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805)
을 위한 세계는 없다-805화(805/817)
EP.805 code name Joe -2 (2)
***
이야기는 도시를 벗어난 여명이 기절하듯 쓰러진 직후부터 시작됐다.
‘어? 형부?’
그가 쓰러지는 걸 본 일행들은 화들짝 놀라 여명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여명의 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마나, 심장, 근육 모두 정상. 쌓인 피로 때문에 잠들었을 뿐이었다.
세계수의 마나로 여명의 몸을 훑은 미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로는 감탄했다.
밤새 빨갱이들과 싸우고 미사일에 핵폭탄까지 맞았는데, 고작 잠든 게 전부라니.
하지만 그런 감탄과 상관없이, 일행은 곧 새로운 고민과 마주해야 했다.
누가 여명을 업을 것이냐… 가 아니라, 델타 포스를 어떻게 할 것인가.
코르부스에게 제압된 다섯 명과 브라우닝에게 무기를 받아 움직이는 한 명. 총 여섯 명의 델타 포스를 죽여야 할까, 아니면 살려 보내야 할까?
네티와 시리는 당연히 죽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계속 도와줬으면 모를까, 형부 뒤통수를 친 시점에서 다 죽은 목숨이죠.’
‘시체는 깨끗하게 소각하면 돼요.’
하지만 의외로, 미리가 반대표를 던졌다.
‘아니, 델타 포스는 죽이지 않을 거야.’
엘프가 미군을 살려주잔 말을 할 줄 몰랐던 희생양 자매가 놀랐으나, 미리는 나름의 논리로 그녀들을 설득했다.
‘델타 포스한테 뒤통수를 맞은 당사자는 여명이니까, 여명이 정하는 게 맞아. 그리고 또… 듀크 중령이 델타 포스를 살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잖아? 너희도 알다시피 여명은, 데스나이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거고.’
여명은 어르신의 부탁에 약하다. 자매들 또한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두 사람은 순순히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집단이 아닌 개인의 의견이 더 중요하다니… 형부가 서기장이 된 게 실감 나는 걸요.’
‘형부는 제가! 제가 업고 갈래요!’
시리가 뼈있는 농담을 던지거나, 네티가 노골적으로 여명을 노리기도 했지만- 뭐, 아무튼.
무사히 비료길의 합류 지점에 도착한 일행은 오크들이 남겨 놓은 야영 물품으로 임시 거처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친 양탄자 위에 조심스레 여명을 눕힌 뒤, 코르부스에게 델타 포스를 전부 살려서 잡아 와 달라는 무전을 보냈다.
그녀라면 델타 포스 정도는 손쉽게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참 뒤에 돌아온 코르부스의 답변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이런 질문 해서 미안하오만, 반드시 살려서 데리고 가야 하오?]‘예?’
[양복 차림의 흑인과 미군들이 델타 포스를 쫓고 있소. 총 쏘는 모습을 보아하니 죽일 생각으로 보이오만.]‘….’
내부 숙청? 아니면 뒷정리? 미군의 진심이 무엇이건 간에, 미리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듀크 중령님은 뭐라고 하세요?’
[그 양반은 무기를 가져온 델타 포스에게 무기를 받은 뒤, 잡아 놨던 델타 포스들과 함께 미군에게 대응하고 있소.]‘….’
[미군들이 본인을 알아보면 귀찮아질 테니 끼어들지 말라 하였소만… 제자에게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지 물어봐 주시오.]‘어… 여명은….’
미리는 잠든 여명의 얼굴을 확인한 뒤 말했다.
‘…지금 대답하기 어려운 상태에요.’
[뭐라? 설마 크게 다친 것이오?]‘다친 건 아니고 그냥 기절한 상태인데….’
여명을 깨워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기장은 당의 모든 걸 지배하는 지도자지만, 그게 쉴 시간도 없이 모든 걸 돌봐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여명은 스탈린처럼 편집증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인간성도 묻어버린 스탈린과 달리, 여명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정도 일은 저희 선에서 끝내는 게 좋겠어요. 코르부스, 위치를 알려주세요. 제가 갈게요.’
