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96)
을 위한 세계는 없다-96화(96/817)
〈 96화 〉 운명을 위한 스승은 없다 (7)
* * *
***
아카데미의 섬의 해안가, 감시 카메라조차 닿지 않는 방파제 위.
밤 그림자처럼 어두운 복면을 쓴 세 명의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인가?”
먼저 입을 연 건 일행 중 가장 키가 큰 여성이었다.
그녀는 무언가 불쾌한 것처럼 허리춤에 매달린 채찍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드문드문 드러나는 마나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허가는! 아직이냐고 물었다!”
“…예, 아직입니다.”
마찬가지로 복면을 쓴 거구의 남자가 대답하자, 여성의 눈매가 뒤틀렸다.
“빌어먹을 늙은이. 이래서 정치인은 안 된다는 거야. 빠릿빠릿 움직일 줄 모르고…”
그녀는 분노를 삼키는 것처럼 복면을 잘근잘근 씹었다.
머리 위에 떠 있는 달빛조차 그녀의 분노를 피해 구름 뒤로 숨을 때쯤, 거구의 남자가 들고 있던 군사용 휴대폰이 반짝였다.
“…위에서 연락입니다. 작전은 무사히 성공했다고 합니다. 장관님께서 직접 코쟁이 이사를 구워삶으셨…”
“당연히 성공해야지! 그 노인네가 얼마나 귀한 물약을 가져갔는지 모르나?”
움찔, 거구의 남자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쓰레기들… 침투는 시간이 생명이거늘…”
채찍의 여성은 다시 한번 씹어 뱉듯 말한 뒤, 고개를 돌렸다.
“연락은?”
이번에 그녀의 질문을 받은 건 세 사람 중 가장 작은 체구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거구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군용 휴대폰을 들고 있었는데, 복면 겉으로 드러난 표정이 심히 좋지 않았다.
“…아, 아무도 받지 않습니다.”
“아무도? 검은 양도 포함인가?”
“예, 검은 양도… 받지 않습니다.”
채찍을 만지던 여성의 목이 뚜둑, 소리를 내며 기울어졌다.
“하… 축사를 떠난 지 고작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반항심을 키울 줄이야.”
“…뭐, 뭔가 사정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사정? 무슨 사정? 애국보다도 중요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나?”
여성이 날카롭게 대꾸하자, 휴대폰을 들고 있던 여성은 푹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언행을 조심하도록. 우리는 아카데미에 놀러 온 게 아니다.”
“…예.”
그 대화를 끝으로,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채찍을 든 여성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나머지 두 남녀는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찰나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 흐른 뒤, 채찍을 든 여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군. 우리가 먼저 움직인다.”
“하지만… 내부에서 발각되기라도 하면…”
“걸리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럼 양들은 어찌할까요?”
“양들이 안일해졌다면, 몽둥이 휘두르는 게 목자의 의무일 터. 기숙사 주변에서 금제를 발동하겠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에게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조국을 향한 애국심과 마찬가지로, 한 치의 의문도, 반항도 허락되지 않는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한다.”
채찍을 든 여성이 방파제에서 발을 떼는 순간,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아카데미 섬 내부로 내달렸다.
아는 사람이 봤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완숙한 경지의 비각술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고 감시 카메라와 색적 마법을 피해 달리기를 한참.
그들의 시야로 아카데미 1학년 여자 기숙사의 전경이 들어왔다.
사진으로 본 것과 똑같은 건물이었기에, 그들은 단번에 양들이 생활하는 방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금제를 준비해라.”
“대상은 어떻게 할까요? 붉은 양?”
“검은 양, 한 마리에게 집중한다. 언니가 칠 공에서 피를 쏟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기어 나오겠지.”
“…예.”
세 사람이 각자 기숙사 주변에 자리를 잡고, 어둠 속에 숨어 금제를 발동시키려는 그 순간.
번쩍!
기숙사 옥상에서 빛줄기가 솟아올랐다.
***
‘저건….’
공사장 인부의 가죽을 뒤집어쓴 ‘사제’는 아카데미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밤하늘 위로, 한줄기의 황금빛 마나가 솟구쳐 오르는 광경.
오, 폭죽인가? 이 시간에 누구지?
학생들이 있는 섬 방향인 거 같은데? 무슨 마법 실험이라도 하나 보지.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인부들이 빛줄기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으나, 사제는 그들과 전혀 다른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신이시여, 진정으로 예언이 바뀌었단 말입니까?’
언제나 그렇듯, 신께서 침묵으로 대답하셨다.
