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8)
을 위한 세계는 없다-78화(78/817)
〈 78화 〉 전학생을 위한 우연 (8)
* * *
***
여러분! 실제 상황입니다! 모두 침착하게 대피소로 이동하세요!
경보음이 울리기 무섭게 제미니 선생님이 대피 안내를 시작했다.
당황하지 말고, 대피 요령을 따라 행동해 주세요! 천천히, 교실 앞자리부터 일어나 긴급 대피소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질서를 지켜주세요. 걱정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옆자리 학생이 화장실에 갔다면 선생님에게 알려주세요!
학생들은 선생님을 따라 교실을 나선 뒤, 중앙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역시 로드 하우라고 해야 할까?
겁을 먹거나 비명을 지르는 학생은 없었다. 이런 대규모 대피에서 으레 보이는 새치기꾼조차 없었으니, 더 말해 무얼 할까.
오히려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잡담을 나누는 녀석들까지 있었다.
아침부터 운동 제대로 하네.
또 마법 학부에서 삽질했나?
오늘 점심 메뉴 아는 사람?
여유롭다 못해 익숙한 모습.
살벌한 경보음과 학생들의 잡담이 뒤섞인 이질적인 분위기는 대피소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거대한 방공호를 닮은 대피소에 들어서고 나서야, 학생들은 각자 긴장을 풀려는 듯 친구끼리 모이거나,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명은 옆에 서 있던 쇠미리를 향해 물었다.
“…다들 왜 이렇게 여유로운 거지?”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쇠미리는 잠시 눈을 껌뻑이다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살짝 미소 지었다.
“아, 그렇죠. 쇠… 아니, 여명은 어제 왔죠?”
그녀는 짧게 덧붙였다.
“사실, 이게 벌써 세 번째 대피거든요. 그러니 모두 익숙해진 거죠.”
“…세 번째라고?”
여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학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쇠미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설명했다.
“첫 번째 경보는 입학식이 끝난 바로 다음 날이었어요. 마법 학부에서 입학식 때 쓰고 남은 폭죽을 실수로 터트려서 경보가 울렸죠.”
“….”
“두 번째는 저번 주말이었는데… 교직원분들이 실수로 경보를 눌렀던가? 아무튼, 정말 별일 아니라서 대피소에 모이고 5분 만에 해산했어요.”
여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대피소를 바라봤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 아닌가. 벌써 두 번이나 그런 일을 겪었다면야, 이렇게 긴장감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도리어 그런 모습 때문에 여명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저번 경보가 별일 아니었다고 해서, 이번 경보도 별일 아니란 법은 없었으니까.
“…큰 사고는 언제나 안전 불감증과 함께 오지.”
여명은 대피소 안의 학생들을 훑으며 짧게 평했다.
“어째 예감이 좋지 않은데.”
“흐응… 괜한 걱정 아닐까요? 아카데미에 상주하는 초인과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데요. 금방 해결되겠죠.”
“글쎄… 아닌 거 같은데. 저기 좀 봐봐.”
여명은 손을 들어 제미니 선생님을 가리켰다.
그녀는 대피소에 준비된 전화기와 본인의 핸드폰을 동시에 두들기며 어디론가 연락을 보내고 있었다.
전화가 먹통인 걸까? 전화기를 든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주변 학생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애써 표정을 숨기고 있었지만… 여명이나 쇠미리쯤 되는 초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제야 쇠미리도 무언가 잘못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는지, 슬그머니 마나를 끌어 올렸다.
“…갑자기 저도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무슨 일로 경보가 울린 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따로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죠.”
쇠미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세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그녀에게 매달리듯 붙어있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성녀님에게 부탁해볼까요?”
“뭘?”
쇠미리는 까치발을 들어 입술을 여명의 귀에 가져댔다.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성녀님은 미래를 볼 수 있어요.”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태도.
여명은 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묻지 않았다. 명색이 엘프 공주님 아닌가.
