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815)
을 위한 세계는 없다-815화(815/817)
EP.815 숲의 사람들. (6)
***
트럭에서 내린 여명이 마주한 마을의 전경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나무로 만든 집이나, 임시로 만든 전초기지 같은 건 없었다. 여명의 눈동자에 비치는 건,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드높은 감시탑과 두꺼운 담장, 그리고 살벌한 포대까지.
그건 조금 과장하면 만주 기지와 맞먹을 정도로 큰 군사 기지였다. 심지어 벽 곳곳에 총알 자국이 남아있는 게, 최근에 지은 것도 아닌 듯싶었다.
이게…
“…마을이야?”
여명 대신 라쉬크가 중얼거리자, 이번에도 미리가 변명처럼 설명했다.
“전쟁 당시에 후방 기지로 쓰였던 곳 같아요. 이미 지어 놓은 건물을 버리기도 아깝고, 그냥 그대로 민간용으로 쓴 거겠죠. 아마 내부에는 멀쩡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그때, 정문 감시탑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이곳은 봉쇄 중이다! 당장 꺼져!
-접근하면 쏜다!
멀쩡한 사람이 총부터 겨누냐? 일행들이 그런 뜻이 담긴 눈으로 엘프를 바라보자, 미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 엘프 숲에 있는 인간 중 8할… 아니, 9할은 미친놈들이에요. 남의 숲에 도적질하러 오는 인간들이 정상일 리 없잖아요?”
“….”
시리와 네티는 그렇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딜라조차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여명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순간.
붉은 별의 아이들 중 몇몇이 감시탑을 향해 소리쳤다.
-이 새끼들이 감히!
-뒤지기 싫으면 당장 문을 열지 못할까!
-서기장님께서 오셨다!
호가호위라고 하던가? 붉은 별을 등에 업은 강도들은 총 무서운 줄 모르고 빽빽 소리를 질러댔다. 아마 정문을 부순 여명의 힘을 보고 자신감이 붙은 것이리라.
-문 열어 새끼들아!!
여명이 속으로 숙청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사이, 감시탑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자신만만한 태도가 먹힌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딴 허세가 통할 리 없지… 여명이 다시 트럭에 올라탈 준비를 하는 순간 감시탑에서 답변이 돌아왔다.
-서기장… 진짜 붉은 별인가?
-이 새끼가 속고만 살았나!
-증명할 수 있나?
-잘 봐라! 우리 붉은 별의 아이들이야말로 서기장님이 오셨단 증거다! 서기장께선 데메론드의 초대를 받고 오신 몸! 더 이상의 질문은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본인이 붉은 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당당한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데메론드의 이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감시탑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뭐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일행들과 달리, 강도들…아니, 붉은 별의 아이들은 더욱더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3초를 주겠다! 당장 문을 열어라!
강도 출신이라 그런가, 협박 하나는 제대로였다. 그리고 대충 30초 정도 지난 뒤, 감시탑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무장을 해제하고,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진입을 허가하겠다.
이걸 허락한다고? 이건… 뭔가 있다. 여명은 확신에 가까운 본능을 느꼈으나, 붉은 별의 아이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히히덕거리며 여명에게 다가왔다.
“서기장님! 보셨습니까? 초인에게 무장해제라니.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그깟 총이 없어도 서기장님 혼자서 이곳을 통째로 접수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아, 그냥 이참에 이곳을 접수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
여명은 상대가 바보로 보이냐고 반문하는 대신, 그저 잘했다는 한마디로 강도들을 칭찬했다.
“저희는 보수만 올려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한 붉은 별의 아이들은 서로 무어라 떠들더니, 대뜸 차량 아래쪽에 무기를 숨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무장해제 할 마음도 없었구먼….’
스탈린이 어째서 군대를 싸그리 숙청했는지 실감하던 여명은, 일행들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준비하고 들어가자.
