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92)
을 위한 세계는 없다-792화(792/817)
EP.792 교향곡 제10번 E단조 작품 93 (9)
***
사람은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터스키기 연구소에서 태어난 구더기 공주, 라쉬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연구소를 불태웠음에도, 고문 같은 인체 실험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원래 내장이 돌아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라쉬크는 그 사실에 슬퍼하는 대신, 현재를 마주했다.
실험의 부작용으로 변한 진한 분홍빛 눈동자 위로, 아폴로 시티 세관 앞 도로가 비췄다. 붉은 살기와 살기에 오염되는 시민들로 가득한 도로가.
도로를 똑바로 바라보던 그녀는 땅을 짚은 자세 그대로 마나를 움직였다.
심호흡 세 번, 시발 두 번, 그리고 각오 한 번.
‘가자 벌레들아. 인사 한번 안 해본 인간들을 살리러 가자.’
그녀의 각오가 울린 직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벌레와 곤충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시 곳곳을 날아다니던 각다귀, 노린재, 비단벌레, 벌, 나비, 파리, 나방, 쓰레기통과 하수도 아래 숨어있던 구더기, 며루, 심지어 사육장에서 키우던 밀웜까지.
성경 속 재앙이 이랬을까? 그녀의 의지를 따라, 도시 전체의 벌레들이 도로로 쏟아졌다.
날갯짓하고, 꼬물거리고, 꿈틀거리는 벌레의 파도는 압도적이란 표현으로 부족했다.
어찌나 대단한지, 수만 명의 시민들이 일제히 기겁하고, 살기에 잠식된 주가시빌리들조차 바짝 정신을 차릴 정도였다.
-으아악!!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비켜! 비키라고!!
첫 번째 피해자는 눈이 벌게진 채 자해하던 오크였다. 녀석은 하수도에서 튀어나온 구더기의 파도에 그대로 휩쓸렸다.
다음은 자신의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주먹을 휘두르던 남자였다. 모기를 비롯한 날벌레 떼가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코와 입이 막힌 남자는 아이 대신 허공에 주먹질하다가 쓰러졌다.
그 후에는 서로 물어뜯던 커플도, 맥콜을 집어던지던 드워프도, 성난 얼굴로 시민을 두들겨 패던 군인도… 살기에 잠식된 모두가 벌레에게 습격당했다.
더 이상 살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누구도 죽이지 못하도록.
-꺄아아악!!
-사, 살충제! 살충제 없어?!
-불! 불을 붙여- 어억!
물론, 사정을 모르는 시민들은 기겁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종종 불을 지르려는 멍청이들이 있었지만, 라쉬크는 세삼하게 벌레를 움직여 그들을 제압했다.
삼류 공포 영화처럼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비명이 커지면 커질수록, 눈에 띄게 살기가 줄어들었으니까.
‘막을 수 있어.’
라쉬크는 계속 벌레를 움직이며 확신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마나를 사용한 탓일까? 내장이 뒤틀리고, 고막이 망가진 듯 소리가 먹먹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히죽, 웃음이 나왔다. 천여명, 그 자식이 이걸 보면 뭐라고 할까.
칭찬? 아니면 감탄? 뭐가 됐든, 적어도 앞으로 핑크 데스란 말은 쓰지 않겠-
-쿨럭!
그때, 목구멍으로 피가 역류하며 눈앞이 흐려졌다. 연금술사인 그녀는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힘을 썼다.
나름대로 조절한다고 한 건데, 완전히 실패해 버렸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나 넓은 공간에서, 이만한 양의 벌레를 조종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이제 멈추자. 그녀의 마음속 연금술사가 속삭였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운이 좋아야 불구가 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라쉬크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벌레를 더 세분화해서 이미 주가시빌리가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나눠 각각 도로 옆으로 밀어냈다.
그때마다 장기를 쥐어짜는 고통이 몸을 강타하고, 땅을 짚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먹먹했던 귀는 이미 고장 난 듯, 삐이이- 이명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그만 둘까? 이 정도면 그 자식도 열심히 했다고 인정해 주지겠지. 스스로에게 물었던 라쉬크는 대답 대신 혓바닥을 꽉 깨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 있겠냐.’
