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89)
을 위한 세계는 없다-789화(789/817)
EP.789 교향곡 제10번 E단조 작품 93 (6)
***
-11번 함정으로 접근 중! 준비해!!
듀크 중령은 달려드는 주가시빌리를 확인하며 소리쳤다.
목소리에 반응한 주가시빌리의 붉은 눈동자가 그를 향해 돌아갔고, 듀크는 곧장 샤프슈터를 사용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정확하게 발사된 총알은 주가시빌리의 목과 머리를 노리며 날아갔다. 총알들이 기다란 호선을 그리는 가운데, 주가시빌리가 맨손을 휘둘렀다.
뭐 대단한 대응은 아니었지만, 녀석의 손은 총알을 대신 받아냈다. 터프한 새끼 같으니. 듀크는 곧장 등을 돌려 위치에서 벗어났다.
“우라아아아아 – !!!”
주가시빌리는 벌건 눈으로 듀크를 쫓아왔다. 듀크는 짬짬이 뒤로 돌아 발목과 무릎을 향해 총을 쐈지만, 주가시빌리는 잠깐 움찔하는 게 전부였다.
-하, 좆 같은 빨갱이 새끼.
듀크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빠르게 달려오던 주가시빌리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날카로운 돌을 주워 그를 향해 집어던졌다. 총알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빠른 속도였고, 위력은 총알 이상이었다.
!
돌에 관통당한 복부에 구멍이 났다. 데스나이트가 아니었다면 즉사하고도 남을 상처. 듀크는 바닥을 구르며 소리쳤다.
-아직 멀었냐!?!
애타는 목소리에 호응하듯, 가까운 건물 옥상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준비 끝났어요!”
네크로맨서 딜라, 세계수 결정이 박힌 미리의 완드를 든 그녀는 가까운 건물 옥상에서 지휘자처럼 완드를 흔들고 있었다.
“엎드리세요!”
다음 순간, 딜라가 탁! 손을 휘저었다. 완드를 따라 준비되어 있던 주문이 춤을 추고, 골목 전체에 우드득 – ! 작은 뼛조각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얇은 손가락뼈, 두꺼운 정강이뼈, 휘어진 갈비뼈와 휘어진 척추뼈, 그리고 사람의 두개골까지.
모든 뼈는 불규칙적으로 얽히고설키며 커다란 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초인이라도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고, 로켓으로 부술 수 없을 정도로 두껍게.
이윽고, 완성된 뼈의 벽이 주가시빌리가 달려오던 도로를 통째로 틀어막았다. 주가시빌리의 반응은 간단했다.
녀석은 고함을 지르며 뼈의 벽을 후려치다가, 부술 수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엘프가 준비한 함정이었다.
“묶어!”
엘프의 명령과 동시에, 딜라가 주문을 움직였다. 다음 순간 뼈의 벽이 우드득-! 움직이며 벽을 타고 있던 주가시빌리의 팔다리를 붙잡았다.
주가시빌리는 고함과 함께 벽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옥상의 엘프가 폭탄을 집어 던졌다. 테러리스트답게 정확한 폭파 타이밍이 입력된 폭탄은 그대로 날아가- 주가시빌리 앞에서 폭발했다.
!!!!
코앞에서 폭발을 뒤집어쓴 주가시빌리의 상체가 폭발했다. 피가 한 움큼 쏟아지는 가운데, 녀석을 붙잡고 있던 뼈의 벽이 중 일부가 흔들리며 우르르 무너져내렸다.
쿠구궁…!
그렇게 주가시빌리가 막대한 양의 뼈 아래 깔아뭉개진 직후.
엘프는 네크로맨서를 안은 채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휘릭! 바람으로 속도를 줄인 두 사람이 가볍게 땅에 착지하는 사이, 듀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걸로 터미널 방향으로 가는 길은 다 차단했다. 적어도 이십 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다.