뭘 준비하는지 되물을 정도로 눈치가 없는 건 라쉬크 한 명뿐이었다.
여명은 라쉬크에게 그냥 뒤에 있으라고 말한 뒤, 붉은 별의 아이들과 함께 군사 기지… 아니, 엘프 숲에서 만난 첫 번째 마을 문을 향해 다가갔다.
트럭들을 이끌고 두꺼운 철조망과 바리케이드로 막힌 문을 넘자, 무장한 병력이 정지 신호를 보냈다.
녀석들의 겉모습은 일반적인 용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낡은 전투복에 비해 비싼 방탄복, 그리고 아마 스위스제로 보이는 총기까지.
강도단인 붉은 별의 아이들과 비교하면 제대로 된 용병으로 보였지만….
‘…피 냄새.’
문 입구에서는 무장 혈청을 가지고 있는 여명조차 간신히 맡을 수 있을 만큼 흐릿한 피 냄새가 나고 있었다.
단순히 코피를 흘렸다거나, 가벼운 상처 때문에 나는 피 냄새가 아니었다. 피 냄새의 근원은 용병들의 방탄복이었으니까.
방탄복에 피가 튀는 일이라… 여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용병들을 훑었다.
하지만 여명의 긴장과 달리, 녀석들은 여명과 미리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별다른 검문도 없이 트럭을 통과시켜줬다.
-통과!
수십 명의 무장 병력을 통과시켜주는 것치고는 너무 가벼웠다. 설마 안에서 포위한 뒤에 공격할 생각인가?
그런 잔재주를 펼친다면 역으로 잡아먹으면 그만이었다. 일행들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듯, 각자 무기와 마법을 준비했다.
준비했는데….
“손님! 손님 오셨다!”
“가시상추 무기상입니다! 총알, 정글도, 그물! 없는 게 없습니다!”
“저희 여관으로 오십시오! 따스한 물로 목욕도 가능하고, 지구산 라텍스 침대도 있습니다!”
“이런 상도덕 없는 새끼들! 야! 비켜! 이번에는 우리 차례야!”
정작 몰려드는 건 용병이 아닌 상인들이었다. 이 군사 기지에 있는 상인들이란 상인들은 전부 몰려온 건지, 바글거리는 상인들이 길을 통째로 막아버릴 정도였다.
“엘프 숲 전통 나뭇잎 찜은 어떠신가요? 영약은 아니지만, 이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과일도 있습니다!”
“주차장도 있습니다! 하루 주차에 단돈 13달러!”
상인들의 기세가 얼마나 강한지, 전투를 준비하던 시리조차 눈이 벌게진 상인들을 피해 여명 뒤로 도망쳤다.
일행 중 놀라지 않은 건 호객 행위에 익숙한 여명과 입을 다문 미리디스뿐.
“서, 서기장님! 어떻게 할까요?”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강도 놈들도 당황한 듯 여명을 불렀다. 여명은 보란 듯 인벤토리에서 달러가 든 가방을 잔뜩 꺼냈다.
“조금 이르지만, 보수를 지급하겠다. 내가 명령할 때까지, 이곳에서 마음껏 쉬어라.”
직후, 옆에 있던 네티와 시리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가방을 가득 챙긴 두 소녀는 붉은 별의 아이들에게 가방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상인들이 가방 속 달러를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중간중간 가방을 열었다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계의 기축 통화인 달러의 위력은 엘프 숲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상인들은 가방을 받아든 붉은 별의 아이들에게 달려들어 호객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여명은 잠시 그 꼴을 바라보다가, 일행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따로 쉰다. 이의 있는 사람?”
그냥 의례적으로 한 말이었는데, 의외로 이의 있는 사람… 아니, 오크가 한 명 있었다.
“저는 이제 그만 돌아가도 될까요?”
공산당 오크, 페로루. 그러고 보니 컨테이너 트럭 운전사는 이 사람이었다. 여명은 그를 잊고 있었단 사실을 티 내지 않기 위해 크흠, 헛기침한 뒤 말했다.