이제 와서 자신만 챙기기엔 그녀는 용사 파티와 너무 가까워졌다. 용사를 따라 운명을 바꾸는 자들, 그중에서도 그녀처럼 연구소에서 태어난 소녀들을 너무 오래 봐왔다.
홍세티, 성녀, 살로메- 연구소에서 도망쳐 마약상이 되었던 자신과 달리, 끝까지 세상과 맞선…
…좋은 사람들.
그래, 그녀가 본 용사 파티는 전부 좋은 사람들이었다. 복수에 눈이 먼 상태에서도 발아래를 살피고,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거는, 빌어먹게 좋은 사람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지만, 라쉬크는 자신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녀가 걸어 온 구불구불한 길은 바꿀 수는 없겠지만, 이제부터라도 곧은 길을 걷고 싶었다. 언젠가 호문쿨루스로 부활할 그녀의 자매에게 당당하기 위해서, 다른 좋은 사람들과 나란히 서기 위해서.
뭐, 쇠똥구리도 용사가 되는데, 구더기 공주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
그 순간, 한 번 더 핏물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제기랄. 라쉬크는 치미는 고통을 참으며 구더기를 움직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자. 녀석이 이기고 올 때까지만.
하지만 ‘조금만’ 은 끝없이 연장됐다. 대략 5분 정도가 지난 시점부터, 라쉬크는 시간을 세는 걸 포기했다. 통증 때문에 시간 감각이 흐려진 까닭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도로 위의 시민들이 가만히 있으면 벌레가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혼란이 잠잠해질 무렵.
라쉬크의 감각과 연결된 수천 마리의 벌레가 동시에 경고를 보냈다.
‘위험!’
고개를 든 라쉬크의 시야로, 벌레 사이를 뚫고 낙하하는 주가시빌리 한 명이 보였다.
살기에 잠식된 시민이 아니라, 빨갱이들이 처음부터 준비했던 진짜 주가시빌리.
라쉬크는 곧장 단검을 꺼내 반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긴커녕, 단검조차 쥘 수 없었다. 혹사 당한 근육이 축 늘어진 까닭이었다.
이런 시발.
하다못해 도망칠 체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죽음을 예상한 라쉬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 직전의 주마등일까? 아쉬운 것들이 연달아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한 푼도 못 쓴 통장 잔고, 지우지 않은 하드 드라이브, 창고에 모셔둔 연금술 재료, 그리고 떼지 못한 처녀 딱지.
‘불쌍한 내 인생. 이럴 줄 알았으면 성녀처럼 방탕하게 살걸!’
라쉬크가 유언치고는 어딘가 이상한 생각을 삼키는 찰나.
누군가 그녀와 주가시빌리 사이로 착지했다.
***
라쉬크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순간, 차원문 주변은 문자 그대로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폭탄 투하로 인간을 죽이는 방법을 훈련시킨다. 그러면서도 고작 비행기에 야한 낙서한 걸 가지고 지랄하지!
-나는 공포를 봤다! 하지만 누구도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자격은 없어! 우리에겐 죽일 자격이 있지만, 심판할 자격은 없으니까!
-공포와 친해져야 해! 도덕적 공포는 우리의 모두의 친구다! 하지만 만약 친구가 되지 못하면…? 가장 무서운 적이 되겠지!
세관을 지키던 군인 중 일부가 살기에 장악당한 탓이었다.
군인이란 직업 탓인가? 살기에 장악당한 군인들은 하나 같이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이며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공격했다.
총, 칼, 심지어 수류탄을 꺼내 던지는 놈까지.
하지만 피해가 크게 번지는 일은 없었다. 살기가 세관을 덮치기 전에 미리 와서 위험을 알린 초인, 시리 덕분이었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느껴지는 분은 무장을 해제하고, 팔다리를 묶으세요!”
“아무 문제가 없더라도 가까운 사람들을 확인하세요!”
“혹시라도 눈이 붉어진 사람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제압하세요!”
