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811)
을 위한 세계는 없다-811화(811/817)
EP.811 숲의 사람들. (2)
***
“군이 우리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엘프 숲으로 향하는 민간인들과 물자를 통제하기 위해서… 라고 알고 있다.”
“알고 있다…? 군인이 강도질을 하면서, 정확한 작전 목표도 모르는 거냐?”
“그건….”
라헐이란 외인부대원은 잠시 뜸을 들였다. 살짝 입술을 씹은 그는 미리에게 맞아 기절한 대장의 얼굴을 확인한 뒤 말했다.
“…상부는 우리에게 명령 이상의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걸 믿으라고?”
“믿고 안 믿고는 자유지만, 이건 극비 임무고, 우리는 현장 요원에 불과하다. 많은 걸 아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거짓말이었다. 여명의 감각이, 그리고 라헐의 심장 소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단순히 정보를 숨기기 위한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거짓말을 하는 거지?’
의아함을 숨긴 여명이 조금 더 강한 말로 그를 압박하려던 순간.
꾸욱- 미리가 단검으로 라헐의 목을 누르며 말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지껄이시는 걸까.”
“…흡.”
“KGB의 고문 기술은 곰한테서도 자백을 받아낼 수 있다는 거 아시죠? 서기장께서 말로 할 때 진실을 말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미리는 슬그머니 단검에 힘을 줬다. 날카로운 칼날을 따라 주륵- 라헐의 피가 흘러내렸다.
노골적인 협박이었으나, 여명은 신경 쓰지 않았다. 미리는 KGB의 고문법을 몰랐… 모르겠지? 아무튼, 미리가 진짜로 라헐을 죽일 리 없었으니까.
굳이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단검을 빼앗긴 채 투덜거리는 라쉬크정도일까.
어쨌거나, 라헐은 문자 그대로 목에 칼이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다시 말하지만, 거짓말이 아니다.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다.”
기절한 대장과 달리 말이 좀 통하는 인물인 줄 알았는데, 그냥 연기였나? 여명은 단검을 움직이려는 미리에게 멈추라는 듯 손을 내민 뒤, 라헐을 내려다봤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외인부대,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외인부대 외인 마법 연대 소속, 라헐. 라헐 톨로메다.”
“옆에 쓰러진 강도단 두목은?”
“나와 같다. 외인 마법 연대 소속, 판코에 바르.”
프랑스가 아닌, 아샤식 이름이었다. 외인부대 소속 아샤인이라… 흥미를 느낀 여명은 재차 질문했다.
“계급은?”
“우리 둘 다 상사다.”
“…?”
여명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오르기 무섭게, 똑같이 물음표를 띄운 네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마법사인데… 왜 계급이 상사밖에 안 돼?”
상식적인 질문이었다. 전투기 조종사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군대는 초인에게 소위 이상의 장교 계급을 부여했다. 양성이 어려운 고급 인력인 까닭이었다.
다른 예를 들자면, 여명에게 팔이 잘렸던 한국의 초인 정마필의 계급이 소령이었다. 심지어 초인을 싫어하는 미군조차 초인에게는 위관급 장교 계급을 부여하는 판에, 초인을 사랑하는 프랑스가 왜?
의문은 길지 않았다.
“외인부대에서 선임 상사 이상, 장교로 진급하기 위해선 프랑스 국적자여야 한다.”
“…너희는 프랑스인이 아니다, 그 말인가?”
여명이 묻자, 라헐은 기절한 두목과 여명을 번갈아 보며 되물었다.
“식민지 알제리의 국민은 프랑스인인가? 베트남의 국민은 프랑스인이었나?”
“….”
“그리고 프로방스 자치령이 된 변경백령의 마법사는… 프랑스인인가?”
여명은 문뜩, 쓰러진 대장이 한 말을 떠올렸다.
-우리의 조국은 제국이 아닌 프랑스다!
그건 제국에게 버려진 변경백령 군인의 한탄이었던 걸까? 여명은 너무 오래 끓인 멸칫국물을 마신 것처럼 떫은맛을 느끼며 물었다.
“프랑스군의 대답은 아니오, 였나보군.”
“….”
라헐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도질처럼 더러운 임무를 맡은 이유가,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던 건가?
여명이 그런 생각을 떠올린 직후, 라헐이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대답했다.
