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016
81화 손님을 맞이하는 그들의 자세
카말 왕국 국경수비대들은 눈앞에 거적 하나만 걸친 채 미친 듯이 음식을 퍼먹는 사내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들의 정체는 터그람 왕국의 패잔병이었다. 그런데 행색은 패잔병이라기보다는 도적에게 털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터그람 왕국에 대한 분노보다는 인간적인 안타까움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안타까울 뿐, 이들이 카말 왕국의 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처음 발견했을 때 워낙 굶주려 있어 식사를 제공하였다. 물론 그 대가는 적극적인 협조였다.
식사를 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카말 왕국의 3군단 소속 국경수비대장인 커흘 체서 남작이 다시 대답을 종용했다.
“그래서?”
“사실 그래서 그렇게 도적질을 하려고 했지만 워낙 주변에 있는 게 있어야지요. 그나마 가끔 오가는 상인들을 털었습니다. 하지만 죽이는 건 안 했습니다! 통행료 조금 받는 정도만 했습니다. 식량은 좀 털기는 했어도.”
상인을 털었다는 말에 커흘 남작의 표정이 굳어지자 식사를 하며 털어 놓던 사내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믿지 않는 표정이자 서둘러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고만고만한 작은 규모만 덮쳤고, 만약 사람을 상하게 하는 추격이 있을지 몰라 정말 살기 위해 조금 털었던 것뿐입니다. 정말입니다.”
“맞습니다. 물론 같은 도적끼리는 좀 부딪히긴 했습니다…….”
“흐음. 그래서?”
모든 것을 믿을 순 없었지만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다가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
“카말 왕국의 유명한 도적이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래서 그 행세를 하며 좀 편하게 털어 가는 도중에…….”
“유명한 도적?”
커흘 남작은 유명한 도적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전쟁통에 유명한 도적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전쟁 때가 아니었어도 카말 왕국에는 도적단이 없기로 유명했다.
그 이유는 바사 왕의 정책 때문이었다.
훈련만으로는 제국에 대항하는 게 어렵다는 이유로 수시로 신병들을 포함해 도적단들을 때려잡아 대는 통에 남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있어 봐야 정말 도적의 탈을 쓴 범죄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기에 유명 도적단이 있다는 말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커흘 남작의 반응에 터그람 왕국 패잔병 사내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왜 있잖습니까. 숲적이라고…….”
“쿨럭.”
숲적이라는 말에 커흘 남작은 사레가 걸린 듯 기침을 해 대었다. 사실 카말 왕국 내에서 숲적에 대한 이야기는 알게 모르게 퍼져 있었다. 다만 위에서 확인을 해 주지 않을 뿐이었다.
게다가 최근에 그와 관련하여 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숲적으로 위장했던 일단의 병력의 흔적을 찾으라는 명령 말이다.
“그러다 진짜 숲적을 만났지 뭡니까. 우리도 그 한탕만 하고 복귀하려 했는데.”
“잠깐, 진짜 숲적?”
커흘 남작의 눈이 반짝였다.
“예. 한 오십 명 정도 됐나? 그야말로 괴물들이었죠. 동료들이 순식간에 죽어 나갔습니다요. 사실 숫자가 많아서 반대하는 동료들도 많았는데, 우리를 이끌던 백인장이 강요하는 바람에…….”
그날의 기억 때문인지 열심히 식사를 하던 이들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들이 어디로 갔던가?”
“그게 이상하게 그 양반들도 이 근방 지리를 모르기에…… 대충 길을 알려 줬습니다요.”
“잠깐, 대충이라니?”
“우리가 헤매면서 만든 지도를 주기는 했지만 솔직히 엉망이라 쓰지 않던 건데 그걸 찾아내는 바람에…….”
“바람에?”
“그냥 얼렁뚱땅 설명하고 대충 방향을 가리켜 줬습죠.”
패잔병의 말에 커흘 남작이 이마를 짚었다. 이들조차 길을 헤매는데 뭘 제대로 가르쳐 줬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한숨을 내쉰 커흘 남작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대충 어느 방향인가.”
“그게 저희들이 발견된 위치에서 숲이 끝나는 방향 쪽이기는 한데…….”
순간 커흘 남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국경수비대 병력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단서를 찾았으니 흔적을 찾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
을지수호와 묵갑귀마대 오십여 명의 실종.
그때 고진천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보고가 들어왔다.
“흔적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 아새끼들, 어디서 시간 까먹고 있던 거이간!”
물론 이 소식을 기다린 또 다른 한 명 을지우루 역시 노성을 터트리면서도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그게…….”
하지만 보고를 하기 위해 도착한 전령은 머뭇거리며 할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천은 물론이고 우루 역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말하도록.”
진천의 한마디에 전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제국 방향으로 빠져나간 것 같다고…….”
“어느 방향?”
우루가 조심스럽게 되묻자 전령이 다시 정확하게 보고를 올렸다.
“시에라 제국 방향 말입니다.”
“…….”
“분명 그쪽으로 기마가 이동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합니다.”
진천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표정을 하고 말이다.
“어쩌디요?”
우루가 물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진천이 무덤덤한 음성으로 답했다.
“몰라.”
