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90)
을 위한 세계는 없다-90화(90/817)
〈 90화 〉 막간 세티와 성녀
* * *
***
세티는 성녀에 대해 생각했다.
성녀다운 위엄이라곤 하나도 없고, 친구라는 말에 바보처럼 웃고, 눈매를 가리겠답시고 어울리지도 않는 안대를 쓰고 다니는… 신의 사랑을 독차지한 계집애.
세티는 그녀를 좋아할 수 없었다.
분노나, 증오처럼 복잡한 감정을 품은 건 아니었다. 세티의 증오는 오롯이 한국 정부만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그럼 질투인가? 아니, 그런 감정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녀가 정말로 성녀를 질투했다면, 거리낌 없이 성녀의 호의를 이용했겠지.
그저… 좋아할 수 없다. 그래, 그게 가장 정확한 설명이다.
그녀에게 무한한 호의를 보내는 성녀가 이 사실을 안다면 충격을 받겠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다.
이성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애꿎은 마음을 불태운다.
‘…치졸하네.’
투명 망토의 발소리를 따라 아카데미를 가로지르면서, 세티는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평가했다.
다른 누구보다 세티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성녀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결국 유치한 떼쓰기에 불과하다는 걸.
세티의 불행은 성녀의 잘못이 아니다.
비록 그녀가 트리거가 됐을지언정, 언젠가 찾아왔을 일을 앞당긴 것에 불과했다.
성녀는 우정을 증명하고자 정정당당히 싸웠다. 그녀는 강했고, 세티는 졌다. 그뿐이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악의나 적의도 없었다.
그저, 세티가 처한 상황이 정상이 아니었을 뿐.
초인 올림피아에서 성적을 내지 못했단 이유로 한국 정부가 세티와 자매들에게 ‘그런 짓’을 시킨 것도.
더러운 태생을 보다 못한 신들께서 그녀에게 모든 축복을 거둬간 것도.
그 어느 것 하나 성녀의 잘못이 아니다.
안다. 알고 있다. 어디까지나, 머리로는.
…세티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할 때쯤, 그녀가 쫓던 발소리가 끊겼다.
투명 망토 속 성녀를 찾을 재주는 없었기에, 세티 또한 발소리가 끊어진 곳 바로 옆에 멈춰 섰다.
1학년 여자 기숙사 뒷문.
“…아직 수업 남았는데.”
세티는 굳게 닫혀있는 기숙사 문을 보며 팔짱을 꼈다.
다른 곳이었다면 몰래 발소리를 죽이고 도망갔다고 생각했겠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럴 리가 있나.
“야.”
대답은 없었지만, 세티는 성녀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라 확신하며 말을 이었다.
“…난 이대로 내 방으로 갈 거야. 할 말 있으면…따라와도 돼.”
그 말을 끝으로 세티는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출석이 자유로운 임시 수업인 탓에 기숙사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세티는 학생들이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는 1층 로비를 지나 방으로 향했다.
여자 기숙사에는 남자 기숙사의 방 쟁탈전처럼 무식한 전통은 없었기에, 세티의 방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5층, 오른쪽 맨 끝에 있는 방.
끼익.
세티는 방에 들어선 뒤, 한동안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렸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세티는 문을 닫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으로 얇은 천 하나가 걸렸다. 스르륵, 벗겨지는 투명 망토 사이로 숨어있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산발이 된 하얀 머리카락, 옅게 젖어있는 안대, 그리고 기도하듯 꽉 쥔 양손.
세티는 그런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거야?”
그건, 너희 둘이. 너희 둘이…
“…날 속였어.”
“응?”
“나, 난 믿었는데. 둘을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다 봤어! 그날 옥상에서! 두 사람이 같이 있던 거!”
옥상? 세티는 성녀가 말한 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움찔 몸을 떨었다.
“어, 엄청 친해 보이더라? 도저히 아카데미에서 만난 사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던데?”
“….”
“왜, 왜 나한테 말 안 해줬어? 내가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할까 봐? 그래서 모르는 척 속인 거야?”
성녀의 언성이 올라가는 것과 비례해서, 세티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디까지 들은 걸까. 복수에 대한 것도 들었나? 아니, 중요한 이야기는 대놓고 하지 않았는데…
세티의 머리가 복잡해지려는 순간.
성녀의 입에서 그녀의 상상을 초월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여명이랑 얼마나 사귀… 아니, 둘이 어디까지 갔어?”
“…뭐?”
“서, 설마… 끝까지 갔어?”
끝까지 갔냐고?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뜻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성녀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리가…
세티가 얼떨떨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성녀는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쳤다.
“세티의 새하얀 눈밭에! 여명이 발자국을 찍은 거냐고!”