[지하 공군 기지 잔해에서 서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폐허… 잠깐, 잠깐만 있어 보시오.]‘네?’
[이상한 자가 끼어들었소.]***
…거기까지 말한 미리는 슬쩍, 여명의 얼굴을 확인했다. 요약을 좋아하는 여명이 긴 이야기를 싫어하면 어쩌나 싶어서.
하지만 여명은 요약은커녕,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살짝 웃었다.
서기장의 미소… 미리는 표정이 풀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성녀가 지금 그녀의 얼굴을 봤으면 노발대발했겠지만, 미리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성녀는 용사와 성녀라는 전통적인 커플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나. 이제 자신도 나름의 위치를 잡을 때였다.
예를 들어 국방 인민 위원장이나, 상무회 주석처럼 서기장과 밀착하는…
“크흠, 뒷이야기는 본인이 이어가도 되겠소?“
코르부스가 한마디 하고 나서야, 미리는 뒤늦게 망상에서 빠져나왔다.
뒤에 있던 라쉬크가 쯧쯧 혀를 차고 미리가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이는 가운데, 코르부스가 말을 이었다.
“델타 포스와 미군의 교전에 끼어든 건, 긴 대검을 든… 히스패닉 남성이었소.”
대검을 든 히스패닉 남성? 떠오르는 얼굴이 있던 여명이 물었다.
“혹시, 코가 크고 눈동자가 마약한 사람처럼 탁한 남자였습니까?”
“…맞소. 아는 사람이오?”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포시스… 삼지창을 든 별의 아들이자, 미국의 세 번째 대행자였던 남자.
“포시스. 제가 저번에 말씀드린 미국의 세 번째 대행자입니다. 그가 뭘 했습니까?”
“대행자… 그런 것치고는 대단한 일은 하지 않았소. 그가 양복쟁이 흑인과 얼굴을 맞대고 무어라 떠들자, 미군이 전부 물러갔으니.”
“그냥 물러갔다고요? 아무 일도 없이요?”
“아무 일도 없던 건 아니오만… 이걸… 흠….”
코르부스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 부리를 쭈욱 내밀었다가, 잠시 후 다시 부리를 열었다.
“앞 머리카락이 잘렸소.”
“…예?”
“흑인이 뒤로 물러난 직후, 그 포시스란 자의 앞 머리카락이 몽땅 잘려 나갔소. 칼로 벤 것처럼 반듯하게.”
“….”
스승이 보지 못한 무언가라면… 권능. 그것도 시간과 관련된 대행자의 권능이 틀림없었다.
‘정체 모를 흑인… 그가 첫 번째 대행자인 건가’
여명이 새롭게 안 사실을 마음속에 적립하길 잠시. 코르부스는 계속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어쨌거나, 그렇게 일이 끝난 직후, 그 포시스란 자는 남은 델타 포스와 듀크에게 같이 가자 제안했소. 델타 포스는 찬성했고, 듀크 또한 잠시 고민한 뒤 찬성했소.”
“…중령님이?”
“그렇소. 딜라가 몸의 수리를 끝내는 대로 도시를 떠나겠다 하였소.”
“….”
그래서 딜라와 중령님 모두 이곳에 없는 거였나. 갑작스러운 이별이 언제나 그렇듯, 여명의 혓바닥 위로 씁쓸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여명은 한 가지 의문을 떠 올렸다.
“녀석이 대체 뭐라고 했길래, 중령님이 그런 마음을 먹으신 겁니까?”
당연히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내뱉은 질문이었지만, 의외로 스승님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미국인이라 하였소.”
“예?”
“내게도 함께 가자고 제안했소. 본인이 제자를 두고 어디를 가겠소만, 일단 하는 말을 듣긴 했소. 포시스 그자는… 이렇게 말했소.”
코르부스는 여관 창문 바깥, 폐허가 된 도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미국인이다. 헌법을 유린하는 가짜가 아닌, 진짜 미국인.”
