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020
85화 선택된 자들
시에라 제국 남부의 수상한 움직임에 터그람 왕국은 물론이고 필리어리 왕국까지 들썩이기 시작했다.
물론 카말 왕국 역시 긴장도를 높이기는 했지만, 고위 인사들은 그들이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기에 한결 차분한 모습이었다.
터그람 왕국의 경우 삼국 동맹에서 가장 동떨어진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 덕에 발 빠르게 징병을 하는 듯 부산함을 떨었지만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반면 필리어리 왕국의 경우 왕성이 공격당하는 위기를 겪기는 했었지만, 의외로 빠르게 안정이 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내부적으로 갈려 있던 세력다툼이 종식되었다는 점이었다.
더 이상 계승귀족파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계승귀족파의 수뇌들이 시에라 제국에 나라를 팔아먹으려 했다는 소식이 퍼진 것이다.
그중 그 일에 발을 걸친 이들은 빠르게 몰락했고, 그 일에는 그 사실조차 몰랐던 다른 계승귀족들이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소외감이 일단 컸다. 만약 그대로 공국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큰일에 소외되었던 이들을 핵심 계승귀족들이 크게 써 줄 리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 계승귀족의 핵심이 몰락하자 또 다른 위기감이 돌았던 것이다. 다른 일도 아닌 반역이다.
반역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충분히 불똥이 튈 수 있는 일이었다.
파벌이라는 것이 그런 거다.
몸을 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득을 얻을 수도 또 손해를 입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소외되었던 계승귀족들은 오히려 왕가에 적극 협조를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은 이번 일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던 것이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왕가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힘의 구조에 편승을 할 수 있었다.
때 아닌 충성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대승적 차원이었다.
제국의 침공이 임박해 있는 가운데 국가의 보위차원에서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그런 이유 말이다.
결과적으로 필리어리 왕국의 헤머튼 리어 2세는 그 어떤 때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가우리라는 뒷배였다.
이번 왕성 습격 사건을 막아 내준 동맹이 바로 가우리라는 점과 그들의 수뇌부와 왕가 사이에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소문 덕이다.
소문만 무성했던 가우리가 실제로는 제국의 노블기사단을 피해 없이 막아 내는 강력한 제국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다른 귀족들까지 납작 엎드리게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그들도 사신단을 습격했던 숲적의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다행히 그 피해자들은 이번에 모두 숙청을 당했기에 잘 포장이 되어 무마되었다.
사실 왕실이 가우리 덕에 생존했는데 그걸 언급하기도 힘들었기도 했다.
어쩌면 다행인 것이다.
그런 필리어리 왕국의 헤머튼 왕과 달리 이번 일로 인해 뜨고 있는 귀족이 있었다. 그는 바로 필리언 제라르의 친우로 알려진 카사 노바 백작이었다.
사전에 습격을 알린 공도 세워 남작에서 두 단계나 오른 백작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었다. 계승귀족파의 천덕꾸러기에서 새로운 왕도 귀족들의 실세로 올라선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제라르는 황금 동앗줄인 것이다.
“오늘은 어디로 가는 거냐?”
“흐흐흐 믿으십시오! 제가 두 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카사 백작은 자신을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 두 남자에게 자신감이 찬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바로 제라르와 계웅삼이었다.
“그럼 기대해 볼까?”
희안하게도 웅삼과 제라르는 둘이 있을 때는 티격태격만 했는데 그 사이에 카사 백작이 끼면서 의외로 잘 어울리게 된 것이었다.
“오오오!”
화려한 실내장식과 테이블 그리고 고급스러운 소파가 그동안 보아왔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심지어 방긋거리며 웃고 있는 아가씨들까지.
“이거야! 이거!”
“어떻습니까? 비슷합니까?”
“비슷한 걸 떠나 고급져!”
제라르와 웅삼이 환호했다.
“이곳에서 이걸 볼 줄은 몰랐는데…… 노래방 기계만 있으면 딱이야!”
