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80)
을 위한 세계는 없다-780화(780/817)
EP.780 I hope the Russians love their children too. (8)
***
예브게니 ‘스탈린’? 여명은 짜증을 삼키며 반박했다.
“예브게니 스탈린이 아니라, 예브게니 주가시빌리겠지. 스탈린은 단순한 성이 아니야. 고작 스탈린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물려받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자 리보프는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명의 말이 뭔가를 건드린 걸까? 그는 꽈악- 주먹을 쥐며 되물었다.
“오호… 나름대로 소련에 대한 철학이 있었군.”
“….”
“붉은 별, 그 말을 들으니 묻지 않을 수 없군. 뭘 해야 스탈린이란 이름을 물려받을 수 있지? 대체 무엇을 해야만 스탈린이 될 수 있는 거냐?”
소련의 권력. 그렇게 대답하려던 여명은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스탈린의 이름을 계승하지 못한 자는 소련의 권력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소련의 권력을 얻지 못한 자는 스탈린이란 이름을 계승할 수 없다- 두 명제가 모순이라는 걸 깨달았으므로.
물론, 모순을 타파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스탈린 본인에게 직접 이름을 물려 받는다면 모든 모순은 해결된다….
그 사실을 밝힐 수 없던 여명은 말을 돌렸다.
“그쪽 질문은 여기까지다. 이제는 내가 질문할 차례다.”
“….”
“새로운 나라도 아니고, 굳이 소련을 되살리려는 이유가 뭐냐. 네놈들의 그 멍청한 목적이 대체 뭐길래, 이런 일을 벌이는 거지?”
리보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에 펼쳐진 칠판을, 정확히는 칠판 위에 그려진 지구의 지도를 보며 말했다.
“우리의 대의는 마르크스가 뜻을 세우고, 레닌께서 첫 혁명을 일으켰던 시절과 똑같다.”
“….”
“인민의 나라를 세우고,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에게 철퇴를 내리고, 신음하는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돌려주는 것.”
리보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여명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붉은 별, 너도 머리가 있다면 알겠지. 현대의 자본주의는 잘못되었다. 개선될 여지도 없지. 그리고 우리에게는 힘이 있다. 왜 세상을 바꿀 힘이 있으면서,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외면해야 하지?”
“그래서, 유혈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거냐? 혁명이 없이도 세상을 바꿀 수 있-”
리보프는 여명의 말을 끊었다.
“꿈 같은 소리! 두려움 없이는 존중도 없고, 폭력 없이는 권리도 없다! 이건 인류 역사가 증명하는 진리다! 소련이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자본가들을 떨게 했던 건 그만한 힘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
“붉은 별, 네가 노동자 출신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말해 봐라. 자본가와 정부가, 노동자의 호소를 들어주더냐? 그들의 고통 가득한 외침을 들어주냔 말이다!”
목이 터져라 외치는 물음에 여명은… 시간 외 수당은커녕 야근과 특근을 밥 먹듯 하던 청소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쪽 말마따나, 나는 노동자란 이름의 가축을 수도 없이 봐왔다. 채찍질 당하고, 소모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가축들을.”
곧, 무전기 너머에서 불편한 기침이 들려왔다. 듀크 중령의 기침이었다. 하지만 여명은 말을 바꾸지 않았다. 이건 그가 인천에서 무수히 마주했던 진실이었으니까.
리보프가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여명을 바라보는 가운데, 여명이 덧붙였다.
“하지만 그들에겐 최소한의 선택권이 있었다. 우리의 노동에는 정당하진 않아도 대가가 있었다. 함께 땀 흘릴 동료가 있었으며,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너희가… 거름으로 쓰려던 아이들과 다르게.”
“…뭐?”
“인민의 나라? 노동자의 권리? 누가 인민이고, 누가 노동자란 말이냐. 아이들을 소모품으로 써먹은 순간부터 너희는 혁명을 입에 올릴 자격을 잃었다. 너희는 자본가가 되지 못한 파시스트에 불과해.”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고작 수백 명이다. 그만한 희생도 감수하지 못하면서, 무슨 대업을 이루겠단 말이냐!”
“고작? 고작이라고?”
“그래! 소비에트 연방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희생해야지! 스탈린께서 천만의 붉은 군대와 두 아들을 희생해서 히틀러를 몰아낸 것처럼!”