쇠미리는 그의 말에 호응하는 대신, 구멍 난 복부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괜찮으세요?”
-이 상처 말이냐? 괜찮다.
듀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은 뒤, 탄창을 갈아 끼우며 말했다.
-그나저나, 좀 이상하군.
“배에 구멍이 났는데 멀쩡하게 말하는 건 좀, 이상하긴 해요.”
-그거 말고, 다른 부분 말이다.
“다른 부분이시라면?”
-이 새끼들, 숫자가 너무 많아.
듀크는 뼈의 벽 너머, 도심 방향을 보며 말했다. 살기가 뿜어지는 지역마다 한 명씩이라고 해도, 천여명과 싸운 여섯을 더하면 스무명이 넘었다.
이것부터가 쿠바 사태 이후 최대 전력 투입이나 다름없는 판에, 도시 곳곳의 무전을 도청하며 확인한 숫자는 그보다 배는 많았다.
-주가시빌리가 서른에서 마흔 명… 이건 말도 안 되는 숫자야. 내가 살아있던 시절에 소련이 보유하고 있는 주가시빌리 추정치가 세 자릿수가 안 됐으니.
“확실히, 이상할 정도로 많네요.”
엘프, 쇠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 때문에 쉬워 보이지만, 사실 주가시빌리 육성은 국가 단위로 벌이는 미친 짓에 가까웠다.
입문부터가 그랬다. 더 빠르고, 더 강한 현대식 무술에 두루 익숙해져야만 배울 수 있는 살인 무술. 하지만 그렇게 입문해서 완성에 도달하는 사람은 역사상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살기에 잡아 먹혀 이성을 잃은 괴물이 될 뿐.
그래, 냉정하게 말하자면 주가시빌리는 결함 덩어리 무술이었다. 재능 있는 초인이 아니면 익힐 수도 없고, 익혀봤자 대부분은 폭주해서 이성을 잃는… 실패한 무술.
그 무식한 강함과 스탈린의 무술이라는 상징성, 그리고 소련이라는 거대한 국력 덕분에 육성될 수 있던 거지, 본래 정상적인 국가라면 진즉에 폐기하고도 남았으리라.
당장 소련의 해체 당시 남아 있던 주가시빌리들의 머릿수가 스물이 안 됐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아무튼, 듀크는 무전기 주파수를 맞추며 말을 이었다.
-무술도 결국은 기술… 새로운 주가시빌리 육성법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겠지.
“현 모스크바는 그럴 여력이 없을걸요?”
당장 10강에 소련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게 그 증거였다. 모스크바는 소련의 옛 영광이라는 시체를 파먹는 구더기에 불과했다.
새로운 주가시빌리라니, 그런 건 불가능했…
그때, 듀크가 그녀의 상념을 끊었다.
-엘프 아가씨. 체제 경쟁에서 여력 따윈 중요하지 않아.
“….”
-적의 체제보다 우리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면, 국민 따윈 언제든 쥐어짤 수 있지. 도로변에 굶는 아이들이 굴러다니던 시절에도, 빨갱이들은 빵보다 로켓을 만들었다.
“그건….”
-부정할 필요 없다. 이 부분은 내 조국도 똑같으니까. 그리고…
말끝을 흐린 듀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스모그처럼 붉은 아지랑이로 가득 찬 하늘.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다. 저기, 저 살기.
쇠미리는 그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살기가 왜요?”
-우리가 처음 움직일 때보다 확연히 늘지 않았나?
“….”
밤의 어둠 때문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야경은커녕, 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이상할 정도로 많은 주가시빌리와 계속 늘어나는 살기… 쇠미리가 묘한 불길함을 느낀 바로 그 순간.
주파수를 맞춘 듀크의 무전기 너머에서 여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여기는 여명. 듀크 중령님. 응답 바랍니다. 괜찮으십니까?]-배에 구멍이 난 것만 빼면 괜찮다. 그쪽은?
