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81)
을 위한 세계는 없다-81화(81/817)
〈 81화 〉 작가를 위한 나비 효과
* * *
21. 베를린 차원문이 열린 이후 세계정세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 연합군이 나치 잔당 색출을 이유로 아샤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2) 지구인 상인들을 박해한 겔차 왕국이 멸망하였다.
(3) 황제가 스탈린에게 엘릭서를 선물하였다.
(4) 나가사키·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5) 에어컨 혁명으로 깊은 탑이 몰락하였다.
『로드 하우 아카데미 입학시험 문제지 사회탐구 영역 (근·현대사)』
***
세상 모든 일에는 미처 예측할 수 없는 미세한 오차가 있기 마련이다.
너무나 미세하기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오차.
그리고 그런 오차 대부분은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어떤 오차는 때때로,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커다란 변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러한 변화를 두고 나비 효과라 불렀으며, 혹자는 카오스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소설 속에 빙의한 작가는 둘 중 어느 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예측할 수 없는 오차가 만들어낸 막대한 변화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씨발.”
없는 마나를 끌어모아 강화한 그의 시야 너머로, 어두운 토굴 위에서 쏟아지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저 편입생 일행만 바라보고 있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는 토굴로 쏟아지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좀비.
초인의 피부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싸구려 좀비가 아니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증오와 광기로 빚어진, 미친 네크로맨서의 특제품들.
대체 왜?
프롤로그, 그러니까 피의 입학식에서 나타났어야 할 좀비들이 왜 하필 지금 나타난단 말인가?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안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 같지도 않고.
‘튀어야 해.’
본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직후 반론이 따라왔다. 대체 어디로?
대피소의 문은 굳게 잠겨 있고, 토굴에선 좀비가 쏟아지는 중이다. 도망갈 곳은커녕, 대항할 무기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그런 절망을 느끼는 건 작가뿐이었다.
대피소에 모인 학생들은 편입생이 만들어낸 승리를 보며 각자 감상을 나불대고 있었다.
살았다…
승리에 안심하는 놈.
엄청 심각한 척하더니, 생각보다 별거 없었잖아?
되도 않는 허세를 지껄이는 녀석.
사람을 어떻게…
그리고 천여명의 무자비함에 겁을 먹은 녀석까지.
‘이런 멍청한 새끼들이…’
작가는 이를 갈며 학생들의 면면을 둘러봤다.
뒤늦게 뒤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확인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력 강화마저 풀어버리고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 같이 죽어라 막아도 모자랄 판에 벌써부터 긴장을 풀다니. 앞으로 일어날 일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 대피소에 있는 학생 중 대부분은 좀비밥이 되어 뒤지리라.
‘뒤지려면 니들이나 뒤져라.’
작가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학생들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그는 의도적으로 좀비 떼의 접근을 알리지 않았다. 뒤로 물러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반대편 벽까지 가는 건 쉬웠다. 편입생 일행을 맞이하려는 학생들이 앞으로 나서준 덕분이었다.
동급생들에게 정보를 숨기고, 고기 방패로 쓴다는 죄책감? 그런 건 없었다.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입학식에서 우수수 뒤졌어야 할 녀석들 아닌가.
‘…아카데미에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만 버티자, 그러면 살 수 있어.’
원래라면 강자들 옆에 붙어 목숨을 도모했겠으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1학년 강자들은 단 한 명을 빼고 전부 천여명을 따라가 버렸다.
그 한 명조차 이런 상황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역시 동급생들을 고기 방패로 삼는 게…
작가가 그런 생각을 이어가던 순간.
천여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토굴을 울렸다.
“물러나면서 챙길 수 있는 무기는 전부 챙겨!”
멍청한 학생들조차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정도로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학생들 사이로 소란이 퍼져나갔다.
뭐야? 뭐가 더 있는 거야?
뒤, 뒤에 저거!
좀비?
학생들의 술렁임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
일반적인 좀비가 초인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건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주렁주렁 무기를 챙겨든 천여명과 일행이 무너진 벽에 도착하자마자, 학생들은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젠장, 무기 줍다가 뒤질 뻔했네!”
