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72)
을 위한 세계는 없다-772화(772/817)
EP.772 도금의 도시, 약탈의 길. (9)
***
여명이 비료길에서 밀수꾼 사냥을 시작한 지 3일째.
미국의 민주당 전당대회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드는 그 시점에, 한 까마귀가 아폴로 시티 곳곳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매연 섞인 공기와 낡은 건물들 사이에서 날개를 퍼덕거리던 까마귀는, 여느 날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규칙도 없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까마귀는 영역 동물처럼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는데, 만약 까마귀를 관찰한 사람이 있다면 까마귀가 도시 외곽의 비료 창고를 중심으로 날아다닌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조류학자도, 그렇다고 까마귀를 감시할 만큼 여유로운 사람도 없었다. 덕분에 까마귀는 어떠한 의심도 없이 공산당의 비료 창고를 살필 수 있었다.
하지만 딱 한 명, 그녀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코르부스, 교대 시간이에요.”
투덜거리며 상가 건물 옥상에 올라온 구더기 공주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곧 하늘을 날던 까마귀가 옥상 난간에 내려앉으며 말했다.
“늦었구려.”
“죄송합니다… 식사 준비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어요. 애들이 한 둘이어야죠.”
코르부스는 라쉬크가 요리를 할 리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깃털을 뽑아대고, 노래를 불러달라고 떼를 쓰던 꼬맹이들을 떠올린 까닭이었다.
뭐, 아무튼. 그녀는 부리를 딱! 다물며 말했다.
“괜찮소. 사람이 늦을 수도 있으니.”
감사의 뜻으로 꾸벅 고개를 숙인 라쉬크는 능숙한 자세로 카메라와 망원경을 꺼내 옥상 난간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달깍, 달깍- 공산당 아지트 감시 준비를 끝낸 라쉬크가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뭐 특별한 점 있었어요?”
“딱히 특별한 건 없었소. 지난 11시간 동안 인부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들락거린 게 전부요.”
코르부스는 비료 창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흑요석처럼 반투명한 눈동자 위로, 굳게 닫힌 비료 창고가 비췄다.
“흠, 세관 습격까지 한 것치곤 하는 일이 너무 없는데… 아마 활동을 자제하는 거 아닐까요?”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그래서 더 걱정이구려.”
“…녀석들이 쉬면 좋은 거죠. 뭐.”
코르부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공산주의자들은 마른 장작과 같소. 그들이 참고 기다리면 언제나 더 큰 불길로 이어진다오.”
“어… 그러면 여명은 뭐, 핵폭탄쯤 되나요?”
“…?”
“참으면 더 큰 불길이 된다면서요. 걔는 빨갱이면서 맨날 공산주의자 아니라고 하잖….”
딱! 코르부스는 부리를 부딪쳐 그녀의 말을 끊었다. 라쉬크는 억울하다는 듯 손목을 휘휘 저었다.
“아, 솔직히 그렇게 많은 공산주의 유산을 받아먹었는데, 빨갱이 아니라는 게 말이 돼요?”
“제자가 복수를 위해 선택하고, 받아들인 힘이잖소. 이데올로기를 따라 선택한 힘이 아니오.”
“인생은 원래 자기가 원하는 것만 먹을 수 없는 법이죠. 억지로 먹은 것도 일단 먹은 거라고요.”
그러자 코르부스가 스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호오… 우리 제자에 대해 꽤 많은 생각을 했나 보구려?”
“…이야기가 왜 그런 쪽으로 빠져요?”
“뭐, 본인은 신경 쓰지 마시오. 제자의 연애에 참견할 생각 없으니. 무분별하게 첩을 늘리던 녀석들과 제자는 됨됨이부터가 다르기도 하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까마귀는 은근슬쩍 라쉬크와 거리를 벌렸다. 당연하게도, 라쉬크는 정색했다.
“코르부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뭔지 아세요?”
“갑자기?”
“스타워즈에요. 왜 좋아하는 줄 아세요?”