“아 그 음악이 저절로 나온다는 그것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건 이걸로!”
카사 남작이 한쪽의 장막을 열자 여러 가지 악기를 가진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다 아리따운 여인들이었다.
“오오!”
웅삼과 제라르가 더욱 환호했다.
그들은 서울이라는 세상의 향수를 완벽하게 재현해 준 카사 남작에게 치하의 말을 건넸다. 그러고는 웅삼이 악사들에게 다가가 가장 부르고 싶었던 곡의 음을 알려주었다.
전주가 흘러나왔다. 경쾌한 음악이었다.
웅삼이 해맑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오람찬! 하루 일을! 끝 마아치고오서어어!”
“아싸!’
옆에선 제라르가 박수를 쳤다. 그리고 카사 백작이 탄성을 터트렸다.
“왠지 하루를 마무리하는 용사들의 기상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그들이 힘차게 목소리를 높여 노래를 불러 나갔다.
뚝. 뚝. 뚝.
“뭐지 저 남자?”
“물기를 뚝뚝 흘리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
카사 백작이 임대한 살롱 입구에 있던 종업원들이 수상한 눈초리로 그 앞에 나타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위기도 이상해 보였다.
“누구요?”
건장한 사내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사내가 물기를 털며 입을 열었다.
“내 영혼의 반려를 찾아왔다.”
“응?”
질문을 던진 건장한 사내가 몸을 움찔했다. 왠지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소란은 피해야 할 일이었다. 나름 점잖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를 찾는 거면…….”
“필리언 제라르. 내 영혼의 주인이다. 그의 향기가 이곳에서 난다. 나를 안내해 줄 수 있는가?”
“…….”
그의 정체는 바로 머맨인 페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발언으로 인해 제라르의 게이설이 필리어리 왕국의 왕도에 쭉 퍼지는 순간이었다.
***
제라르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정말이오!”
“후우. 하지만…….”
센시아 리어 공주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페일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 홀짝이며 서 있었다.
“정말이라니까요! 난 아직도 치마 입은 여인네가 지나가면 벌떡벌떡 일어서……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대만 보면 벌떡…… 이, 이거도 아닌데!”
뭔가를 변명하려면 할수록 말이 꼬이는 덕에 제라르가 머리를 감싸며 몸부림 쳤다. 그런 제라르를 보며 페일이 한마디 툭 던졌다.
“주인. 발정났군.”
“닥쳐!”
“후루루루루룩!”
말은 없었지만 차 마시는 소리가 커졌다. 마치 반항이라는 걸 하듯 말이다.
그런 페일을 보며 센시아 공주가 조심스럽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정말 아닌 건가요? 아니며 두 쪽 다 취향인 건…… 어머! 상상해 버렸어!”
“고, 공주!”
갑자기 세상 잃은 표정을 짓던 센시아가 볼을 물들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제라르는 다시 무너졌다. 제라르가 발끈하며 페일에게 외쳤다.
“야! 뭐라고 좀 해 봐!”
그러자 페일이 입을 뻐끔거렸다. 마치 ‘니가 닥치라며?’ 라고 반항하는 듯했다.
“말해! 말해도 돼!”
“인간 공주. 난 남자가 취향이 아니다. 그저 맹약에 따른 인과관계일 뿐. 심지어 난 부인도 열이 넘는다.”
“개새끼지.”
부인이 열을 넘는다는 말에 제라르가 얼굴을 팍 일그러트렸다.
“주인. 무능한 자의 질투는 추잡하다. 난 할 만큼 했다. 내 머맨 생에 수백 명의 세이렌에게 채인 사내는 그대가 유일하다. 그것 나름 역사에 남을 기록이지만.”
“그만! 닥쳐 닥치라고!”
“풉!”
센시아 공주의 얼굴이 벌게졌다.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것이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최대한 억제하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나온 흘러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제라르의 곁에서 주인의 명령에 충실한 페일이 차 마시는 소리만이 요란할 뿐이었다.
