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092
157화 전쟁은 전쟁일 뿐
양측이 어울리나 싶더니 순식간에 피가 튀었다.
“아악!”
비명은 주로 시에라 제국의 기사들에게서 나왔다. 묵갑귀마대원들은 그들을 상대로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실력상 우위에 있음에도 눈앞에 뒤통수가 보이면 일단 후려치고 보았다.
그 덕에 소울아머 유저들을 따라온 기사들은 몇 합 지나기도 전에 모조리 나자빠졌다.
“빌어먹을!”
소울아머 유저들도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사들이 순식간에 죽어 나가는 것을 눈 뜨고 봐야 했기 때문이다.
로우급 유저들은 누굴 도울 형편도 아니었다.
다들 상대할 숫자가 불어나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그렇다고 소울아머 유저들이 좀 더 낫다는 것도 아니었다.
콰쾅!
“크윽!”
그들은 각자 제라르와 구신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가끔 뒤쪽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다 보니 눈앞의 한 명이 아니라 사방에서 합공을 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소울아머의 방어력을 믿고 그냥 받아넘길 수도 있겠지만, 들은 소문이 있어 그게 맘 같지 않았다.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건 곧바로 드러났다.
콰직!
“커억!”
콰쾅! 쾅!
로우급 유저의 갑주가 거친 소리를 내며 쩍 하고 벌어져 버렸다.
이어 연달아 들려오는 타격음과 함께 갑주가 사방으로 파편을 뿌리며 깨어져 버렸다.
그렇게 한번 흔들리자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로우급 유저 하나가 순식간에 피떡이 되어 나자빠졌다. 그 위로 병장기가 몇 번 더 훑고 지나가니 살아 있기를 비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아군 한 명이 줄었다는 것은 자신을 상대하는 적군이 더 늘어난다는 증거다.
“억!”
연신 방어를 하며 물러서던 로우급 유저의 발아래로 창대가 쑤욱 하고 들오자 순간 균형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정면에 있던 묵갑귀마대원이 그대로 발을 들어 밀어차자 로유급 유저의 몸뚱이가 그대로 붕 떠서 뒤로 날아가 버렸다.
바닥을 구르면서도 재빨리 몸을 일으켰지만, 언제 다가왔는지 뒤로 돌아온 묵갑귀마대원이 그대로 그의 목을 휘어 감았다. 물론 무기를 든 손도 붙잡혔다.
“이익!”
벗어나기 위해 힘을 썼지만, 그에 앞서 다가온 묵갑귀마대원이 무방비 상태가 된 로유급 유저의 어깻죽지를 내리쳤다.
콰직!
“으아아악!”
소울아머의 방어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일격이었다.
무기를 든 쪽의 어깨가 반쪽이 나서 너덜거렸다. 이어 그의 무릎 위로도 무기가 떨어져 내리니 그 역시 버티지 못했다.
“끄아아아!”
비명을 내지르는 로우급 유저를 잡았던 묵갑귀마대원이 그를 놓아주는 동시에 환두대도를 역수로 잡아 그대로 아래로 찍어 내렸다.
콰콱!
로우급 유저의 입에서 비명 대신 피로 물든 환두대도가 튀어나왔다. 부릅뜬 두 눈에서 눈물이 몇 방울 흘러내렸다.
원통함인지, 삶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낸다는 허무함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렇게 두 명의 로우급 유저가 죽음을 면치 못하자 남은 이들의 행동이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젠장.”
에덤 자작이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또 한 명의 로우급 유저가 처참하게 당해 버린 것이다.
어떻게든 눈앞의 상대를 처리하고 도우려 했지만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었다.
“제라르…….”
에덤 자작은 그가 바로 필리어리 왕국에서 시에라 제국의 작전을 무너트린 장본인임을 알아챘다.
물론 황실 쪽에서 쉬쉬하던 내용이기는 했지만 아는 이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
“오? 나도 이제 유명해졌나 봐?”
