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056
121화 바이칼의 새 별명
달려 나가는 로우급 유저를 보며 스트레인지 후작은 불길함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으로 세 번 연속 이겼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
거기에 자세히 생각해 보면 간간히 보이던 반격에서의 그 날카로움과 절묘함은 결코 그냥 나온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소울아머 유저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필리어리 왕국은 제국과 같이 광대한 땅이 아니었다. 거기에 지금은 완전히 쓸려 나갔지만, 권력의 중추에서 지속적으로 정보를 보내오던 첩자도 있었다.
당연히 필리어리 왕국의 어지간한 소울아머 유저는 다 파악하고 있었다.
숨겨진 전력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거기에 소울아머 유저라는 위치는 쉽게 내버릴 만한 패가 아니었다.
소울아머 유저라는 위치가 일종의 한계를 넘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반 기사들을 상대로 소울아머를 입지 않더라도 압도적일 수 있는 게 소울아머 유저였다.
그런 자가 갑주를 입으면서 더욱 넘나들 수 없는 벽이 되었다.
그런데 만약 그런 귀중한 자원을 맨몸으로 내보냈다가 소울아머 유저가 나온다면 어쩌겠는가.
만약 그대로 꽁무니를 뺀다면 변명거리는 있을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만약 상대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사기는 다시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에는 저쪽에서도 소울아머 유저를 내보낼 수밖에 없다. 피한다 해도 소울아멍 유저가 나와야 한다.
소울아머 유저의 숫자가 적은 필리어리 왕국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다.
소울아머 유저끼리의 기사대전은 쉽게 끝나지 않는 면이 있었다.
이겨도 전투에 다시 복귀하기 어렵다. 소울포스가 고갈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필리어리 왕국이 내밀 만한 패는 적었다.
“피할까?”
스트레인지 후작의 중얼거림에 하퍼 자작이 입을 열었다.
“피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 보이는군.”
“소울아머 유저로 보이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간혹 있잖은가. 나이든 노기사가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음을 얻는다든지 하는 경우 말일세.”
스트레인지 후작의 말에 하퍼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둘이 대화하는 사이에 로우급 유저가 거의 다다랐다.
“토니 트리먼 남작이다! 이 운 좋은 늙은이, 이제 목을 내놓아라!”
“운도 실력이라네.”
바이칼 공작이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그를 보며 토니 남작은 신중한 표정으로 방패와 롱소드를 다잡았다.
로우급 유저이니 자신만만해도 될 법했지만, 상대를 가볍게 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거 참, 노인을 상대로 너무 신중한 것 아닌가? 젊은 친구라면 패기가 있어야지.”
“늙은 게 입만 살았구나.”
“그러게 아무래도 힘이 부치다보니 입만 주로 놀리게 되더구먼. 자네도 나이 먹어 보게. 아! 미안하네. 이제 더는 나이를 먹을 수 없을 건데. 안타깝네.”
한마디, 한마디가 성질머리를 슬슬 긁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토니 남작은 대꾸하지 않고 신중한 표정으로 바이칼 공작을 노려보았다.
“쯧, 이 짓도 그만해야 하나. 몇 정도 더 나올 줄 알았건만.”
바이칼 공작은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만만히 보이며 상대해 오고 있었는데 이번 상대는 지나치게 신중했다.
거기에 로우급이라 불리는 소울아머 유저였다.
더 이상 운이 있다고 포장하기에는 상대의 실력이 확실했다.
“후웁!”
토니 남작이 순간 말을 몰아가며 롱소드를 휘둘렀다.
그걸 바이칼 공작이 그대로 피해 냈다.
확실히 로우급이지만 소울아머 유저임을 증명하듯 빠른 공격이었다.
한 번의 공격이었지만 토니 남작은 더욱 진중해졌다.
“역시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운이 좋다니까?”
“최선을 다해 네놈을 쓰러트려주지. 소울아머를 입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겠다.”
토니 남작도 그동안 기사대전을 살피며 운이라고 하기에는 잠깐씩 내보이는 공격이 날카롭거나 흐름을 차단하는데 있어 주요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거기에 막상 도착하니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모습에 신중하게 공격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여유롭게 피해내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외부에서 볼 때는 다급히 피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공격을 하며 바이칼 공작의 몸동작보다는 시선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몸동작과 달리 여유가 담겨 있었다.
여기에서 확신을 한 것이다.
“난 소울아머가 없다네. 뭐 신기하기는 하더구먼.”
그의 대꾸에 토니 남작이 서늘하게 웃었다.
더는 속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소울아머 유저라 해도 자신은 있었다.
상대가 유저라 쳐도 소울아머를 입고 있지 않은 상태이고, 자신은 로우급이지만 소울아머를 착용하고 있었다. 질 리 없는 싸움이었다.
“하압!”
토니 남작이 말을 몰아 나아갔다. 동시에 그의 롱소드에서 소울포스가 뿌옇게 번져 갔다.
콰앙! 쾅!
막고 피하고 또 막았다.
바이칼 공작의 방패는 이리저리 패이고 갈라졌다. 딱 두 번 막았을 뿐인데 방패가 너덜거렸다.
그러나 그에게 피해는 없었다. 완벽하게 흘려버렸기 때문이었다.
“본 실력을 드러내라.”
토니 남작이 으르렁거렸다. 아직까지도 쩔쩌래는 시늉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그때였다. 바이칼 공작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까?”
순간 바이칼 공작의 노안에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토니 남작이 순간 방패를 들어올리며 움찔할 정도였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끼히힝!”
