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806)
을 위한 세계는 없다-806화(806/817)
EP.806 code name Joe -2 (3)
***
라쉬크는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기지개를 하려던 그녀는 우웩- 숨을 삼켰다. 숙취 특유의 무겁고 더러운 피로감이 머리를 흔든 까닭이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람.
그녀가 힘겹게 이불을 밀어내며 일어나자, 옆에 누워있던 오시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우 술 냄새… 얘도 엄청 퍼 마셨네.’
뭐, 그래도 이게 정상이었다. 무사히 큰일을 넘긴 뒤에는 술을 마셔야 하는 법. 모든 일이 끝나고도 쫓기듯 움직이던 한국이 이상한 거였-
그때, 술 냄새를 압도하는 고소한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킁킁, 냄새를 따라 힘겹게 고개를 돌려 보니, 여명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냄비를 든 채로.
“일어나셨어요?”
“…넌 왜 내 방에 있냐.”
“여긴 제 방인데요.”
뭐? 라쉬크가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려고 했으나, 그보다 먼저 탁! 여명이 냄비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해장죽 끓였어요. 와서 드세요.”
“해장죽…?”
“황태와 콩나물로 국물을 낸 다음, 불린 찹쌀과 쌀을 넣고 끓인 다음 계란과 파로 마무리했어요. 원래는 김치도 들어가는데… 라쉬크는 김치 싫어하실 거 같아서 뺏어요.”
황태가 뭔데? 라쉬크가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나 탁자로 다가가자, 고소한 냄새가 한층 더 진해졌다. 여명은 의자에 앉는 라쉬크를 향해 수저를 내밀었다.
“드세요.”
“….”
수저를 받은 라쉬크는 조심스레 죽을 떠 먹었다. 온도를 딱 맞춘 죽 사이로 말린 생선 특유의 감칠맛과 부드러운 무의 식감이 느껴졌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맛이었다.
“맛있죠?”
라쉬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명이 작게 웃었다. 라쉬크는 죽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이런 요리는 어디서 배운 거야?”
“청소부 시절에, 음식점 아주머니들한테 배웠어요. 형님들 챙기는 건 막내 일이라고,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셨죠.”
“…막내라서 알려준 게 아니라, 잘 생겨서 알려준 거 아냐?”
“어… 글쎄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여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라쉬크는 문뜩, 자신의 말이 여명이 잘 생겼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시발, 그녀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야, 야, 그보다 다른 애들 죽은 없어? 나만 주는 건 아니지?”
“이미 다 나눠주고 왔어요. 시리가 먹을 죽은 인벤토리에 있구요.”
이런 성실한 새끼가 있나. 라쉬크는 한 번 더 주제를 바꿨다.
“어… 그, 그러면 어제… 내가, 그, 주정 부리진 않았지?”
그러자 여명의 표정이 바뀌었다. 평소의 서글서글한 웃음이 아닌, 어딘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기억 안 나세요?”
“….”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라쉬크가 필사적으로 기억을 뒤지는 것보다 빠르게, 여명이 말했다.
“정색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평범한 넋두리였으니까. 평소에 하고 싶던 거, 라쉬크 본인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거요.”
“나, 나에 대한 거?”
“연금술만큼이나 포커를 잘 친다거나. 뭐 그런 이야기들이요.”
“….”
라쉬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상한 말은 안… 하지 않았다.
“저하고 일행들 모아서 옷 벗기 포커 치면, 전부 알몸으로 만들 수 있다고도 했죠.”
“…뭐?”
“제가 왜 하필 옷 벗기 포커냐고 물었더니, 살로메의 털 모양을 꼭 확인하고 싶다고….”
“으아아아아-!!”
라쉬크는 수저를 내려놓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명은 싱글벙글 웃으며 한 번 더 라쉬크를 놀렸다.
“무슨 모양인지 알려드려요?”
“미친놈아!!”
라쉬크가 한 번 더 고함을 내지르자, 여명이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라쉬크. 왜 이렇게 당황하세요? 당연히 거짓말이죠.”
“….”
“제가 남한테 제 여자의 비밀을 알려줄 사람으로 보여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당장 라쉬크의 비밀도 잘 지키고 있잖아요.”
“…내 비밀???”
무슨 비밀?? 라쉬크가 당황하자, 여명이 슬쩍 고개를 내밀며 속삭였다.
“어젯밤에 한 이야기도 절대 말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뭐, 뭣?”
내가 어제 뭐라고 했는데? 네오나치의 털보다 더한 소리를 지껄였단 말이야??
라쉬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탄했다.
술이 원수구나. 하다 하다 상사한테 속마음을 털어놓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구더기 공주가 이런 실수를… 아니, 잠깐.