“…모르겠소만.”
“주인공 아빠가, 직장 상사를 원자로에 던져버리거든요.”
“….”
“이제 제가 여명 생각을 하는 이유가 뭔지 아시겠죠?”
내가 포스만 쓸 줄 알았어도 콱 원자로에 던져버리는 건데- 그녀의 투덜거림을 들은 코르부스가 껄껄 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라쉬크는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때 막 공산당 비료 창고로 들어가는 일단의 노동자들이 보였다.
“저 새끼들, 이제 좀 움직이네요. 저기 저… 보이세요? 형광색 작업복 입은 놈. 저 놈들이 빨갱이 정예 비슷한 놈들인 거 같아요.”
“청소부들 말이오?”
“저게 청소부 복장이었어요? 뭐, 어쨌거나 공산당 내부에서 나름대로 지위가 있는 놈들인 건 확실해요. 세관을 습격한 어중이떠중이들은 빼고 지들끼리만 다니는 거 보….”
거기까지 말한 라쉬크는 문뜩, 비료 공장을 바라보는 코르부스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까마귀임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은 표정.
갑자기 무섭게 왜 그러세요- 라고 물을 새도 없이, 코르부스가 먼저 부리를 열었다.
“8시간 전에 저자들이 비료 창고로 들어가는 걸 보았소. 그리고 다시 나오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
“…잠깐 감시하지 않은 사이에 나온 거 아닐까요?”
“11시간 동안 한 번 도 저 공장에서 눈을 뗀 적 없소. 필시, 다른 출입구가 있는 것이오.”
“비밀 통로? 하지만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고작 십여 분 만에 저 커다란 비료 창고를 다 살폈다고 확신할 수 있겠소?”
“…아뇨. 비료 더미 때문에 아무것도 못 봤죠.”
코르부스는 딱! 부리를 부딪친 뒤 말했다.
“당장 카메라를 챙기시오. 제자에게 돌아가야 하니.”
***
아지트로 돌아온 라쉬크가 천막으로 들어가는 사이, 코르부스는 주변을 서성였다.
그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아니, 그녀가 일행 중 누구보다 아이들의 처지를 공감했기 때문에.
수인 최강자이자 용사의 스승이 고작 공감 때문에 아이들을 피한다는 게 우습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공감은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까닭이었다.
동족에게 부모를 잃은 고아라는 경험.
그래서 코르부스는 아이들의 애정과 관심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눈동자 속에서 보이는 두려움은 그녀의 과거와 맞닿아 있었으니까.
혼자가 된 두려움, 낯선 장소와 사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구원의 두려움.
그중 가장 큰 두려움은 구원의 두려움이었다. 한 번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람이 다시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 추락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구원 받은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또 다시 버려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으나, 코르부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수인이었고, 저 아이들은 인간이었다. 그녀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두들겨 패거나, 함께 사냥을 돌아다닐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말할 줄 아는 까마귀의 모습으로 위안을 줄 수 있을 뿐.
만약 그녀가 수인의 모습이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더욱더 큰 두려움에 빠지리라….
그렇게 상념이 이어지던 순간, 천막 입구가 열리며 여명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스승님, 안 들어오세요?”
“잠깐 깃털 정리 좀 하고 들어가겠….”
그러자 여명이 픽 웃으며 말했다.
“애들이라면 걱정 말고 들어오셔도 됩니다.”
“….”
속마음을 들킨 까닭일까, 코르부스는 별말 없이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째서 여명이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아지트에 모인 수십 명의 아이들은 모두 꿈나라에 있었다.
낮잠 시간인 걸까? 여명이 처제와 함께 여기저기 천막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베개를 고쳐주는 모습을 보면 낮잠 시간이 맞는 듯했다.
갑자기 무슨 낮잠인가 싶었지만, 아마 제자가 육아 다큐멘터리에서 본 걸 따라 하는 게 아닐까- 코르부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제자를 바라보았다.