“돌아가다가 이상한 놈들에게 곤욕을 치를 텐데.”
“…그, 변장을 시켜주시는 건?”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지. 여명은 페로루와 함께 트럭 뒤편으로 간 뒤, 그의 얼굴에 피눈물의 환상을 덧씌웠다.
페로루가 변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놀라워하는 가운데, 여명이 덧붙였다.
“컨테이너 트럭은 눈에 띄니까, 강도단의 차량을 끌고 가. 그리고 가는 중에 차량이 걸릴 수도 있으니까, 정문 주둔지가 가까워지면 차는 버리고.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연락이 닿는 곳에서 대기하고 있어. 일이 끝나면 찾아갈 테니까.”
“물론입니다. 서기장 동지. 그리고 부디 하시는 일이… 잘 풀리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한 페로루는 어색한 경례를 올린 뒤, 일반 트럭에 올라탔다. 상인들과 용병들이 길을 되돌아가는 그의 트럭을 바라봤지만, 그들의 관심은 금세 눈앞의 달러로 향했다.
-손님! 제발 저희 가게로!
-덤 많이 드릴 테니까, 얼른!
-어허, 그만들 싸워! 손님들은 충분하다니까!
여명은 잠시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뒤, 일행들과 함께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붉은 별이란 이름값 때문인지, 다행히 여명 일행에게 달라붙는 상인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용병들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기지 깊숙한 곳으로 내려온 직후.
“어딘가 불쾌한 곳이오. 미리도 그렇게 느끼지 않소?”
작은 까마귀 형태로 시리 어깨에 앉아있던 코르부스가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미리는 이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예, 많이 불쾌하네요. 숲 인간들이 이렇게 모여있는 걸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
뭔가 핀트가 어긋난 대답. 뒤따르던 네티가 은근슬쩍 물었다.
“미리 언니, 살로메 언니한테 인종차별 옮은 거 아니죠?”
살로메가 인종 차별할 거라는 건 오해 아니니? 여명이 그렇게 지적하기도 전에, 미리가 차가운 눈으로 대답했다.
“인종차별? 아니, 이건 차별이 아니야. 이건 그냥… 유대인이 나치를 볼 때 느끼는 불쾌함에 가까워.”
“살로메 언니가 들으면 슬퍼하겠… 넵, 그만하겠습니다.”
네티는 여명이 눈을 부라리고 나서야 살로메를 향한 음해(?)를 멈췄다. 물론, 질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숲 인간들이 나치에 비교될 정도인가요? 엘프-미국 전쟁의 원인이 된 건 저도 배워서 알고 있는데…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미국 탓이 더 큰 거 아닌가요?”
“미국은 미국의 죄가 있고, 숲 인간들에게는 숲 인간들의 죄가 있어. 그들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엘프는 멸-”
그때, 누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손님분들, 혹시 쉴 곳을 찾고 계십니까?”
목소리는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정확히는, 2층짜리 건물 발코니에서.
“환삼덩굴 여관은 엘프 숲을 찾는 모든 분들에게 열려있습니다.”
청소 중이었는지, 먼지떨이를 든 청년이 말했다. 이마와 볼을 다 가리는 덩굴 문신이 특이한 청년이었는데, 걸음을 멈춘 여명은 그에게 대답하는 대신, 일행들을 향해 물었다.
“여기서 쉴까?”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고, 이 여관에서만큼은 용병들의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까닭이었다. 일행들은 거절하지 않았다. 청년이 숲 인간이라는 걸 알아본 미리가 조금 불쾌함을 표했을 뿐, 그녀 또한 여명을 따라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 내부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최신식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마치 통나무 내부처럼 두꺼운 나무로 마감된 벽과 나무 가구가 늘어선 내부는 아늑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미리가 내부를 보자마자 입술을 깨무는 걸 보면 아마 숲 인간의 전통 디자인이 아닐까.