“…너, 어제 나한테 일부러 술 먹였지??”
“잔을 채워 달라고 한 건 라쉬크인데요.”
“뭐든 간에!! 내가 취해서 헛소리할 때까지 먹인 거 맞지?! 그렇지?!”
그러자 여명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헛소리라뇨. 라쉬크, 공주 대접해달라는 말이 어떻게 헛소리입니까?”
“…뭐?”
여명은 라쉬크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맨날 나만 일 시키고, 돈만 주면 다냐? 나도 여자야, 여자!”
“….”
“명색이 공주가 이명인데, 공주 대접 좀 해줘. 암시장에 있던 사람 끌고 나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솔직히 성격 순으로 줄 세우면 내가 세티나 성녀보다 못할 게 없- 읍.”
더는 듣지 못한 라쉬크는 손을 뻗어 여명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자기 머리카락보다 훨씬 시뻘게진 얼굴로 말했다.
“너, 너 씨발… 더 말하면… 너랑 나랑 둘 다 죽는 거야… 알겠어?”
여명은 슬쩍 고개를 뒤로 빼며 말했다.
“거짓말이란 말은 안 하시는 걸 보니, 전부 진심이셨나 보네요.”
“…야!!!”
라쉬크는 냄비를 휘두르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죽이 마음에 든 것도 있었지만,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난 시리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본 까닭이었다.
여명은 곧장 인벤토리에서 죽 냄비를 꺼냈다.
“처제, 일어났어? 속은 좀 어때?”
“으으… 안 좋아요.”
“듀크 중령님이 가져온 술이 좀 독하긴 했어. 여기 해장죽 해놨으니까, 와서 한 숟갈 들어.”
시리는 휘적휘적 침대에서 일어나 탁자 앞, 그러니까 라쉬크의 바로 옆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시리가 식사를 시작할 때쯤, 라쉬크는 제발 시리가 못 들었길 바라며 말했다.
“마, 맛있지? 여, 여명이 요리를 참 잘한다니까? 그지?”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공주님.”
“….”
“그리고 공주님이 어젯밤에 하신 말들은… 저도 무덤까지 비밀로 간직할게요.”
여명이 웃음을 터트리는 가운데, 라쉬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시카고의 한 고급 호텔, VIP룸.
커다란 벽걸이 TV 너머로 선언하는 붉은 별을 본 엘프들의 반응은 복합적이었다.
-내가 그랬지.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는 놈이야말로 가장 붉은 피를 가지고 있다고.
외눈의 엘프, 데메론드의 왼손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킥킥거렸다.
-…설마, 저번에 준 담배가 문제였나?
외팔이 엘프 핀엘은 당황했으며.
-스탈린의 계획이 망가진 걸까요. 아니면 이거야말로 그의 계획일까요?
인공성물이 덕지덕지 달린 지팡이의 엘프는 의아한 듯 중얼거렸고.
-설마, 공주님이 시킨 일은 아니겠지요….
은발의 엘프는 겁에 질렸다.
하지만 그 어떤 반응도 모든 엘프들의 수장, 데메론드의 반응보다 솔직하진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몇 발 더 쏠 걸 그랬군.”
“….”
지나치게 솔직한, 그러니까 장인어른답지 않은 말.
엘프들은 일제히 데메론드를 바라봤다. 그리고 개중에서 외팔이 엘프, 핀엘이 대표로 물었다.
“서기장의 장인이 되신 걸 축하드려야 합니까, 아니면 서기장에게 샷건을 쏜 유일한 엘프가 되신 걸 축하드려야 합니까?”
데메론드는 담배를 입에 물며 대답했다.
“핀엘, 너는 저게 농담이라고 생각하나?”
농담이라기엔 너무나 진지한 말투. 핀엘은 역으로 되물었다.
“그럼 녀석이 진심으로 서기장이 될 거라고 보십니까? 공주님이야 좋아하시겠지만, 붉은 별은 가짜 신분입니다.”
“핀엘. 서기장이 되는데 중요한 건 신분이 아니라, 얼마나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다.”
“그럼 성격상 어렵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솔직히, 천여명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까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기장처럼 귀찮은 자리를 맡는 건… 공주님이 세뇌라도 하지 않는 이상 어렵다고 봅니다.”
후우- 담배를 피운 데메론드는 다른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엘프들의 생각도 핀엘과 다르지 않은지, 모두 대동소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데메론드는 탁,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혁명의 근본… 아니,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이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노다.”
데메론드는 핀엘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세상에 화내는 바보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내 사위 또한 그런 거라면?”
“공산주의자와 미국 모두에게 분노했단 말입니까?”
“그래, 그렇다면… 서기장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길이다.”
