우르르 몰려드는 꼬맹이들은 예외 없이 전부 인간이었다.
서른 하나.. 빠르게 아이들을 숫자를 확인한 쇠미리는, 어느새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가두두를 보며 물었다.
“…아이만 따로 모아 놓은 이유가 뭐죠?”
“아니, 딱히 아이만 모은 건 아니다. 보통 아이들은 구출한 어른들과 함께 드레이테리얼로 보내는데… 이 도시에는 하필 어린아이만 있어서, 어디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모아놨다.”
“….”
여기 있는 모두가 인신매매로 팔려 온 아이들이란 뜻이었다. CIA, 이 미친 새끼들. 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납치한 거지?
자신의 처지도 모른 채 순박한 미소를 짓는 아이들을 보며, 여명은 아주 짧게 혐오를 삼켰다.
결국 현대의 강대국이란 한국과 별반 다를 거 없단 말인가? 아니면 엘릭서가 그만큼 가치 있다는 건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코르부스가 ‘제자여, 좀 도와주시오!’ 라고 도움을 청한 까닭이었다.
여명은 곧장 인벤토리에서 간식을 잔뜩 꺼냈다.
콜라, 팝콘, 쿠키, 초콜릿, 사탕… 각양각색의 간식들은 전부 말 안 듣는 하수도의 용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수십 명의 꼬맹이를 배 터지게 먹이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우와, 이 아저씨 손에서 과자가 나온다!”
“사탕! 사탕!”
“콜라… 펩시 없어요?
여명은 밀려드는 아이들에게 차례대로 간식을 나눠주며 말했다.
“펩시는 콜라가 아니라 그냥 설탕물이란다. 자, 여기 사탕. 그리고 나 아저씨 아니다.”
“에이, 그래도 그 얼굴로 형은 아니죠.”
“…넌 초콜릿 없다.”
“형!”
그렇게 여명이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주는 틈을 타, 코르부스가 아이들 사이에서 탈출했다. 의외로 아이들한테 약하시네.
그사이, 시리가 여명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형부, 나머지는 제가 나눠줄게요. 가서 일 보세요.”
“괜찮겠어?”
“예, 저 아이들 돌보는 거 잘해요.”
그 말처럼, 과자 더미를 차지한 그녀는 순식간에 아이들을 줄 세우기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나눠주던 여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모습.
그걸 본 미리도 팔을 걷어붙였으나, 시리는 언니는 계획을 짜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며 미리를 여명에게 보냈다.
“나도 계획 짜러 가면 안 될까?”
눈치 빠른 라쉬크가 그렇게 말했지만, 여명은 그녀가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라쉬크에게 투명 망토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누님. 저희가 처음 묵었던 여관에서 딜라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가서 최대한 은밀하게 데리고 와주실래요?”
“그러고 보니, 샌드위치 중독자, 버리고 왔구나…??”
하청도 사람이야, 사람! 그렇게 쏘아준 라쉬크가 망토를 챙겨 천막 바깥으로 나간 직후.
상황이 정리된 걸 확인한 여명은 가두두를 비롯한 오크들을 데리고 천막 구석에 자리에 가서 앉았다.
가두두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상석을 권했지만, 이미 충분히 부담스러웠던 여명은 평등하게 둘러 앉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제는 간단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주지사가 제게 요구한 조건은 아이들을 찾아 구출하고, 그 사이 공산당을 감시하는 겁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 도와드리겠습니다. 은인이시여, 부디 저희를 수족처럼 사용해주소서.”
조금 과하긴 했지만, 오크들은 주지사보다 훨씬 믿음직했다. 여명은 간식을 나눠주는 시리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러면 우선, 공산당을 감시하는 것부터 논의해 보죠.”
가두두는 다른 오크들과 여명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저희 부족의 페로루가 감시 중입니다. 이미 만나신 걸로 압니다.”
“예, 만났습니다. 한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공산당에 첩자를 보내신 겁니까?”
가두두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알고 보낸 건 아닙니다.”
“그러면?”
“페로루는 원래 공산주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희가 인신매매 피해자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에 인원을 보내자마자 자발적으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공산당에 가입했더군요. 덕분에, 이렇게 당을 감시할 수 있게 되었지요.”
