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84)
을 위한 세계는 없다-84화(84/817)
〈 84화 〉 작가를 위한 나비 효과 (4)
* * *
***
새벽이 숨죽이고, 서서히 아침이 다가오는 시간.
여명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기지개조차 켜지 않고 무덤덤한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화려한 방이었다. 아카데미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문과 대리석으로 마감된 바닥, 고풍스러운 가구들까지 뭐 하나 고급이 아닌 게 없었다.
이곳까지 안내해준 교직원의 말에 의하면 외부 VIP를 맞이하기 위한 특별룸이라는데…
그 말마따나, 일개 학생이 쓰기엔 과분한 방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아카데미가 그를 일개 학생 이상, 그것도 VIP에 준하는 사람으로 대접한다는 뜻이겠지.
정체불명의 습격자와 좀비 떼에게서 1학년 전체를 구해낸 업적은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간단할 리 있나.’
여명은 아카데미가 순수한 호의로 이런 방을 내어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는 세상은 그렇게 달달한 곳이 아니었다.
일개 청소부 길드조차 온갖 정치질과 더러운 일이 오고 가는데, 아카데미는 그보다 수백 배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곳 아닌가.
그리고 아카데미가 그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는 이유는…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성검과 내 사이를 오해하는 건가?’
교직원 중 누구도 그와 성검이 무슨 관계인지 묻지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는, 적어도 성검과 안면이 있는 교직원들은 사실상 그를 성검의 제자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고 있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건지, 아니면 성검이 의도한 바인지 모르겠지만…
‘곤란한데.’
여명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주물렀다. 성검의 제자라는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 미래를 보장하건, 그에겐 하등 쓸모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아니, 그의 복수 계획을 생각하자면 오히려 단점밖에 없었다.
성검은 호주 정부가 종교계의 반발마저 억누르며 사수한 물건 아닌가.
만약 여명이 성검의 제자,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호주는 여명이 한국과 접촉하는 걸 필사적으로 방해하겠지.
한국 같은 중소국도 뒤로는 양치기 같은 괴물을 사용하는데, 호주 같은 강대국이라면?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검과 호주의 호의 속에서 복수를 이룬다고 해도…
‘한국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을 암살한 성검의 제자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개판이 펼쳐지겠군. 여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성검과 필요 이상으로 친해지는 건 지양해야 한다. 생각 없이 거리를 좁혀오는 건 푼수 같은 성녀만으로도 충분했다.
‘다음에 만나서 혜성검의 비전유물을 돌려주고… 제자는 절대로 될 수 없다고 말해야겠지.’
여명이 그런 상념을 이어가길 한참.
그는 옷을 챙겨 입고 방문을 나섰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고,그저 바람이나 좀 쐴 생각이었다.
술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답답한 가슴을 쓸어낼 방법은 그것뿐이었기에.
여명은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를 넘어,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옥상 정원이라고 하던가? 아카데미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옥상에는 화단과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옥상은 텅 비어있었다. 친숙한 고독 속에서, 여명은 가장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그렇게 홀로 옥상에 앉아 어둑어둑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수평선 너머에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인천의 그것과 닮은 차가운 바람.
여명은 눈을 감고 흘러가는 바람 속에서 시간을 죽였다.
잠시 후, 그가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아.”
여명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
그는 옥상 정원으로 들어서던 푸른 눈의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손에 편의점 봉투를 주렁주렁 들고 있는 소녀 또한 여명을 발견하곤 눈을 껌뻑였다.
짧은 침묵.
뒤늦게 불어온 바닷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쓸고 지나간 뒤, 여명은 풋 웃어버렸다.
“아침 먹기엔 이른 시간인데.”
그가 편의점 봉투를 향해 턱짓하자, 소녀는 붉어진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힘을 썼으면 그만큼 채워야 하는 체질이거든요.”
“인스턴트는 잘 안 먹는 편이고?”
“….”
묘한 기시감이 드는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소녀는 쪼르르 여명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왜 혼자 궁상떨고 있어요?”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러는 넌 왜 방에서 안 먹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쪽하고 다르게, 여자들은 방 하나밖에 못 받았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발치에 봉투를 내려놨다.
족히 다섯 개가 넘어가는 봉투들은 편의점 식품 코너를 통째로 쓸어온 것처럼 묵직했다.
“같이 먹자고 깨우자니, 그쪽 말대로 너무 이른 시간이고…그렇다고 혼자 먹자니 먹다가 걸릴 게 무섭고.”
