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86)
을 위한 세계는 없다-86화(86/817)
〈 86화 〉 작가를 위한 나비 효과 (6)
* * *
***
전윤성. 신입생 대표, 배신자의 자식, 그리고 미국의 자랑.
동기들… 아니, 이번 세대 중에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소년의 갑작스러운 대련 신청이 끝나자마자, 훈련장에 있는 모든 눈동자가 여명에게 쏠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천여명이 방 쟁탈전에서 웨슬리를 때려눕힌 그날부터 지금까지, 모두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질문이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전윤성과 천여명, 둘 중 누가 더 강한가?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가볍다면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초인다운 질문이기도 했다.
마법사나 사제와 달리, 초인에게 힘이란 무술의 증거이자 사상의 증명 아닌가.
누가 더 강한가 라는 질문 속에는 서로의 사상 중 어느 것이 더 깊은지, 얼마나 더 충실한지에 대한 본질적인 고찰이 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이야기고.훈련장에 모인 학생 대부분은 흥미 반, 기대 반으로 여명과 전윤성을 바라보았다.
전윤성은 뭐가 그리 긴장되는 건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떨리는 몸을 억누르고 있었고, 대련 상대로 지목당한 여명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뭔데?’
쏟아지는 시선이나, 동급생들의 관심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대뜸 한판 붙자니. 대체 왜?
굳이 따져보자면 이유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좋지 않았던 첫인상, 치기 어린 경쟁심, 쇠미리를 향한 노골적인 감정…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전윤성이 애써 숨기고 있는 부끄러움에 대한 답은 되지 못했다.
‘…이유야 상관없나.’
어차피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언젠가 한 번 쓰러트려야 할 상대였다.하필 그 순간이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여명은 잠시 전윤성을 바라보다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천천히 마나를 끌어 올리고, 학생들이 싸움을 기대하며 좍 갈라지려는 순간.
누군가 여명의 옷깃을 잡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학생들 사이에 섞여 있던 세티였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싸우지 마세… 아니, 아니. 싸우지 마.”
“…왜?”
여명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언젠가 전윤성을 쓰러트려야 한다고 했던 건 바로 그녀 아니었나.
“…누가 희생양을 길거리에서 죽여?”
“세티, 아무리 그래도 사람보고 희생양이라니….”
“비유는 신경 쓰지 말고! 전윤성을 쓰러트리는 건 계획의 클라이막스잖아. 학생만 있는 훈련장이 아니라, 카메라가 가득한 경기장에서 싸워야지.”
세티는 그렇게 말하곤 여명의 옷깃을 놓았다.
학생들이 묘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가운데, 세티는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선생님.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상황을 지켜보던 마르간은 어디 들어나 보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윤성 학생이 제안한 대련은 교칙에도 어긋나고, 임시 수업에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르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서 학생들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깃들었다. 몇몇은 아예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우, 우!
니가 뭔데 끼어들어?
남자의 승부를 막지 마라!
딱히 진심이 담긴 야유는 아니었기에, 세티는 가볍게 그들을 무시했다.
정작 여명은 그러지 못했지만.
세티를 향한 야유를 듣던 그는 마나를 담아 뒤꿈치를 들었고…
쿵!
가벼운 진각이 훈련장 바닥을 강타했다. 짧은 진동과 함께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깜짝 놀란 시선이 그에게 쏠리건 말건, 여명은 팔짱을 끼고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뭐, 어쩌라고.
여명이 의도한 대로 야유는 끊겼지만, 그 대신 묘한 눈빛이 두 사람을 향했다.
짧은 정적.
세티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작게 헛기침한 뒤, 마르간을 향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선생님. 그래도 전윤성 학생의 말에 아주 일리가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임시 수업이라고 해서 기초만 복습하기보단, 다른 방향으로 수업을 진행하면 어떨까요?”
“다른 방향?”
“무술 시연은 어떨까요? 선생님과 다른 학생들이 앞에서 시연을 보인 뒤에, 모두가 토의해서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면 더 좋을 거 같습니다.”
무술 시연이란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이 튀어나왔다.
야! 그건 중등부나 하는 거잖아!
물론, 마르간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세티 학생, 좋은 의견 고맙군. 학생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네.”
이번에는 진심으로 야유가 터져 나왔으나, 마르간은 듣는 척도 안 했다. 백번 양보해봐도, 무술 시연이 대련보다는 나았으니까.
“자, 자. 이제 모두 자리에 앉아주겠나? 무술 시연은 번호대로…”
마르간이 손뼉을 치며 말하자, 투덜거리던 학생들도 하나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얼굴이 빨개진 전윤성도 있었다.
자기가 제안한 대련을 거절당한 게 부끄러워서? 아니, 아니었다.
여명은 그의 표정에 숨어있는 안도감을 읽어냈다.
‘사실은 대련하고 싶지 않았던 건가? 아니면…’
그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새 옆에 앉은 세티가 말을 걸어온 탓이었다.
“여명, 아직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무술 훔칠 수 있죠?”
“…훔치다니, 그냥 보고 배운 거지.”
“아, 예. 그러시겠죠.”
세티는 여명의 농담을 가볍게 무시한 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애들이 펼치는 무술, 훔칠 수 있는 건 전부 훔쳐요. 대부분은 기본 무술이나 익혔겠지만 개중에는 나름 좋은 무술을 익힌 녀석들도 있을 거예요.”
“…무술 시연을 하자고 한 게 그거 때문이었어?”
“좋은 아이디어죠?”