둘은 한참 동안 서로 말하지 않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자 진천이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우루.”
“예.”
“일단…….”
“일단?”
뭔가를 뜸 들이는 진천의 모습에 우루가 초조한 얼굴로 그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인 진천이 말을 이었다.
“못 들은 걸로 하지.”
“……알갔습네다.”
못 들은 걸로 하는 대상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
을지수호와 묵갑귀마대원들은 불가에 모여 앉았다. 그 안에는 꽤 지저분한 종이가 재로 변해 가는 중이었다.
“잘 탄다.”
“젠장. 종이니까 잘 타지!”
“빌어먹을, 이걸 믿어선 안 됐어.”
투덜거리던 묵갑귀마대원들이 일제히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수호가 기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끄응.”
뭔가를 말하려던 묵갑귀마대원들은 입을 닫았다.
그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좀 이상할 때 길잡이를 그만두게 했어야지.”
“그러는 넌? 왜 따라갔냐? 이상하다며?”
종종 이 길은 아닌 것 같은데 하던 대원을 향해 핀잔을 주었지만 그 역시 다른 대원들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건…….”
“큼.”
모두 시선을 피했다.
그때 누군가가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쟤가 말이 막내지, 막내 같기나 하냐?”
“끄응.”
절로 신음성들이 뒤따랐다. 제아비를 쏙 빼닮은 수호의 모습 때문에 그들은 종종 막내라 부르면서도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그건 뼛속까지 침투해 있는 존재감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을지부루는 철저하게 따라야 할 대상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뛰어들고, 그의 한마디에 울상을 지으며 말을 지고 뛰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본능적으로 수호가 하는 대로 따르게 된 것이다. 부루를 따르듯 말이다.
일종의 습관이었다. 본능이 따르는 습관.
“아무리 처음 보는 동네라지만, 이거 창피해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남들이 알면 우리를 뭐라고 하겠냐.”
“그러게.”
툴툴거리던 묵갑귀마대원들이 다시 불에 손을 가져갈 때였다.
“응?”
몇몇이 귀를 쫑긋거렸다. 그러고는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다들 뭔가를 느낀 모습이었다.
말없이 누군가가 슥 사라졌다가 나타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손님이다.”
“수는?”
“약 서른. 그중 병력은 열다섯.”
“군인이냐?”
“아니, 상인 같아.”
“젠장, 피해야 하나?”
잔뜩 인상을 찌푸린 그들이 중얼거릴 때 수호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고기만 먹기 지겹지 않습네까?”
“응?”
“옷도 좀 더럽고 말입네다.”
“…….”
“혹시 제대로 된 지도를 얻을 수도 있고 말입네다.”
수호의 말에 묵갑귀마대원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애용하던 두건을 눌러썼다. 그러자 수호가 히죽 웃으며 두건을 눌러썼다.
그때 대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야, 막내야.”
“예?”
“니가 두목이다.”
그 말에 수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러자 대원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니가 덮어쓰는 게 나아. 넌 줄이 좋잖아. 우루 장군도 그렇고.”
“끄응.”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에 수호는 저지른 잘못도 있기에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까짓 내가 하디요.”
일어서서 무장을 점검하곤 선두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본 대원들 중 하나가 말했다.
“왠지 이 그림이 속 편하기도 하고.”
“그렇지.”
“암.”
진짜 이유는 이것이었다. 다들 눈빛이 달라졌다.
그때 수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손님 맞으러 가야디요.”
“흐흐흐흐!”
“그래!”
“오늘은 배 좀 부르겠는 걸?”
두건을 눌러쓴 수호와 오십 인의 숲적들이 상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겨 나갔다.
숲 너머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우린 숲적이다! 있는 거 다 내놔!”
“도적떼들을 물리쳐라!”
누군가의 호기로운 외침, 그리고 짧은 병장기 마찰음. 일이 끝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들의 허름한 모습에 달려들었던 손님들은 처참한 시체로 변해 여기저기 누워 있었다.
전투라 할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일개 상단의 호위 따위는 이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을 마친 수호와 숲적들은 포로들을 앞에 두고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지도는 없고, 이놈이 길잡이란 말이냐?”
“예. 흑흑. 집에는 토끼 같은 마누라와 노모가 셋이나…….”
“보통 애가 셋이라고 하지 않냐?”
“아! 그, 아버지가 장가를 여러 번 가셔서…….”
변명을 늘어놓던 자가 황급히 말을 바꿨다. 혀를 찬 대원 하나가 다시 물었다.
“어쨌든. 지도는 없고?”
“예. 우리 같은 이들이 지도를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요. 그거 걸리면 큰일 납니다요.”
포로의 대답에 숲적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길잡이의 머리통은 보기 좋게 갈라져 있었다. 그 앞에는 수호가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말이다.
“죽여도 꼭 필요한 애들만 골라 죽이냐…….”
“후우. 어쩌겠냐. 막내…… 아니 대장인데.”
그때 대원 하나가 물었다.
“지도는 군부대에나 있다고?”
“예.”
포로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살아남은 포로들은 언제나 그렇듯 알몸으로 나무에 묶여 남겨졌다.
그렇게 그들의 명성이 조금씩 시에라 제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