“…판코에 대장과 나는 조국에게 충성을 증명하지 못했고, 이런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제 믿겠나? 군 상부는 우리를 신뢰하지 않고, 우리는 이 임무의 작전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라헐의 표정부터가 그랬다. 그는 어디 죽여보라면 죽여보라는 듯 입술을 콱 다문 채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변경백령… 프로방스 자치령의 초인이라.’
누가 그랬더라? 인연은 우연이나 필연보다도 무섭다고. 라헐의 굳은 눈동자를 보며 그 말을 떠올린 여명은 붉은 별이 아닌, 변경백의 아들로서 물었다.
“프랑스가 요구한 충성의 조건이 뭐였지?”
“그건…… 말할 수 없다.”
다른 건 다 불어 놓고 이건 말 못하시겠다? 여명은 본능적으로 그 충성의 조건이 변경백령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다.
하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프랑스가 점령한 변경백령을 평화롭게 지배했을 리 없었으므로.
당장 베트남과 알제리란 예제가 있지 않은가. 여느 제국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악독한 지배자였다.
‘….’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간 여명은 선명한 불쾌감을 느꼈다.
아버지는 그에게 가문도, 영토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는 이미 변경백 가문의 무술과 보검을 물려받은 몸이었다. 타고난 성격과 작업반장님이 가르침 때문이라도, 그는 변경백령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프랑스가 변경백령의 시민들을 학대했다면, 그는 절대 프랑스를 용서하지 못 하리라.
‘하지만… 지금 당장은 때가 아니야.’
여명은 분노하는 자신을 타일렀다. 그는 아직 아버지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지금 그가 가진 힘은 프랑스와 싸우기엔 충분했지만, 프랑스에게서 영토와 사람을 지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러니 조금만 뒤에,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한 진짜 서기장이 되고, 닉슨과 운명에게 대항할 힘을 얻은 뒤에… 그 뒤에 변경백령으로 돌아가자.
‘두메아 가주님도, 오귀스트께서도 좋아하시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여명의 머릿속으로, 불현듯 어떤 계획을 떠올렸다.
미리의 계획처럼 몰래 들어가는 것보단 위험하지만, 프랑스를 엿 먹일 수 있는 계획을.
그 계획을 조금 더 구체화하기 위해, 여명은 라헐에게 물었다.
“말할 수 없다… 좋다. 라헐,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
설마 이렇게 순순히 넘어갈 줄은 몰랐던 건지, 라헐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다음 질문을 받는 순간, 그의 표정이 한 번 더 크게 흔들렸다.
“지금 엘프 숲이 어떤 상황이고, 프랑스군을 비롯한 세력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아는 대로 말해라.”
***
[너희를 증오한다.]익숙한 한 마디를 끝으로, 나무 침대에 앉아 있던 노인은 눈을 떴다.
오랜만에 꿈을 꾼 탓인가? 몸이 가벼웠다.
그는 오랜만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고엽제의 후유증 때문에 자라난 수포들이 피부를 간지럽혔지만,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모시풀로 만든 펑퍼짐한 옷을 입고, 나무로 된 신발을 신었다.
지구에서는 엘프 숲의 명품이라며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팔리는 물건들이었으나, 노인에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이 복장은 수십 년 전부터 입어온 익숙한 옷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두 발로 일어선 그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삐걱- 오래된 나무를 깎아 만든 나무창 틀은 오랜 손길에 놀란 듯 비명을 질렀다.
그래, 그건 비명이었다.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비명을 지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거기, 비인가 약초꾼들에게 경고한다. 불법으로 채취한 영약을 제출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다시 말한다. 영약을….
탕!
-이런 씨발, 저 도둑놈이 먼저 쏜 거다!!! 대응 사격!! 아니, 그냥 다 죽여버려!!!
수 백 미터 바깥에서 들려오는, 불법 약초꾼들과 제약 회사 보안팀 사이의 총격음.
-Putain Merde!! 엘프 함정이다!! 모두 엎드려!!
그보다 먼 곳,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프랑스어와 뒤이어 이어지는 폭발음.
콰아아앙 – !