냉전 시절, 전설적인 엘프 간첩들의 활약을 떠올려보자면 그녀가 이런 비밀을 알고 있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쇠미리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계속 말했다.
“성녀님이 미래를 보고 무슨 일인지 알려주시면… 우리도 뭔가 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성녀와 계속 얽히게 되는 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금 당장 이보다 좋은 계획을 떠올릴 수 없었다.
판단을 끝낸 여명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성녀에게 다가갔다. 설마 바로 움직일 줄은 몰랐던 건지, 쇠미리가 깜짝 놀라 그의 뒤를 따라왔다.
“여, 여명! 잠깐, 잠깐. 예지는 비밀이라 함부로 말하면 안 돼요. 은근히 돌려서 물어봐야…”
“그럴 필요 없어. 나도 알고 있으니까.”
“응?”
“나도 안다고.”
쇠미리가 뭘 아느냐고 되묻기도 전에, 여명은 성큼성큼 걸어 세티와 성녀 앞에 섰다.
“그래서 말이지? 우리 엄마가… 어? 여명? 무슨 일이야?”
세티가 먼저 여명이 다가온 걸 눈치챘지만, 그녀는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았다. 덕분에 성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 시간 좀 내줄래?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는데.”
“…너랑 나랑 단둘이? 갑자기 뭐야?”
“급한 거야. 잠깐이면 돼.”
성녀는 세티와 떨어지기 싫은 건지 우물쭈물 대답을 피했다.
그러자 세티가 그녀의 등을 확 밀어버렸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드디어 해방된 세티가 후우, 한숨을 내쉬는 동안 성녀와 여명은 학생들이 없는 대피소의 구석으로 향했다.
그래 봤자 고개만 돌리면 모두가 볼 수 있는 위치였지만, 단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기엔 충분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너 설마…”
성녀는 여명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은근한 시선으로 그의 위아래를 훑었다.
“…나랑 세티 사이를 질투하는 건 아니지?”
이게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예지고 뭐고, 울컥한 여명은 손가락을 들어 성녀의 이마 중앙에 딱밤을 때려 넣었다.
딱!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한 성녀는 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야! 아프잖…!”
그녀가 이마를 붙잡고 항변하려는 그때. 여명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네 예지가 필요해.”
“…갑자기 왜?”
“지금 울리는 이 경보, 예감이 좋지 않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이제야 장난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걸까, 성녀는 이마를 주무르면서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미래는 함부로 보는 게 아닌데….”
“부탁할게. 나중에 나도 네 부탁 하나 들어줄 테니까.”
“어? 정말? 너 분명히 약속했다? 내 부탁 하나 들어주는 거다?”
“…이상한 부탁만 아니라면야.”
여명이 그리 말하자마자 성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팔짱을 꼈다.
자신만만한 태도였으나,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 때문에 위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 잠깐만 기다려.”
다음 순간, 성녀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
설마 바로 예지를 사용할 줄이야.
여명은 멍한 표정을 짓는 성녀의 뒤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보지 못하도록 몸으로 그녀를 가렸다.
혹시라도 시선 때문에 예지가 실패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명의 걱정대로 수많은 시선이 성녀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사람 중 대다수는 남학생들이었다.
기숙사에서 싸웠던 웨슬리는 물론이고, 눈을 가늘게 뜬 전윤성까지.
누가 보고 있건 간에, 여명은 담담히 성녀의 뒤를 지켰다.
아니, 그 사이에도 대피소의 인원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아직 여유만만한 학생들과 어떻게든 긴장을 숨기려는 듯 등을 돌린 제미니 선생님, 복잡한 표정으로 쇠미리를 바라보는 전윤성, 그리고…
겁에 질린 듯 입술을 씹으며 대피소의 벽과 성녀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바오닉 레락.
‘…왜 저러는 거지?’
단순히 겁을 먹은 정도가 아니었다. 손발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게, 마치 폭탄을 앞에 둔 사람처럼 보였다.