세티는 칭찬을 바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세티의 머리를 쓰다듬을 생각으로 손을 들었다가,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느끼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내가 얼마나 훔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못 훔쳐도 상관없어요. 이참에 안목이나 넓히면 되죠.”
둘이 남몰래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르간은 무술 시연을 위한 준비를 끝마쳤다.
그러니까, 대충 단상 비슷한 커다란 발판을 훈련장 가운데까지 끌고 왔단 뜻이었다.
자, 호명하는 학생은 앞으로 나오시오.
단상에 올라선 마르간이 학생들을 호명하기 시작했을 때, 여명은 무언가 떠올리곤 세티를 불렀다.
“세티.”
“예? 왜요?”
“경어 쓰지 말고 말 놓으라니까. 솔직히 외견만 보면 내가 동생처럼 보… 큭!”
세티의 손가락이 여명이 옆구리를 찔렀다.
***
“녹색경 11장 1절… 과실을 얻는 자 다음 과실을 위해 과실을 버릴 것이오. 나무를 얻는…”
“인생을 사랑하는 것은 무릇 과실을 얻는 것과 같으니…”
“순환과 성장, 이것이 이사기녹님의 근본적인…”
녹색 신을 섬기는 사제님의 경건한 목소리가 울리는 교실.
성녀는 사제님의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시계만 확인하고 있었다.
기초적인 경전 해석 따위 이미 신물 나게 배운 내용이라서? 아니, 이제 곧 무술과 수업이 끝날 시간이었으니까.
아무튼, 성녀가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길 한참.
드디어 수업이 끝났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사제님께서 마무리 인사를 하기 무섭게, 성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다른 사제 지망생들이 말을 걸기도 전에 후다닥 교실을 나서 본관 건물 바깥, 야외 훈련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학생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지만, 성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언뜻 무례할 수도 있는 모습이었으나, 성녀 입장에선 나름 신경 쓴 반응이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사람 생각으로 가득했으니까.
‘세티….’
걸음걸음마다 그날 옥상에서 봤던 세티와 여명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워낙 작게 속삭인 탓에 대화는 듣지 못했지만, 표정과 몸짓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세티의 표정, 발을 동동 구르며 부끄러워하던 그 몸짓.
‘둘이 무슨 사이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
‘얼마나 오래 만났어?’
‘나랑 알고 지내던 시간보다 길어?’
‘왜 서로 모른 척했어?’
‘둘이 나 놀린 거야?’
요 며칠간 끝없이 떠올렸던, 그리고 한 번도 묻지 못한 질문.
오늘은 반드시 물어보자.
성녀는 저번에도 지키지 못했던 다짐을 삼키며 훈련장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미 수업이 끝난 훈련장에는 텅 빈 단상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성녀는 입술을 씹으며 예지를 떠올렸다. 어디로 갔을지 찾기만 하면 금방…
‘…안 돼.’
생각을 이어나가던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는 계속 좋은 결과만 만들어서 잊고 있었지만, 예지는 함부로 남발해선 안 되는 능력이었다.
관측된 미래가 어떻게 비틀릴지 알 수 없었으니까.
결국, 그녀는 세티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직접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매점, 본관 도서관, 정원, 휴게실…
한참을 돌아다니던 성녀는 문뜩, 본관 옥상을 바라봤다.
…혹시?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그녀는 마나까지 써가며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옥상에 도착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옥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옥상에 오르고 보니 본관 주변 경관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것 아닌가.
옥상 난간에 서서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던 성녀는, 안대를 살짝 들어 올리고 눈에 마나를 담았다.
그녀가 펼친 건 신의 축복도, 마법도 아니었다.
무술. 그것도 냉전 시대 소련의 무술이 그녀의 눈을 통해 펼쳐졌다.
어린 시절, 거울 속 자신의 눈매가 보기 싫어 엉엉 울던 그녀에게 어머니가 알려주었던 유일한 무술.
다음 순간, 그녀의 시야는 일반적인 마나로 강화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넓게 확장되었다.
뛰어다니는 학생들의 옷깃과 땀방울, 날아다니는 풀잎 하나, 벤치에 앉은 다람쥐의 눈동자까지.
본관 주변을 전부 확인한 성녀는 금세 여명과 세티를 찾아낼 수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녀의 착각과 달리 두 사람은 숨어있지 않았다.
본관 바로 뒤편, 쓰레기장으로 이어지는 길목 벤치에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전부였다.
‘남은 휴식 시간은… 15분. 충분해.’
성녀는 즉시 옥상 아래로 내려갔다. 아니,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확장된 그녀의 시야로, 여명과 세티를 몰래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들어왔다.
‘…저것들은 뭐야?’
게다가 두 사람을 지켜보는 눈은 하나가 아니었다.
첫 번째 감시자는 벤치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 쓰레기를 치우는 척하며 두 사람을 힐끔거리는 에이바 아주머니.
그리고 또 하나는…
‘쟨 누구야?’
나무 사이에 숨어 휴대폰 줌인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소년.
교복을 보면 1학년 동급생인 듯싶었는데, 성녀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특이한 눈동자 색을 보아하니 지구인은 아닌데… 누구지?
누구든 무슨 상관인가. 당장 내 친구를 몰래 감시하는 감시자… 아니, 관음증 환자인 게 중요하지.
‘이것들이 감히…’
성녀는 입술을 씹으며 시야를 정상으로 되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머릿속에 가득 찼던 질문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성녀님?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시…”
한 학생이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성녀가 허공 사이로 사라졌다.
놀란 학생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분노한 발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