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83)
을 위한 세계는 없다-83화(83/817)
〈 83화 〉 작가를 위한 나비 효과 (3)
* * *
***
여명의 싸움은 멋진 것과 거리가 멀었다.
좀비물에서 으레 나오는 히어로의 그것처럼 처절하지도 않았고,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붙이는 장엄함도 없었다.
그의 싸움은 노동에 가까웠다.
뒷골목의 청소부들이 잠깐의 깨끗함을 위해 온갖 오물을 치우는 것처럼, 묵묵히 손을 움직이는…그런 싸움.
첫 시작은 검술. 여명은 검을 들어 가장 먼저 달려드는 좀비의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캬아악!
썩어버린 성대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끊어지고, 썩은 체액과 살점이 튀었다.
그사이 다른 좀비가 그의 팔을 노리고 입을 벌렸지만, 여명은 피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주먹을 내질러 좀비의 머리를 터트려버렸을 뿐.
더 많은 체액과 살점, 뼛조각들이 토굴 바닥을 적셨다. 생전 처음 입은 교복이 도축업자의 앞치마처럼 울긋불긋하게 물들었다.
살벌한 모습이었지만, 그런 모습을 이해할 지능이 없는 좀비들은 멈추지 않고 몰려들었다. 여명의 검 또한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백 마리가 넘게 좀비를 치웠을 때쯤, 여명의 검이 볼품없이 부러졌다.
눈치 빠른아마 세티일행이 그에게 다시 검을 던져줬고, 그는 계속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검을 바꾸길 서너 번. 일행 중 가장 체력이 약한 쇠미리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후방 마법사가 빠지자, 습격자들에게서 노획한 무기가 빠르게 소진되었다. 일행의 체력도 마찬가지로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총알이 떨어진 성녀는 한계까지 마나를 쥐어짜다가 탈진해서 쓰러졌고, 제미니 선생님은 좀비에게 크게 물려 기절했다.
그다음은 웨슬리였다. 녀석은 상체만 남은 좀비에게 발이 걸려 넘어졌고, 그대로 몇 초간 좀비들 아래 깔렸다.
여명이 좀비 사이에서 녀석을 건져냈을 땐, 이미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뒤였다.
대피소에 있던 사제 지망 학생들이 마나를 퍼부어 간신히 목숨줄을 붙여주었으나, 다시 싸움에 뛰어드는 건 무리일 정도로 중상.
결국, 대피소의 구멍에는 전윤성과 세티, 그리고 여명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세 사람 모두 실력, 체력적으로 좀비를 막아내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한 손으로 열손을 막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꺄아악!
젠장, 마법사들 전부 뒤로 물러나!
좀비 중 일부가 세 사람을 우회해 대피소 안으로 들어왔다.
한두 마리 정도는 학생들끼리 어떻게 해볼 수 있었지만, 세 사람을 넘어 대피소로 들어서는 좀비는 시시각각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탈진한 성녀와 쇠미리조차 위험해질 상황.
여명은 좀비들과의 드잡이질을 멈추고 토굴 안으로 몸을 훌쩍 날렸다.
“여명?! 혼자서 어디…!”
뒤에서 쇠미리의 놀란 목소리가 들리고, 수십 마리의 좀비들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는 순간.
여명은 품에서 우라간의 손잡이를 꺼냈다.
[동… 아니, 계승자여! 드디어 나를 찾았군! 오, 좀비들! 그대는 참 언데드와 자주 엮이는군! 내가 막을 저주와 마법은 어디 있는가?]이제는 동정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가? 여명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보호막은 됐고, 지금 당장 빛을 내뿜어줘.’
[… 빛?]‘좀비들의 주의를 끌어줄 정도의 빛이면 충분해. 가능하지?’
[… 계승 받고 처음으로 맡은 역할이 손전등이라, 기뻐서 눈물이 다 나는군!]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니콘은 즉시 빛을 내뿜었다. 토굴 전체에 우글거리던 좀비들이 빛을 따라 고개를 돌려 여명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명은 토굴의 한가운데 좀비들 사이에 착지했다.
쾅!