***
같은 시각, 제미니 자치령 외곽의 시골 여관.
말없이 지구산 플라스틱 컵을 닦던 주인장이 홀에 준비된 TV를 보며 혀를 찼다.
“아이고, 새 변경백님께서 곤란하시겠구먼.”
그러자 바에서 술잔을 비우고 있던 중년인이 의아한 듯 TV를 바라보았다.
수십 년 전에 지구에서 수입된 낡은 TV 화면에는, 붉은 별이 핵폭발 속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방송되고 있었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서기장이…! 핵으로도 죽일 수 없는 서기장이 탄생했습니다!]호들갑을 떠는 앵커의 목소리를 듣던 중년인은, 주인장을 보며 물었다.
“주인장, 핵을 견딘 건 붉은 별인데, 왜 새 변경백이 곤란해진다는 것이오?”
주인장은 탁, 컵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옛날 변경백님만 핵을 버텼다면 모를까, 이제 사람들이 새 변경백님을 볼 때마다 붉은 별과 비교할 거 아닙니까. 젊으신 분인데… 앞으로 마음고생 하실 거 생각하면 짠합니다.”
어딘가 걱정이 가득한 말투. 중년인은 픽 웃으며 물었다.
“많은 이들이 변경백으로 인정하지 않던데. 주인장께선 새 변경백을 인정하나 보오?”
그러자 주인장은 슬쩍 주변을 살핀 뒤, 의미심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소싯적에 변경백령 전쟁에 참여한 용병입니다. 그래서 변경백님의 젊은 시절 모습을 아주 여러 번 봤습죠.”
“오호, 그래서?”
“근데 글쎄, 새 변경백님의 외모가 전 변경백님과 판박이지 않습니까.”
“….”
“황제께서 사리분별을 못 하신다지만, 용사의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새 변경백을 허투루 책봉하셨을 리가 없습죠. 새로운 변경백은… 분명 전대 변경백 전하의 숨겨진 아들이실 겁니다.”
중년인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빙그레 웃었다.
“참전용사셨군.”
“참전용사라니, 아닙니다. 두메아 가주님이나, 황태자님의 벨라디바 같은 분이 용사시지요.”
“그래도 참으로 놀라운 식견이시오. 본인이 오늘 큰 가르침을 받았소.”
중년인은 답례라도 되는양 새 술을 주문했다. 이런 허름한 마을에서 쉽게 팔리지 않는 비싼 아샤의 술이었고, 주인장은 희희낙락 웃으며 중년인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술잔을 모두 비운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장이 물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주무시고 가시지요. 이 주변에 있는 숙박시설은 저희 여관이 유일합니다.”
“발길이 바빠서, 아쉽지만 자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소.”
그렇게 말한 중년인은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이것은?”
“참전 용사에게 주는 작은 성의요.”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직후, 가죽 주머니를 열어 본 주인장은 화들짝 놀랐다. 기껏해야 몇 센트 들어있을 줄 알았던 주머니 속에는, 금화가 들어있었으니까.
그제야 중년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주인장이 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중입니까?”
“제미니 시티를 거쳐 황도로 갈 생각이오.”
“….”
“오늘 주인장을 만났던 것처럼, 옛 전우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구려.”
그렇게 중년인이 여관을 떠나고 나서야, 주인장은 그의 얼굴이 새 변경백과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
코르부스의 설명이 끝난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여명은 휴대폰을 꺼냈다.
그가 가장 먼저 통화를 건 사람은 성녀였다. 오늘 하루 그를 가장 많이 걱정 했을 사람.
하지만 이미 지구로 돌아간 것인지, 성녀는 통화를 받지 않았다. 여명은 아쉬움과 고마움, 그리고 애정을 담아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사랑하는 나의 메켄티, 걱정 끼쳐서 미안….]그의 느릿한 문자를 본 네티가 답답하다며 대신 문자를 적어주는 소란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건 그가 문자를 보내자마자 온 통화였다.