“…걸리는 게 뭐 어때서? 그냥 같이 먹으면 되지.”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먹는 모습을 들킨 뒤에요?”
그녀는 둔감해서 좋으시겠어요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크림빵 하나를 꺼냈다.
가격에 비해 크기가 꽤 큰 빵이라 청소부들도 꽤 즐겨 먹던 빵.
그런 빵이 소녀의 뱃속으로 사라지기까지,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저 작은 입으로 저렇게 빨리 먹는 건지.’
여명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세 번째 빵을 꺼낼 때쯤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세티.”
갑작스러운 인사. 세티는 빵 봉투를 뜯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이에요. 여명.”
“어쩌다 보니, 이제야 단둘이 됐네.”
“뭐… 그동안 시간이 나지 않긴 했죠.”
아카데미 공항에서부터 바로 어제 습격까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남몰래 만날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제가 준 대포폰으로 연락만 잘하셨어도, 굳이 단둘이 만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
여명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고, 세티는 샐쭉한 눈으로 여명을 바라봤다.
물론 진심으로 여명을 탓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난리가 났던 만주에 있지 않았나, 통화하기 여의치 않았던 거겠지.
그래도…문자는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성녀와 기사가 뜬 그 날부터 보낸 문자가 몇 통인데. 수십 통에 한 번꼴로 답장해줬어도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죠!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으나, 입에 물고 있는 빵 덕분에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세티는 빵을 씹어 삼키고 캔 콜라 하나까지 싹 비운 뒤에야 입을 열었다.
“문자 안 한 것도… 이해할게요. 여명이라고 해서 뭐든지 잘할 수는 없는 거니까.”
“….”
“그러니 지금은 그냥… 못했던 이야기나 해줘요. 대체 만주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에요? 기사에 뜬 게 전부 사실에요?”
“무슨 기사를 봤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사실일걸?”
“…진짜로 성녀랑 키스했어요?”
여명은 농담인가 싶어 피식 웃었다가, 세티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웃음기를 싹 지웠다.
“…아니. 그건 찌라시고.”
“흐음… 정말 아니죠?”
“내가 그럴 이유가 없잖아.”
“…그럼 됐어요.”
됐다고? 뭐가? 여명이 되물으려 했으나, 세티는 대뜸 다른 빵을 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입을 열 생각이 없다는 듯, 우걱우걱 빵을 씹는 모습.
여명은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할 이야기가 적지 않은 까닭이었다.
용병단 입단 시험.
푸른 쥐의 꼬리를 밟고, 성녀와 만났던 일.
한국 정부가 만주에 개입했단 사실과 북만주 사태.
성녀와 카할 마그두.
가짜 이력서가 이미 들켰던 사실과 성녀의 어머니가 푸른 쥐의 사장이었단 사실.
그리고 만주에 잠들어 있던 용에 관한 이야기까지.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다행히 세티가 가져온 음식의 양도 만만치 않았다.
여명은 봉투에서 캔 커피 하나를 꺼낸 뒤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새벽이 다가오는 가운데,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으나, 세티의 반응이 재밌는 덕분에 끝까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성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고, 조작된 이력서가 들켰다는 말이 나왔을 때는 아예 목에 빵이 걸려서 등을 두들겨 줘야 했다.
아무튼, 여명은 거의 모든 일을 솔직하고 가감 없이 말했다.
드워프 왕의 유령과 만난 이야기만 빼고.
왕이 말한 소위 ‘운명’이라는 게, 미그니움과 관련되어있을 거란 불길한 확신 때문이었다.
세티도 뭔가 어색함을 느낀 것 같았지만, 굳이 그 부분을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렇게 긴 이야기가 끝날 때쯤, 시기적절하게도 세티가 사 온 음식들도 바닥을 보였다.
그녀는 여명과 마지막 참치 샌드위치를 나눠 먹은 뒤에야, 여태껏 이어진 이야기에 대한 감상을 남겼다.
“고생했어요.”
여명은 별일 아니었다고 말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세티의 손이 여명의 손위로 겹쳐졌다.
“그리고… 고마워요.”
세티는 다른 손을 들어 여명의 뺨을 쓸었다. 푸른빛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멀쩡히 돌아와 줘서.”
“….”
“농담 아니에요. 만주 사태도 그렇고, 이력서도 그렇고… 전부 제가 제대로 돕지 못해서 벌어진 일 같아서… 만약 당신이 잘못됐다면, 저는…”
그녀가 무언가 고백하려는 순간, 여명은 어색함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그제야, 그녀 또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깨달았다.
