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812)
을 위한 세계는 없다-812화(812/817)
EP.812 숲의 사람들. (3)
***
-하하하! 빵빵! 당장 길을 비키지 못할까!
귀를 찌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따라, 판코에 바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공산당 나가신다!!
뭐지? 그는 여전히 꿈속에 있나 싶어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판코에는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덜컹거리는 트럭이 전신을 흔들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가 깨어난 걸 눈치챈 동료 때문이었다.
“판코에 대장, 일어나셨으면 우선 이것부터 드십쇼.”
“….”
판코에가 조심스레 눈을 뜨자, 작은 물약을 든 라헐이 보였다. 판코에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라헐이 물약 뚜껑을 열어 병을 내밀었다.
“발목에 박힌 총알은 제가 미리 제거했습니다. 이 약을 드시면 몇 시간 내로 걸으실 수 있을 겁니다.”
발목에 총알…? 윽, 제기랄.
쓰라린 고통을 느낀 판코에는 그제야 모든 게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고통을 참기 위해 얼굴에 힘을 준 채 물약을 받아 마셨다. 하지만 물약을 삼킨 직후, 그는 인상을 팍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혀끝에서 선명한 딸기 맛이 올라온 까닭이었다.
‘전통 연금술사가 만든 물약인가.’
지금은 거의 사라진 옛 연금술사들은 종종 이런 장난을 치곤 했더랬다.
예를 들어, 위대한 연금술사 익시르는 모든 물약을 아샤의 야생 산딸기 맛으로 만들었고, 위대한 마법사이자 연금술사인 마하간은 찐 갑각류 맛으로 만들었다.
산딸기 맛과 비슷한 딸기 맛인 걸 보니… 아마 이 물약의 제작자는 익시르의 팬인 모양이었다.
‘빨갱이가 익시르의 팬이란 말이지.’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군- 그런 생각을 삼킨 판코에는 빠르게 물약을 비웠다. 제작자가 누구든 간에, 약의 효과는 확실했다. 약기운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지고, 총을 맞은 상처가 간질거리며 재생되는 게 느껴졌으므로.
어쨌거나, 그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라헐, 우리가 대체 어떻게 살아 있….”
그때, 앞 방향에서 예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붉은 별의 아이들이 나가신다!!!
뭐??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판코에는 목소리가 들려온 반향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가 누워있던 작은 트럭 앞, 거대한 컨테이너 트럭 위에 서 있는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얼굴에는 가면을, 손에는 붉은 확성기를 든 그녀는 도로를 막고 있는 다른 차량을 향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돼지들아!! 당장 비켜!!
그러자 길을 막고 있던 놀란 운전자들이 우르르 길을 터줬다. 지구인들이 보면 모세의 기적을 떠올릴 모습이었으나, 아샤인인 판코에는 그곳에서 어떠한 신성함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거대한 컨테이너 트럭의 뒤를 쫓는 부하들… 아니, 강도들의 트럭을 보며 황당함을 느꼈다.
쟤들은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얼굴을 쓸어내린 그는 라헐을 향해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냐.”
그러나 질문의 답은 라헐이 아닌, 그의 뒤통수에서 돌아왔다.
“붉은 별의 아이들은 물주를 갈아탔다. 진짜 아버지와 함께 엘프 숲으로 가는 중이지.”
흠칫, 판코에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등 뒤에서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그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트럭 짐칸에 늘어지게 앉은 청년이 보였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판코에는 확신했다.
‘…붉은 별이다.’
공산주의자들이 변장의 달인이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 시절 변경백님의 얼굴로 변장한 미친놈이 붉은 별 외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나마 눈동자가 금색이 아닌 붉은 색인 덕분인지, 묘하게 인상이 달랐다. 변경백령 출신인 판코에는 작은 모욕감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엘프 숲으로 간다고…? 붉은 별.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거냐. 엘프 숲은 지금….”
“프랑스를 비롯한 지구인들이 뭔가를 꾸미고 있지. 몰타 발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
판코에는 즉시 라헐을 노려봤다. 설마 적에게 비밀을 누설했냐는 뜻이 담긴 눈빛이었으나, 라헐은 어깨를 으쓱였다.
“판코에 대장,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쇼. 어차피 우리가 아는 건 쥐뿔도 없잖습니까.”
“그 쥐뿔도 없는 정보로 적이 조국에게 피해를 끼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라헐, 차라리 우리가 죽었다면-”
그때, 붉은 별이 그의 뒷말을 가로챘다.
“-개죽음이었겠지.”
판코에는 눈을 부라리며 다시 붉은 별을 노려봤다. 그러자 붉은 별은 쓴웃음을 지었다.
“주문을 외울 생각일랑 하지 마라. 지금 덤벼도 개죽음이니까.”
“적의 개가 되느니, 개 같이 죽겠다!”
