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093
158화 어디까지가 내 새끼인가
빛과 함께 나타난 세상에 라임 론 일루이먼 18왕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빛나는 원에 서 있다가 눈을 떠 보니 다른 세상에 와 있었던 것이다.
“뭐해?”
“예?”
“애들 데리고 빨리 나와. 다음 애들도 옮겨 와야지.”
“아, 예!”
필리언 제라르의 타박에 라임 왕자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허둥대며 마법진에서 내려왔다. 다른 이들도 그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제라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마법이 널리 퍼진 이곳에서도 이런 장거리 이동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이는 리셀이 거의 유일하다 할 정도였다.
물론 제국이라면 가능하지만 비용대비 효과도 낮고, 이렇게 대규모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아예 맙버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저들 입장은 어떻겠는가.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는 없을 것이다.
빛과 함께 쏟아지는 병사들의 모습은 처음 온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죄다 멍한 표정들.
그런 이들을 향해 마치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는 듯 호통 치는 라임 왕자를 보며 피식 웃어젖힌 제라르가 한쪽에서 진땀을 뻘뻘 흘리는 리셀을 보며 머리를 긁었다.
당장 뭘 묻기가 어려웠다. 주변을 돌아보니 카말 왕국의 왕인 바사 론 카말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전쟁 중인데 별로 바쁘지는 않으신가 봅니다?”
“바쁘지. 바쁜데 손님 온다는 걸 그냥 놔둘 수 있나. 뭐 일루이먼 왕국은 왕래가 없긴 했지만…….”
말끝을 흐리는 바사 왕에게 옆에 있던 쉬람 마잘 공작이 핀잔을 주었다.
“왕래가 있는 게 더 이상한 겁니다. 공국도 세워지기 이전이라면 변경백이었는데, 왕가와 왕래가 가당키나 합니까?”
“시끄러워.”
그때 라임 왕자가 이들의 투덕거림을 들었는지 재빠르게 다가와 예를 올렸다.
“라임 론 일루이먼 18왕자입니다. 카말 왕국의 국왕이신 바사 론 카말 전하를 뵙습니다.”
“오! 잘생겼군. 그래 고생 많았네. 산적질했다면서?”
“…….”
“거참 부흥군이라는 좋은 말 놔두고 무슨 망발입니까?”
“그게 어때서? 원래 그렇게 하다가 틈 봐서 나라 다시 세우고 하는 거지. 막말로 내가 말이 왕이지, 지금 하는 게 왕인가!”
쉬람 공작의 타박에 바사 왕이 버럭 소릴 질렀다. 물론 쉬람 공작 역시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럼 나라가 부실한데 칼 잘 쓰는 사람이 나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막말로 가우리의 황제께서도 항상 일선에서 칼밥 먹고사시는 마당에.”
“그건 그런가?”
“황제께서 이르시길,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했습니다. 여태 그게 불만이셨던 겁니까? 그런 것 치고는 전장에서 위명이 미친…….”
“한마디만 더 뱉으면 공작이고 나발이고 이빨 몽땅 날려 버릴 거다.”
바사 왕의 최후통첩에 쉬람 공작이 찔끔하며 물러섰다. 그 덕에 라임 왕자는 웃을 수 있었다. 이들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듣던 대로 바사 왕이 직설적인 면은 있지만 바른 예의에도 악의가 있으면 베이는 법이다.
이들은 산적 운운하며 이야기를 했지만, 나름 고생을 치하하는 말을 해 준 것이다.
“어떤가? 좀 가능성은 있어 보이는가?”
바사 왕의 말에 라임 왕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질문한 내용의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탓이다.
“일루이먼.”
“아…….”
바사 왕의 말에 라임 왕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라 이끌어가는 게 생각보다 단순해.”
“예?”
“내 새끼들이라 부르는 영역이 어디까지냐가 중요하단 거야.”
“영역이라니?”
“내 측근까지면 거기까지 충성하는 거고, 귀족들까지면 귀족들까지 충성하는 법이지.”
“아…….”
바사 왕의 말에 라임 왕자는 공감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사 왕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난 그 영역을 내 땅에 있는 모든 걸로 생각한다고. 동네 개새끼마저 내 새끼라 생각한다고.”
라임 왕자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번에 주변 영지를 점령하면서 식량을 나누어 줄 때의 자괴감이 다시 밀려왔다.
분명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식량을 받아가는 이들의 퀭하던 얼굴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일루이먼 왕국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던 마음도 빠르게 가라앉았다.
현실을 봤으니까.
그런 라임 왕자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바사 왕이 친근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예.”
라임 왕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들어야 한다. 들어야 그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든 것이다.
“충성은 받는 게 아냐.”
“예?”
“정확히는 주고받는 거다.”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을 열자 라임 왕자가 적극적으로 변했다.
“집안의 가장이 피똥 싸며 밖에 나가 일하는 게 단지 식구들 거둬 먹이려는 거 같아?”
“그거야…….”
“내 새끼 먹여 살리는 건 당연해. 하지만 그걸 내가 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게 권력이 되는 거다. 내가 니들 먹여 살리는데 이것들이!”
바사 왕이 눈알을 부라렸다. 하지만 이내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식구들에게도 충성해라. 그리고 충성을 이끌어 내라. 따지면 다른 거긴 한데, 그걸 주고받는 거라고 인정하는 순간 세상은 달라진다.”
“아…….”
라임 왕자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카말 왕국에 대해 떠도는 소문의 진의를 알 것 같았던 것이다.