***
옥새에 어마어마한 마나가 빨려 들어가는 순간.
여명은 드워프 왕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옥새는 마나만 충분하다면 어떤 금제나 봉인도 풀 수 있다네.]그때 ‘충분하다’ 의 기준을 조금 더 정확하게 물어봤어야 했나?
여명은 빠져나가는 마나의 양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 그가 파양결에 쓰는 마나를 바가지로 퍼내는 물에 비유할 수 있다면, 지금 빠져나가는 마나는 구멍 난 항아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와 다름없었으니까.
다행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세계수의 결정을 먹은 그의 몸은 꽤 커다란 항아리였다.
이런 마나 소모를 적어도 몇 분은 버틸 수 있을 정도.
다르게 보자면, 이런 소모를 버틸 수 있는 건 겨우 몇 분이 한계란 뜻이기도 했다.
‘…왜지?’
여명이 마법을 잘 아는 건 아니었으나, 겨우 금제를 푸는 일에 이 정도 마나가 들어가지 않는 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혹시 마도구가 문제인가? 아니, 지금 그가 들고 있는 황금 옥새는 드워프 왕가의 보물 아닌가.
오히려 옥새 덕분에, 효율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하나, 자매들의 머릿속에 있는 금제가 사실은 금제가 아니라는 것.
‘…세티.’
여명은 황금빛 마나 너머, 옥새의 마법에 휩쓸린 세티의 자매들을 살폈다.
네 자매 모두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머나먼 곳을 보고 있었다.
금제가 풀리는 게 아니라… 흡사 환상 마법에 걸린 것 같은 모습.
‘…여기서 멈춰야 하나?’
여명의 이성은 옥새에서 손을 떼고, 마법을 멈추라고 말하고 있었다.
금제를 푸는 것도 좋지만, 정작 여명 본인이 탈진해서 쓰러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아카데미에 찾아온 양치기가 걱정이라고?
세티와 그녀의 자매들이 고통을 겪긴 하겠지만, 설마 죽이기라도 하겠는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당장 마법을 멈추는 게 옳았다.
어디까지나, 이성적으로는.
그러나 여명은 이성을 외면했다.
청소부들의 묘지 앞에서 복수를 다짐하던 그때처럼.
장만 어르신이 복수를 포기하라 타이르던 그때처럼.
만주에서 수십 마리의 양치기에게 달려들던 그때처럼.
그는 이성을 밀어내고 분노에 몸을 맡겼다.
개 같은 한국 정부에게 엿을 먹일 기회를 앞에 두고 이성을 따르기엔, 그는 이미 너무 멀리 왔으므로.
‘…끝을 보자.’
그는 역으로 옥새에 마나를 퍼부었다.
항아리의 구멍에서 흐르던 물이 홍수가 될 때까지, 계속.
***
검은 양은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여명과 함께 기숙사 옥상에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농장인지 별장인지 알 수 없는 통나무 집 안에 있었다.
[너희는 뭔가를 착각하고 있군.]통나무 집안은 따뜻했다.
차갑고 싸늘한 바람이 부는 바깥과 달리, 따스한 벽난로가 타오르고 있는 덕분이었다.
[양을 풀어주는 건 자유가 아니다. 학대지.]그리고 그 벽난로 앞, 마른 장작을 넣고 있는 늙은이… 아니, 늙은이의 모습을 한 ‘무언가’는 계속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양은 목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주인에게 털을 바치고, 새끼를 낳고, 끝끝내 피와 살을 바침으로써 그 무가치한 삶에 의미를 부여받지.]이해할 수 없는 말. 검은 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못 알아듣는 게냐? 하긴, 너는 회귀자도, 빙의자도 아니지.]늙은이의 말에는 비꼼과 조롱이 가득했다.
검은 양은 화를 내려다가, 양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돌아, 통나무 집의 출구로 향했다.
[쯧쯧, 너는 나가지 못 한다.]그 말대로였다. 양은 문을 열 수 없었으니까.
입으로 손잡이를 물어보려고 했으나, 손잡이는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손잡이를 향해 힘껏 뛰어올라 봤지만, 그녀는 손잡이 주변에도 닿지 못하고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무의미한 짓이다. 너는 양이다. 목장에서 살아야 해. 누가 알겠느냐? 말을 잘 들으면 양치기가 씨가 좋은 수컷을 구해줄지?]씨 좋은 수컷? 검은 양은 처음으로 분노를 느끼고 늙은이를 노려봤다.