그렇게 소리친 판코에는 곧장 화염 주문을 외웠다. 화륵! 그의 주먹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곧장 붉은 별의 얼굴을 후려- 치지 못했다.
탁.
어느새 몸을 일으킨 붉은 별이 손가락 하나로 그의 주먹을 누른 탓이었다.
고작 손가락 하나.
하지만 판코에는 주먹을 뻗을 수 없었다. 단순히 초인과 마법사 간의 차이가 아니었다. 그의 주먹에서 피어오른 불길은 손가락을 태우긴커녕, 패배한 짐승처럼 붉은 별의 손가락을 피하고 있었으니까.
격이 다르다. 판코에가 꿀꺽 침을 삼키는 가운데, 붉은 별은 흥미롭다는 듯 불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프레시외즈의 수식 중 일부가 담긴 화염 마법… 프랑스군이 알려준 것 같지는 않고. 오귀스트 어르신께 가르침을 받았나?”
그걸 어떻게? 판코에는 자신이 놀랐단 사실을 숨기려는 듯, 더욱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닥쳐라!”
그는 정곡을 찔린 멧돼지처럼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발목의 상처도 재생하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그의 주먹이 붉은 별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결국 지켜보던 라헐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려는 찰나.
화르륵-
붉은 별이 그의 손에 있던 불길을 뜯어냈다. 아니, 그보다는 복종시켰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마치 주인을 찾은 강아지처럼, 불길은 붉은 별의 손가락 끝에 뭉친 채 타올랐다.
판코에와 라헐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불길과 붉은 별을 번갈아 바라봤다.
침묵, 짧은 침묵.
그리고 앞서가던 컨테이너 위 소녀가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가-’ 라는 시구를 읊을 때쯤.
붉은 별이 불길을 꺼트리며 물었다.
“오귀스트 어르신과 무슨 관계지?”
“…아무 관계도 없다.”
판코에는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종류의 인간이었고, 옆에 있던 라헐은 이렇게 덧붙였다.
“자그마한 인연으로 수식 몇 개 가르쳐 주신 게 전부입니다.”
“수식 몇 개라… 10강의 마법에서 유래한 수식이라.”
붉은 별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판코에가 사납게 말했다.
“네가 뭘 요구하건,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알아갈 수 없을 거다.”
하지만 붉은 별은 수식을 요구하긴커녕, 변경백과 똑같은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라. 내가 너희에게 수식을 물어보는 일은 없을 테니.”
“…부하에게 시키겠다, 이 말이냐?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악명 높은 KGB 고문법으로도 우리의 입을 열 수 없-”
“내 부하가 묻는 일도, KGB식 고문법도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애초에, 이미 알고 있는 걸 왜 물어볼까.”
“…뭐?”
알고 있다니? 판코에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붉은 별이 앞 방향을 보며 말했다.
“거의 다 왔군.”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말대로 비료길 저편에서 엘프 숲이 보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엘프 숲과 바깥을 분리하는 거대한 장벽이 보였다.
엘프와 인류의 오랜 반목을 증명하듯, 살벌한 쇠창살들과 넝쿨 식물들로 뒤덮인 콘크리트 장벽.
숲의 나무들을 가릴 정도로 드높은 장벽을 바라보던 붉은 별은, 다시 고개를 돌려 판코에와 라헐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붉은 별이 입을 열기 전에, 판코에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제네바 조약에 따라, 포로 대우를 요구한다. 붉은 별. 네가 정말 서기장이라면 국제 조약을 무시하진 않겠지.”
그러자 붉은 별이 빙그레 웃었다.
“제네바 조약이 언제부터 교전권도 없는 강도들에게 적용됐지?”
“…우리는 프랑스 외인부대 소속이다.”
“프랑스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지.”
“….”
“프랑스 군이 외인부대를 시켜 비료길을 막고 강도질을 벌였다… 이걸 프랑스가 인정할 것 같나? 고작 너희 둘을 구하기 위해서?”
판코에는 꽉 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별에게 반박할 말이 없는 까닭이었…
…그때, 라헐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장을 놀리는 건 거기까지만 해주십시오.”
“놀리다니? 난 그저 대화를 했을 뿐이다.”
“…정보는 모두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모를 일이고… 무엇보다 당신들이 어떤 인간인지 궁금했거든.”
“이제 좀 아셨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하지만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은 드는군.”
죽였으면 오귀스트 어르신을 만날 때 껄끄러웠을 테니까. 붉은 별이 뒷말을 삼키는 사이, 판코에가 눈을 깜빡였다.
“라헐, 이게 다 무슨 말이냐.”
라헐은 트럭 난간에 기대어 앉는 붉은 별을 보며 대답했다.
“제가 아는 걸 다 말하는 대가로, 우리를 풀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이 멍청한 놈! 공산주의자에게 약속은 길거리 똥만도 못하다는 걸 잊었나!”