[저도 델타 포스한테 총 맞은 것만 빼면 괜찮습니다. 현재 상황을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델타 포스에게 총을 맞아? 쇠미리가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이쪽은 처음 계획대로 민간인 대피를 끝낸 참이다. 그쪽 상황 설명 부탁한다.
[예, 그러면 우선 아폴로 시티 공산당 대표였던 리보프의 정체부터….]그렇게 시작한 여명의 설명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손을 잡은 트로츠키의 손자와 스탈린의 손자, 살기를 내뿜는 인공 성물, 그리고 CIA와 공산당의 진정한 목표가 냉전이란 사실까지.
정상적인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지만, 듀크는 의외로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뭐, 빨갱이가 언제는 정상이었던가?
아무튼, 한동안 여명이 해준 말을 곱씹던 듀크는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잘 들어라, 천여명. 너도 이미 알겠지만, 빨갱이들은 기본적으로 사기꾼이다. 일이 끝나기 전에는 절대 계획의 전모를 드러내지 않지.
[….]여명은 부정하지 않았다. 비코프, 킴 필비, 베리야… 심지어 스탈린까지, 그가 만났던 모든 빨갱이가 그러했으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예브게니의 목적이 진짜로 냉전이라면… 절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다.
[아이들을 죽이고, 이만한 주가시빌리를 투입한 게 부족하단 말입니까?]-부족하다. 서로가 목 아래에 핵을 겨눈 채 으르렁거리던 시대로 돌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해.
[….]-핵… 혹은 그에 준하는 걸 사용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라.
냉전 시대의 최전선에 있던 군인의 말이었다. 무전기 너머 여명이 침묵하는 사이, 듀크가 말을 이었다.
-괜한 기우일 수도 있지만, 빨갱이를 상대로는 언제나 최악을 상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너는 최대한 빠르게 인공 성물을 회수해라. 우리는 델타 포스에게 가겠다.
[델타 포스에게요?]-빌어먹을 전투로 살기가 늘어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 저쪽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이상, 할 수 있는 모든 걸 틀어막아야지.
그렇게 말한 듀크는 도시의 중앙 방향을 바라보았다. 델타 포스와 코르부스가 전투 중인 그곳은 주변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진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이름보다 대장이란 칭호로 더 자주 불리는 델타 포스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터엉, 터엉, 터엉 – !!
최신예 자동 샷건은 불과 2초 만에 특수처리된 수 백개의 쇠구슬을 흩뿌렸다. 맞은 편에 있던 주가시빌리의 몸이 걸레가 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주가시빌리에게 달려들었다. 너덜너덜한 손으로 반격하는 상대의 손을 막고, 입에 총구를 처박은 다음- 발사.
터엉 – !!
주가시빌리의 머리가 수박처럼 박살 났다. 짙은 살기가 살점을 붙잡았지만, 대장은 개의치 않고 다른 델타 포스를 향해 소리쳤다.
“로기버! 말뚝!”
곧, 그의 로기버라 불린 델타 포스가 가슴 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못을 꺼내 던졌다. 탁! 못을 받아든 대장은 못에 힘껏 마나를 불어 넣은 뒤, 그대로 주가시빌리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
머리를 잃은 주가시빌리의 몸이 펄떡였다. 조금 전 꽂아 넣은 대못에는 강력한 염기성 기체를 내뿜는 마법이 걸려 있는 까닭이었다.
쉽게 말해, 접촉하는 단백질을 녹이는 독가스를 내뿜는다는 뜻이었다.
무적의 재생력이라도, 심장에서 직접 전신으로 퍼트리는 독가스를 중화하려면 십 분은 족히 걸릴 게 분명하리라.
펄떡이는 주가시빌리를 내려다보던 대장은 곧장 자동 샷건을 들고 다음 주가시빌리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
불을 뿜는 총기, 바닥에 나뒹구는 피와 살.