“….”
원래부터 빨갱이였구나. 여명은 그가 이중 첩자일 가능성을 떠올려봤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이미 공산당 편에 붙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같은 빨갱이인 미리 또한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슬쩍 손가락으로 그의 허벅지에 이렇게 썼다.
‘보류.’
여명이 첩보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의심 가는 사람을 쓰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미리의 의견을 받아들인 뒤, 대안으로 코르부스를 바라보았다.
“스승님, 까마귀 모습으로 공산당 비밀기지를 감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보는 것과 듣는 것, 어느 쪽을 원하시오?”
“가능하면 둘 다 해주셨으면 합니다.”
“노력해 보겠소.”
“감사합니다. 교대는 저와 라쉬크가하겠습니다.”
라쉬크가 들었으면 야 이 시발- 이라고 소리쳤을 말.
그 외에 정보 길드들을 이용하는 방법도 논의됐으나, 이 도시에 있는 건 CIA였다. 시크릿 소사이어티나 푸른 쥐처럼 큰 정보 길드가 아니고서야, 정보 길드는 별 의미가 없을 게 분명했다.
결국 공산당 감시는 자신과 코르부스가 직접 하기로 한 여명은 바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아이들에 관한 부분인데… 가두두, 특히 어떻게 아이들을 구한 건지 말해주겠어?”
대체 어떤 방식을 쓰길래, 도시로 팔려 오는 수십 명의 아이를 구할 수 있었을까?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도시 입구에서 터미널까지, 들어오는 트럭 중 의심 가는 것들을 전부 확인했습니다.”
“…뭐?”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트럭이 오가는데, 그걸 고작 열 명 넘는 인원으로 확인했다고? 잘난 미국의 세관도 그건 불가능했다.
여명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가두두가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오크에게 무어라 손짓했다.
그러자 오크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천막을 지지하고 있던 트럭으로 달려가 뭔가를 가져왔다.
그건 육각형 금속 케이스 안에, 고풍스러운 나무줄기 모양의 시침이 달린 물건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여명은 그게 아샤의 나침반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것도 뒷면에 마법진이 그려진 나침반.
“엘프 숲의 노예 상인들에게서 빼앗은 겁니다. 수집가들에게 되팔아서 노예를 모을 생각으로 주워놓은 겁니다만… 뜻밖의 마법이 걸려 있어서 저희가 쓰게 되었습니다.”
엘프 숲의 노예 상인이란 단어에 미리의 눈이 싸늘해졌지만, 미리가 엘프인 걸 모르는 가두두는 나침반을 아이들이 있는 방향으로 들었다.
그러자, 핑그르르- 나침반의 시침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무작위로 돌아가는 시침이 가리킨 건 아이들이었다.
사탕을 씹어 먹는 아이, 손에 묻은 초콜릿을 빨아 먹는 꼬맹이, 콜라를 홀짝이는 아이 등등 구출된 아이들.
여명이 설마 싶은 눈으로 바라보자, 가두두가 그 설마가 사실임을 확인해 줬다.
“이 나침반에는 제값을 치르지 않은 노예들을 추적하는 마법이 걸려있습니다.”
“….”
“도시 터미널 입구에서 이걸 들고 있으면, 노예를 태운 차량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시침이 흔들릴 때마다 번호판을 기록해 뒀다가, 몰래 터미널로 들어가 트럭 속에서 아이들을 구해왔습니다.”
주지사가 어쩌다가 오크들을 만났나 했더니, 터미널을 털다 잡힌 거였나? 우연치고는 황당한 맛이 잇었다.
여명은 가두두가 내민 나침반을 받아서 들며 물었다.
“CIA도 그렇게 찾았나?”
상업 지구에 있는 CIA 본부를 언급하자, 가두두가 침통하게 고개를 떨궜다.
“예, 하지만 그 건물에 들어가면 저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쉬워할 거 없어. 괜히 들어가서 죽는 것보단 나았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여명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전에 이게 있었다면 CIA의 기지에서 아이들을 구출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한 번 실패한 이상, 기지의 방비가 한층 더 삼엄해졌을 게 분명했다. 적어도 아이들을 무사히 데리고 나오지 못할 정도는 되리라.