웨슬리, 입학 순위 4위를 자랑하는 초인의 몸에 좀비의 이빨과 손톱자국이 가득한 탓이었다.
상식을 부정당하는 광경.
그리고 뒤이어 토굴 가득 밀려드는 좀비들의 모습까지.
“꺄아악!”
이름 모를 학생의 비명을 시작으로, 대피소에 다시 혼란이 찾아왔다.
***
대피소의 무너진 벽 바로 앞.
으어어…
토굴 너머에서 서서히 몰려드는 좀비를 보는 여명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무술에서 생각지도 못한 단점을 찾아낸 까닭이었다.
‘…장기전에 쓸만한 게 하나도 없군.’
그의 무술은 기본적으로 단기전에 특화돼 있었다.
후유증 따윈 무시하고 육체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비각술과 혈류가속.
위력과 비례해 어마어마한 마나를 퍼먹는 파양결과 혜성검.
극단적으로 치우친 무술들이었지만, 그동안에는 별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상대한 적들은 언제나 그와 엇비슷하거나 더 강했으니까.
하지만 무수한 좀비들을 마주하고 보니, 그런 치우친 무술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적이 숫자로 그의 힘을 빼고 차륜전을 강요한다면? 그로서는 일방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만주에서 말머리와의 싸움이 실제로 그렇지 않았나.
오염된 용병들에게 힘을 뺀 탓에, 말머리를 처리하는 게 늦어져 버렸다.
여명은 조용히 생각을 음미했다. 문제를 파악하고 나니, 해법은 쉽게 떠올랐다.
‘마나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기전 전용 무술.’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파순이었다. 여명이 봤던 사람 중 가장 다양한 무술을 사용하던 마인.
배울 게 많은 적이었다.
장풍부터 하늘을 나는 무술까지, 이제 막 무술에 입문한 여명은 녀석을 보며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살아있다면 한 번 더 싸움을 빙자한 가르침을 받고 싶었으나, 녀석은 이미 만주 기지의 영안실에 처박혀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명이 그를 시체로 만들었으니, 아쉬워할 것도 없었다.
아무튼, 여명은 천천히 녀석의 무술들을 복기해봤다.
특히 몸에서 마나를 아지랑이처럼 뿜어내던 그 무술을 집중적으로 떠올렸다.
진의를 읽어낼 수 없어서 무술 자체를 훔쳐 올 수는 없었지만…
‘비슷하게나마 따라 하면 꽤 괜찮은 효율을 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파순이나 다른 초인들이 들었다면 기겁할 소리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던 그 순간.
“여명,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쇠미리가 여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투와 달리, 오히려 그녀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곧 아카데미에서 구조대가 올 거예요. 우린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요.”
진지한 표정과 결연한 목소리. 여명이 긴장했다고 착각한 게 틀림없었다.
“조금 전 싸움도 잘 해냈잖아요?”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겠으나, 여명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애써 용기를 내고 있다는 걸.
그래서였을까? 여명은 좀비들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에겐 별문제가 되지 않음을, 그래서 긴장은커녕 잠시 무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 입을 다물어 버린 사이…쇠미리는 더욱더 용기를 냈다.
“오늘… 이 대피소의 누구도 죽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
여명은 이번에도 말을 아꼈다. 요정 공주의 각오와 상관 없이,그는 딱히 다른 사람 목숨에 관심 없었으니까.
곁에 있는 세티와 성녀, 그리고 쇠미리 정도만 구할 수 있으면 족했다.
얼굴도 모르는 다른 놈들이야 죽건 말건…
그때, 웨슬리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멋진데.”
“….”
“초인이라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웨슬리는 그렇게 말하며 일행들을 둘러봤다. 전윤성, 성녀, 세티, 제미니 선생님… 모두 쇠미리의 말에 동의하듯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세티까지?’
여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세티가 대피소 방향으로 눈짓을 보냈다.
