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84)
을 위한 세계는 없다-784화(784/817)
EP.784 교향곡 제10번 E단조 작품 93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은 더 멋진 일이다.
『마크 트웨인.』
***
세관에서 스탈린의 솔방울이 터지던 시각, 아폴로 시티 상업 지구의 CIA 본부.
이름보다 지부장이란 명칭으로 더 자주 불리는 남자는 창밖을 보며 담배를 물었다.
탁, 탁- 불을 붙이며 바라본 창밖은, 회백색 담배 연기와 대비되는 붉은 아지랑이로 뒤덮여 있었다.
“빨갱이들이란… 정말이지, 정도라는 걸 모른다니까.”
내뱉는 말과 달리, 창밖을 보는 그의 표정에는 묘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성공의 미소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담배 몇 모금 안 남았을 때쯤, 누군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부장님. 후퇴 작업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흔적 처리는?”
“그쪽도 끝냈습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전부 빨갱이들의 소행이 될 겁니다.”
지부장은 탁, 꽁초를 바닥에 털며 물었다.
“주둔군 쪽은?”
“적극 협력 중입니다. 지휘부는 이미 대피를 완료했습니다. 남은 일반병들은 곧 살기에….”
“그쪽 말고.”
주어가 없는 말이었으나, 요원은 유능했다. 그는 단박에 지부장이 원하는 대답을 내놨다.
“브라우닝은 아직 태평양에 있습니다. 중간에 용이라도 타지 않는 이상 사건이 끝날 때까진 오지 못할 겁니다.”
“좋아. 이제 촬영팀만 남기고 모두 퇴거한다.”
마지막 한 모금을 빤 지부장은 그대로 등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요원이 그의 등을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꼬맹이들은 어찌할까요?”
지부장은 발도 멈추지 않은 채, 담배꽁초를 툭- 던지며 말했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전부 빨갱이들의 소행이 될 거라고.”
“….”
“진짜도 좀 섞여 있어야, 가짜도 그럴싸해지는 법이지. 안 그런가?”
요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발소리도 없이 지부장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수면제에 취한 아이들의 숨소리가 이어지는 고요 속에서, CIA는 도시를 떠났다.
***
“나보고 그걸 믿으란 겁니까? CIA와 미군이… 냉전을 위해 빨갱이와 손을 잡았다고?”
여명이 황당한 목소리로 묻자, 독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아는 한, 문제가 생길 접촉은 하지 않았다. 서로 판을 깔아준 것에 가깝지.”
“….”
“CIA는 아이들을 모아 모스크바의 시선을 끌었고… 공산당은 그에 맞춰 이 도시에 손를 뻗었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이상한 수준이 아니라, 미친 소리지.”
독화는 쓰러진 주가시빌리들의 상태를 살피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번 일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합리??”
“냉전의 종결 이후, 미국은 꾸준히 국방비를 축소해왔다. 라이벌이었던 소련은 알아서 무너졌고, 호주나 프랑스를 비롯한 강대국들은 미국에게 대들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지.”
여명은 바로 반박했다.
“초인 육성 예산은 꾸준히 늘어났을 텐데?”
“그래, 하지만 초인 육성은 전차나 전투기 같은 기존 무기 생산비를 빨아 먹고, 군부의 장교 숫자를 보장해주지도 않지.”
“….”
“미군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초인 부대 하나가 늘어 날 때마다 군함 하나가 사라지고, 두 개 늘어나면 같은 숫자의 전차가 퇴역한다. 미군이 괜히 초인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냉전 시절과 비교하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든 지금은… 경멸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고작 군축 때문에 냉전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여명이 여전히 못 믿는 표정을 짓자, 독화가 덧붙였다.
“사람은, 자기 밥그릇이 엎어지면 못 할 일이 없다.”
“….”
여명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독화의 말속에서 논리적 허점을 찾아냈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냉전을 벌일 이유가 없잖습니까. 자본가들과 손을 잡은 노멘클라투라들이 굳이 냉전을 원할 리가….”
“…그 노멘클라투라들을 견제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권력?”
