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77)
을 위한 세계는 없다-777화(777/817)
EP.777 I hope the Russians love their children too.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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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두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두려움에 굴복한 마음은 닫힌 문과 같으니, 우리 모두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과 마주….]낡은 TV 너머에서, 안대를 찬 백발 소녀의 연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폐허가 된 서울 위에서 연설하는 그녀의 뒤에는 무대는커녕 간단한 조명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서 있는 자리는 어떤 공연장보다도 열광적이었고, 그 어떤 신전보다도 거룩했다.
[울지 말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마음껏 우셔도 됩니다. 하지만…! 하지만 여러분,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로는 그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떠나간 이들과 아직 남은 이들을 위해 웁시다. 우리의 눈물이 이 거리를 전부 적실 때까지, 젖은 땅 위에서 희망이란 싹이 자랄 때까지. 다 함께 웁시다. 신들께서는 여러분들의 눈물을 긍휼히 여기실….]감동적인 연설이었다. 어찌나 감동적인지, 폐허 주변에 모인 수 백, 수천 명의 서울 시민과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들이 왈칵 눈물을 쏟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TV 너머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레몬색 눈동자의 남자는 그 어떤 감동도 느낄 수 없었다.
차디찬 감옥에 갇혀있다는 현실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황태자로 태어난 까닭이었다.
타고난 혈통 덕분에 그는 이 세상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대중 연설을 보고, 듣고,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까,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괴벨스의 연설을 분석한 것처럼, 그는 본능적으로 성녀의 연설을 정치적으로 하나하나 분석했다.
‘한국에 자원봉사자와 후원을 더 보내 달라는 뜻이 담긴 연설… 총대주교가 이런 짓을 할 리는 없고. 성녀의 독자적인 판단인가? 장기적으로 아샤는 총대주교, 지구는 성녀가 지배하는 식으로 교단의 권력을 분리하려는 생각이라면… 아니, 총대주교의 성격상 이건 말이 안 돼.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소문처럼 새 변경백과 성녀가….’
아쉽게도, 황태자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감옥 앞에서 TV를 보고 있던 간수가 왈칵 울음을 터트린 탓이었다.
“크흡, 다섯 신이시여, 성녀님을 보우하소서….”
“….”
상념이 끊긴 황태자는 황당한 눈으로 간수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지간히도 감동했는지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었다.
저런 뻔한 연설에 감동하다니. 괜히 심통이 난 황태자는 평소와 달리 조금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의외로군요. 사바칸, 성녀는 당신 같은 공산주의자도 울리는 겁니까?”
“예, 참 감동적인 연설 아닙니까?”
“….”
“소련 핏줄을 타고나신 분이라서 그런지, 연설 한 마디 한 마디가 혁명적인 것 같습니다!”
혁명적이라니. 황태자는 자신이 아는 성녀에 대해 떠올렸다.
지구인을 사제로 선정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절에 덜컥 성녀가 된, 지구와 아샤의 혼혈아.
아샤와 지구 양측 모두의 불안과 의심 속에서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완벽하고 자애로운 성녀가 되어 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고 평가 받지만… 글쎄.
황태자는 선택 받은 자로 태어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아는 황족들부터 하나 같이 정상이 없는데, 다섯 신과 수억 신도의 관심을 받는 성녀라면…?
‘…분명 정상은 아니겠지. 아마 성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어떤 정신병이라도 앓고 있지 않을까?
여명이 들었다면 화들짝 놀랐을 만큼 정확한 통찰이었지만, 황태자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그는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성녀가 소련의 핏줄을 타고난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어, 그게… 성녀님은 사실 공산주의자십니다.”
황태자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따지 않았다. 당장 말을 꺼낸 사바칸부터가 눈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걸 보면, 거짓말이 분명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조금 더 말이 되는 설명을 골랐다.
“…비밀이면 굳이 말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 진짠데… 그, 못 믿으시겠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다른 동무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성녀님이 소련 혈통을 타고난 건 다섯 신께서도 혁명을 지지해서 그런 거라고 합니다.”
“…공산주의는 종교를 탄압할 텐데요.”
“아닙니다. 전부 오해입니다! 소련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스탈린 서기장님의 어머니께서도, 독실한 지구 종교의 신도셨고, 또… 다섯 신 교단을 따로 억압한 적도 없습니다!”