델타 포스의 안면 보호대에 피가 튀고, 주변의 아지랑이가 한층 더 진해졌지만, 델타 포스는 계속 전투를 이어 나갔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 사이로 자부심과 분노가 깃들었다. 그들은 미국이 주가시빌리의 악몽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였으므로.
주가시빌리가 처음 등장하고 벌써 반세기.
기술과 무술의 발전을 거듭한 델타 포스는 완성형 주가시빌리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하물며 완성형도 아닌 폭주 주가시빌리 쯤이야!
중간에 네 명이나 되는 주가시빌리가 더 난입해 총 열 명의 주가시빌리가 그들을 포위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기쁘게 방아쇠를 당겼다.
빨갱이를 더 죽일 수 있는데,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물론, 대장은 그 와중에도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들은 언제나 탄환을 보충할 수 있는 브라우닝이 아니었고,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남은 탄환의 숫자를 헤아려야 했다.
‘남은 탄환은 절반 정도.’
절반으로 주가시빌리 넷을 제압했으니, 전부 사용하기 전에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샷건 탄환이 남은 델타 포스를 전면으로 배치한 뒤, 자신은 뒤로 물러나며 유탄 저격총을 꺼내 들었다.
무술을 활성화하고, 예브게니가 빙의한 주가시빌리의 머리를 정확히 노려 사격하려는 순간.
-잠깐, 정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사람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여자 둘에, 미군 총기로 무장한 남자 하나. 그들은 적이 아니라는 듯 가까운 주기시빌리들에게 사격하며 델타 포스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의 복장이 낯이 익었다. 그가 막 훈련병이던 시절에나 입던 옛 미군 군복.
복부를 붕대로 꽁꽁 싸맨 덕분에 바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분명 옛 군복이 틀림없었다. 델타 포스의 대장은 총을 내리며 싸움에 끼어든 남자를 바라봤다.
[누구냐?]-전투 중지하고 물러나라! 이 전투는 빨갱이들이 파놓은 함정이다!
[무슨 미친 소리를… 관등성명을 대라. 그렇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다.]그가 목소리를 내리깔자, 뒤에 서 있던 두 여자가 뜨끔하며 뒤로 물러났다. 엘프도 아니고, 왜 저런 반응을?
아무튼, 옛 미군 군복을 입은 남자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현재 이 싸움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살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빨갱이들의 계획일 가능성이 높으니, 당장 교전을 중지하고 물러나라!
대장은 주가시빌리와 교전하는 다른 델타 포스의 모습을 확인하며 말했다.
[불가. 우리가 물러나면 이 주가시빌리들이 민간인들을 덮칠 거다.]-터미널로 향하는 길목은 우리 쪽에서 막았고, 차원문과 중앙 숙박시설 방향에도 우리 동료가 가 있다. 그렇게 민간인이 걱정되면 서쪽으로 물러나면서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이나 챙겨라!
[….]그 순간, 한 주가시빌리가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대장은 녀석에게 터엉! 유탄을 발사한 뒤 말했다.
[관등성명.]-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당장 꺼져라. 이곳의 지휘권은….]그 순간, 옛 군복의 남자가 말을 끊었다.
-관등성명을 말할 수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들은 관등성명을 언급하는 게 금지되어 있으니까.
[….]-대신, 이거라면 충분하겠지. 총을 뽑은 자는 총에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대장은 자신도 모르게 총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샤프슈터의 진의였으니까.
그 무엇보다도 그가 미군이라는 증거.
[…선배님이셨군요.]-선후배는 나중에 따지고, 일단은 물러나라. 우리 쪽에 살기를 흡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를 이용해 도시의 살기를 걷어낼 때까지는 교전을 중지해야 한다.
[….]대장은 고민했다. 물론, 고민은 길지 않았다. 빨갱이를 못 죽이는 것보다, 빨갱이의 계획에 이용 당하는 쪽이 더 불쾌했으므로.