여명이 그를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뜬 순간.
우웩!
성녀가 예지를 끝냈다. 그녀는 허리를 굽히고 대뜸 헛구역질을 내뱉기 시작했다.
“왜 그래? 뭘 본 거야?”
“아, 안돼. 주, 죽으면 안 돼…”
“죽다니? 누가?”
“세, 세티, 나의 세티가…”
여명이 등을 두들기자,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웅얼거렸다.
“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 이대로 있으면….”
여명은 몸을 떨며 세티에게 가려는 성녀를 바라보다가, 한숨 쉬며 왼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짜악!
그대로 성녀의 뺨을 후려쳤다.
대피소에 있는 모두의 귀을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 성녀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성녀는 그제야 여명을 똑바로 바라봤다.
“똑바로 말해. 뭘 본 거야?”
제미니 선생님이 깜짝 놀라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동안, 그녀가 말했다.
“…이제 곧 벽을 뚫고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올 거야.”
“테러리스트인가? 아니면 네크로맨서?”
“모르겠어… 예지가 흐릿해서 잘 보이 않아… 하지만 학생들이 잔뜩 죽어…”
“남은 시간은?”
“10분… 아니, 그보다 짧아. 그리고…”
성녀의 안대가 대피소의 넓은 벽으로 향했다. 아니,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봤다.
“대피소 바깥도 안전하지 않아. 학교 주변에 바다 아래 시체가… 어마어마한 양의 시체가 있는데, 그… 그것들이 일제히 언데드가 돼서 이곳으로 몰려와.”
“…학교 주변에 시체가 있다고? 왜?”
“나, 나도 몰라, 내 예지를 넘어서는 범위란 말이야…”
여명은 성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제미니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봐요, 편입생! 어떻게 성녀님의 뺨을 때릴 수가 있어요?! 학생 간의 폭력은…”
제미니 선생이 언성을 높였으나, 여명은 단박에 그녀의 말을 끊었다.
“선생님. 대피소에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무기나 총화기가 있습니까?”
뜬금 없는 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제미니는 여명과 안절부절못하는 성녀를 번갈아 보며 이게 단순히 학생 간의 싸움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무기는 왜 찾는 거니?”
“적이 올 겁니다. 그리고 이대로 있으면 학생들이 죽을 거구요.”
한 치의 의문도 허락하지 않는 확신 가득한 말투, 은은하게 끌어올린 마나.
제미니는 어떻게 적이 오는 사실을 알았는지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
여명의 금색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에 압도당한 탓이었다. 그녀는 여명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여긴 대피소야. 따로 무기가 있을 리 없잖니.”
“그럼 당장 대피소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기숙사건 어디건 상관없이, 여기보다 더 나은 곳에서.”
여명이 그렇게 말하자, 제미니 선생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대피소의 문은… 한번 잠그면 바깥에서 열쇠로 열 때까지 열리지 않는단다.”
“….”
꼼짝없이 갇혔군.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고, 성녀는 다가오는 세티를 향해 달려나갔다.
세티는 놀란 표정으로 성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성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여명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다른 학생들의 표정도 세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미 예지를 알고 있는 쇠미리나, 기묘하게 눈을 빛내고 있는 바오닉만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을 뿐.
여명이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던 그때.
제미니 선생님이 말했다.
“제대로 된 무기는 아니지만, 클럽 활동을 하는 애들이 박아 둔 연습용 무기들이 있긴 해…”
선생님은 말을 흐렸지만,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버텨야지.
그리고 아무리 연습용 무기라도, 초인 학생을 위한 장비 아닌가. 적어도 장난감 수준은 아니리라.
“그거라도 꺼내주십시오. 그리고…”
여명은 대피소의 학생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황, 의아함, 기대감, 두려움… 온갖 감정이 뒤섞인 시선이 그에게 모이고, 여명은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말했다.
“싸울 사람을 뽑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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