마나가 뿜어져 나오며 토굴 바닥이 움푹 파였다. 곧이어 주변의 좀비들이 우수수 쓰러지며 공간을 만들었다.
여명은 다리에 힘을 주고, 주먹을 쥐었다.
“그럼…해볼까.”
그의 몸에서 푸른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
문자 그대로 시체가 산처럼 쌓인 대피소의 벽 앞.
세티가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후우… 그, 천여명 씨?”
여명은 감고 있던 눈 중 한쪽만 슬쩍 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가벼운 말투와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여명에 대한 염려가 가득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그 표정을 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없었다. 그녀는 대피소 모두를 등진 채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에 비해 여명은 대피소에 있는 모두와 마주 보고 있었고, 자연스레 냉담한 표정과 말투로 대답했다.
“왜, 문제 있어 보이나?”
세티와 아는 사이라는 걸 숨기기 위한 연기.
여명 본인이 생각하기엔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어색한 연기였지만, 그의 태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성녀조차 여명에게 손가락질하며 저, 저 싸가지… 같은 말을 웅얼거릴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얼 할까.
어쨌든, 여명과 세티는 적당히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상태를 확인했다.
조금 전 아지랑이를 내뿜던 무술 이름은 뭐냐, 용병 생활은 어땠냐, 우리 중에 누가 가장 도움이 됐냐…
둘에겐 중요하지만, 남들이 듣기엔 영양가 없는 대화가 이어지길 한참.
대피소 문이 덜컹거리며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울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당장 구해주마!
문 너머에서 들리는 어른들의 목소리였다. 풀 죽어 있던 학생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환호나 기쁨은 없었다. 목숨을 위협하던 테러리스트들과 좀비는 이미 여명과 일행이 막아낸 뒤였으니까.
그리고 그 어중간한 반응 때문인지, 문 너머 어른들의 목소리는 더욱더 다급해졌다.
기다려다오! 이제 금방이다!
대피소 문을 거의 뜯어버릴 기세로 잠금을 소리가 거의 끝날 때쯤.
여명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끝났군.”
그는 교복에 묻은 오물들을 털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교복을 입은 첫날부터 이런 꼴이라니. 교복하곤 영 인연이 없는 거 같은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던 여명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약간 당황했는데, 주변에서 두 다리로 서 있는 게 여명 혼자뿐인 탓이었다.
세티를 비롯해 그와 함께 싸웠던 일행들은 전부 탈진해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다른 학생들은 전부 멀찍이 떨어져 대피소 벽 주변에 모여있었다.
그가 쏟아지는 묘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일행에게 손을 내미려는 그 순간.
철컥.
거대한 문이 열리며 바깥에 있던 어른들이 대피소로 들어왔다. 총으로 무장한 어른들 대부분은 아카데미 직원으로 보였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찰칵.
작은 카메라를 든 남자. 만주에서 질리도록 기자와 마주했던 여명은 어렵지 않게 그의 정체를 예상할 수 있다.
“…기자가 여긴 어떻게?”
기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여명을 찍었다.
카메라에 이골이 난 성녀가 반사적으로 기자에게 총을 집어 던졌으나, 가장 늦게 대피소로 들어온 여자가 허공에서 총을 탁, 붙잡았다.
“…아.”
직원들에게 달려가던 학생들조차 걸음을 멈추고 입을 벌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여자.
그녀는 좀비의 시체로 틀어막은 대피소의 구멍을 보며 씨익 웃더니, 여명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금세 여명과 눈높이를 맞춰 선 그녀는 실실 웃으며 검지로 그의 이마를 쿡 찔렀다.
“오랜만이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검님.”
성검.
그녀의 외모를 보고 설마설마하던 학생들이 눈을 크게 떴다. 특히 학생들 뒤편에 숨어있던 바오닉의 눈은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성검은 주변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내뱉었다.
“내가 준 물건은 잘 썼냐? 만주에서 벌인 일을 보니 벌써 익힌 거 같더만.”
“…예,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그으래?”
안대를 차지 않은 외눈이 은근하게 여명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분이 뭐라고 하시디? 이제야 제대로 된 계승자를 찾아서 다행이라지?”