목소리에 마나를 담은 시리는 세관 곳곳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폭주하는 군인의 제압을 도와주는 건 덤이었고.
하나부터 열까지 외부인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나, 그 사실을 지적하는 군인은 아무도 없었다.
저 멀리서는 거대한 살기 덩어리가 땅을 울리고, 바로 옆에서 동료가 미쳐가는 상황 아닌가.
이런 상황에 온 힘을 다해 차원문을 지키는 초인을 마다할 정도로 멍청한 군인은 이 자리에 없었다. 있어도 벌써 살기에 잠식됐거나.
아무튼, 세관의 군인들은 암묵적으로 시리의 행동을 방조했다. 심지어 역으로 그녀를 지원하는 군인마저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역시 미군은 미군이라고, 세관 내부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부상자는 속출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장교진이 몰살당한 상황이라는 걸 감안하면 완벽에 가까운 대응이었다. 상황이 안정된 걸 확인한 시리와 군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
!!!!
그때, 도시 저편에서 충격파가 밀려왔다. 주변을 채운 살기가 출렁거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세관에 있는 모두가 충격파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혜성처럼 밝은 빛이 살기 덩어리를 넘어 하늘을 가르는 광경을.
누군가는 감탄했고, 누군가는 기도했으며, 또 누군가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떤 반응을 보였건, 모두의 머릿속으로 떠오른 질문은 똑같았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닌 아폴로 시티에서, 용사가 트로츠키의 후손을 숙청한다는 걸 대체 누가 예상하겠는가?
여명이 스탈린에게 인정받은 용사라는 걸 아는 시리조차 멍하니 혜성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시민들 사이에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는 달랐다. 그는 리보프도, 여명도 신경 쓰지 않았다.
혁명이 시작되기 전부터 세관 앞에 줄을 서 있던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차원문에 7MZh3, 속칭 ‘스탈린의 솔방울’ 을 투척하는 것뿐이었다.
달깍-
초인이 아니었던 공산주의자는 솔방울에 마나를 불어 넣는 대신, 핀을 뽑았다.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된 솔방울 내부의 마법진이 활성화되며 솔방울이 남자의 손을 떠났다.
시리가 날아가는 솔방울을 눈치챈 건 필연이었다. 피눈물의 환상을 자주 사용했던 그녀는 공산당 특유의 마나 사용법에 익숙했고, 심지어 스탈린의 솔방울을 코앞에서 본 적도 있었으니까.
‘아.’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그녀의 행동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검 손잡이를 쥐었다.
주특기인 화염 마법을 쓴다거나, 하다못해 소리친다는 선택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뭘 해도 늦을 테니까. 그녀는 저 솔방울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검과 검집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검집에 주입된 마나가 레일을 만들고, 검기에 싸인 검이 레일 위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발도.
그녀의 이름을 딴 검과 할머니의 무술이 결합하며 검집을 떠나는 순간, 검집 끝에 달린 기계 장치가 마지막으로 가속을 더 했다.
터엉 – !
흡사 샷건을 쏘는 듯한 소리와 동시에, 가속이 중첩된 검기가 공기를 갈랐다. 주변에 서 있던 미군 중 극히 일부만이 눈치챌 정도로 빠른 일격.
눈 깜빡할 사이에 날아간 검기는 솔방울과 허공에서 그대로 충돌했다.
!
콰직! 솔방울의 정중앙이 찌그러졌다. 베었다기보단 후려쳤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일격이었고, 결과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부의 마법진과 마석이 손상된 솔방울은 폭발은커녕,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뭣?”
뒤늦게 공산주의자가 고개를 돌렸을 땐, 검을 회수한 시리가 그의 가슴에 비각술을 펼치고 있었다. 거의 날아가는 속도로 가슴을 걷어차인 공산주의자는 다른 솔방울을 꺼낼 새도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자, 잠깐! 오해, 오해입니- 커헉!”
녀석이 무어라 변명을 지껄여댔지만, 시리는 망설임 없이 녀석의 턱을 후려쳤다. 형부가 아닌 다른 빨갱이에게 베풀 자비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일격에 기절한 공산주의자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시리는 그제야 아차,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턱뼈가 부러질 정도로 강하게 때려서? 아니, 미군들이 보기엔 그녀가 갑자기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오해할만한 상황이라서.