수십 명의 아이들을 재우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도, 제자의 얼굴에는 불평은커녕 보람이 가득했다. 아이들을 구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런 일까지 할 줄이야.
어째서일까, 코르부스는 문뜩 제자의 얼굴에서 스승을 발견했다. 수인들이 돌아올 용사에게 부끄럽지 않을 종족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스승님.
둘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여명의 스승이 된 건 운명이 아니었을까- 마음속에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코르부스는 조용히 제자를 구경했다.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가 천막을 가득 채울 때까지, 계속.
그리고 모두가 잠든 직후. 여명이 다가와 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어요?”
대답은 코르부스가 아닌 라쉬크의 입에서 나왔다. 그녀는 여명의 취향에 맞춰, 최대한 요약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공산당 기지 아래 비밀 통로가 있는 것 같다.]설명을 들은 여명의 반응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비밀 통로…? 빨갱이들이 다 그렇죠, 뭐.”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마저 가벼운 건 아니었는데, 특히 오크들이 그러했다.
-페로루의 보고에서 그런 말은 없었는데… 설마, 페로루가 일족을 배신한 건가?
-감히 은인보다 공산당을 우선하다니!
-이럴 줄 알았소! 공산 마족은 전염병이오!
오크들이 서로 언성을 높여대자, 낮잠을 즐기고 있던 아이들 중 몇몇이 눈을 비비며 깨어나는 게 보였다.
간신히 아이들을 잠재운 시리가 도끼눈을 뜨는 가운데, 여명이 오크들을 진정시켰다.
“모두 진정하세요. 그동안의 보고를 들어보면 공산당 놈들은 아샤 노동자들과 오크들은 차별하고 있다고 했으니, 몰랐을 가능성도 있어요. 자세한 건 그에게 직접 듣죠.”
“…은인의 말이 옳다.. 증거 없이 가족을 의심하는 건 대체 어느 혈족의 전통이란 말이냐?”
가두두 또한 합세해서 오크들을 말리길 잠시.
천막이 다시 평온해진 뒤에야, 여명이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있는 인원으로 비료길의 아이들을 구출하면서, 공산당의 비밀 통로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오크들은 당연히 가능하다고 말했으나, 일행의 의견은 달랐다. 특히 라쉬크가 부정의 뜻을 비쳤다.
“빨갱이 비밀 통로가 어딘지도 모르는 판에, 거기에 뭐가 있는 줄 알고? 투명 망토는 만능이 아니야.”
“….”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숨겨야 할 아이가 수십 명이야. 미군이 미끼를 물 때까지 계속 늘어나겠지? 내 생각에는, 지금 인원으로는 아이들을 지키고, 숨기는 것도 빡빡해.”
타당한 의견이었다. 여명은…
“지원을 부르는 건 어떻습니까?”
…라고 말한 뒤 슬쩍, 미리와 연결된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무전기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반대에요. 저희가 하는 일이 중요한 만큼, 세티나 성녀가 한국에서 하는 뒤처리도 중요해요.
“…그래도 가능한 인원은 최대한 불러본다면?”
-네티나 막내… 아, 오르세 타불이 왕의 무덤을 정리해서 슬슬 아샤로 돌아올 시기이긴 해요. 그를 호출할까요?
“응, 특히 네티를 불러줘. 그리고 타불은… 도움보다는 드워프 발굴단하고 같이 넘어오는 쪽으로 가자.”
-예, 알겠어요. 그러면 비밀 통로는 네티가 온 뒤에?
“아니, 오늘 당장 찾아야지.”
-?
오늘부터? 무전기 너머 미리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라쉬크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하지만 아이들의 점심 식사인 샌드위치를 훔쳐 먹고 있던 딜라는 달랐다.
그녀는 몰래 우물거리고 있던 샌드위치를 꿀꺽 삼킨 뒤, 재빨리 아공간에서 네크로맨서용 도구들을 꺼냈다.
다음 순간, 여명이 인벤토리에서 데스나이트를 꺼낼 걸 미리 눈치챘으므로.