핀엘은 그 말에 담긴 뜻을 곱씹으려는 듯 턱을 쓸었다. 하지만 딱 한 명, 미리디스의 호위였던 리메는 다른 해석을 내놨다.
“조금 이르지만, 성공을 경하드립니다.”
“…성공?”
리메는 데메론드와 TV 너머 붉은 별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하필 이런 때, 공주님과 천여명을 어머니의 무덤으로 보낸 이유가 의문이었습니다. 단순히 용사의 핏줄이 남긴 유산을 모으게 할 생각이었다면… 제국의 수도로 보내도 됐으니까요.”
“….”
“하지만 조금 전 하신 말씀을 듣고 확신했습니다. 그가 분노를 느끼게 하시려고 했던 것 아닙니까? 서기장까진 아니더라도… 그가 세상에 분노할 이유를 보여줄 생각이셨던 거 아닙니까?”
그럴싸한 이유였다. 다른 엘프들의 시선이 모이기 무섭게, 데메론드는 빙그레 웃었다.
“리메, 자네는 좋은 부하야.”
“과찬이십니다.”
“자네의 추리는 부정하지 않겠어.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니. 하지만 사위가… 벌써 미국과 공산당에 분노하는 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빨라.”
“….”
“이번에 미국에게 힘자랑을 했으니, 남은 건 공산주의자들에게 힘을 보여주는 것뿐. 비코프나 예브게니, 둘 중 하나가 사위 손에 끝장나는 순간 사위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서기장이 되겠지. 우연이란… 참 신기하단 말이지.”
직후, 데메론드를 바라보는 엘프들의 시선이 무거워졌다. 데메론드의 말이 사실이라서? 아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사위라고 부르시는군요.”
리메의 지적을 들은 데메론드는 눈썹을 으쓱였다. 그걸 본 부하들이 제각각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샷건을 쏠 때부터 이리될 줄 알았지.”
“공주님 고집을 누가 꺾겠나. 그냥 받아들인 거지.”
“뭐… 아깝기로 따지면 저쪽이 더 아깝지. 우리 대장은 장인으로 삼기엔 최악이니.”
격의 없는 동시에, 애정이 느껴지는 중얼거림이었다. 데메론드는 웃으며 부하들의 애교를 내버려 뒀다.
그리고 TV 속에서 붉은 별의 서기장 선언과 전당대회 선언을 분석하는 자칭 ‘공산주의 전문가’들의 헛소리가 끝날 때쯤.
데메론드는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물었다.
“남미 쪽 상황은?”
그러자 한없이 가볍던 핀엘의 태도가 진지해졌다. 혁명단의 전사로 돌아온 그는 딱딱한 자세로 대답했다.
“예상대로 마그두의 비밀 기지가 털렸습니다. 붉은 가지들이 직접 확인했습니다.”
“좋아,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희 쪽 계산으로는 보름 정도면 끝날 것 같습니다.”
“보름… 보름이라.”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데메론드는 뭔가를 고민하듯 허공을 노려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일주일 뒤, 우리는 남미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흘리지 못한 지구인의 피는 그곳에서 받아내겠다.”
명령이 떨어진 직후, 엘프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까지 훈훈했던 분위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에 있는 건 피와 죽음을 뿌리는 테러리스트뿐이었다.
“어머니 세계수를 위해.”
그렇게 엘프들이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데메론드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샷건을 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사위와 일찍 재회하겠군.”
***
!?
뜬금없이 등에 소름이 돋은 여명은 눈을 찌푸렸다. 뭐지?
본능이 경고했다고 하기엔, 살기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착각인가…? 여명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의 옆에 서 있던 미리가 물었다.
“여명, 무슨 일이에요? 뭐 이상한 거라도 느꼈어요?”
“잘 모르겠어. 누가 내 이야기라도 하나?”
여명이 어깨를 으쓱이자, 미리가 큭큭 웃었다.
“당연히 이야기하고 있겠죠. 지금 전 세계의 모든 뉴스가 여명에 대해 떠들고 있을걸요?”
“….”
“미래의 서기장, 핵을 버틴 초인… 다음 행보가 궁금하지 않으면 이상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여명은 새삼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가 됐는지 실감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선택에 후회하기엔, 그가 저지른 일이 너무나 컸으니까.
어쨌거나, 미리가 여명의 몸을 더듬으며 시간을 보내길 잠시.
두 사람만 있던 여관방으로,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사위.”
성녀의 어머니이자, 정보 업체 푸른 쥐의 수장, 모리네.
평소에 쓰고 다니던 쥐 가면 대신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그녀는 여명과 미리를 번갈아 본 뒤 말했다.
“서기장… 아니, 이제는 미국식으로 Joe – 2 라고 불러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