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007
72화 나라를 위한 여인들의 충심
“후우.”
제라르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말 그대로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남은 이들은 더 이상 잔당이라 할 것도 없었다. 일리언 공작가의 병력이야 이미 저항을 포기했고, 주요 전력이던 시에라 제국의 인원들은 술법사 두 명 정도를 빼면 모두 죽었다.
모두 하나같이 마지막에 생명을 담보로 저항했기에 사로잡아 봐야 소용없었다.
“아주 넝마가 됐네.”
“흥, 난 이번에 소울아머 유저란 놈들 서른을 상대했다고.”
어느새 다가온 웅삼이 피식피식 웃으며 말을 걸어오자 제라르가 목을 뻣뻣이 세우며 대꾸했다.
그 말에 웅삼이 픽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고생했겠어.”
“고생이라 할 것까지는 없지만…….”
제라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이거 전쟁 좀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냐?”
“왜?”
제라르의 말에 웅삼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웅삼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기에는 뭔가 느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너 소울아머 유저들이랑 많이 상대해 봤지?”
“아무래도 그렇지.”
“실력이 어떻디?”
제라르의 질문에 웅삼이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은 짧았다.
“오늘 상대한 놈들이 가장 좋더군.”
“역시 그런가.”
제라르 역시 소울아머 유저와 손을 섞어 보았다. 그런데 그 차이가 확연할 정도였다.
“기사라도 다 같은 기사가 아니듯, 소울아머 유저라는 것도 그 실력의 차이가 큰 것 같더군. 특히 마지막 그놈은 꽤 까다로웠어.”
“뭐 실력은 있어 보이더군. 편법을 썼지만 말이야.”
“사실 전쟁하는데 그런 걸 따져가며 하지는 않잖아.”
둘의 대화는 점점 심각하게 변해 갔다.
그때 제라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문제는 전력이야.”
“그래. 안 그래도 본국에서 많이 의아해하는 모습이었지.”
“그렇지?”
세간에 알려진 시에라 제국의 소울아머 전력이 이미 상회하고 있었다.
웅삼이 터그람 전쟁 때 마주친 소울아머 유저 역시 적지 않았는데, 이곳에서만 오십여 명의 소울아머 유저를 만났다.
심지어 사신단으로 온 인원들 중 서른 명 정도가 역시 소울아머 유저들로 보인다는 보고가 있었다.
거기에 카말 왕국에서 죽인 인원들과 웅삼이 국경을 넘어가서 죽인 인원들을 합치면 벌써 백 명이 넘어간다.
이는 삼국 동맹이 소유하고 있는 소울아머 유저 수에 거의 육박하였다.
숫자로 따지면 시에라 제국의 소울아머 유저의 숫자는 절반 이하가 남았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쪽에서 들은 소울아머 유저는 대단위 병력을 운용할 때 한두 명씩 결전병기처럼 배치되어 있는 것이 정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시에라 제국은 그걸 열 명 이상씩 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내전 때도 네다섯 명씩 움직이고 말이다.
솔직히 말이 안 되었다.
“삼국이 버틴 게 신기할 정도야.”
웅삼의 솔직한 말에 제라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듣기로는 북방 쪽의 전선이 있었고, 그 전에 다른 국가들과도 전쟁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더군.”
“돈이 남아나나 보지.”
제라르의 말에 웅삼이 한숨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모를 말을 뱉어내었다.
“게다가 이 소울아머라는 것이 남아 있는 수가 적지 않다고 예상하면 그것 또한 심각하지 않겠어?”
다시 이어진 웅삼의 말에 제라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도 입힐까?”
“음.”
제라르의 뇌리에 묵갑귀마대 전원에게 소울아머를 입힌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의 말에 웅삼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일시적으로 힘을 늘려 주는 건 매력이 있어.”
“그렇지? 넌 입어 봤으니까 알잖아.”
“뭐, 그렇지.”