황태자는 바로 그 스탈린이 지구 종교의 성당을 허물어 버리고, 그 폐허 위에 소비에트 궁전을 지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국가 무신론이나, 고차원적 에너지 생명체 같은 불경한 단어도 쓰지 않았다. 그간 봐온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 스탈린은… 신화나 다름없었으니까.
실종된 지 반세기도 되지 않은 인물이 무슨 신화인가 싶지만, 아샤의 초대 용사가 그러하고, 지구의 알렉산더 대왕이 그러하듯, 강자의 역사는 그 자체로 신화가 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스탈린은 세계의 절반을 주무른 강자였다.
그가 황족을 능멸한 역사는 귀족들을 처형장으로 보내기 위한 결단으로 치부되고, 드워프를 학살한 건 힘의 증거로 여겨졌다.
조금 전 사바칸의 말도 같은 맥락이었다. 소련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고? 당연히 보장했다. 딱 자신들이 허락한 수준의 자유를.
다섯 신 교단을 탄압하지 않았다? 그래, 탄압은 하지 않았다. 그저 소련 땅에 발을 못 붙이게 했을 뿐.
‘신화가 역사를 덧칠하는 광경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황태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을 오해한 사바칸이 이렇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태자님. 제가 저번에 비코프 동지께 물어봤는데, 초대 용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용사 혈통은 끊지 않고 내버려 두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
“생각해 보면, 스탈린 서기장님도 황족분들을 존중하시지 않았습니까? 혁명이 끝나도 황태자님은 특권 계층에서 내려올 뿐이지,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사바칸은 하루에 딱 하나만 보급되는 초콜릿을 철창 너머로 내밀었다. 조롱이 아닌 진심이 담긴 행동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정작 황태자는 폭소를 참고 있었다.
‘용사 혈통은 끊지 않겠다… 비코프, 당신은 참 잔인한 사람이군.’
조용히 초콜릿을 받아서 든 황태자는 거짓 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위해 비밀을 말해준 순박한 공산주의자를 위한 미소이기도 했고, 애처로운 자신의 혈통을 향한 미소이기도 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사바칸 동지.”
황태자는 웃는 사바칸을 보며 까득, 초콜릿을 씹었다. 싸구려 초콜릿 특유의 시큼함이 혀를 타고 올라오는 가운데, 황태자는 불현듯 궁금해졌다.
‘초대 용사의 신화는 제국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스탈린의 신화는? 누가 그 힘을 이어받아 새로운 서기장이 될 것인가… 데메론드? 이곳의 비코프? 모스크바의 예브게니? 그것도 아니면…….’
***
-천여명.
누군가 이름을 불렀음에도, 여명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바위를 의자 삼아 앉아있는 그의 시선은 오크들을 따라 천막을 정리하는 아이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야, 빨갱이 피뢰침.
흠칫, 이름이 아닌 별명을 듣고 나서야, 여명은 고개를 돌렸다. 뒤편에서 듀크 중령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 중령님. 죄송합니다. 제가 딴생각을 좀 하느라.”
-딴생각?
“별일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여명은 재빨리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인벤토리에 뭔가를 넣기 위한 행동. 듀크는 여명의 손에서 금색의 별이 사라진 걸 간파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쪽은 준비 끝났다.
“슬슬 가야겠군요.”
여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사이, 곁으로 다가온 듀크가 뭔가를 내밀었다.
아이들 간식으로 빼놓은 캔콜라.
여명은 이걸 왜 가지고 계세요- 란 눈으로 듀크를 바라봤지만, 듀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탁! 캔을 땄다.
미각이 없는 데스나이트였음에도, 그는 참 맛깔나게 콜라를 들이켰다. 심지어 꺼억- 트림까지 했는데, 그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걸 깨달은 여명은 똑같이 콜라 뚜껑을 땄다.
여명의 입술이 콜라 캔에 닿는 가운데, 듀크가 말했다.
-델타 포스가 온다지?
“…언제 들으셨습니까?”
-분홍 계집애가 입이 싸더라.
“….”
라쉬크… 나중에 두고 보자. 여명이 갑질을 각오하건 말건, 듀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왜 말 안 했나?
“…숨기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왜? 설마, 내가 미군하고 싸우는 일이 없도록 배려한 거냐?
“….”
그 설마가 맞았다. 여명이 슬쩍 고개를 돌리자, 듀크가 이마를 짚었다.
-이런 국보급 인성을 봤나.
여명은 변명처럼 덧붙였다.
“제가 중령님께 약속드린 건 빨갱이와의 전투였지, 같은 나라의 군인과 싸우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런 일로 부담드리고 싶지 않았….”