지랄하네- 품속에 있던 무전기에서 쌍욕이 들려왔다. 쇠미리의 목소리였다. 리보프는 그 목소리에 반박하듯 계속 소리쳤다.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스크 하나 없이 광산에 끌려가는 아버지들과 먹을 게 없어서 이삭을 주워 먹는 아이들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온몸이 부서지고,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도록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 우리의 피로 물든 붉은 깃발이 워싱턴 D.C에 꽂힐 때까지!”
미친 새끼가. 참지 못한 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리보프가 쿵! 탁자를 내려치며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소. 붉은 별 동무.”
그의 목소리는 리보프의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거칠고,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
“우리에게 협조하시오. 주가시빌리와 피눈물의 계승자로서, 새로운 인민의 나라에 봉사하시오.”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었으니까.
다음 순간, 그의 의지를 따라 검 모양의 무장 혈청이 피부를 찢고 튀어나왔다. 여명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리보프는 피하지 않았다. 난폭한 검술을 따라 그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지고, 목에서 피가…
…쏟아지지 않았다.
잘린 목에서 떨어지는 건 육포처럼 굳은 살점과 뼛가루가 전부였다. 마치 말라붙은 시체를 자른 느낌이었다.
-어리석군. 붉은 별, 기어코 반동이 되길 선택하다니.
목 없는 리보프는 잘린 머리를 주워 들며 말했다. 잘린 머리에서 툭- 가죽으로 만들어진 뭔가가 떨어졌다. 인공적으로 만든 가짜 얼굴.
그 아래 숨겨져 있는 건, 미라처럼 빼빼 마른 사람의 얼굴이었다.
“…인공 신체.”
파순이 제3 연구소에서 훔쳐 온 스탈린의 예비용 육체. 눈앞의 미라는 그 신체에 비해 눈에 띄게 약했지만, 똑같은 기술로 만들어진 게 틀림없었다. 외모가 그러했고, 내면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그러했다.
-아, 이것도 알고 있나? 제3연구소의 물건을 훔쳐 간 도둑도 너였군.
“….”
리보프를 연기하고 있던 인공 신체는 보란 듯 잘린 목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주가시빌리, 피눈물, 인공 신체, 그리고 무장 혈청까지. 그만큼 소련의 유산을 차지하고도 인민의 나라를 거부하다니. 반동도 이런 반동도 없군.
여명은 무장 혈청을 꽉 쥐며 말했다.
“리보프는… 너희가 만든 가짜였나?”
-하! 가짜라니. 리보프 동무는 인민과 당에 헌신하는 충신 중의 충신이다.
“….”
-너나 비코프 같은 반동들과 다르게 말이지.
그렇게 말한 인공 신체는 씨익- 웃었다. 마른 피부가 갈라지는, 흉측한 미소였다.
-하지만 너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 붉은 별은 나름의 방식으로 당에 봉사했으니.
봉사? 그게 무슨- 여명이 무어라 묻기도 전에, 녀석이 먼저 말했다.
-그거 알고 있나? 리보프 동무는 피눈물의 환상의 달인인 빌만큼이나 뛰어난 변장술의 대가다.
“…뭐?”
-붉은 별이 모닝 아울을 살해하고, 아이들을 납치한다면… 참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군.
여명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 무전기 너머에서 코르부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의 무리가 호텔로 접근 중이오. 무장 상태와 복장으로 보아 공산주의자인 것 같소만… 문제가 하나 있소. 선두에서 달려오는 자의 외모가, 붉은 별과 판박이오.]다음 순간, 인공 신체가 조롱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미 늦었다. 붉은 별! 오늘의 교훈을 잘 새겨둬라! 가짜 신분으로 이름값을 날릴 때는, 다른 사람에게 도용 당할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는 걸!
***
같은 시각, 아폴로 시티 중앙 지역의 호텔.
두두두두 – !!
창밖을 울리는 거친 총소리를 시작으로 무시무시한 소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놀란 차량의 브레이크 소리, 대형 트럭이 넘어지는 소리, 창문이 깨지는 소리…
마치 겁을 주려는 것 같은 소리였고, 그 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진짜로 겁에 질렸다. 덜덜 떨며 이불을 뒤집어쓰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가까운 오크를 꼭 끌어안거나, 아예 엉엉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오크들은 아이를 달래지 못했다. 그들의 본성은 보모가 아닌 전사였다. 오크들은 각자 무기를 빼 들고 다가올 전투에 대비했다.