하지만 딜라조차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여명이 꺼낸 데스나이트는 두메아 가주나 바라나 단장이 아니란 점이었다.
-하, 제기랄. 이제는 오크냐?
듀크 중령. 미군 출신 데스나이트는 인벤토리에서 튀어나오자마자 불평을 내놨다.
-큰일을 끝냈으면 쉴 줄도 알아야지. 아주 흥분한 인디언처럼 싸돌아다니는구나. 빨갱이는 대체 언제 잡는 거냐?
여명은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요.”
-?
***
대충 30분 뒤, 여명에게 전당 대회와 아폴로 시티의 일을 모두 들은 듀크는 천막 밖으로 나와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CIA에, 아샤 공산당에… 넌 진짜….
“어쩌다 보니.”
-어쩌다는 무슨, 하, 담배 가진 거 있냐?
“데스나이트는 담배 맛을 못 느끼는 거 아니었습니까?”
-기분이라도 내려고 그런다. 기분이라도.
여명은 잠시 인벤토리를 뒤적거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데메론드가 준 담배를 꺼냈다. 그러니까, 스탈린의 파이프 담배를 꺼냈다.
“아.”
뒤늦게 실수를 인지한 여명이 손을 뒤로 빼자, 듀크가 정색했다.
-…이거, 내가 아는 그 파이프 맞냐? 젠장, 지금 널 쏴 죽이는 편이 더 나을 거 같단 생각이 드는데, 넌 어떠냐?
“노 코멘트하겠습니다.”
후다닥 파이프 담배를 집어넣은 여명은 평범한 궐련을 꺼내 듀크의 입에 물려줬다. 화륵! 주와이외즈의 불길이 담배에 불을 붙인 직후, 듀크가 뻑뻑 연기를 빨며 말했다.
-CIA가 아이를 납치하고, 공산당은 아이들을 노리며 암약하고… 스탈린의 담배를 가진 놈은 비료길에서 아이를 구하고 있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구나.
“예, 동의합니다.”
-하지만 평범한 개판은 아니야. 뭔가… 뭔가가 이상해.
“…어떤 점이 이상하단 말씀이십니까?”
-내 조국이 정의로운 나라는 아니지만… 아이들을 잡아다가 거름으로 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우리 조국 슬럼가만 가도 써먹을 고아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아샤 꼬맹이들을 잡아 오지?
“….”
저번에 라쉬크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미국은 개새끼지만, 유능한 개새끼였다. 스탈린의 실종과 함께 무너진 소련이나, 쇠락한 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뭔가가 있다. 근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
후우- 한 번 더 담배를 뻐끔거린 듀크는 대뜸 이런 제안을 꺼냈다.
-야, 그냥 붉은 별 변장하고 가서 빨갱이랑 CIA랑 전부 쓸어버리는 건 어떠냐?
“…저도 그러고 싶은데, 지금은 미국 대선이 한창 아닙니까. 제 손으로 냉전을 다시 시작하고 싶진 않습니다.”
-냉전… 냉전이라. 그랬지. 이 시대는 이미 냉전이 끝난 시대지.
듀크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눈으로 아폴로 시티 방향을 바라보았다. 여명은 그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짧은 침묵.
바람을 따라 흘러가는 담배 연기 사이로 옅은 침묵이 흐르다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듀크는 반쯤 피운 담배를 꽈악- 쥐며 물었다.
-빨갱이는 워낙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생물이라, 직접 봐야 설명할 수 있겠다.
“….”
빨갱이가 무슨 벌레도 아니고. 쓴웃음을 삼킨 여명은 떠날 채비를 위해 천막으로 향- 하지 못했다. 듀크가 그를 붙잡은 까닭이었다.
-아, 그리고, 비료길에서 미군을 상대로 미끼를 던진 게 며칠째라고 했지?
“오늘로 삼 일째입니다.”