“어….”
여명은 말을 아꼈다. 혜성검 속 혜성의 마지막 부탁 때문이었다.
‘프레아 칸을 만나면 반드시 단검을 돌려주거라. 내, 내가 이렇게 부탁하마’
그 간절한 목소리를 떠올린 여명은 애써 표정을 숨겼다.
기숙사에 있는 혜성검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당장 돌려주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분과 관련해서 나중에 단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흐, 그거야 당연하지. 뭐 그리 어렵게 부탁하냐? 같은 혜성의 계승자끼리.”
실없이 웃으며 어깨를 두들기는 성검의 모습.
그건 그녀를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뭇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행동은 그녀를 잘 모르는 이들조차 충격을 받기에 충분했다.
“아 그리고, 너 나랑 사진 좀 찍자.”
“…사진이요? 이미 찍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정신없이 여명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 기자를 보며 말했다.
“저런 사진 말고, 찐하게 컨셉 하나 잡아서.”
“….”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여명이 얼떨떨해하는 사이, 성검은 탈진한 일행들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너 혼자 독사진 하나 찍고… 뭐? 이미 찍었어? 그럼 여기 널브러진 네 친구들이랑 찍자.”
일행들은 황송하다는 듯 성검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딱 한 명, 성녀만은 성검의 손을 매몰차게 거절한 뒤, 세티의 치맛단을 붙잡았다. 세티는 한숨을 쉬며 성녀를 일으켰다.
어쨌든, 성녀조차 사진을 거부하지 않았다.
성검은 기자를 불러들여 좀비를 배경으로 일행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작위적인 전투 컨셉 사진부터, 자연스러운 포즈의 휴식 사진까지.
갑작스러운 촬영 쇼에 모두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여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미리 양념 좀 처놓… 아니, 정치적인 문제니까 너희는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
“….”
“아마 며칠 뒤엔 나한테 고마워할걸?”
확신에 가득 찬 말투. 여명은 굳이 무엇이 고맙게 느껴질지 물어보지 않았다.
이번 아카데미 습격 사건이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 그는 예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
차원문 너머에는 제국이라 불리는 나라가 존재한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강대하고, 가장 위대했던 나라.
그리고 지금은 그저 껍데기만 남아버린 나라.
자칭 현자란 자들은 지구인들이 퍼트린 자본과 기술,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휩쓸리지 않고 껍데기라도 유지한 게 어디냐고 자위했지만…
삼 황자의 생각은 달랐다.
지구의 속담에 의하면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가는 법이다.
아버님과 할아버님의 실책으로 껍데기만 남았더라도, 제국은 여전히 제국이었다.
위대한 혈통과 의지가 남아있는 한, 제국은 언젠가 지구에게 빼앗긴 것들은 되돌리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리라…
삼 황자는 종종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곤 했다.
유모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시면 큰일 난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천한 핏줄이라면 모를까, 제국의 황족이라는 혈통을 타고난 이상 야심을 품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황태자인 형님조차 그의 야심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는 그저 말로만 끝내지 않았다.
지구보다 우리 혈통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겠다.
삼 황자는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지구로 직접 넘어와 로드 하우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황궁을 떠나는 날, 그는 유모의 손을 꼭 잡고 약속했다.
반드시 황족의 혈통을 증명하겠다고.
지난 1년간 삼 황자는 그 약속을 잊지 않았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는 1학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각각 분야마다 그와 맞먹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종합 성적에서 그를 이길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2학년이 된 황자는 교만이란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를 향한 찬양은 당연한 일이 되었고, 겸손하라는 조언은 실력 없는 것들의 질투로 느껴졌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황자는 종종 무단으로 수업을 빠졌다.
특히 빌어먹을 공동 수업은 아예 출석조차 하지 않았다.
고귀한 자신이 하찮은 것들과 한자리에 모여 수업을 해야 한다고?
무의미하고 무용한 짓이었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래서 황자는 오늘도 자신만만하게 공동 수업을 빠졌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캬아악!!
삼 황자는 좀비들에게서 도망치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공동 수업에 빠지지 않았다면.
경보음을 무시하지 않았다면.