시리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미군들 중 누구도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눈을 크게 뜬 채, 그녀의 뒤편, 그러니까 차원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시리는 미군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제 막 차원문을 넘어오는 거대한 수룡을 보며 미군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쿵!
커다란 발소리와 함께 차원문을 넘어온 수룡의 지느러미 위에는 그녀의 셋째 언니 네티와… 군복을 입은 미국의 10강이 서 있었으니까.
“지원군 등장이오!”
언니가 경박하게 등장을 알리는 가운데, 브라우닝이 수룡의 위에서 뛰어내렸다. 아폴로 시티에 발을 디딘 그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손가락을 들어 도시 저편에서 보이는 살기 덩어리를 ‘겨눴다.’
추가적인 손짓이나 몸짓은 없었다. 하지만 세관에 있는 모두가 브라우닝이 진의 무술을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하늘 위에서 갑자기 나타난 미사일 세 발이 살기 덩어리를 강타했으므로.
!!!
섬광과 굉음이 피어오르건 말건, 브라우닝은 손을 내리며 말했다.
“보고는 필요 없다. 나는 바로 전선으로 갈 테니, 남은 병력은 차원문을 사수해라. 알겠나?”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미군들이 반사적으로 경례를 올리는 가운데, 다리에 마나를 모은 브라우닝은 그대로 세관 담장 너머로 몸을 날렸다.
***
뭐지?
죽음을 기다리던 라쉬크는 슬쩍 눈을 떴다. 아무리 기다려도 주먹이 날아오지 않은 탓이었다.
벌레들이 보내는 신호를 보아하니, 극한의 상황에서 시간이 느리게 느껴지는 뭐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의심과 함께 눈을 뜬 라쉬크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달려들던 주가시빌리를 꽝꽝 얼려 제압한 용사의 모습이었으니까.
라쉬크가 멍하니 여명을 바라보는 사이, 여명은 고개를 돌려 입술을 벙긋거렸다.
청각이 망가진 라쉬크는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명이 재차 말하자, 입술 모양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괜. 찮. 아. 요?
“당장 뒤질 거 같은 거 빼면, 괜찮아.”
그러자 여명이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제. 손. 가. 락. 어. 떻. 게. 보. 여. 요?
“검지는 예쁘고, 중지는 엿 같네. 그리고 엄지는… 굳은살이 존나 멋있게 보인다. 빗자루 잡아서 생긴 굳은살이야? 이야, 완전 반할 거 같다.”
다. 행. 이. 네. 요. 농. 담. 할. 정. 도. 로. 괜. 찮. 으. 셔. 서.
“….”
좀. 올. 드. 한. 농. 담. 이. 라. 서. 그. 렇. 지.
“올드? 너 지금 내가 나이 많다고 꼽주-”
그 순간, 라쉬크의 몸이 균형을 잃고 뒤로 풀썩- 쓰러졌다. 여명은 다급히 그녀의 몸을 붙잡으며 말했다.
무. 리. 했. 어. 요. 이. 제. 좀. 쉬. 세. 요.
“말 안 해도 쉴 거야… 그래도 저기, 저 도로 보이지? 난 할 일 다 했다?”
라쉬크가 벌레로 뒤덮인 도로를 가리키며 말하자, 여명은 도로와 그녀를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예. 잘. 해. 주. 셨. 어. 요.
“알면 됐어.”
뿌듯하게 웃은 그녀가 벌레들에게 몇 분만 더 유지하다가 흩어지라는 명령을 내리는 사이, 여명이 조심스레 그녀를 바닥에 눕혔다. 라쉬크는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물었다.
“야, 이걸로 나도… 조금은 좋은 사람이 된 걸까?”
예.
즉답이었다. 라쉬크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물었다.
“어느 정도로? 알기 쉽게 비유로 대답해 줘.”
음. . . 성. 녀. 에. 조. 금. 못. 미. 치. 는. 정. 도?