-삼 일…? 흐음… 최대한 빠르게 다녀와야겠군. 내 생각에, 아마 오늘 저녁쯤에 미끼를 물 거다.
“오늘이요?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가 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내가 아는 미군이라면, 코앞에서 깐죽거리는 새끼를 삼 일 이상 내버려 두느니 콱 혓바닥 깨물고 자살할 테니까.
“….”
-뭐가 올진 모르지만, 무조건 오늘 온다. 알겠냐?
전직 미군이 하는 말이라서 그런가,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
아폴로 시티로 향하기 전에, 여명은 남은 데스나이트들을 꺼냈다.
그리고 듀크 중령 때와 마찬가지로,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을 대신해 비료길을 막아달라 부탁드렸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지만, 데스나이트 어르신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종말 교단 다음에는 미국인가? 이거 참, 진짜로 성불 안 하길 잘했구먼.
-정의로운 강도질이라니! 내가 이런 걸 원했다니까!
두메아 가주님이나 벨라디바는 그렇다 치고, 성기사인 바라나 어르신조차 열의를 보였다.
-인신매매? 신성한 태양 아래에서 감히! 나만 믿게, 용사여. 검은 신의 경전에 이르길, 아이를 사고파는 행위는 즉결 처형일세!
참으로 종교적인 이유였고, 여명은 말리지 않았다. 그저 미국이 미끼에 걸렸을 때 최대한 싸움을 피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외에는 세디달이 ‘기왕 가는 길에 우리 손녀와 같이 가라’며 역으로 부탁하시는 게 전부였다.
뭐 아무튼, 마지막으로 코르부스에게 천막과 아이들의 안전을 부탁한 여명은 곧바로 천막을 떠나 아폴로 시티로 향했다.
공산당 비밀 통로를 확인할 듀크 중령과 일을 도와줄 시리와 라쉬크까지해서 넷.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쉬크가 자진해서 따라온 건 의외였는데, 그녀는 한 마디로 여명의 궁금증을 해소했다.
“오크들이랑 같이 애들을 돌보느니, 빨갱이랑 싸우는 게 편해.”
과연 그럴까. 여명은 침묵으로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도시 바깥으로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오크의 트럭에 숨어 아폴로 시티 내부로 들어갔다.
파순과 범죄자들 덕분에 경계가 살짝 삼엄했지만, 주지사의 부하들이 의도적으로 그들을 빼줬다. 덕분에 여명은 간단히 아폴로 시티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럭이 곧바로 공산당의 비료 창고로 향하는 일은 없었다. 듀크 중령의 요구 때문이었다.
-공산당 기지에 가기 전에, 도시를 좀 둘러봐야겠다. 괜찮겠지?
“예, 괜찮습니다. 그러면 바로 내리시죠.”
여명은 운전 중인 오크에게 무전을 보내 차량을 멈췄다. 끼이익! 묵직한 소음과 함께 일행이 트레일러에서 내렸다.
트럭이 멈춘 곳은 드워프들이 운영하는 먹자골목과 빌딩촌이 만나는 중간 지역이었는데, 고소한 보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듀크가 주변을 둘러보는 가운데, 트럭을 운전한 오크는 일행이 내린 걸 확인한 뒤 ‘터미널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언제든 불러 달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부아앙-! 트럭의 엔진 소리가 멀어진 직후, 듀크 중령이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아폴로 시티라고?
“예, 뭔가 이상한 걸 찾으신 겁니까?”
-그래, 이상하네. 내가 아는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니.
그러자 라쉬크가 한마디 했다.
“그쪽이 데스나이트가 된 시절을 생각해보면, 다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긴 하죠.”
-일반적인 변화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이건… 아예 지형이 바뀌었는데?
“…?”
-내가 기억하는 아폴로 시티는 산을 낀 저지대에 지어진 군사기지였다. 물류 도시가 됐다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평지잖아.
마치 전혀 다른 도시를 본다는 듯한 듀크 중령의 시선을 따라, 여명이 말했다.