“인정하지.”
에덤 자작은 오히려 덤덤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는 여유를 두고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보니 살아남기가 힘든 상대들이었다.
이들이 여기에 숨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알려야 했다. 단순한 폭도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에덤 자작이 가슴에 있는 소울 스톤으로 손을 가져가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가 소문 이상으로 강한 자라는 걸 말이다.”
에덤 자작의 말에 제라르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인정해. 내 실력이 소문 이상이라는 걸 말이야.”
대꾸하는 말조차 밉상이었다. 에덤 자작이 피식 웃으며 소울스톤을 돌렸다.
“재수 없는 자식. 이대로 끝날 것 같으냐?”
콰콰콰콰!
순간 에덤 자작의 주변으로 소울포스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소울스톤이 돌아가며 생명을 담보로 한 폭주가 시작된 것이다.
사방으로 솟구치는 소울포스를 느끼며 에덤 자작이 덤덤한 시선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느낌이군. 엄청난 힘이야.”
죽기 전에는 느껴 볼 수 없는 힘.
소울아머의 폭주.
그 힘을 느껴본 에덤 자작이 주먹을 불끈 쥐며 온몸에 솟구치는 힘에 잠시 취해 보았다.
마치 죽기 전에 마지막 호사라도 누리겠다는 듯 미소까지 머금었다.
그때 제라르가 외쳤다.
“하지 마!”
“응?”
제라르의 외침에 에덤 자작이 그를 바라보았다.
떠어엉!
순간 에덤 자작이 제라르를 향해 구십 도로 허리를 꺾으며 인사를 했다. 아니, 정확히는 뒷통수를 얻어맞고 허리가 접힌 것이다.
“으어…….”
한 발자국 나서며 고개를 들어 올린 에덤 자작은 머리가 진동하는 느낌에 몽롱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마치 방금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표정이었다.
이어 다시 또 한 번 종소리 같은 게 울렸다.
떠엉!
이번에는 옆으로 몇 발자국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풀렸다.
“이 무슨…….”
눈이 풀린 에덤 자작이 몽롱한 시선으로 비척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새끼, 똥폼은…….”
구신이 히죽 웃으며 철곤을 어깨에 척 하니 올려두었다.
“빌어먹…….”
뭔가 말을 하려고 해도 자꾸 입이 어버버거린다.
에덤 자작은 흐느적이며 코로 손을 가져갔다.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그 사이로 허연 조각도 보였다. 더 이상 사고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실이 끊어진 사람처럼 무너져 내렸다. 구신의 말마따나 뇌가 곤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철곤을 휘리릭 돌리며 구신이 자랑스럽게 외쳤다.
“예언의 완성.”
“이런 개자식!”
성난 제라르가 구신을 처단하기 위해 오러블레이드를 뽑아 올렸다.
“쳐라!”
라임 왕자의 명령에 병사들이 물밀듯이 몰려갔다.
그들의 방문을 받는 영주성은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마글 병사도 얼마 없었다.
토벌대에 집어넣지 않고 애써 남겼던 병사들이었지만 막기에는 불가능한 숫자였다.
지원을 오는 소울아머 유저들을 처리한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토벌대를 구성한 인근 영지를 휩쓸어 갔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수성 준비는 아예 되지도 않았다.
포로로 잡힌 술법사들이 정기적인 연락을 주고받은 덕에 평상시와 다름없는 수비 상태였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조금 더 풀어져 있었다.
황도에서 내려온 소울아머 유저의 합류를 전해들은 탓에 위험이 없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그 덕에 각 영지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삼일 사이에 세 개의 영지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부랴부랴 방어를 준비하던 영지 하나도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라임 왕자가 이끄는 일루이먼 반군에 의해 불타올랐다.
총 네 개의 영지를 함락시키면서 소득은 꽤 컸다.