바닥에 쓰러져 있던 말이 발버둥을 친 것이다.
지금 이 주변으로는 시에라 제국 기사들의 시체와 턱뼈가 바스라져 기절한 채 쓰러져 있던 말 한 마리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살기에 쓰러져 있던 말이 놀라 퍼덕거린 것이다.
문제는 그 퍼덕거린 말의 주변에 토니 남작이 탄 말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보통 이 정도 살기가 짐승에게 간다면 짐승 역시 견디기 쉽지 않다.
그러나 실력 있는 기사는 이런 경우, 타고 있는 말을 진정시킬 수 있다.
제대로 된 기사는 말과 호흡할 줄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닥에 누워 있던 말은 그 영향력 밖이었다.
그때 바이칼 공작이 방패를 집어던졌다.
“웃차!”
그때 토니 남작이 탄 말이 바닥에서 허둥대는 말을 피하듯 앞발을 들어올렸다.
그 탓에 날아가던 방패가 말의 몸통을 가격했다.
다리를 들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피하거나 쳐낼 수 있었던 공격인데 말이다.
퍼억!
“끼히히힝!”
“설마 살기를?”
토니 남작은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바이칼 공작을 노려보았다.
그의 동공에 비춰진 바이칼 공작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토니 남작은 쓰러지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긴장했다. 세 번째 기사도 말이 쓰러지며 잘못 떨어져 죽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뭔가 유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져 있는 말에게 살기를 쏘아 보낸 것을 보고 예상한 것이다.
“웃차!”
“이런 비겁한!”
토니 남작의 외침에도 바이칼 공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롱소드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러나 겉보기에나 그렇지 그의 균형을 마저 무너트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콰당탕!
결국 토니 남작은 바닥을 굴렀다. 그 순간이었다. 함께 뛰어내린 바이칼 공작이 롱소드를 횡으로 휘둘렀다.
마치 사형수의 목을 베는 망나니처럼 큰 동자기었다.
죽이기 위해 휘두른다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보여 주는 것처럼 말이다.
“헛!”
“으잉?”
순간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놀란 음성이 튀어나왔다.
서걱!
깔끔한 절삭음과 동시에 토니 남작의 머리가 하늘로 붕 떠 버렸다.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토니 남작의 머리를 보던 바이칼 공작이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날아가는 토니 남작의 얼굴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남아 있었다.
그가 막기 위해 휘두르려던 롱소드가 아까 날렸던 방패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건 정말 예상치 못했던 결과다.
“이거 참, 이런 경우도 있나.”
머리를 벅벅 긁던 바이칼 공작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에 올랐다.
그러고는 양손을 들고 진지로 돌아갔다. 이쯤 했으면 됐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와아아아아!
그를 환영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바이칼 공작의 얼굴이 멍해졌다.
“행운의 기사! 행운의 기사! 행운의 기사!”
“허허, 이건 또 뭔가.”
행운의 기사라는 위명을 얻은 바이칼 공작이 되돌아가며 헛웃음을 지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롱소드를 든 손을 하늘로 향한 채 말을 몰아갔다.
허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런 큰 동작을 막지도 못하다니…….”
“무언가에 걸린 듯했습니다.”
“나도 보았네.”
대답하는 스트레인지 후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먼 거리였지만, 두 사람이 지은 표정을 읽었다.
커다란 동작으로 휘두른 적진의 노기사의 놀란 표정도, 막으려던 아군의 로우급 유저가 지은 당황한 표정도 말이다.
무엇보다 열이 받는 것은 이기고 당당하게 돌아가는 적의 모습이었다.
마치 난 이겼으니 이만 할래 하고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걸 막을 명분이 없었다. 기사대전에 있어 명문화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암묵적인 룰이라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기사와 소울아머 유저간의 대결이었다.
초반이라면 십 중 십 거의 기사가 교체를 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붙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기사가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소울아머 유저는 해당 기사를 꺾은 뒤 무기를 빼앗아 돌려보낸다든지 혹은 사지 중 일부를 잘라 돌려보낸다.
그러면 그다음 상대방에서 마찬가지로 소울아머 유저를 보내어 일전을 마무리한다.
그런데 지금 달려 나가 죽은 이는 로우급이지만 소울아머 유저다. 심지어 죽었다. 물론 다시 한 번 하자고 나갈 수는 있었다. 그가 버티고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목만 따고 당당히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 경우 다시 붙자고 했다가 거절당하면 그 사기는 정말 최악이 될 수밖에 없다.
상상했던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
로우급이지만 소울아머 유저를 보내 상대방이 소울아머 유저이며 일반 기사인 척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처구니없이 상황이 마무리된 것이다.
“크으윽!”
하퍼 자작이 분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되돌아간 노기사를 좇고 있었다. 마치 전투가 벌어지면 당장이라도 그 목을 따겠다는 듯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수하 기사를 잃은 이들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트레인지 후작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안 하느니만 못한 짓을 한 것 같구먼.”
차라리 모르는 척 소울아머 유저를 처음부터 보내 버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전투에는 잔챙이들이 낄 곳이 아니라고 외치며 말이다.
후회는 빨라도 늦는 법이다.
“행운의 기사라…… 딱 어울리는군.”
멀어지는 필리어리 왕국의 노기사를 보며 스트레인지 후작이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간을 주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참모들의 의견에 스트레인지 후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창피한 일은 빨리 덮는 것이 좋았다.
시간을 끌어 적의 사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 방법은 싫었다.
“진군하지. 행운의 기사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구먼.”
시에라 제국의 본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