[올턴.]일리노이 주지사, 올턴. 여명이 그의 통신을 받자마자, 통신 너머에서 잠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미친, 통화 연결됐어!’
‘주지사님을 불러!’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아마 올턴 본인이 아니라 부하들이 통화를 걸어오고 있던 모양. 여명이 참을성 있게 답변을 기다리자, 곧 주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애미없는 개새끼.
“예, 저도 반갑습니다. 올턴 주지사.”
-두 번 반가우면 일리노이 전체가 파산하겠군. 제기랄, 네가 박살 낸 도시 복구 금액이 얼만지는 알고 있나?
“그러면 주지사님은 제가 외곽 도로랑 터미널을 피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이 뻔뻔한 새끼… 나한테 말도 없이 일을 저지른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대가….”
여명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대가로 지지율을 높일 방법은 어떻습니까?”
-뻔뻔해도 멍청하진 않아서 다행이군. 어디 말해봐라.
정치인이란. 여명은 자신을 향해 눈을 빛내는 시리에게 웃어준 뒤 대답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붉은 별이 친필 서한을 보낼 겁니다. 새로운 서기장은 핵 보복을 하지 않는 대신, 냉전도 바라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긴 서한을.
-….
주지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가치를 가늠하는 것처럼 시간을 끌다가, 곧 이렇게 물었다.
-빨갱이랑 붙어먹으면 반공주의자들이 싫어할 텐데, 그걸 해결할 방법은?
“그건 주지사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엿 같은 새끼. 서한은 내가 직접 쓰면 되겠나?
“멍청하진 않아서 좋네요.”
-…다음에 만나면 어금니를 박살 내주마.
주지사는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정치인을 하는 걸까… 그런 의문과 함께 여명이 휴대폰을 내려놓은 순간.
끼익- 누군가 여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술병을 가득 들고 온 네크로맨서 딜라와… 마찬가지로 술병을 가득 들고 온 듀크 중령이 보였다.
“중령님? 떠나신 거 아니었습니까?”
여명이 놀라서 다가가자, 듀크가 눈썹을 씰룩거리며 대답했다.
-뭐야, 벌써 다 들었냐?
“예, 포시스랑 만나셨다고….”
-그래, 그 히스패닉 녀석이 네 이야기를 좀 많이 하더군.
“….”
-그리고… 내가 그냥 떠날 놈으로 보였냐?
여명은 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듀크는 가져온 술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기 전에 작별 파티는 해야지. 겸사겸사 서기장 즉위 파티도.
즉위 파티라니. 여명이 픽 웃자, 듀크가 술병 중 하나를 따서 그에게 내밀었다.
여명은 그의 술병을 받아들며 말했다.
“빨갱이 제거용 독이 들어있는 건 아니겠죠?”
-멸공 성검을 든 놈이 빨갱이일 리가. 네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 아, 그리고 델타 포스에 뭔 말을 한 거냐?
“예?”
-델타 포스 막내 녀석이 서기장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더라. 뭐, 성경 말씀과 미국 대학 모토를 동시에 말하는 빨갱이는 있을 수 없다나?
“….”
여명은 자신의 무고함을 믿어주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뭐, 아무튼. 여명은 다른 일행들에게 술병을 돌리며 물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다시 만나야지. 성불하려면 성녀님이 있어야 할 거 아니냐.
“….”
-그보다, 떠나지 말라고는 안 하냐? 이거 섭섭하네.
“중령님이 이미 결정하신 일이라면, 충분히 고민하신 결과일 테니까요.”
믿음. 미필인 여명은 아직 몰랐지만, 그건 어깨를 나란히 한 전우들이 나눌 수 있는 믿음이었다. 듀크는 기분 좋게 웃은 뒤, 술병을 기울였다.
-고맙다.
“고마우시면 나중에 배로 갚으세요.”
-그건 생각해보마.
킥. 지켜보던 네티의 작은 웃음소리를 따라, 술병이 돌기 시작했다. 일행 대부분은 술을 즐기지 않았기에, 술의 대부분은 라쉬크와 듀크 중령, 그리고 의외로 시리가 마셨다.