“제가 알기로, 아폴로 시티의 위치는 바뀐 적 없습니다.”
-쓰읍… 그러면 신전은? 신전은 어디 있지?
“신전이요? 다섯 신의 신전이라면 도심 중앙에….”
그때, 듀크가 그의 말을 끊었다.
-아샤 신 말고, 지구의 신전 말이다.
“제가 알기로, 아폴로 시티 세관 미군 기지에 교회가 하나 있긴 합니다.”
-…제기랄, 이것도 없어졌나 보군. 차원문은 멀쩡하냐?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예, 저희가 직접 넘어왔으니까요.”
-좋아, 그러면 일단 차원문부터 확인해 보자.
고개를 끄덕인 여명은 앞장서서 차원문으로 향했다.
시카고 차원문은 워낙 거대한 차원문이었고, 일행은 몇걸음 걷지 않아 빌딩 숲 너머의 차원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명이 코앞까지 다가가냐고 물었으나, 듀크는 고개를 저었다.
-다가가지 않아도 알겠다. 차원문은 똑같다. 그렇다는 건…
미간을 구긴 듀크는 차원문과 도심 사이에 서서 스윽 도시를 훑었다.
그리고 잠시와 한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시간이 흐른 직후, 듀크가 대뜸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중령님?”
여명이 그를 불렀지만, 듀크는 멈추긴커녕 오히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왔던 먹자골목보다 더 멀리, 뒤따라오던 라쉬크가 왜 택시 내버려 두고 뛰는 거냐고 항변할 정도로 멀리.
그리고 시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때쯤. 듀크는 인적이 드문 맨홀 뚜껑 앞에서 멈추어 섰다.
듀크 중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맨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명은 대체 왜 이러나 싶어 물었다.
“중령님?”
듀크는 여전히 맨홀 뚜껑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알려준 공간 감지. 기억하고 있겠지?
“예.”
-지금 당장 써 봐라.
당장? 여명은 불만 없이 공간 감지를 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듀크처럼 인상을 콱 찌푸렸다.
맨홀 뚜껑 아래, 마나로도 느낄 수 없는 빈공간이 느껴졌으므로.
“…뭡니까, 이거?”
-솔직하게 말하자면, 모르겠다.
“….”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예상가는 건 있으니… 일단 내려가지.
그렇게 말한 듀크는 단번에 맨홀 뚜껑을 뽑아냈다. 무저갱처럼 깊은 어둠이 그의 얼굴을 반겨주는 가운데, 데스나이트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여명 또한 맨홀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하는데, 라쉬크가 이렇게 말했다.
“젠장, 그냥 애들이나 볼걸.”
“그 말할 줄 알았어요.”
“나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될까?”
“그 말도 할 줄 알았어요. 제가 뭐라고 대답할지, 라쉬크도 아시죠?”
라쉬크가 언젠가 반드시 원자로에 처넣을 거다- 같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여명은 아래로 뛰어내렸다.
쿵! 무릎을 때리는 묵직한 소음과 함께 착지한 그는 곧장 위에서 떨어지는 라쉬크와 시리를 받았다. 살포시 여명의 품에 안긴 시리와 달리, 라쉬크는 자신이 떨어진 맨홀을 올려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이런 씨… 이게 대체 몇 미터야??”
“모르긴 몰라도 일반적인 하수도 깊이는 한참 넘었네요.”
간단하게 답변한 여명은 고개를 돌려 듀크를 바라보았다. 지하의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듀크는 정확하게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령님?”
-여기 있었군.
뭐요? 여명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시리가 화염 마법을 일으켰다. 화르륵! 어둠을 가르는 불길을 따라,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드러난 건 커다란 콘크리트 벽이었다.
그것도 철조망과 감시탑으로 둘러싸인 군사용 외벽.
“…뭡니까 이거?”
-내가 알던 아폴로 시티의 군사 기지. 정확한 명칭은 아폴로 공군 기지다.
“….”