라헐이 제발 말좀 조심하라고 말하기도 전에, 붉은 별이 픽 웃었다.
“그래? 그거참 다행이군. 난 공산주의자가 아니거든.”
“뭐?”
“기회가 있으면 다음에 보지. 외인부대.”
직후, 지이잉! 염동력이 두 사람의 몸을 들어 올렸다. 라헐이 설마? 하는 눈으로 붉은 별을 바라보는 순간.
염동력이 두 사람을 트럭 밖으로 집어 던졌다. 몸이 붕 떠오른 라헐은 판코에의 어깨를 꽉 붙잡은 뒤- 으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에 대비했다.
그러나 라헐이 비료길 바닥에 처박히는 일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은 짚 더미가 가득 쌓인 트럭 짐칸에 떨어졌다.
“…제기랄, 미리 말 좀 해줄 것이지.”
라헐은 몸에 달라붙은 지푸라기를 떼어내며 투덜거렸다.
“판코에 대장,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
“대장?”
판코에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짚 트럭 운전사가 내려오라고 소리칠 때쯤 입을 열었다.
“라헐. 만약 변경백님과 성녀님께서 아이를 낳았다면… 지금 몇 살일 것 같나?”
“잘은 몰라도, 저희와 비슷한 나이겠지요.”
“…붉은 별이 몇살이지?”
“글쎄요… 진짜 얼굴도 모르는데, 나이는 어찌 알겠습니까?”
“….”
“그보다,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판코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멀어지는 붉은 별의 트럭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
과거, 공산주의가 아샤에 퍼지고 거기에 자극받은 미국이 숲 인간들을 선동하던 시절에.
미국은 엘프와 세계수를 보호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엘프 숲 주변을 둘러싸는 거대한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웨스트모어랜드 평화선.
계획을 세운 미군 장교의 이름을 딴 이 장벽은 초기 목표와 달리, 숲의 일부밖에 막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연이은 전쟁과 그로 인한 예산 문제도 문제였지만, 기본적으로 틀어막을 곳이 너무 넓은 까닭이었다.
그래,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아샤 대륙 중서부를 차지한 거대한 숲을 통째로 틀어막는 장벽을 세우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미국이 모든 곳을 틀어막을 거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명한 이들은 미국이 숲에서 가장 중요한 육로… 그러니까 영약 유통에 핵심적인 길을 틀어막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 예상은 사실이 되었고, 미국은 엘프 숲에서 채취되는 영약의 대부분을 독점할 수 있었다.
장벽을 혐오한 엘프들이 테러를 벌이기도 했지만, 끝끝내 장벽을 넘지 못했다.
오히려 ‘세계수는 그냥 큰 나무다’ 라는 문구로 대표되는 미국엘프 전쟁 항복 문서에 ‘웨스트모어랜드 평화선 주변을 미국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문구를 적어야 했다.
장벽은 그렇게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켜왔다. 숲 인간들이 벌인 배신의 증거이자 엘프들의 수치, 그리고 미국의 이권을 상징하는 상징물로서.
그나마 아샤에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는 ‘몰타 발표’ 이후 미국은 우호의 증거로 장벽의 권리를 포기하고 엘프와 지구 모두에 소속되지 않는 중립 지역으로 선포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는.
미국이 가진 무력은 미군만이 아니었다. 거대 기업의 무력 조직과 용병들은 순식간에 미군의 빈자리를 채웠다. 다른 지구 국가들과 불법 약초꾼들에게 권리를 나눠주게 되었지만, 장벽은 여전히 미국의 것이었다.
그리고 개중에서 가장 확고하게 미국의 영역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은 ‘장벽의 정문’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비료길에서 엘프 숲 중심부로 바로 이어지는 길을 틀어막은 거대한 철문.
한때 미군 7천 명이 주둔하던 이곳은 현대에 이르러 창고와 알약형 영약을 최초로 상용화한 미국의 거대 건강 기업, 존슨&존슨의 거점으로 쓰이고 있었다.
현재 주둔 중인 병력은 최신예 마도구로 무장한 존슨&존슨 직속 전투팀과 미군이 직접 장비를 대여해준 무장 용병단 9개, 거기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방어 진지까지.
미군의 전문가들은 10강이 오지 않는 이상 이곳을 뚫을 수 없을 거라 자신했다.
그리고 존슨&존슨 측은 당연히 그 10강이 데메론드일 거라고 판단했다. 회사는 데메론드가 진짜로 문을 공격했을 때를 대비한 전투 매뉴얼을 준비하며, 온갖 무기를 쌓아뒀다.
그 무기들이 어찌나 대단한지, 직접 이곳을 방문했던 존슨&존슨 회장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이곳의 모든 미국인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누가 와서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이 문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로 10강급 강자가 나타났을 때, 철문을 지키는 용병들은 회장의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