어쨌든, 손님은 여명 일행뿐이었다. 여명이 1층 홀에 적당히 자리를 잡자, 얼굴에 문신이 있는 청년이 내려와 인사했다.
“환삼덩굴 여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이 여관의 주인인 창크페라고 합니다. 식사만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숙박도?”
“숙박으로 하지. 방은 몇 개나 있지?”
“저희 여관방은 세 개뿐이라, 그… 두 분씩 나눠서 주무셔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여명은 일행들의 머릿수를 확인했다. 딜라와 라쉬크, 시리와 네티, 코르부스와 미리. 코르부스야 까마귀 형태로 잘 테니 논외로 치고. 여섯 명에 방 세 개. 딱 맞았다.
“괜찮으니 방 세 개 준비해줘. 요금은 선불인가?”
“예, 선불입니다. 방 하나당 하룻밤에 400달러, 식사와 샤워는 따로 계산합니다.”
400달러? 생각보다 비쌌지만, 여명은 군말 없이 요금을 지불했다.
“샤워는 모두 할 수 있게 준비해주고. 식사는 이 여관에서 가장 잘하는 걸로, 최대한 많이.”
꾸벅 고개를 숙인 청년이 주방으로 향한 직후. 네티가 손을 들고 말했다.
“제가 형부랑 같은 방 쓰겠습니다.”
“…그걸 왜 니가 정해?”
라쉬크가 반박하자, 네티가 싱긋 웃었다.
“먼저 찜하는 사람이 임자니까요?”
“야, 오는 건 순서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 없는 법이야. 헛소리하지 말고 제비뽑기로 정해.”
“예? 하지만… 라쉬크는 형부랑 아무 사이도 아니시잖아요?”
라쉬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대신 잠자리를 팔 수는 있지. 내가 제비 뽑으면 니 동생한테 돈 주고 팔 거야.”
“….”
하. 네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은 뒤, 곧장 동생 오시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시리는 언니의 시선을 피해 라쉬크에게 물었다.
“얼마에 파실 건데요??”
“싸게 줄게.”
“좋아요. 거래 성립.”
두 사람의 거래를 본 네티는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야합이다! 이 반동들! 공평한 제비뽑기에서 음모를 짜다니! 코르부스, 딜라! 둘 다 나랑 손잡아요!”
돌아오는 대답은 시큰둥했다. 코르부스야 어른이다 보니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딜라는…
“나중에 샌드위치 줄게!”
“네티 동무, 저만 믿으십시오.”
그렇게 일행들이 야합을 끝낸 직후, 네티는 나무젓가락을 꺼내 제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비가 완성되기도 전에, 서기장이 무의미한 당파 싸움을 끝내버렸다.
“아쉽지만, 오늘 나랑 같은 방을 쓰는 건 미리야.”
“예?”
네티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명은 그녀가 새로운 주접을 떨기 전에 말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오늘 밤, 이 마을을 좀 살펴볼 생각이니까.”
“어… 왜요?”
“이 마을, 어딘가 좀 이상한 거 같아서. 잠깐 확인 좀 하고 가게.”
“….”
“겸사겸사, 정보도 좀 모으고.”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네티와 달리, 시리는 뒤늦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깨달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어쨌든, 미리가 탁자에 턱을 괴며 말했다.
“무슨 정보요? 그냥 바로 용사의 후손께서 잠드신 무덤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프랑스도 그렇고, 차원이 얇아진 것도 그렇고, 뭔가 좀 걸리네.”
“….”
“어차피 강도들을 남기고 가야 하기도 하고… 딱 하루만 이 마을을 뒤져보자.”
여명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미리도 반론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여관 주인이 쟁반을 들고 왔다.
쟁반 위에는 납작한 빵과 기름이 좔좔 흐르는 고깃덩어리가 놓여있었는데, 지구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특이한 향신료 냄새가 났다.