입고 싸워 보기까지 했다. 물론 그 상대는 진천이었고 입은 만큼 튼튼해진 몸 덕에 살면서 그에게 맞아본 것 중 가장 처절하게 맞았다.
좋은 기억이 아니다.
“적응이야 훈련을 하면 되지만 장기적으로 이게 좋을지는 모르겠어.”
“역시 그런가?”
“그렇지. 게을러질 수도. 그리고 너무 위험하지.”
“그래. 전쟁을 하다 보면 목숨을 던질 수도 있지만, 이건 좀 너무 심하다 할 정도지. 꼭 그 신성제국의 잔혹의 퍼블릭 때처럼.”
잔혹의 퍼블릭.
광신자였던 그와 그의 병력들이 떠오르자 웅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한 비유 같았다.
“이 소울아머라는 것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어. 그리고 아까 그놈.”
“그렇지. 필리어리 왕국 쪽도 놀라는 모습이더군.”
“그래. 모두 그런 식으로 목숨을 도외시하며 달려든다면 그것 역시 끔찍한 일이니까.”
그들답지 않게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 웅삼이 제라르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더니 흠칫했다. 양 볼이 불그스름해지는 것을 본 제라르가 히죽 웃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 장가갈지도 몰라.”
“딱 보니 손에 물방울조차 안 묻혀 본 여자 같은데, 이 지랄을 하고 퍽이나 좋다고 하겠다.”
웅삼이 슬쩍 시선을 돌린 곳에는 사방으로 토막 난 팔다리와 몸뚱이에서 쏟아진 내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여자야 원래 전사니까 오히려 존경의 눈으로 본다지만, 쯧.”
“아…….”
그제야 현실을 깨달은 제라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후폭풍이 되돌아올 때가 되었던 것이다.
“저, 괜찮으신지…….”
제라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말문을 떼었다.
그의 앞에는 센시아 공주가 서 있었다.
그녀의 아름답고 고운 모습이 주변의 처참한 광경과는 거리가 멀어 있었다.
그녀의 표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전투가 끝나자 이제야 긴장이 풀리며 주변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제라르 님.”
“그, 저기 전투란 게 사실 싸우다 보면 조금 험할 수도 있고…… 칼질하다 보면 팔다리도 좀 떨어지고. 가끔 머리도 굴러떨어지고…… 내장도 보이는 거긴 한데.”
나름 변명이라고 하는 말들이 죄다 이상했다.
제라르가 어버버하는 모습을 보며 웅삼은 히죽 웃었다. 왠지 승자의 미소 같았다. 그런데 그런 웅삼의 눈동자가 커졌다.
갑자기 그 금발 미녀가 제라르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제라르 경!”
“웁!”
“허?”
제라르의 입은 센시아 공주의 입으로 인해 완전히 틀어막혔다. 그리고 웅삼은 이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으. 그냥 화끈하다고 해야 하나.”
언제 왔는지 두표가 중얼거렸다.
지금 센시아 공주는 양팔로 제라르의 목을 휘감고 있었고, 양다리는 허리를 감싸며 꼬고 있었다. 마치 매미라도 된 듯 말이다.
그러면서 뭉그러질 정도로 제라르의 입술을 뭉개고 있었다.
“큭!”
웅삼은 왠지 울컥했다.
패배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고, 공주 피, 피가!”
제라르가 살짝 입술이 떨어진 사이 다급하게 말문을 열었다.
제라르의 온몸에 묻어 있던 피가 그녀의 옷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심지어 제라르의 얼굴에 묻은 피마저 빨아먹은 듯 그녀의 입술에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피를 빨아먹는 존재처럼 보였다.
“피요? 짭짤하네요? 그래선가? 내 몸의 피는 더 뜨거운 것 같아요.”
센시아 공주의 표정은 언제 창백했냐는 듯 홍조가 양 볼에 올라 있었다.