-이 큰 걸 어떻게 치웠나 했더니, 그냥 파묻고 위에 새로 지었군. 무슨 도금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미국인들이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듀크는 군사 기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뒤따라오는 여명에게 물었다.
-지상의 공산당 아지트가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지?
“멀지 않습니다. 대략 3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가 공산당의 비밀 통로일 가능성이 높겠군.
듀크의 의심은 사실이었다. 콘크리트 외벽 앞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들이 가득했으니까.
킁킁, 여명은 발자국에서 느껴지는 비료 특유의 냄새를 확인하며 말했다.
“공산당이 여기서 무기를 챙긴 걸까요?”
-그건 아닐 거다. 미군이 병신도 아니고, 공군 기지를 파묻어버리면서 무기를 두고 갈 리가 있겠냐?
그렇게 말한 듀크 중령은 외벽 출입구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공군 기지라는 설명처럼 거대한 활주로가 있었는데, 그 활주로에는 전투기 대신 무수한 군용 차량과… 총기들이 놓여 있었다.
-이런 병신 새끼들이.
무기를 얼마나 많이 놓고 갔으면, 공산당이 다 챙기지도 못했어? 듀크가 오만상을 찌푸리는 가운데, 여명은 주와이외즈를 일으켜 기지 내부를 훑었다.
기지는 넓었다. 대체 어떻게 이걸 파묻었는지 모를 정도로.
여명은 먼지 위에 새겨진 공산당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물었다.
“이런 곳을 왜 도시 아래 파묻은 걸까요?”
-나도 모르겠다. 무기를 놓고 가는 병신짓부터 이해가 안 가는데, 그걸 어떻게 알겠냐?
여명은 현대 미군이 무기를 버리고 가는 일이 흔하며, 심지어 바다에 무단 투기하고 간 적도 있다고 반박하는 대신 공산당이 남겨둔 흔적을 따라 기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주변 기지와 어울리지 않는 곳과 마주했다.
신전. 그것도 굵은 대리석 기둥에 지붕이 올라간 그리스식 신전.
“…뭔?”
여명이 무어라 묻기도 전에, 듀크가 신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아직도 남아 있었나.
“이게 뭡니까?”
-내가 아까 말한 신전이 이거다. 군인들 사이에 다섯 신 신앙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지은 지구식 신전이지.
“…교회도 아니고, 그리스식 신전을 지었다고요?”
-이게 그리스 식이었냐? 뭐, 이거 말고도 잡다하게 이것저것 지구식 신전은 다 지었어. 기지 바로 바깥에는 동양식 사당인가 뭔가가 있었고, 또 저쪽에는… 교회가 있었지.
“….”
여명은 듀크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무너진 군사 기지 사이로 십자가가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였다.
차원문이 열리고 지구 종교가 아샤의 종교에 압도 당하던 시절의 흔적.
정작 지구의 신들은 인간들에 의해 강제로 땅으로 끌어 내려졌지만… 뭐,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
여명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리스 신전으로 이어지는 공산당의 흔적을 훑으며 말했다.
“잠깐, 다들 여기 좀 보세요. 뭔가를 끌고 간 흔적인 거 같은데… 이게 뭘까요?”
그가 가리킨 건 네모반듯한 뭔가가 끌려간 흔적이었다. 시리는 화염 마법으로 신전 입구를 밝히며 말했다.
“네모난 물건을 질질 끌고 갔다… 총알 상자 아닐까요?”
“총알 상자치곤 너무 얇아. 신전에서 총알 상자를 꺼냈을 거 같지도 않고. 오히려 이건…”
『관을 옮긴 거다.』
“맞아. 사람을 담은 관이 딱 이 정도….”
여명은 문뜩, 대답한 사람의 목소리가 낯설다는 걸 깨달았다.
‘적.’
놀란 그가 반사적으로 무장 혈청을 뽑아 든 순간.
『무기보다는, 인사부터 나누는 게 어떻겠느냐? 또 다른 태양의 아이야.』
세상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