“야 이, 씨, 그건 욕이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라쉬크의 얼굴에는 기다란 미소가 고였다.
퍽 만족스러운 미소였으나… 아쉽게도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지막에 끼어든 용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안 돼! 죽기 전에 내 비늘 값 주고 가!]***
기절한 라쉬크를 바닥에 눕힌 여명은, 고개를 돌려 세관 방향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시리와 네티, 시조새로 변신한 오르세 라날, 그리고… 브라우닝.
브라우닝이라니. 예상하지 못한 지원군이었다. 살짝 놀란 여명이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기 전에, 네티가 쪼르르 다가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형부, 놀라지 마세요. 전부 성녀님의 예지를 따라 데리고 온 거니까요.”
“예지? 무슨 예지?”
“음, 첫 번째 예지는 브라우닝이 태평양 어딘가에 낙오될 거란 예지였어요. CIA랑 미 해군이 뭘 짰다는데, 성녀님도 잘 모르는 눈치더라구요.”
“….”
“그래서 저희가 며칠 전에 먼저 라날을 데리고 출발해서, 바다에서 주워 왔죠.”
아무리 그래도 주워 왔다니… 여명이 황당함을 삼키건 말건, 네티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예지는, 다른 언니들은 지금 당장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는 예지여서… 일단 저만 왔어요. 모두 한국의 일이 끝나는 대로 전부 합류하실 거래요.”
“막내는?”
“막내는 살기에 노출되면 미쳐 날뛸 거라고 해서, 성녀님이 직접 제외했어요.”
“성녀가 직접? 설마… 쐈어?”
네티는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네티가 살짝 덧붙였다.
“뭐, 카멜 클러치를 쓰긴 했지만요.”
“카멜… 뭐?”
“나중에 직접 보세요.”
그녀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뒤에 서 있던 브라우닝이 크흠! 헛기침한 덕분이었다. 네티가 눈치껏 뒤로 물러나자마자, 브라우닝이 물었다.
“현재 상황은?”
여명은 딱 전투에 필요한 만큼만, 정확히 요약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공산주의자의 발호, 전염되는 살기와 주가시빌리, 예브게니와 인공 성물, 그리고 불사에 가까운 리보프까지.
짧은 설명이 끝날 무렵, 브라우닝은 여명을 보며 중얼거렸다.
“빨갱이 전용 피뢰침….”
뭐요? 여명이 정색하자, 브라우닝은 크흠,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상황은 이해했다. 계획은 있나?”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무한한 재생력을 괴물을 죽이는 방법은 꽤나 복잡했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여명은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
“일단은, 살기가 퍼지는 것부터 막아야 합니다. 적어도 인공 성물과 주가시빌리를 한곳에 모아야 승산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네가 인공 성물을 모으는 동안, 나는 저… 트로츠키 혈통을 상대하면 되겠나?”
“상대하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아예 한 곳에 붙들어 놓고, 계속 재생에 집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자 브라우닝은 슬쩍, 리보프를 둘러싼 살기 덩어리의 크기를 가늠한 뒤 대답했다.
“녀석이 도망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대충 30분 정도는… 숨도 못 쉬게 할 수 있네.”
“도망치지만 않으면 된다…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장담할 수 있네. 조금 전 쏜 미사일에 타격을 입은 것만 봐도 확실하지.”
“그러면….”
말끝을 흐린 여명은 손을 뻗어 아폴로 시티 도심 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그럴싸한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곳으로 리보프를 몰고 가겠습니다.”
“함정?”
“도시 지하에 파묻힌 옛 공군 기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떨어트리면 저 덩치로는 못 빠져나올 겁니다.”
그건 군사기밀인데? 브라우닝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여명의 위아래를 훑었다. 하지만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정보 길드인 푸른 쥐의 사위 아닌가. 이 정도 기밀을 아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뭐, 아무튼. 브라우닝은 재차 질문했다.
“리보프를 이동시킨 뒤에, 인공 성물을 모을 생각인가? 아니면 인공 성물을 모은 뒤에 이동시킬 생각인가?”
“동시에 할 겁니다.”
“…동시에?”