달깍, 그가 헬멧에 달린 통신기를 켜고 다른 델타 포스들에게 후퇴를 명령하려는 순간.
유탄에 하반신이 날아간 주가시빌리가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예브게니의 목소리로.
대장이 총을 드는 것보다 먼저, 선배를 따라온 금발의 여성이 움직였다. 펑! 그녀는 무슨 대포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주가시빌리의 머리를 걷어찼다.
[하하하!!]몸과 분리된 머리가 껄껄 웃음을 터트리고, 그 뒤로 교전하는 델타 포스의 총소리가 이어지길 잠시.
여명이 리보프를 처박은 돌무덤이 있는 방향에서, 거대한 존재가 몸을 일으켰다.
***
아폴로 시티 차원문 세관 앞.
라쉬크와 시리는 세관 담장 위에서 피난민이 몰려드는 도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빨갱이들이 당연히 이곳부터 노릴 거란 일행의 예상과 달리, 피난민을 쫓아오는 주가시빌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유형화된 살기가 하늘을 채우고 있었지만, 그 뿐. 저 멀리 중앙 도심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살기를 보아하니, 아마 저쪽에서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
“에헤이, 괜히 준비했네.”
라쉬크가 김빠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옆에서 같은 방향을 보던 시리가 툭,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런 소리 하면 진짜 큰일 생기는 거 몰라요?”
“야, 그런 거 다 미신이야.”
“….”
“생각해봐. 성녀가 난 천여명이랑 손도 안 잡을 거야! 라고 말해서 두 번째가 된 거 같아? 엉덩이도 맞고, 총도 쏘고! 그래서 둘째가 된 거야.”
엉덩이가 뭐요? 시리는 눈을 가늘게 뜨건 말건, 라쉬크는 계속 지껄였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사실은 뭐냐.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는 거지. 너도 형부 형부 노래만 부르다간, 부리 딱딱 까마귀한테도 밀린다.”
“…라쉬크. 진짜 미쳤어요?”
“아, 차라리 미친 거면 좋겠다. 기껏 열심히 준비했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피난민 구경만 하고 있으니….”
“….”
“그래, 뭐, 편한 건 좋다 이거야. 하지만 성도, 한국, 그리고 이곳에서까지 내가 중요한 일을 못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응? 이래서야 천여명, 그 자식이 날 물약 셔틀로만 볼 거 아니야.”
거기까지 말한 라쉬크는 푹 한숨을 쉬었다. 시리는 성녀가 그랬던 것처럼 라쉬크의 엉덩이를 걷어차려다가, 발을 멈췄다.
라쉬크의 말에 공감해서? 아니.
저 멀리, 도심에서 몸을 일으키는 무언가 때문에.
“어…?”
그것은 붉은 살기로 이루어진 덩어리처럼 보였다. 갓 태어난 신생아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고, 이제 막 부화하는 달걀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컸다.
아폴로 시티에서 가장 높은 빌딩과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로, 세관으로 들어차는 모든 피난민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라쉬크는, 검 손잡이를 꽉 쥔 시리를 향해 물었다.
“저, 저거 내가 입을 털어서 나타난 건 아니지?”
“말보다는 행동이라면서요.”
“어….”
“뭔지 몰라도, 느낌이 좋지 않아요. 일단 행동하….”
시리가 검을 쥔 그 순간, 그것이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은.]그것은 입이 없었으나, 너무나도 분명한- 리보프의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 받을 일로 여긴다.]***
다섯 번째 성물을 회수한 여명은 공중에서 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살기 덩어리 속 리보프가 내뱉은 말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현존하는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으로….]“…타도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여명은 그게 무슨 말인지, 어디에 적힌 문장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848년,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최초로 출판한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단.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프롤레타리아가 혁명으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여명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으나, 리보프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죽여라.]무시무시한 선언을 끝으로, 도시를 뒤덮은 살기가 내려앉았다.
그 아래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살기가 도시를 뒤덮고, 정확히 35분 지난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