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070
135화 전투 그 후
“스트레인지가 죽었다!”
“스트레인지 후작이 죽었다아!”
사방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시에라 제국 총사령관의 전사 소식에 참모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차피 소울아머의 최종 단계를 선택한다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다. 물론 일부는 폐인이 되어 살아남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소식은 달랐다. 그저 힘이 다해 쓰러진 것이 아니라 적장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었다.
“이, 이렇게 빨리?”
원래는 적장의 목을 베고 적진을 초토화시킬 것이라 예상했다. 보통 마지막을 선택한 소울아머 유저들의 행동이 그랬다.
마찬가지로 스트레인지 후작의 명령 역시 그것을 기반에 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필리어리 왕국 쪽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은 그들이 예상했던 결과와 너무 달랐다.
“적들이 몰려옵니다!”
필리어리 왕국의 대군이 시에라 제국군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전면전이었다.
후방에서도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한 아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시,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이 어찌!”
이쪽이 병력을 물리고 있는 것을 적들이 모를 리는 없었다. 그 때문에 저렇게 거세게 밀어붙이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시에라 제국의 총사령관을 무너트린 그들에게 있어 거칠 것은 없었다. 사기도 그만큼 달아올라 있었다.
“병력을 빨리 물리고 궁수 대기하라!”
“알겠습니다!”
전령이 움직이고 참모들이 몰려왔다.
“어쩔 수 없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궁수를 미리 소집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전방에 휩쓸리고 있는 병력들을 제물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시간을 끌 동안 최대한 병력을 빼고 그들이 후퇴를 위해 뒤엉켜 달려올 때 화살을 쏘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대기할 수는 없었다.
화살을 쏘아 적들의 진군을 저지하고 최대한 병력을 뒤로 빼는 것이 최선이었다.
적들도 마찬가지로 놓치지 않으려 따라붙을 것이 뻔했다. 아마도 길고긴 후퇴전이 될 것이다.
“후우, 결사대를 뽑게나.”
“알겠습니다.”
이럴 때는 방법이 없었다.
화살로 적의 진군을 저지하면서 결사대를 보내 적들의 추격병의 예봉을 무디게 하는 것이 유일했다. 말 그대로 결사대다.
본진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이들.
이미 결사대로 쓸 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제국군이 승승장구해 왔다고 해도 기본적인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들의 사기다.
전투 전에 결사대를 결성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실제 쓰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에라 제국의 결사대는 제국의 고위 귀족가의 일원들이 명분을 쌓기 위한 자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방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아도 결사대에 지원했다는 것 하나로 큰 공을 함께 받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결사항전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모인 자리라기보다는 위험하지 않은 위치에서 쉽게 공훈을 얻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결사대도 줄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자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결사대가 쓰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참모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뽑아놓고 안 쓸 수도 없으니 말이다.
지금 다시 뽑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이 와중에 어찌 그런 운용이 가능하겠는가.
운이 좋지 않았다.
“병력을 최대한 빨리 물려라! 진영에도 알려 무거운 것은 모조리 벌이도록 하라 명하라! 상태가 심한 이들도 포기하라!”
참모들의 명령이 시시각각 퍼져나갔다.
그와 함께 시에라 제국군의 사기는 점점 떨어져 갔다.
필리어리 왕국군이 몰려가는 모습을 보며 가우리를 포함한 동맹국 병력은 뒤에 남았다.
여기서부터는 저들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웅삼은 함께 움직였다. 어차피 내세우기로 한 패였기에 보낸 것이다.
상징적인 의미였다.
“아쉽습네까?”
우루가 슬쩍 질문을 던졌지만 진천은 별로 아쉽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다지.”
“기렇습네까?”
우루는 진천의 대답을 듣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만 해도 왕건이니 뭐니 하면서 돌멩이를 던지던 모습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우린 이만 본진으로 복귀한다.”
진천이 그 말을 남기고 되돌아가는 모습에 우루는 여전히 의아한 시선을 그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 우루에게 기율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딱 보면 답 나오지 않습니까?”
“기거이 무슨 소린 거이네?”
“계 장군 남긴 거 말입니다.”
“응?”
웅삼의 이름이 나오자 우루는 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기율이 피식 웃으며 설명을 보탰다.
“여기는 아마 당분간 소강상태일 겁니다. 어차피 이쪽 지역이 조공이기는 해서 힘겨루기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길티.”
“그런데 계 장군은 여기에 있는 게 동네방네에 소문났잖습니까.”
기율의 말에 우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 길티.”
“여기서 카말까지 가는 시간도 있을 것이고, 또 전투 억제를 위해 남겨 놓을 공산이 클 겁니다.”
기율의 말에 우루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말했다.
“무슨 소리네? 우리야 이동마법을 쓰면…….”
“그거 비밀이잖습니까. 계 장군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아!”
기율의 말에 우루가 드디어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바이칼 그 영감님도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당분간은요.”
기율의 말에 우루가 입을 떡 벌렸다.
“경쟁자를 그렇게 하나씩 떨구시는 겁니다. 우리 폐하께서는 말입니다.”
“병풍 노릇하길 잘한 거이구먼.”
“그렇죠.”
우루는 몸서리를 쳤다. 역시 진천은 진천이었다. 그의 뒤끝은 천하제일이었다.
***
“대승이옵니다!”
왕성을 크게 울리는 목소리에 한동안 초조한 마음으로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던 헤머튼 리어 2세의 표정이 활짝 폈다.
“그, 그렇더냐!”