여명은 설명 대신 푹, 손날로 자기 팔을 찔렀다. 옆에 있던 라날이 화들짝 놀랐지만, 찔린 자리에서는 피 대신 마나가 섞인 바람이 흘러나왔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본 브라우닝은 하, 헛웃음을 흘렸다.
“…분신이었군.”
“예, 본체는 지금도 리보프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쿠구궁 – !! 살기 덩어리 쪽에서 묵직한 굉음이 들려왔다. 브라우닝은 아지랑이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여명의 본체와 까마귀를 확인하며 말했다.
“다음으로, 주가시빌리들은 어떻게 한곳으로 모을 생각인가?”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여기서 인공 성물을 더 회수하면, 예브게니는 무조건 인공 성물을 되찾기 위해 주가시빌리를 보낼 겁니다.”
“남은 주가시빌리 전부가 몰려든단 소리로군. 그러면 그 주가시빌리의 상대는….”
여명은 라날을 외면한 채, 처제들을 차례대로 바라보며 말했다.
“도심에 제 동료들과… 델타 포스가 있습니다.”
“…델타 포스? 그 친구들은 자네 말은 절대 안 들을… 아.”
브라우닝은 뒤늦게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나보고 설득하란 말이군.”
“예. 직속상관이시잖습니까.”
여명의 말마따나, 브라우닝과 델타 포스 모두 미군 초인군 소속이었다. 하지만 브라우닝은 어딘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알겠네. 녀석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하지만… 조언 하나 하겠네. 절대, 절대로. 그 친구들은 믿지 말게.”
“…?”
“연구관찰단이나 델타 포스 같은 특수 부대는 나보다 윗선의 명령을 받네. 그러니 언제 배신해도 이상하지 않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게. 알겠나?”
미필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브라우닝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리라.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브라우닝이 아공간에서 커다란 기관포를 꺼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저 벌레는 가급적 빨리 치우게. 예전에 정보국에서 추적하던 암살자가 저것과 똑같은 힘을 다뤘거든. 내버려 두면 괜한 오해 받을 걸세.”
“….”
그 암살자가 맞습니다. 애써 대답을 삼킨 여명은, 라쉬크가 기절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같은 시각, 살기로 뒤덮인 아폴로 시티 도심.
주가시빌리들의 심장에 차례차례 대못을 박아 넣던 독화는 미사일의 불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샤에서 대전차 미사일이라. 오스틴 중장이 온 건가.
하필이면 군과 엮인 10강이 오다니. 운이 나빴다. 그에게나, 여명에게나.
잘그락- 그는 쇠사슬과 연결된 관에 주가시빌리들을 안장하며 생각했다.
‘이대로 물러날까.’
여명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구할 사람은 전부 구했다. 다섯 공산주의자가 모인 상황도 아니니, 괜히 브라우닝과 마주치지 않고 이대로 물러나는 게 상책이었다.
고민이랄 것도 없었다. 도시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독화는 마지막 관의 뚜껑을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관에 누워있던 흑인 주가시빌리가 부릅 눈을 떴다.
관 뚜껑을 든 독화는 물론이고, 눈을 뜬 주가시빌리조차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
살기 섞인 침묵이 무겁게 두 사람 사이를 채우는 가운데, 관에 누운 주가시빌리가 먼저 말했다.
“허크.”
“…야코프.”
“평소보다 표정이 좋군. 무슨 좋은 일 있나?”
가슴에 대못이 박힌 사람의 말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였다. 독화는 자신도 모르게 관 뚜껑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좋은 일은 무슨, 평소랑 똑같지.”
“자네는 항상 그런 식이었지. 꼭 미제 첩자 놈마냥 재미가 없었어… 하지만 오늘은 용서하겠네. 우리가 드디어 죽을 수 있는 날이니.”
“…뭐?”
독화가 놀라건 말건, 야코프라 불린 흑인은 평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께서 내게 속삭이셨네. 오늘, 새로운 서기장의 임명식이 있다고.”
“….”
“같이 가겠나?”
독화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사이, 리보프가 있는 방향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축제를 알리는 폭죽 소리처럼, 크고 격렬한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