특히 라쉬크와 시리는 아예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셔댔는데, 슬금슬금 술주정을 부릴 정도였다.
뭐, 아무튼.
살짝 취한 딜라가 안주로 샌드위치를 요구하고, 미리가 여명에게 엉겨 붙을 때쯤.
마지막 술병을 비운 듀크 중령이 탁! 술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른 데스나이트 어르신들한테도 작별 인사 전해다오. 부끄러워서 얼굴 보고는 못 말하겠다.
“…예. 중령님.”
살짝 얼굴이 붉어진 여명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듀크를 바라보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다시 보자.
그렇게 듀크가 여관방을 떠나는 걸 시작으로, 나머지 일행들도 차례차례 방을 떠나기 시작했다. 샌드위치를 잔뜩 챙긴 딜라가 샌드위치를 뺏어 먹으려는 라날을 피해 도망쳤고, 라날은 그런 딜라를 쫓아 날갯짓했다.
코르부스는 은근히 여명의 가슴팍에 손을 짚어 넣는 쇠미리의 머리를 쪼아준 뒤, 그대로 미리를 잡고 방을 떠났다.
그나마 정신줄을 붙잡고 있던 네티는 인사불성이 된 시리와 라쉬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순서는 형부가 정하는 거니까, 뭐… 오늘은 여기서 퇴장합니다.”
여명이 무슨 소리를 하냐며 화를 내기도 전에, 네티는 그대로 방에서 도망쳤다.
그렇게 방에 인사불성이 된 여자 둘과 남은 여명은 푹 한숨을 내쉰 뒤, 두 사람을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야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 명을 쫓아내자니, 술에 취한 사람을 쫓아내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셋이서 하는 건… 성녀와 세티가 가장 먼저 해야 했으니까.
‘….’
지구에 남은 연인들이 떠오른 여명은 다시 휴대폰을 붙잡았다. 그리고 마음을 담아 한 명 한 명 장문의 문자를 쓰기 시작한 순간.
“야, 술… 술 더 없어…?”
라쉬크가 침대에서 꼼지락거리며 일어났다.
“라쉬크, 무리하지 마시고 그냥 주무세요.”
“아니, 아니지… 내가… 오늘, 사람을, 얼마나 많이, 구했는데… 더, 더 마셔야지.”
“….”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여명은 인벤토리에 남은 술을 꺼냈다. 새 술을 본 라쉬크는 바닥을 기어 여명 앞으로 오더니, 술 벌레처럼 술잔을 내밀었다.
여명은 자연스레 그녀의 술잔을 채워준 뒤, 다시 휴대폰 문자에 집중…
“…야, 솔직히, 우리 둘만, 남았으니… 하는 질문인데… 나 어떠냐?”
“…?”
“내가, 그… 딸꾹, 솔직히, 어디 가서… 꿀리는… 외모는… 아니잖아?”
“…취했어요?”
“씹새… 당연히, 취했으니, 까… 이런, 거… 물어보지….”
내일 맨정신 차리면 어쩌려고 이러시지. 킥킥 웃은 여명은, 살로메와 성녀, 그리고 세티에게 문자를 보낸 뒤 다시 라쉬크의 술잔을 채웠다.
“솔직하게 대답해요?”
“…히끅, 가짜라도, 좋으니까… 좋은 쪽으로 대답해 줘….”
그렇게 말한 라쉬크는 찔끔 눈물까지 보였다. 웃음을 참을 수 없던 여명은 껄껄 웃으며 다시 라쉬크의 술잔을 채웠다.
“한 잔 더 마시면 대답해 줄게요.”
“너… 그거… 정말… 이지?”
“정말이죠.”
물론, 거짓말이었다. 여명은 대답은커녕 계속 술잔을 채웠다. 한 잔 더, 한 잔 더… 그건 주정을 부리던 청소부 형님들을 재울 때 쓰던 수작질이었고, 연하에 내성(?)이 없던 라쉬크 또한 얄짤 없이 수작에 걸려들었다.
아침이 기대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