무엇보다, 공산당과 독화가 뭘 노리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CIA와 충돌하는 건 하책이었다. 그의 목적은 아이들을 구하는 거였지, 공산 혁명이 아니었으므로.
뭘 해야 할까.
고민에 빠진 여명이 잠시 나침반을 만지작거리고, 간식을 먹어 치운 아이들이 코르부스의 모습을 힐끗거릴 때쯤.
미리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아무래도 전통적인 방법을 쓰는 게 좋겠어요.”
“전통적인 방법?”
“게릴라를 통한 보급 차단이요.”
“…그게 왜 전통이야?”
“원래 거점에 숨어있는 적들을 끌어내는데 보급을 끊는 게 가장 좋… 엘프 전통이란 뜻으로 한 말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대체 엘프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
사위한테 샷건 쏘는 테러리스트?
여명이 그런 말을 삼키는 사이, 미리가 오크들에게 지도를 부탁했다. 곧 가두두가 직접 아폴로 시티 주변 도로가 그려진 지도를 가져와 펼쳤다.
미리는 도시를 둘러싼 도로들을 짚으며 말했다.
“노예를 태운 트럭들의 대부분은 도시 동남부, 비료길로 들어올 거예요. 그렇죠?”
오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거기다 북방에서는 비코프의 공산당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니, 다른 건 몰라도 노예를 태운 트럭은 오지는 않겠죠. 기껏해야 난민일 텐데, 그 난민들도 더 북쪽에 있는 성도로 가면 갔지, 아폴로 시티까진 오지 않을 거고요.”
그렇게 말한 미리는 주머니에서 형광펜을 꺼내 기다란 비료길에 죽죽 선을 그었다. 그녀는 도시와 가장 가까운 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시의 실질적인 주인은 미국이지만, 일단 표면상으로는 제국의 땅이에요. 제가 알기로, 아폴로 시티에서 미국이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는 도시 외곽에서 12km까지예요.”
“그래서?”
“20km 바깥에서 트럭을 털면, 미국은 구경만 해야 해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요.”
“….”
미리는 다음 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도시에서 정확히 28km 떨어진 곳에 휴게소가 하나 있으니까… 여기 주변에 천막을 치고 나침반으로 트럭을 체크하죠.”
“그러니까, 노예 공급부터 끊자?”
“예, 적어도 아이들이 더 이상 도시에 들어가는 건 막아야죠.”
좋은 생각이었지만, 가두두가 반론을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길을 막고 트럭을 터는 건… 미친 짓이다. 미군이 직접 움직이지는 못해도, 분명 용병을 보낼 거다. 제국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
“까짓것, 보내라고 하세요.”
“뭐?”
미리는 여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정규군이나 10강도 아닌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무리 몰려와도 상관 없어요. 여명 혼자서 전부 틀어막을 수 있으니까.”
여명은 부정하지 않았다. 가두두는 그래도 은인의 얼굴이 알려지는 건 위험하지 않으냐고 따졌지만, 여명이 피눈물의 환상으로 얼굴을 바꾸자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보다 더 좋은 계획이 없다면, 바로 시작하죠.”
***
대략 한 시간 뒤, 아폴로 시티에 주둔 중인 미군은 ‘복면을 쓴 초인들이 비료길의 트럭들을 털고 있다’ 황당한 연락을 받았다.
당연하게도, 미군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초인들이 우르르 트럭을 턴다는 말도 어이가 없는데, 강도에게 털린 트럭들도 무슨 물건이 털렸는지 말을 못 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도단의 이름이 문제였다.
파순과 범죄자들이라니? 어떤 미친 놈들이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단 말인가?
가뜩이나 킴 필비 때문에 어수선했던 미군은 의도적으로 연락을 무시했다.
그렇게 최초 연락 이후 23시간.
총 여덟 대의 트럭이 털리고, 아폴로 시티 주둔군 상부에서 누군가 쪼인트를 까이고 나서야, 미군은 그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