입가에 침이 고이게 하는 냄새였고, 종업원 청년은 일행들의 관심이 즐거운 듯 웃으며 말했다.
“저희 환삼덩굴 여관의 자랑인….”
그때, 미리가 그의 뒷말을 가로챘다.
“…두태찜이네요.”
“오, 외지인이 저희 부족의 전통 요리를 알고 계시다니.”
“레시피도 알아요. 발효하지 않은 납작 빵을 튀긴 다음, 그 위에 동물 신장에 붙어있는 두태 기름으로 익힌 고기를 얹고 엘프 숲 특유의 향신료를 가득 뿌리는 요리죠. 맞죠?”
“정확히 아시는군요!”
활짝 웃은 청년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요리의 전통과 먹는 법을 설명하고, 덤으로 공짜 술까지 가져다줬다. 문화를 아는 손님들에게는 이정도는 해드려야 한다나 뭐라나.
잠시 후, 여관 주인이 자리를 떠난 걸 확인한 미리가 말했다.
“이거, 엘프의 요리야.”
“….”
“우리의 선조께서 숲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준 레시피지. 그런데 뭐? 부족의 전통 요리…?”
미리는 콰직! 쥐고 있던 포크를 으스러트렸다.
그러고도 화가 안 풀렸는지, 그녀는 당장이라도 종업원의 머리통을 깨부술 것 같은 눈으로 주방을 바라봤다. 다행히 피를 보는 일은 없었는데, 여명이 그녀의 볼을 꼬집은 덕분이었다.
“서기장의 이름으로 묻겠습니다. 미리 동지. 식사 자리에서 화내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서기장 동지.”
그제야 일행들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미리는 일행들에게 사과하며 직접 술과 음료를 돌렸다. 세티 언니가 히스테릭 부리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네티의 말을 시작으로, 일행은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화기애애한 식사는 아니었다. 두태찜이 맛이 좀….
“와 씨, 존나 느끼하네. 여명, 콜라 있어?”
“형부, 저는 핫소스요.”
“제자여, 미안하지만 본인도 콜라 좀 주시오.”
“…미스터 샌드위치, 그냥 샌드위치나 하나 꺼내주면 안 될까요?”
여명은 이미 고추장을 꺼내 발라 먹고 있었다. 기름에 찐 고기라 그런가, 생각보다 훨씬 느끼했다.
정작 미리는 맛있다며 잘 먹었지만… 뭐, 아무튼.
식사를 끝낸 일행은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가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하룻밤에 400달러나 하는 방 치곤 침대 수준이 쓰레기 같았고, 유료 샤워실도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노숙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밤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적어도 미리가 여명의 옷을 벗기기엔 짧은 시간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오늘은 키스만.
미리가 그렇게 여명을 독점하길 잠시.
엘프 숲 위로 두 개의 달이 떠오르고, 술에 취한 붉은 별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질 시간이 되었다.
창밖이 어둑해진 걸 확인한 여명은 투명 망토를 꺼내고, 쇠미리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닐 준비를 끝마쳤다. 뭐가 됐든, 이 마을에서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명과 미리가 창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두두두두 – !!
갑자기 창밖에서 들려온 총소리 때문에?
-여기다! 여기에 그 녀석이 있다!
아니면 여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거친 고함 때문에?
아니, 아니었다. 여명과 미리가 발을 멈춘 건, 코가 뚫릴 정도로 청아한 향기 때문이었다.
“…세계수의 결정 냄새.”
이 새끼들 진짜 뭐지? 투명 망토를 벗어젖힌 여명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여관 입구에 총을 든 군인들이 그를 향해 삿대질했다.
“마나 반응 확인! 엘프다! 진짜 엘프가 있어!!”
여명은 반사적으로 미리를 바라봤다. 한데, 녀석들의 총이 겨눠진 건 미리가 아니라… 여명이었다.
“저놈! 저놈이 세계수의 마나를 가진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