대피소로 대피하라는 방송을 들었다면.
전부 부질없는 생각이었으나,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수업 좀 빠졌다고 죽을 위기에 빠지다니.
그는 턱밑까지 치밀어 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흘렸다.
“허억… 허억… 누가 좀… 구, 구해줘…”
살고 싶었다.
처음에는 저깟 좀비 정도란 생각으로 싸웠으나, 그게 만용이라는 걸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백, 수 천마리에 달하는 좀비들을 혼자서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포위되기 전에 몸을 빼고 도망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사, 살려… 살려줘. 누가 좀…!”
저 빌어먹을 좀비들은 지치지도 않고 그를 쫓아왔다.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학교를 이리저리 돌아다닌 게 문제였을까, 어느새 체력도 마나도 바닥난 지 오래였다.
“누구 없느냐! 날 살려라! 살려다오!”
그는 어느새 본관 교무실에 도달했다.
혹시라도 구해줄 교사가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지만, 교무실에서 그를 반겨준 건 을씨년스러운 침묵뿐이었다.
“아….”
이렇게 죽는다고? 제국의 황족인 자신이?
그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좀비의 발소리를 들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날 좀 살려다오… 아바마마… 유모…”
그가 삶을 포기하고 교무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때.
누군가 교무실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선객이 있었나?”
다행히 좀비는 아니었으나… 상대의 몰골은 좀비보다 나을 게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에 푹 젖어, 걸음마다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이라니.
익숙한 2학년 교복 차림이 아니었다면, 미친 살인마로 오해할 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삼 황자는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저 몰골조차 그에겐 동아줄로 보였다.
“이, 이봐! 나 좀 살려다오!”
삼 황자는 교무실로 다가오는 좀비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제국의 삼 황자다!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수 있어!”
피에 젖은 학생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얼굴로 삼 황자를 바라보다가, 스륵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 꺼낸 건지 알 수 없는 검 한 자루가 들려있었는데, 검을 앞으로 내밀고 한쪽 무릎을 꿇은 그 모습은 삼 황자가 아주 잘 아는 자세였다.
“제, 제국 기사…?”
미국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한 제국의 수호자들.
이제는 그 흔적조차 남지 않은 옛 조직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취하던 바로 그 자세였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자, 자네 설마….”
황자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살펴봤다.
자세히 보니, 그의 손에 들린 검조차 제국 기사의 검이었다. 지구인들이 만든 조잡한 모조품이 아니라, 진짜로 마나가 흐르는 진품.
“이건 꾸, 꿈인가? 여(?)가 꿈을 꾸는 것인가?”
삼 황자는 눈물이 글썽이며 물었다. 이런 순간, 이런 곳에서 제국의 옛 영광과 마주하다니.
“꿈이 아닙니다. 전하.”
피에 젖은 학생은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피에 젖은 손으로 황자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황자 전하. 우선 교무실 안에서 숨어 계시겠습니까?”
“자, 자네 혼자서 저 많은 좀비를 막겠다고? 그, 그러지 말고 여를 업고 도망가는 건…”
조심스레 의견을 내던 황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기사의 눈빛이 뱀처럼 반짝인 탓이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좀비는 제 적수가 아닙니다.”
“그,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여는 그대를 믿겠다.”
황자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2학년 중에 이런 학생이 있었던가? 그보다 왜 지금 교무실에 있는 거지?
그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새 교무실까지 밀려든 좀비들이 교무실의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으니까.
황자는 기겁하며 기사의 몸을 꽉 붙잡았다. 기사는 검을 들어 올리며 그를 밀어내곤, 교무실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교무실 문을 열기 직전, 그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황자를 향해 말했다.
“황자 전하. 제가 싸우는 동안 모리슨 선생의 책상 서랍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챙겨주시겠습니까? 곱게 포장된 붉은 나무 상자입니다.”
“…여를 보고 선생의 물건을 훔치란 말인가?”
“훔치다뇨? 그건 원래부터 제 물건이었습니다.”
“….”
황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거짓말이라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교무실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협박인지 부탁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그는 교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좀비들의 목소리와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홀로 남은 황자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모리슨 선생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