“뭐야, 저…… 여자. 공주라며?”
웅삼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두표가 그의 귓가에 나직이 대답해 주었다.
“공주는 공준데, 별명이 사교계의 미친년이랍니다. 대륙에 미친년이 둘 있는데 그 중 하나라데요. 뭐 소문이 그럽니다.”
두표의 설명에 웅삼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골라도 꼭 지 같은 여잘 골라요.”
웅삼이 고소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두표가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웅삼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남은 한 여자는 누구냐? 대륙에 미친년이 둘이라며?”
“…….”
차마 두표는 웅삼에게 ‘니 애인’ 이라고는 하지 못했다. 그저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는 둘을 구경할 뿐이었다. 물론 구경꾼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큼, 큼. 공주.”
헤머튼 왕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들은 체 만 체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아비가 있는데…….”
헤머튼 왕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제라르의 손이 슬금슬금 그녀의 등에서 엉덩이 쪽으로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눈앞에서. 심지어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모습에 순간 열까지 치솟았다.
“나 있다고!”
열이 치솟은 헤머튼 왕이 버럭 소릴 질렀다.
그때 센시아 공주의 손이 풀리며 뒤로 향했다. 헤머튼 왕을 향한 그녀의 손이 팔랑거렸다.
언뜻 보면 부채질 같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다.
‘가라고, 이 양반아!’
그 행동에 충격 받은 헤머튼 왕이 비틀거리자 그를 부축한 것은 로잔이었다.
“애들 노는 데에서 있지 마시고 자리를 옮기시지요.”
“봐, 봤는가? 저, 저것이 내게!”
“예. 봤습니다. 이 대단한 무위를 보인 남자에게 대놓고 도장 찍는데 방해하는 전하를 쫓아내려는 공주님의 안타까운 모습을요.”
“…….”
순간 헤머튼 왕의 정신이 돌아왔다.
막 나가는 딸의 행동에 눈이 뒤집혔던 그의 머리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아보니 결혼도 한 번 안 한 분이 저렇게 강한데…… 우리 공주님은 그 결혼을 세 번이나 했고.”
“그, 그야…….”
“딱 보니 귀족파가 난리 피울 건데. 그걸 수습하려면 구심점도 있어야 하고…….”
“허흠. 뒷정리를 하러 갈까.”
헤머튼 왕이 헛기침을 하며 돌아서자 로잔이 말을 마무리했다.
“이 나라를 위해 여인 둘이 최선을 다할 것이옵니다. 어디까지나 나라를 위해서죠. 연애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다면야 뭐…… 그런데 둘?”
둘이라는 말에 헤머튼 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로잔이 한쪽으로 걸어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는 류화의 곁에 가서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본 헤머튼 왕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그때 헤머튼 왕에게 바사 왕이 다가오며 눈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센시아 공주, 저래도 됩니까? 남편이 있는데…….”
“갈라섰소.”
헤머튼 왕이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하자 바사 왕이 놀라 물었다.
“그럼 두 번째 사위랑 찢어진 것입니까?”
“……세 번째요.”
“허, 그사이 한 번 더 다녀온 것입니까?”
바사 왕의 말에 헤머튼 왕이 울컥했다.
이건 눈치가 없는 것인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바사 왕이 울컥한 헤머튼 왕에게 감탄을 하며 말했다.
“대단합니다. 난 시집 한 번 보내기도 힘들던데.”
“개새…….”
순간 쌍욕이 나오는 것을 헤머튼 왕은 가까스로 참았다.
“뭐라 하셨습니까?”
“가세. 아니 가십시다.”
“흐흐흐. 그러지요. 뒷정리를 빨리 해야 하니 말입니다.”
걸어가는 헤머튼 왕의 속에서는 바사 왕의 얼굴을 한 수많은 개들이 연달아 새끼를 까고 있었다. 그게 그의 진심이었다.
그렇게 일리언 공작가의 반란은 실패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