아, 그 뜻이 맞았네. 세티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무언의 긍정으로 해석한 성녀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 축축하게 젖어버린 안대, 사과처럼 새빨개진 볼, 그리고 이쁜 입술 아래로 흐르는 콧물까지.
히끅히끅 이어지던 울음은 금세 오열로 변했다.
“흐으어엉…! 세티…!”
***
한참을 울던 성녀는 제풀에 지쳐 세티를 향해 쓰러졌다.
세티는 넘어지는 성녀를 밀어내지 않고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들썩이는 성녀의 등을 두들겨 줬다.
눈물이 많은 자매들을 상대하느라 자연스레 몸이 밴 행동.
정작 그녀의 머릿속은 아직도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 상태였다.
‘…얘 대체 왜 이래?’
세티가 필사적으로 이유를 떠올리고, 성녀가 그녀의 가슴팍에 콧물을 가득 묻히며 엉엉 울기를 한참.
그제야 울음을 멈춘 성녀가 고개를 들고 조심스레 세티에게 물었다.
“세티… 훌쩍, 우리 약속… 잊어버린 거야?”
…약속? 무슨 약속?
“나중에 정식 사제가 되면… 크흥, 같이 성국에서 살자고 했던 거…”
아, 세티는 그제야 초인 올림피아 중등부 시절 나눴던 약속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사제가 되면, 성국에서 같이 살자.
지옥 같은 한국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아직 꿈이란 걸 꿀 수 있었던 어린 소녀가 멋대로 내뱉은 약속.
정작 그 약속을 내뱉은 본인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성녀는 그것을 소중하게 지키고 있던 건가.
순결을 잃으면 사제가 될 수 없으니, 그렇게 서럽게 운 거고?
세티는 그 오해가 귀여워서… 아니, 가여워서 자기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천천히 성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미안해. 난 이제 사제는 될 수 없어.”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실. 그녀는 정말로 사제가 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순결 때문은 아니었지만.
“세, 세티….”
“근데, 꼭 약속 어긴 건 아니다? 사제가 되지 않더라도… 성국에서 살 수 있잖아.”
“….”
세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으니까.
‘…사제가 아니면 오대 신전에는 들어올 수 없어.’
그녀는 가까스로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또 나 혼자만 그곳에 갇혀서, 널 기다리라고? 일주일에 한 번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곳에서?
성녀가 꿈꾸던 미래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매일매일 세티와 함께하는 일상이었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기도하고, 가끔은 한 침대에서 잠드는… 그런 생활.
전대 성녀님처럼 가끔 찾아오는 친구를 기다리며 쓸쓸히 신전을 지키는 생활 따위, 원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간 성녀의 머릿속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명.’
자신의 두 번째 친구이자, 세티의 눈밭(?)에 발자국을 남긴 불법 침입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를 떠올리자 가슴 깊은 곳에서 작은 불길이 일어났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낯선 감정.
여명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가면 이어나갈수록, 그 감정은 꺼지지 않고 더욱더 거세게 불타올랐다.
최악의 첫 만남부터, 같이 용과 싸워 만주를 구하고, 함께 아카데미에 와서, 대피소에서 뺨을 때리고, 그리고…
세티와 단둘이서 아침을 맞이하던 모습까지.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마음속 감정은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
이게 말로만 듣던 분노일까? 아니면 질투? 그것도 아니면…
“…세티. 나 어떡해.”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성녀가 입을 열었다.
“응? 왜 그래? 약속 때문이라면…”
“아니, 그게 아니야, 저기…그게…내, 내가 여명을… ”
“…여명을?”
“트, 특별하게… 생각하나 봐.”
그녀의 고백을 듣는 순간, 세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태껏 본적 없는 차가운 표정.
그 표정과 마주하고 나서야, 성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자각했다.
“저기… 세티? 바, 방금 그 말은…”
성녀가 무어라 설명하기도 전에, 세티가 그녀를 밀어냈다.
“…성녀님, 그거 아세요?”
고저가 없는, 차가운 목소리. 성녀는 울상을 지었다.
“세, 세티. 왜 갑자기 존댓말 해…? 그러지 마…”
“사실, 전 여명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랍니다.”
“…뭐?”
“아직까지는요.”
성녀는 입을 쩍 벌렸다.
“어… 어? 잠깐, 그, 그럼 눈밭은?”
“…글쎄요? 성녀님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성녀가 무어라 더 물으려 했지만, 세티는 대뜸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자, 잠깐만! 세티!”
방 바깥으로 내던져진 성녀가 소리쳤을 땐, 세티가 투명 망토까지 문 바깥으로 집어 던진 뒤였다.
쾅!
멍하니 닫힌 방문을 보던 성녀는 흠칫,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내, 내가 무슨 짓을?”
그렇게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 숙인 성녀의 뒤편.
복도에서 방문이 열리길 기다리던 엘프 소녀는 조심스레 뒷걸음질 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