영주들이 부랴부랴 보내지 못했던 물자를 다시 준비하면서 위로 보낼 뇌물을 함께 준비해 두었던 덕이다.
그 덕에 전리품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모였던 것이다.
불타는 영주성을 보며 라임 왕자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아쉽냐?”
“뭐, 아닙니다.”
제라르의 말에 라임 왕자는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내저었다.
창고를 열어 곡식을 인근 영지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마치 의적이라 불리는 이들이 하는 행동처럼 말이다. 물론 환호는 없었다.
영주성이 함락되며 죽어 나간 이들이나 토벌대로 뽑혀갔던 이들이 모두 영지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어차피 제대로 이끌지도 못해. 알지?”
“예.”
라임 왕자가 아쉬운 표정을 지은 이유는 함락한 네 개의 영지를 그대로 비워 두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함락은 했지만 유지할 병력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러기에는 백성들의 수탈 상황도 좋지 않았고, 또 왕가에 대한 충성도 흐릿했다.
백성들에게 있어 이들은 또 다른 점령군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웃을 죽인 혹은 아비를 죽인.
그저 전쟁이 지긋지긋한 이들일 뿐이다.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게 이래서 어려운 거다.”
“…….”
퀭한 표정으로 곡식을 받아가는 백성들을 보며 라임 왕자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제라르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함락만 하면 환호 받을 줄 알았던 라임 왕자였지만 현실은 달랐던 것이다.
이미 일루이먼 왕국은 이들에게 있어 멀어져 버린 이름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알면 되는 거다.”
“그럴까요?”
“뭐, 그런 거지.”
제라르가 무책임한 위로를 건네었지만, 라임 왕자에게는 그것도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나마 왕국을 재건한다는 마음에 들떴던 가슴도 가라앉으며 현실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다 나누어 주면 우리는 이제 슬슬 자리를 떠야지.”
“알겠습니다.”
“애들 잘 챙기고.”
“예!”
“한동안 잠적했다가 다시 털어주자고.”
제라르의 말에 라임 왕자가 비로소 미소를 머금었다. 그사이 트렌든이 진땀을 흘리며 다가왔다.
“다 끝냈다!”
“그것도 자꾸하다 보니 느는가봐? 처음에는 며칠씩 걸리더니.”
“푸흐흐흐.”
트렌든이 한 일은 이동마법 대응진을 그리는 것이다. 이곳의 물자를 깔끔하게 옮기려면 그게 나았다. 제라르가 가진 공간 확장 가방의 용량이 무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동마법 대응진을 그렸던 것이다.
“잘 안 보이는 곳에 그렸지?”
“당연하지.”
제라르의 질문에 트렌든이 히죽 웃었다.
“내가 못 먹는 건 남도 못 먹어야 하는 법이지.”
제라르가 악당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예?”
제라르의 말에 라임 왕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라르는 더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지 먼저 말 위에 올라 자리를 떴다.
그러자 라임 왕자가 부랴부랴 병사들을 독려했다.
“모두 이동한다! 신속히 움직여라!”
전투를 마친 병사들이 모두 들뜬 마음으로 자리를 이탈했다.
곡식을 든 영지민들은 그 모습을 공허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전쟁은 전쟁일 뿐이었다.
***
“빌어먹을!”
쏜튼 폴리어 백작이 발끈했다.
토벌대가 걱정되어 내보낸 지원군은 물론이고 토벌을 준비했던 인근 영지들이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러니까 왜 성급히 건드려 가지고는!”
쏜튼 백작이 이를 갈았지만, 탓할 상대들은 이미 다 죽어 없어졌다.
“후우.”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대규모 토벌대를 따로 구성해야 한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병력을 따로 빼야 하는 상황에 처해 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건드리지 않고 방치했던 것이다. 언제든 토벌할 수 있지만 섣불리 손대기에는 부담이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작은 일 때문에 큰 전쟁을 수행하는데 문제가 생기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토벌대를 구성해야겠군.”
쏜튼 백작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