모든 끔찍한 소리를 따라, 연기가 피어오른다. 녹색으로 물든 숲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처럼 끝없이 연기를 내뿜는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수천 년… 어쩌면 그보다 오래된 숲을 모욕하는 소리였다. 창밖의 소리를 듣던 노인은 모두에게 닥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창문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늙은 몸 곳곳에서 분노가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달려 나가고 싶었으나… 불현듯 깨달은 진실이 그의 전신을 꽁꽁 얼렸다.
데메론드가 없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엘프 최대 전력이 자리를 비웠다.
노인은 그 사실에 전율했다. 이 모든 게 함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전율했다.
그는 겁에 질린 사람처럼 창문을 닫았다. 하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계속해서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불을 향해 날아가는 불나방들의 날갯짓 소리.
그 소리를 버티지 못한 노인은 겁에 질려 소리쳤다.
“창크페! 어디 있느냐?! 당장 올라오거라! 당장!!”
***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라헐의 설명이 끝난 직후.
잠시 강을 바라보며 계획을 정리한 여명은, 라헐을 내버려 둔 채 주차된 트럭으로 향했다.
그리고 트럭 옆 그늘에 자리를 잡은 여명은 다른 일행들을 향해서 모이라는 손짓을 보냈다.
직후, 하늘 위에서 접근하는 녀석들을 감시하는 코르부스를 제외한 일행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용병들의 숫자를 세던 네티와 미리디스, 꽁꽁 묶은 용병들을 걷어차던 시리와 페로루, 그리고 트럭에서 쉬고 있던 라쉬크와 딜라까지.
그렇게 일행 모두가 모인 직후, 여명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미리가 완드를 휘둘러 방음벽 마법을 펼쳤다.
말하지 않아도 통한다는 게 바로 이런 거였다. 미리가 그에게 윙크를 보내는 가운데, 여명은 일행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한테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는데, 이게 좀 위험해서… 모두의 의견을 묻고 싶어.”
라쉬크는 미리가 빼앗은 단검을 다시 빼앗으며 물었다.
“위험하다고? 어느 정도로 위험한데?”
“정확한 건 아니지만, 재수 없으면 프랑스 외인부대와 싸울 수도 있어요.”
“아하… 외인부대 정도면 뭐, 위험도 아니네. 근데.”
“근데?”
“이건 내 경험인데, 너는 항상 네가 말한 것보다 더 큰 일을 벌이더라고?”
프랑스 외인부대? 너라면 외인부대는 물론이고, 프랑스 정규군하고도 싸울 거 같은데? 라쉬크는 뒷말을 생략했으나, 페로루를 제외한 모든 일행이 그 뒷말을 들을 수 있었다.
여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적어도 핵무기는 안 맞을 겁니다.”
“…확신해?”
“확신은 못 하죠. 세상일이, 어디 예상대로 흘러갑니까?”
라쉬크는 말 대신 표정으로 여명을 비난했다.
하지만 여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10강의 계단을 오르는 초인이었고, 마음만 먹으면 도시 하나 쯤은 땅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강자였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아주 잘 아는 오시리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형부, 정확히 뭘 하실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저 강도들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용병과 어중이떠중이들로 구성된 수십 명의 무장병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이자니 찝찝하고, 풀어주자니 문제가 될 거고… 그나마 가장 나은 선택지는 가장 가까운 제국군에게 넘기는 거였는데, 그러려면 족히 하루는 필요했다.
시리는 형부의 성격상 제국군에게 넘길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명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녀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저 강도들도 이번 계획의 일부니까.”
“예?”
“가짜 붉은 별의 아이들을… 진짜 붉은 별의 아이들로 바꾸는 거야.”
“…???”
페로루를 포함한 일행 모두가 무슨 소리냐는 듯 시선을 모으자, 여명이 덧붙였다.
“뭐, 강도가 돈 따라서 주인을 바꾸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그리고 우리 돈 많잖아.”
라쉬크가 ‘그렇게 돈 많으면 내 월급부터 올려줘….’ 라고 중얼거리건 말건, 시리가 되물었다.
“예, 뭐, 그건 그렇지만… 고작 저 정도 강도들을 어디에 쓰시려고요?”
“처제 걱정처럼 대단한 일에는 못 쓰겠지. 하지만… 머릿수가 중요할 때도 있거든.”
그렇게 말한 여명은 일행들과 강 너머, 엘프 숲을 보며 말했다.
“…예를 들어, 엘프 숲 정문을 지키는 군부대를 박살 낼 때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