독화는 조심스레 여자 주가시빌리의 토막 난 몸을 조립하며 말을 이었다.
“외부의 적은 독재자의 가장 좋은 명분이지. 누군가 모스크바의 권력을 잡으려 한다면, 냉전을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선택지다.”
다음 순간, 여명은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모스크바에서 권력을 바라는 자가 누군지, 조금 전 그와 대화했던 가짜 리보프의 정체가 누군지, 동시에 깨달은 까닭이었다.
“…예브게니 주가시빌리.”
독화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명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북방의 비코프가 일으킨 혁명의 불씨는 아직 아샤를 뒤덮지 못하고 있고, 지구에서는 붉은 별이 돌아다니며, 베리야는 죽었다… 스탈린의 핏줄을 이은 예브게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겠지.”
“….”
여명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자신임을 깨달았으므로.
핵을 손에 넣지 못한 비코프는 제2의 스탈린이 되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분열됐다.
베리야는 승천하지 못했다. KGB는 무너졌다.
그래서, 예브게니에게 기회가 왔다. 그렇기에, 아폴로 시티의 공산당이 움직였다.
이 모든 일이 여명의 탓은 아니었다. 그건 비약이었다. 그가 운명을 바꾸지 않았어도 CIA는 아이들을 납치했을 테고, 모스크바와 워싱턴의 정치인들은 엘릭서를 노렸을 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가 원인 중 하나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여명은 멸공 성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가 백날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말해도, 공산주의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발목까지 차오른 늪처럼, 이미 밟아버린 지뢰처럼.
혈관을 타고 치솟는 살기. 하지만 머리는 더더욱 차가워졌다.
‘이제 더 이상 피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죽이는 것도 모자라다.’
더 늦기 전에, 방법을 바꿀 때였다. 시나리오가 그에게 강요한 운명을 바꿨던 것처럼.
짧은 각오를 삼킨 여명은 독화를 내려다봤다.
“…그래서, 아폴로 시티의 빨갱이들의 계획은 뭐지?”
“아쉽지만, 내가 아는 건 주가시빌리의 투입이 전부다. 아까도 말했지만, CIA와 공산당은 서로 합의하거나 계획한 게 없었다. 그저… 새로운 냉전을 촉발할 정도로 커다란 사건을 일으키자는 공통의 목표가 전부였다.”
공통의 목표? 뭔가 이상한 걸 느낀 여명은 차갑게 되물었다.
“당신이… 중간책이었나?”
“…난 정보를 전해준 것에 불과하다.”
“그걸 중간책이라고 해, 이 씨발 새ㄲ-”
여명은 반사적으로 인벤토리에서 총을 뽑았으나, 방아쇠를 당기진 않았다.
그는 성녀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만한 살기 속에서 완성형 주가시빌리와 싸우는 게 얼마나 시간 낭비인지 아는 탓이었다.
애써 침착함을 되찾은 여명은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한 정보를 물었다.
“…후우, 젠장. 그 주가시빌리들은 어떻게 할 거지? 이대로 내버려 두면 다시 재생해서 날 뛸 거다.”
“영업 비밀이라 알려줄 수 없… 칼 내려라.”
멸공 성검이 아쉬운 듯 징징 울리는 가운데, 독화는 쓰러진 주가시빌리들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적당량까지 살기를 뽑아낸 뒤, 심장에 쇠침을 박아 넣을 거다.”
“….”
“그대로 냉동관에 넣어 놓으면, 지금보다 더 살기가 늘어나지 않는 이상 자력으로 깨어나지 못할 거다. 옛 소련에서 주가시빌리를 재활용할 때 써먹은 방식이지.”
그렇게 말한 독화는 품속에서 쇠침을 꺼냈다. 크기로 보면 침이라기보단 대못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잘그락- 독화는 커다란 대못… 아니, 쇠침 뭉치를 내밀었다.
“다른 주가시빌리들을 제압할 때 써라. 너는 냉동관 대신, 냉동 마법으로 얼리면 될 거다.”
여명은 쇠침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날 믿나? 내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그냥 죽이면 어쩌려고?”