“후루루루루루룩!”
센시아 공주가 나가고 단 둘만이 남았다.
혼이 빠져나간 듯한 제라르가 페일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왔냐.”
“영혼의 반려니까. 그동안 너무 떨어진 것도 있고.”
“끙.”
그의 말에 제라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제라르를 보며 페일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성공했나 보군.”
“큼.”
“게다가 미인.”
“음!”
순간 제라르의 목이 꼿꼿이 섰다.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취향이 참 독특하군.”
“응?”
“아까 그 여자.”
“센시아 공주가 뭐?”
“너 찾아가기 전에 그 주변에서 봤지.”
제라르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가 웅삼과 놀던 곳은 이 지역 최대의 유흥지대다. 그런 곳에 센시아 공주가 있었다는 말에 당연히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건 당연했다.
“그녀가 잘 빠진 남자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하더군. ‘이 누님 또 시집간다. 자주 못 와도 이해하렴.’ 이라고 말이지.”
“…….”
“그러더니 그 남자들이 ‘누님 이 꽃미남 사 인방을 잊지 마십시오.’ 라고 하더군.”
“쿨럭.”
그러고 보면 그녀와 가면무도회장에서도 만났지 않은가.
페일이 쐐기를 박았다.
“이런 걸 천생연분이라 하는 건가? 축하하지. 주인. 영혼의 반쪽을 제대로 만났어.”
페일의 축하에 제라르는 울상을 지었다. 그때 페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열제의 전언이다.”
“응?”
“시에라 제국으로 가라.”
“으응?”
“웅삼이랑 같이.”
“으으응?”
제라르는 지금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그런 제라르에게 페일이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 주었다.
“난 바닷길을 안내해 주기 위해 온 것이고 말이지.”
“…….”
“후루룩!”
제라르의 얼굴이 제대로 똥 씹은 것처럼 변했다.
***
“왜! 안 가! 이실라 공주와 뜨거운 약속이 있단 말이다아! 수호 그놈은 왜 거길 가 있는 건데!”
웅삼이 노호성을 터트렸다. 그러자 이 소식을 가져온 페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을 할 거라 하더군.”
“어떤 놈이!”
“그대가 못 이기는 일인. 제일 윗자락.”
못 이기고 제일 윗자락이면 고진천이다. 하지만 웅삼은 물러서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그래도 이번만큼은…….”
“이 말 한마디면 될 거라더군.”
“뭐?”
“트렌스젠더? 뭐 그걸 만들어준다던가.”
웅삼은 절망했다. 그가 아는 진천은 한다면 하는 남자다. 물론 진짜로 그걸 만들지는 않겠지만 달려 있는 알 두 쪽 중 하나는 터질지도 몰랐다.
페일은 웅삼을 보며 저 표정을 조금 전에 봤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면 그의 표정도 제라르와 똑같이 똥 씹은 사람마냥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
***
“둘이면 되갔지요?”
“되겠지.”
고진천과 을지우루는 한결 편한 얼굴로 차를 음미했다. 최강의 반열에 오른 두 명이다. 다른 건 몰라도 작전 수행만큼은 믿을 만했다.
거기에 페일을 이용해 바닷길로 이동을 할 예정이다. 아무래도 전운이 감도는 지금 육지로의 길은 어려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법사 하나.
“그런데 그놈 믿을 만합네까?”
“열심히 배웠다더군. 이번에 통신 마법도 떼었다고 하고…….”
“길티만.”
“데려왔으니 써 먹어야지.”
진천의 말에 우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
“얼굴에 왜 껌댕을 바르는가?”
지나가던 마법사 하나가 질문을 던지자 트렌든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위장은 침투의 기본이지.”
“그건 그런데.”
칠흑의 제복에 주렁주렁 달린 요상한 무기들. 생소한 모습이었다.
“자네 통신 마법사로 가는 거 아닌가?”
“흐흐흐!”
“어이 이보게?”
트렌든은 오랜만의 작전에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