[양치기와 목장 주인은 멀리 보고 있다. 너희 대에 제대로 된 걸 못 만든다면, 좋은 씨를 구해 다음 대를 만들 생각이다.]지랄.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는 양이야. 양은 양으로 살고, 양으로 죽어야 한다.]꺼져.
[이리 오거라. 추운 바깥으로 나가지 말고, 벽난로 앞에서 따스함을…]너도, 양치기도, 목장 주인도, 전부, 꺼져.
[어허… 말로 타이르려 했더니. 꼭 벌을 받아야 정신을 차릴 것이냐?]늙은이는 그렇게 말하며 벽난로 앞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기세가 늙은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아.
상상을 뛰어넘기에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기에 대항할 수 없는, 그런 기세.
그것을 마주하자, 뒷걸음질 치던 발에서 힘이 빠졌다. 노려보던 눈이 감기고, 욕을 내뱉던 혓바닥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대로 죽을 테냐? 아니면 양으로 살 테냐?]어느새 검은 양의 앞까지 다가온 늙은이가 물었다. 양은 덜덜 떨며 대답을 떠올렸다.
착한 양이 되겠다고, 평생 목장에서 살겠노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혀를 움직이려는 순간, 그녀가 알고 있는 한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으니까.
쇠똥구리, 나의 여명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겠지.
…좆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양의 혀로는 늙은이에게 상처하나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저항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법.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멍청한 것.]늙은이는 살벌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너에게 준비된 운명이 많았거늘.]분노에 휩싸인 손아귀가 검은 양의 모가지를 붙잡으려는 그 순간.
쿵!
통나무 집이 흔들렸다.
[…뭐지?]늙은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문밖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가 무어라 말을 내뱉기도 전에, 통나무 집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니… 어떻게…]늙은이의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검은 양은 고개를 들어 문밖을 바라봤다.
분명 찬 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던 바깥에는, 바람은커녕 황량한 벌판이 자리하고 있었다.
재의 냄새가 나는 벌판에는 작은 점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그것은 점이 아니라 인간 형태를 한 어둠이었다.
마치 귀부인의 그것처럼 여성스러운 몸매를 드러내는 그림자 드레스를 입고, 산책하듯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어둠.
[넌 누구냐? 대답해라!]늙은이는 문을 붙잡고 어둠을 향해 말했다.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이곳은 내 심상이다! 내 꿈이란 말이다!]어둠이 가까워질수록, 늙은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꺼져라! 썩 꺼져!]하지만 정작 어둠이 코앞에 도달했을 때, 늙은이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통나무집 깊숙한 곳으로 도망쳤다.
어둠은 그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 검은 양 앞에 멈췄다.
『홍세티.』
검은 양, 홍세티는 어둠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늙은이와 격이 달랐다.
일렁이는 그림자로 이루어진 어둠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내가 너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왔노라.』
『첫 번째가 되겠느냐? 아니면 이곳에서 양으로 살겠느냐?』
세티는 감히 어둠을 바라보지 못한 채, 바닥을 보며 물었다.
“첫 번째… 무엇의 첫 번째인가요?”
『나의 간택자에게 운명을 바칠… 첫 번째.』
그녀는 어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감히 되물었다.
“…간택자?”
『너도 잘 아는 사람이지.』
“제가 잘 아는 사람…? 설마?”
어둠이 소리 없이 웃었다.
『바로 그 설마다.』
아. 세티는 몸을 떨었다. 두려움이 아닌, 다른 감정 때문에.
“저, 저는…”
세티는 고개를 돌려 통나무집의 내부를 바라봤다. 그녀를 양으로 만들고, 양으로 살아야 하는 공간.
그녀는 더 이상 양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처음이 되겠어요.”
각오가 담긴 선언이었다 어둠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벽난로보다 따스하고, 죽음보다 소름 끼치는 손이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처음이란 유일무이한 것이니. 너는 기쁘게 운명을 바치거라.』
어둠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티의 손 위로 작은 구슬이 생겨났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빛의 구슬.
세티는 자신도 모르게 구슬을 어둠에게 내밀었으나, 어둠은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천천히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아닌, 나의 간택자에게 직접 줘야지.』
“어떻게”
질문은 완성되지 못했다.
세티가 고개를 들어 어둠을 똑바로 마주한 순간.
그녀의 정신이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꿈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때가 되면, 거짓 신이 아닌 나의 이름을 부르거라.』
모든 감각이 아득해진다. 정신이 현실로 떠오르는 가운데, 어둠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선명히 울렸다.
『미그니움. 그것이 그대가 유일하게 섬겨야 할 나의 이름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