그때, 듀크가 여명의 말을 끊었다.
-그런 걱정일랑 접어둬라. 내가 현역 시절에 죽인 미군이 이미 한 다스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아이를 건드리는 놈들을 같은 미국인으로 인정 안 한다.
“….”
-알겠냐?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팍팍 물어봐, 미군 특수군은 어떻게 싸우고, 어떤 전략을 짜고, 어떤 무술을 쓰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쫙 빼가라고.
여명은 말없이 콜라를 홀짝였다. 미국을 대표하는 자본주의의 맛은 참으로 달콤했다.
그렇다고 이어지는 말이 달콤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중령님은 옛날 사람이라, 최신 델타 포스 정보는 모르시지 않을까요.”
-….
“….”
콜라 캔에서 흘러나오는 탄산처럼 가벼운 침묵이 두 사람을 쓸었다가, 사라졌다.
-어… 그 말도 일리는 있다만… 내 정보도 쓸모가 있을 거다. 저 도시에 빨갱이가 있으니까.
“빨갱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대 빨갱이 전략. 즉, 주가시빌리 대처법은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
-내가 주는 정보 없이 정면 대결하면, 아무리 너라도 고생깨나 할 거다. 알겠냐?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듀크는 어느새 준비를 끝낸 아이들과 오크들을 보며 말했다.
-도시로 가는 동안 내가 아는 걸 전부 설명해주마.
“예, 저는 마무리하는 대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여명은 피눈물의 환상을 사용해 듀크의 얼굴을 오크로 바꿨다. 험상궃은 오크의 얼굴로 변한 듀크는 여명의 어깨를 두들긴 뒤, 아이들 있는 방향으로 떠나갔다.
여명은 반대로 듀크가 온 방향, 그러니까 시리와 라쉬크가 열심히 마법진을 설치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각종 마법진이 빼곡하게 그려진 커다란 구덩이가 보였다. 모닝 아울의 공기 마법과 시리의 화염 마법진이 교차하며 새겨진 구덩이.
곧, 구덩이 안에서 마지막 마법진을 완성한 시리가 여명을 향해 말했다.
“형부, 딱 맞춰 오셨네요.”
“끝난 거야?”
“네, 미세 조정까지 다 끝났어요. 마지막으로 형부가 화산쇄설로 터트리시면 돼요.”
“고생했어. 처제.”
그렇게 말한 여명은 손을 뻗었다. 구덩이 안에 있던 시리가 그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올라온 직후, 마찬가지로 구덩이 속에 있던 라쉬크가 물었다.
“야, 다 끝내고 묻는 것도 이상하긴 한데… 이거 꼭 만들었어야 했어?”
“팔이 잘려서 잡혀간 히어로가 아이들을 이끌고 돌아온 걸 납득시키려면 이만한 임팩트는 있어야 한다고 하던데요. 히어로한테는 폭발이 필요한 법이라나 뭐라나.”
“누가 그런 미친 소리를 해?”
“쇠미리요.”
“…엘프나 생각할 법한 생각이긴 해.”
고개를 주억거린 라쉬크는 여명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여명은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만 봤다.
“안 꺼내주고 뭐 해?”
“내부고발자 구경하죠.”
“…그 데스나이트, 그렇게 안 봤는데 입이 싸네.”
“구더기 공주님만 할까요.”
다음 순간, 탁! 여명의 손에서 불씨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라쉬크는 구덩이 속 마법진과 불씨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장난이지?”
“10초 드릴게요.”
“야!!!”
“9초.”
“잠깐, 진짜 농담하지 말고!”
“8초.”
“이 시발, 너 두고봐, 올라가면-”
“3초.”
“잠깐, 잠깐만!”
“2초.”
“야 이 개새끼야!!!”
***
그렇게 라쉬크가 젖먹던 힘을 다해 구덩이를 탈출하고, 일행 모두가 오크로 변장해 아지트를 떠난 직후.
콰아아아앙 – !!!!
비료길 옆 황야에서 어마어마한 폭발과 함께 불기둥이 솟구쳤다. 비료길의 트럭은 물론이고, 저 멀리 아폴로 시티에서 보일 정도로 커다란 불기둥.
차에 탄 아이들이 우와아아- 감탄하는 가운데, 폭발은 오크들과 아이들의 흔적을 통째로 지워버렸다.
나중에 감식반이 와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도록, 완벽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