“물론 힘이 다해 망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어도, 적어도 서로 원망은 안 하거든. 그리고 언제든 다시 함께할 수 있는 순간을 꿈꾸게 되는 거지.”
라임 왕자는 고개를 숙였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많은 것을 알게 해 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여태 그의 마음속을 어지럽혔던 것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물론 충성의 방식은 서로 다르겠지. 나야 칼 잡는 게 전부이지만.”
바사 왕이 털털한 표정을 하며 히죽 웃었다.
바사 왕은 소문 많은 이다.
압도적으로 많은 소문은 좋은 게 하나도 없을 정도다. 예의 없고 악바리인 데다 하는 행동은 거칠기 짝이 없는 사람이 바사 왕이다.
그런데 카말 왕국은 살아남았다.
어떤 이들은 윗물이 흐려서 다 똑같다고 했다. 왕이 그러니 귀족도, 기사도, 백성도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했다.
함께 라임 왕자도 그 소문에 피식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나라든 나라를 세운 위인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들은 다 특별하다. 바사 왕 역시 특별하다는 생긱이 들었다.
“뭐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한 양반이 있더라고.”
“그게 누굽니가?”
“고진천.”
“예?”
“가우리 황제.”
라임 왕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라임 왕자의 어깨를 다시 두들겨 주며 그를 이끌었다.
“내가 들어보니 망한 나라를 다시 세우는데 일가견이 있다더라. 잘 배우고 기왕이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속삭이듯 하는 말에 라임 왕자가 궁금증을 풀었다.
“그런데 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갔다. 망국의 왕자, 그것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18왕자다.
실제 그가 처음에 한 말마따나 산적질하던 왕자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 주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라임 왕자의 질문에 바사 왕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뭐, 왕족 치고 계승권이 없어서인지 때도 덜 묻었고, 또 바닥도 경험했고…… 이만하면 싹수도 있지.”
“가, 감사합니다.”
“결정적으로 시에라 제국은 너무 크지.”
“아…….”
“좀 쪼개 놓아야 할 필요가 있지. 고만고만한 놈들이 여럿이면 전쟁도 잘 안 나는데, 한 놈이 지나치게 세니까 이렇게 되는 거거든.”
바사 왕의 말에 라임 왕자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면에서 일루이먼이 잘 되고 또 시에라 제국이 흔들리면 딴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지 않겠어?”
단순한 예상이었지만, 그게 바사 왕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던 라임 왕자는 그를 다시 보았다. 약간 선망의 눈빛이 비쳤던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바사 왕이 다시 말을 이었다.
“딱 그런 상황에서 싹수 좋은 왕자에게 미리 좋은 말 던져서 호감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써먹기도 좋…… 큼, 이건 못 들은 걸로?”
“하, 하하하하!”
지나치게 솔직한 바사 왕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근래 들어 어지러웠던 것들이 모두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쉬람 공작을 만난 제라르가 질문을 던졌다.
“다들 어디 갔습니까?”
“빈집 털러 가신다고 움직이셨습니다.”
“끙.”
제라르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터그람?”
“예. 우리가 따먹은 땅은 우리 거라고 했으니까 겸사겸사해서 움직이시는 겁니다. 우리 전하께서도 움직이실 거 같습니다.”
“그쪽은 후방 차단이겠네요.”
“예.”
제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우선적으로 적의 선봉을 괴멸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제라르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그럼, 저걸 빨리 사람 만들어야겠네.”
그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라임 왕자와 여전히 어리둥절하고 있는 일루이먼 부흥군 병력이 있었다.
쉬람 공작이 그런 제라르를 보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거참.”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척하면 척하는 이들을 보며 부러웠던 것이다.
아마도 작전대로 전쟁이 잘 흘러가면 다시 되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바로…….”
쉬람 공작이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뭐 공작께서 준비사힐 건…….”
“훈련에 필요한 예?”
“우리 사랑하는 자기 보러 다녀와야지 않겠습니까?”
“…….”
“앗흥!”
제라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통통 튀며 자리를 벗어났다. 쉬람 공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
토벌대에 앞서 대규모 정찰대를 운용했던 쏜튼 폴리어 백작은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종적을 감췄다? 점령지 안정을 하는 게 아니고?”
쏜튼 백작의 질문에 소식을 가져온 기사가 답변을 했다.
“예, 인근 영지의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준 게 전부랍니다. 이후 물자들을 털어서 그대로 사라졌는데, 그동안 근거지로 삼았던 곳에서도 아예 자취를 감췄다 합니다.”
“으으음.”
부흥군이면 그에 맞는 움직임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고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차라리 이전처럼 영지에 자리를 잡는 게 낫지, 산맥에 틀어박혔다면 뒤지는 시간도, 병력도 만만찮게 들기 때문이었다.
“일단 추가로 정찰대를 편성하기는 했습니다만 피해가 좀…….”
“피해?”
“마물들 때문에 말입니다.”
“으으음.”
다시금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잠시 고민하던 쏜튼 백작이 입을 열었다.
“정찰대 늘리고 해당 영지에 내려 보낼 영주들을 좀 선별해야겠어. 참모들 부르고 회의 준비하라 하게.”
“예, 알겠습니다.”
기사가 나가자 쏜튼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 좋았던 경우도 많았지만 이번처럼 초반부터 힘든 전쟁은 처음이었다.
내부의 문제도 없고 제국의 이름을 걸고 제대로 병력을 일으켰는데 초장부터 연이은 패전 소식은 그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당연히 프라임 론 아가드 공작에게도 말이다.
“죽겠군.”
쏜튼 백작이 다시 한숨을 뱉었다. 한숨이 한숨을 부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