“적의 수급만 해도 이만 여를 베었고, 추격 끝에 적 포로 이만 여를 더 잡았다 하옵니다! 심지어 보급을 위해 모여 있던 노예들까지 더한다면 무려 포로만 오만에 달한다 하옵니다!”
“으하하하!”
칠만에서 사만이었다. 적의 전투 병력이 반 토막도 더 나버린 것이다.
보급을 하는 노예를 포함하면 거의 아군 병력만큼의 포로를 잡아들인 대승이었다.
“스트레인지 후작의 표정이 참담하겠구나!”
헤머튼 왕이 속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외치자 이 소식을 가져온 귀족이 더욱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 것도 없사옵니다!”
“무슨 소린가?”
“그 역시 전사했다고 하옵니다!”
“허? 그가?”
적 총사령관인 스트레인지 후작의 전사 소식에 헤머튼 왕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가우리의 계웅삼 장군이 직접 그를 베었다 하옵니다!”
“아!”
그때 헤머튼 왕의 표정 위로 안타까움이 스쳤다.
“우리 사위가 있었으면 그 공을 세웠을 것인데, 아쉽구나!”
“허나 부마께서는 시에라 제국의 심장부에 계시지 않사옵니까? 더 큰 공을 세우실 것이옵니다!”
“맞다! 전역에 이 승전보를 알리고 각 귀족들에게 전력을 더 차출하라 명하라!”
헤머튼 왕의 명령에 귀족의 표정 위로 의아함이 서렸다.
“전력을 더 말이옵니까?”
“그래! 아직 위기는 물러간 것이 아니다. 그리고 터그람 왕국 쪽이 무너지면 전쟁은 더 어려워질 것이 뻔하지 않느냐.”
헤머튼 왕의 말에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사전에 오간 이야기는 있었다.
다만 이번에 시에라 제국이 일으킨 군세가 워낙 컸기에 위기의 동맹에게 지원을 한다는 이야기는 원칙적인 내용에 불과했다.
“카말 왕국에서의 도움이 모자랄 것이니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나마 이렇게 위태로운 동맹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어딘가 싶었다.
“자세한 내용은 조만간 보고가 다시 올 것이옵니다.”
“그래, 그래야지.”
헤머튼 왕은 비로소 얼굴을 폈다.
처음 위장 병력을 받아들여 대회전을 편다는 말에 헤머튼 왕은 펄쩍 뛰었다.
그 병력이 소수기도 했고, 공성전이 아닌 평원에서의 대회전이라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결과만 받고 보니 최선의 선택이었다.
물론 선발대에 불과하고 추가로 지원 올 병력이 이번 병력의 두 배에 달한다지만, 성격상 지원 병력에는 소울아머급의 병력은 적을 것이 분명했다.
보통 선발대에 고급 병종이 몰리고 후발대에는 일반 병력을 추가하는 것이 시에라 제국의 일반적 운용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총사령관인 스트레인지 후작마저 죽었다고 하니 당분간 시에라 제국의 움직임은 견제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봐야 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오랜 기간 제국의 공세를 막아왔던 필리어리 왕국이었다. 견제 정도는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았다.
“이제 터그람이 잘해 주어야 할 터인데.”
남은 것은 터그람 왕국이었다. 그들이 잘 버텨 줘야 전황이 유리해지니 말이다.
“정말 아쉽군. 이전의 삼국동맹이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인데. 후우.”
헤머튼 왕이 말을 하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의 잘못도 있기에 과거의 선택이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그래도 지금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사위, 그대만 믿네.”
제라르가 큰 공을 세우길 기도했다.
***
“일 안 하십네까?”
“응, 원래 나 정도 되는 위치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이리저리 뒹굴며 대꾸하는 필리언 제라르를 보며 을지수호는 그의 존재만으로 충분하다기보다 쉬는 공기도 아깝다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뿐이었다. 간혹 눈이 마주치면 이런 말을 하기 때문이었다.
“심심한데 우리 대련이나 할래?”
“아닙네다. 뭣하면 구신이 형님 보내드립네까?”
“됐어.”
다시 뒹군다.
그 모습을 보며 수호는 그가 더욱 얄미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을지부루나 을지우루에게 구박을 받아왔던 것을 자신에게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와의 대련을 즐겼지만 언젠가 들을 수 있었다.
‘아, 쌓였던 게 풀리는 기분이야!’
대련 후 그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
그 이후로 구신을 종종 붙여 주려 했지만 그 또한 한두 번 싸워보고 말았다.
강구신과 붙으면 제라르가 승기는 잡지만, 승리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결과만 가져왔기 때문이다.
재미없다는 말만 했다.
그건 계웅삼과 강구신이 싸우던 모습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대련할 때와 전투할 때가 다른 이들이 강구신이나 다른 대원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대련에서 제 실력을 내보일 때는 오로지 고진천과 할 때였던 것이다.
이유를 물어보니 안 그럼 죽을지도 몰라 그런다는 대답을 들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그랬다.
고진천은 절대 봐주는 일이 없었다.
가끔 부루처럼 훌륭하게 크라는 말이 다른 의미로 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기럼 나가보겠습네다.”
“응, 뭐 좀 보이면 말해. 좀이 쑤신다.”
손을 휙휙 저으며 돌아눕는 제라르를 보고 수호가 입맛을 다시며 밖으로 나갔다.
수호가 나가자 누워 있던 제라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쩝.”
그러고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은 심상에 빠져들었다. 노는 것 같지만 강함에 대한 열망은 그 누구보다 불타오르는 제라르였다.
그가 중얼거렸다.
“여기 처박아 놓으시겠다? 제대로 깽판 쳐주지.”
제라르의 입가에 악독한 미소가 머무르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