그 시선을 따라 대피소 안을 확인해보니, 붉은 단발머리의 소녀가 그를 향해 썩소를 날리고 있었다.
‘…시리? 아, 그렇지.’
세티의 자매들도 아카데미에 입학했다고 했었지.
여명은 즉시 황금 옥새로 대피소 문을 열어 도망치려던 계획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참에 무술 시험이나 해봐야겠군.’
다짐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여명은 검을 들어 대피소까지 다가온 좀비들을 겨눴다.
그대로 달려가려는 여명을 향해, 쇠미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여명.”
“왜?”
“…마지막으로 각오 한마디만 해줘요.”
아니, 그건 좀… 여명은 목까지 차오른 말을 억누르는 사이, 쇠미리가 말을 덧붙였다.
“해주면 좋겠어요. 우리를 모은 건 당신이니까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절묘한 순간이었다.
좀비가 대피소 코앞까지 다가왔고, 일행들의 시선이 여명에게 쏠린 순간.
“…죽지 마. 아카데미 첫 식사를 장례식에서 하고 싶진 않으니까.”
여명 자신이 내뱉고도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그는 어색한 연기가 들켰을까 감히 고개를 돌리지 못했고, 그대로 좀비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물론, 남들의 눈에는 연기로 보이지 않았지만.
***
아카데미가 습격당했다는 초유의 사태 앞에, 교직원들이 보인 반응은 한가지였다.
분노.
초인들로 이루어진 경비원들은 물론이고 마법 학부에 처박혀있던 마법사들조차 우르르 바깥으로 나와 습격자들을 쫓았다.
상대는 총화기로 무장한 정체불명의 테러리스트들.
녀석들이 습격한 곳은 학생들이 거의 없는 북쪽 섬이었다.
때마침 전교생이 모이는 합동 수업 시간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라는 생각이야말로, 적의 노림수였다.
녀석들은 아카데미의 방위 전력이 북쪽 섬에 몰려든 틈을 타,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학생들을 노렸다.
좀비.
해안선을 가득 채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좀비가 섬에 상륙했다.
뒤늦게 통신이 복구되고교직원들이 그 사실을 파악했을 때는, 좀비들이 이미 학생들을 포위한 뒤였다.
아카데미를 보호하기 위해 호주군과 미 해군이 출동했으나, 도착까지 적어도 두 시간.
결국, 아카데미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어느 학년을 먼저 구해야 할 것인가?
성녀와 그릇이 있는 1학년?
차원문 너머 황족이 있는 2학년?
미국 대통령의 손자가 있는 3학년?
교사들은 모두 학년을 동시에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현실은 냉담했다. 병력과 시간, 모든 게 부족한 상황이었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모든 학년을 잃을 수 있는 위기.
고민할 시간은 많지 않았고, 선택은 잔인했다.
아카데미 교직원들은 1학년을 가장 먼저 구출하기로 했다. 성녀와 그릇은 그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였기에.
그러나 교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1학년이 아닌 2학년과 3학년에 병력을 나눴다.
1학년을 전부 버리자는 겁니까!
교직원들의 거친 항의가 이어졌지만, 교장의 생각은 확고했다.
누구도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고집을 꺾을 시간이 부족했다.
교직원들은 어쩔 수 없는 마음 반, 교장을 믿는 마음 반으로 좀비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그렇게 좀비 떼와 싸우기를 몇 십분.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을 구원할 영웅이 학교에 강림했다.
성검, 프레아 칸.
수천의 좀비를 일격에 쓸어버리며 강림한 그녀를 본 교직원들은 애타는 목소리로 외쳤다.
성검이시여! 1학년, 1학년부터 구해주십시오!
하지만 어째서인지, 프레아 칸의 반응은 교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학년? 성녀랑 그 녀석이 있는데 왜?
순식간에 3학년 대피소를 구해낸 성검은 2학년 대피소로 향하며 딱 한 마디를 남겼다.
그 말이 남길 파장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이깟 좀비에 당할 거 같으면 혜성검을 주지도 않았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