그리고 소음이 바로 호텔 앞까지 다가올 무렵, 가두두가 호텔 복도를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모두 아이들과 무기를 챙기고, 모닝 아울의 방으로 모여라!
오크들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엉엉 울면서도 오크들의 안내를 잘 따라주었다.
우르르 아이들이 모인 모닝 아울의 VIP룸은 백 명에 가까운 아이들을 수용할 만큼 컸지만, 그뿐이었다. 아이들을 지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었다.
“제기랄, 지금이라도 대피해야 합니다. 제가 군에 헬기를 요청할 테니, 모두 옥상으로 갑시다!”
모닝 아울은 마법진이 가득 새겨진 코트를 챙겨 입으며 말했다. 오크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까마귀는 달랐다.
“헬기에 아이들을 태우기엔 늦었소. 그리고… 미군 헬기가 아이들을 지켜줄 거라고 확신하오?”
“….”
모닝 아울은 무어라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푹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이곳에 있어도 다 죽습니다. 조금 전에 보셨잖습니까. 녀석의 머릿수는 적어도 서른이 넘고, 그중 열 명은 중화기로 무장한 데다가… 리더가 붉은 별입니다. 그 붉은 별!”
그러자 까마귀는 딱! 부리를 다물었다. 그녀에게 매달린 아이들이 놀랄 정도로 크게.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녀석은 미국을 테러하고, 일본에서 민간인을 도살한 살인마란 말입니다!”
그렇게 소리친 모닝 아울은 지금이라도 헬기 지원을 부르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 그때, 까마귀가 갑자기 발코니 난간에 올랐다.
“안 돼! 가지 마!”
“까마기야, 여기 이써!!”
그걸 본 아이들이 놀라서 소리쳤지만, 그 소란은 오래가지 못했다. 까마귀의 몸이 갑자기 부풀기 시작했으니까.
뚜둑- 뚝! 다리가 길어지는 걸 시작으로, 깃털들이 한데 뭉치며 기다란 드레스를 만들어냈다. 날개는 검은 장갑을 쓴 손으로, 기다란 꽁지깃은 그보다 긴 머리카락으로 변했다.
“…변신?”
오크와 아이들, 그리고 모닝 아울조차 멍하니 변신을 바라보길 잠시.
발코니 난간에는 까마귀가 아닌, 여명만큼이나 키가 큰 미녀가 우뚝 섰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변신이었다.
까마귀가 생각나는 부분은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박힌 검은 깃털뿐이란 것도 그랬지만, 외모의 차이가 그랬다. 저런 미녀가, 부리를 딱딱거리던 까마귀였다고?
어찌나 변화 폭이 큰지, 몇몇 아이들이 연신 눈을 비빌 정도.
그나마 용기 있는 아이… 그러니까 말하는 까마귀를 처음 봤던 아이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물었다.
“까마기… 싸우러 가?”
코르부스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소. 그대들을 위해 싸우러 가오.”
“안 가면… 안 대? 우리 아빠도… 싸우러 가서, 안 돌아 와써.”
코르부스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
“본인은 돌아올 것이오. 그대의 아버지도 언젠가 돌아올 것이고.”
“진…짜?”
“물론이오. 본인의 스승과… 제자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오.”
아이는 코르부스의 스승과 제자가 누군지 몰랐지만, 그녀의 말에서 위안을 얻었다. 꼬맹이가 발목을 놓고 뒤로 물러난 직후, 코르부스는 모닝 아울과 오크들을 향해 말했다.
“아이들을 잘 지키고 있으시오. 아시겠소?”
모닝 아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현듯 자신의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잠깐, 이 코트를 챙겨 가십쇼. 도움이 될 겁니다!”
“성의는 고맙소만, 본인에게 다른 깃털은 필요 없소.”
그렇게 말한 코르부스는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미소를 보여준 뒤, 그대로 난간 아래로 뛰어내렸다.
놀란 아이들이 곧장 베란다로 달려가 아래를 바라본 순간.
콰아아앙 – !!!!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호텔 입구를 틀어 막는 소리가 도시 전체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