“어차피 죽이나 제압하나 시간 차이는 크게 없을 거고, 나 정도 되는 전력을 이용하는데 이 정도면 남는 장사지. 그리고 무엇보다….”
말끝을 흐린 독화는 여명이 쇠침 뭉치를 받아든 뒤에야 말을 이었다.
“너는 좋은 사람이니까.”
“….”
“적어도, 스탈린이나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보단 나은 사람이다. 안 그런가?”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인벤토리에 쇠침을 회수한 뒤, 그대로 몸을 돌려 독화가 뚫은 구멍 밖으로 몸을 날렸다.
독화는 조용히 멀어지는 발소리를 음미하다가, 고개를 돌려 거의 재생을 끝낸 여성 주가시빌리의 볼을 쓸었다.
눈이 붉게 충혈된 주가시빌리가 그의 팔목을 마구 깨물어 댔으나, 독화는 그녀의 살기를 흡수하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나탈리야. 그리고… 좋은 꿈 꾸렴.”
푹-! 심장에 쇠침이 박히는 소리를 끝으로, 주가시빌리의 몸이 축 늘어졌다.
***
비료 창고와 호텔 중간 지점, 도심에 위치한 미군 병영.
평소라면 당직 근무자와 불침번들이 새벽의 고요 속에서 버티고 있었을 건물은, 낯선 총소리와 고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니미 씨발, 쏴! 쏘라고!!
-입구 닫아!! 안으로 들어오게 하면 안 돼!!
-미친 새끼가, 문 닫으란 명령 누가 내렸어?! 개새끼들아, 닫지 마!! 열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일 셈이냐!!
고함과 총소리가 계속되는 병영 입구에는 겁에 질린 시민들과 그 시민들을 뒤쫓는 한 명의 주가시빌리가 몰려들고 있었다.
시민들을 추적하는 주가시빌리는 이성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녀석은 주변의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운전자가 버리고 간 트럭을 반으로 찢어버리고, 가로등을 뽑아 던지고, 가까운 시민을-
“여, 여러분! 보셨습니까? 저, 저 괴물이 사람의 팔을 통째로 뽑아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었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도망가는 대신 살인 괴물을 찍는 기자.
“이건 편집이나 조작이 아닌, 실제 상황입니다!!”
“으아니!! 보셨습니까?? 로켓을 정면에서 맞고도 살아 있습니다!!”
“만화에서나 보던 소련의 살인 무술이 현실에 튀어나온 걸까요? 이 붉은 아지랑이는 또 뭘까요?? 대체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기자의 투철한 직업 정신과 상관 없이, 병영 입구와 주가시빌리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좁혀지고 있었다.
“우라아아아아아 – !!”
러시아어가 분명한 고함을 내지른 주가시빌리. 온몸에 피칠갑을 한 녀석의 모습은 누군가 정교하게 만든 악몽처럼 보였다.
그리고 도망치던 여자아이 하나가 넘어진 순간, 병영 입구를 지키던 미군들은 그 악몽을 공유하게 되었다.
-안 돼!!!
주가시빌리는 거칠게 넘어진 아이의 다리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땅을 울리고, 고함, 안 돼, 초인 뭐하고 있, 개새끼야, 멈춰, 으아앙, 막아, 엄마, 누구라도, 제발-
그렇게 수많은 소음이 죽음을 예고한 순간.
이상한 노래가 모든 소음을 꿰뚫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그것이 한국의 군가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알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뒤이어 하늘에서 내리꽂힌 누군가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므로.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구를 무찌르고서]푸확! 아이를 붙잡고 있던 살인 괴물의 몸이 반으로 잘리고, 아지랑이 사이로 피가 튀었다.
아이는 그대로 땅에 떨어질 뻔했으나, 누군가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아이를 붙잡은 존재를 확인한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입을 다물었다.
주변의 무엇보다도 붉은 검과 붉은 눈동자, 그리고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 없는 검붉은 아지랑이까지.
모두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딱 한 명, 진실을 전하는 게 직업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부, 붉은 별!! 여러분!! 붉은 별입니다!! 붉은 별이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