“….”
붉어진 얼굴, 어색한 침묵.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새벽이 기지개를 켜며 해가 떠오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붉어진 얼굴은 크게 티 나지 않았다.
여명은 말없이 일출을 바라보다가, 힐끗 세티를 훔쳐보았다.
옅은 햇빛을 반사하는 그녀의 입술,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여명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감정이 떠올랐다가, 잔물결만 남긴 채 생각의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그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감정이었지만, 한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자.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여명은 준비했던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세티.”
“네?”
“진짜로 고마워할 일은 따로 있는데, 들어볼래?”
세티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뻑였고, 여명은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너랑 자매들 머릿속에 있는 금제.”
“… 갑자기 그건 왜요?”
“내가 그걸 풀 방법을 찾았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그녀가 무어라 되묻기 전에, 여명은 황금 옥새에 대해 설명했다.
이 세상 모든 잠금 장치와 금제를 풀 수 있는 마도구.
세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명을 바라보았다. 농담이죠? 라는 뜻이 가득 담겨있는 표정이었고, 여명은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벅차오르는 다른 감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세티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한참을 감정을 억누르던 세티는,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들었다.
“여명, 그 황금 옥새라는 거… 혹시 용에게 받은 거예요?”
“응. 어떻게 알았어?”
“….”
세티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여명과 맞잡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쥐며 물었다.
“설마… 용을 살려주는 대가로 받은 건 아니죠?”
“….”
여명은 드워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고 거기까지 추리한 세티의 추리력에 감탄했다.
물론, 그것과 상관없이 세티의 표정은 더욱더 딱딱하게 굳었지만.
“…저 때문에 용을 포기한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야. 다른 이유도 있었어. 용과 친목도 쌓았고, 만주군에게 한 방 먹이기도 했고, 또…”
실제로 그가 용을 살린 데에는 복잡한 이유가 있었으나, 세티는 용을 포기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충격인 듯했다.
그녀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그런 거 아니라니까?”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이유로 입을 다물었다. 여명은 할 말을 찾지 못해서, 세티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알 수 없어서.
잠시 후, 해가 완전히 수평선 위로 떠오르던 순간,세티가 기다란 날숨과 함께 정적을 깼다.
“…고마워요. 여명.”
“감사 인사는 금제를 푼 뒤에 받을게. 금제를 푸는 건… 다른 자매들이 모두 모였을 때 하자.”
여명은 벤치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슬슬 헤어져야 할 때였다. 교직원이 방으로 찾아올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여명은 벤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세티가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탓이었다.
“…여명.”
“응?”
“아카데미에서 서로 모르는 척하는 계획은 취소할게요.”
“갑자기 왜?”
“…그냥요.”
“으음, 그래도 갑자기 친해지면 다른 학생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우리 공항에서 싸웠잖아?”
여명이 장난기를 담아 말하자, 세티가 묘하게 화난 표정을 지었다.
“싸우다가 정들었다고 해요. 함께 좀비랑도 싸웠는데, 누가 이상하게 보겠어요? 그리고 이상하게 보면 좀 어때요?”
세티의 대답을 들은 여명은 자기도 모르게 다른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정수리를 공격당한 세티가 무어라 항의하려 했으나, 여명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그럼, 말 부터 놔.”
“어… 그건…”
“왜, 못하겠어?”
“알겠… 아니, 알았어.”
“아, 그렇다고 오빠라고 부르진 말고.”
“…뭐요?”
어이가 없었는지, 세티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여명은 자연스레 손을 빼고 벤치를 벗어났다.
“이따가 보자. 세티.”
“응, 이따… 봐.”
짧은 작별 인사를 마지막으로, 여명은 옥상을 떠났다. 옥상으로 올 때와 달리 한층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혼자남은 세티는 잠시 아카데미의 아침을 바라보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뒤늦은 후회를 따라 벤치가 덜컹거리고, 소리 없는 비명이 이어지기를 한참.
세티는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황급히 봉투를 챙기고, 벤치에서 일어나 옥상을 벗어났다.
옥상 정원은 다시 침묵을 되찾았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이 모두 떠난 옥상의 허공에서 방정맞은 목소리가 울렸다.
“…맙소사. 오, 맙소사.”
투명한 무언가에 가려진 목소리는 한참 동안 말도 비명도 아닌 웅얼거림을 내뱉다가, 간신히 제대로 된 말을 완성했다.
“다섯 신이시여, 제가 지금 무엇을 본 것이옵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