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095
160화 바다를 가르는 이들
리페인 남작의 죽음은 반기를 든 집사와의 상잔으로 결론이 났다. 사건 자체가 너무 직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리페인 남작에게 후사가 없었던 관계로 본가에서 자산을 귀속해갔다. 물론 그 와중에 상당수의 재산이 황실로 회수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덕에 계승 영지는 아니지만 지방 영지를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리페인 남작의 본가인 벤 자작가에서 후계 위에서 밀려나 독립을 해야 했던 포먼 준 남작이 남작으로 승작하며 다시 이곳을 맡은 것이다.
그 덕에 혼란은 적었지만 이제 좀 나아지려나 했던 영지민들의 삶은 더욱 나빠졌다.
리페인 남작과는 달리 새로 온 포먼 남작은 영지민을 더욱 쥐어짠 것이다. 리페인 남작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숨통을 조였다면 포먼 남작은 그 숨통마저 쥐고 흔들려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영지민들의 하루하루가 더욱 고달파졌다.
그런 영지민들 사이에서 일루이먼 왕가의 세작들이 침투했다. 영주가 교체되는 혼란을 틈타 무사히 안착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루하루가 고되었다.
똑같이 노동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일루이먼 왕가가 다시 설 수 있는 분위기 말이다.
“이리와!”
“오오!”
“진짜 술이네?”
“그냥 술이 아니지. 약초술이라고. 뭐 좀 더 익어야 맛이 나긴 하지만,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언제 전쟁터로 끌려갈지 알고.”
술을 담가온 이의 말에 술 앞에 밝은 표정을 지었던 사내들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이봐 신.”
“응?”
“정말 끌려갈까?”
걱정이 가득 담긴 질문이었다. 그런 사내들에게 신은 묵묵히 술을 따라 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딱 보면 답 나오잖아. 탈탈 털어 쥐어 짠 덕에 나머지 생산은 애들이나 노인 그리고 여자에게 맡기고 우린 등 떠밀겠지.”
신의 말에 사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소문은 돌고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그동안 영지민들이 빌려갔던 사채를 영주가 직접 놓았던 것이 밝혀진 것이다. 리페인 남작이 대리인을 통해 진행했다면 이번에는 그게 아니었다.
직접 영주성에서 수금원이 나와 이자를 받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아차 했던 영지민들이 서둘러 갚으려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일부 적게 빌린 이들이 갚기는 했지만 유독 그들에게는 더욱 힘들고 고된 일들이 주어졌다.
대놓고 말이다.
리페인 남작이 숨통을 틔워 주며 지능적으로 일을 진행했던 것과는 달리 현 영주인 포먼 남작은 본능적으로 일을 진행한 것이다.
본능적으로 오로지 돈과 공을 탐했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돈을 갚는 것도 두려워 할 정도였다.
“일단 한잔씩 하자고.”
신이 술잔을 들자 옹기종기 모인 사내들이 함께 들었다. 그리고는 근심을 털 듯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자자 이것도 먹어야지.”
“참 재주도 좋아. 사냥꾼이랬나?”
“흐흐흐.”
사내중 하나가 묻는 질문에 신은 웃음으로 대했다.
그들의 앞에는 그가 잡아온 짐승이 잘 익어 있었다. 한동안 고기 구경을 못했던 이들이기에 다들 눈이 반짝거렸다. 그런데 일부는 약간 편치 못한 얼굴로 있었다.
그들을 보며 혀를 찬 신이 말했다.
“일단 먹어. 어차피 우리 다 먹기에는 크니까 알아서 나눠 가져가면 되잖아. 그러니 먹자고.”
신의 말에 사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편치 못한 얼굴을 한 이들은 집에 있는 식구들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제야 마음 놓고 몇 잔 안 돌아가는 잔술에 근심을 털며 시간을 보냈다.
“제국민이 돼서 좀 나아지려나 했더니만.”
“나라 잃은 백성들의 처지가 이런 거야.”
“빌어먹을 왕가 놈들. 제대로 좀 하지.”
“힘이 없어 무너진 건데 뭐.”
신과 사내들이 이미 사라진 일루이먼 왕국을 또 다른 안주삼아 씹었다.
“차라리 누구 말대로 저번에 왔을 때 따라갈 걸 그랬나?”
“거기 가면 전쟁은 안 할 거 앝아? 죽기 더 좋지.”
또 다른 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몇몇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십팔 왕자인가 하는 분은 사람 좋아 보이더만.”
“좋긴 그때 죽어 나간 이들이 한둘이야. 공짜로 주니까 받기는 하지만…….”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잖아.”
“그야…….”
사내들의 의견이 갈렸다. 그때 신이 중얼거렸다.
“뭐 끌고 가려 했다면 끌려갔겠지. 그래도 안 끌고 간 것 보면 양심은 있는 거 아닌가?”
신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옛날도 힘들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건 그래.”
사내들이 과거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의 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일루이먼 왕국.
“먹어. 고기 식으면 뻣뻣해.”
“그래. 먹자고.”
그렇게 남은 술을 비우며 남은 고기를 나누어 가져가는 사내들의 발걸음은 처음보다도 더 가벼웠다. 손에 들린 고기를 가족에게 먹일 생각에 다들 기뻐하는 것이다.
그들을 보내며 신이 중얼거렸다.
“다 잘될 거야. 니들 내가 챙겨줄게. 믿어도 좋아. 이 몸이 하는 말은 대부분 현실이 되거든. 내가 다 소름끼칠 정도로.”
담담하게 미소를 그리고 있는 사내.
신으로 변장한 강구신은 이제 정이란 게 생겨버린 그들을 위해 스스로 약속을 하나 한 것이다.
***
일만여 기마가 쉬지 않고 달렸다. 일반적인 기마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대부분이 퓨켈 혼종인 퓨마인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덕에 영양소를 보급하기 위해 사냥에도 매진해야 했지만 말이다.
“쉭, 저리가 넌 어차피 못 먹잖아!”
퓨마들을 위한 고기를 준비하는 도중에 얼쩡거리는 한 마리 말이 있었다. 고기를 먹지 못하는 말이었지만 뭐가 탐이 나는지 코를 가져다 대고 이빨로 물었다가 뱉었다가를 반복했다.
“놔 둬. 넌 지금 저게 말로 보이냐?”
“하긴…….”
한 사내의 말에 말을 쫓던 사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은 바로 강쇠였다. 말이라지만 말 같지 않은 괴수가 바로 강쇠였다.
“주인이나 말이나…….”
“그건 그래.”
다들 그러려니 했다. 다 늙어 이제는 종마 노릇이나 하나 보다 했더니 전쟁터까지 따라 온 것이다. 물론 위에 누굴 태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상 전투에 끼어들면 기가 막히게 잘 싸운다. 제대로 된 묵갑귀마대원 하나가 더 있는 느낌이랄까.
저 뒷발에 채이면 상체가 남아나지 않는다.
함몰되는 정도가 아니라 박살이 나버린다. 심지어 갑주를 입지 못한 적병 하나는 그대로 뒷발에 몸통이 뚫려 강쇠가 달릴 때마다 딸려 다니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그걸 목격한 적병들은 강쇠를 피해 다른 이와 전투를 벌일 정도였다.
“이제 곧 터그람 왕국 국경이랬지?”
“그렇지.”
“저 양반들이 죽을 맛이겠네.”
“뭐, 나름 튼튼한 이들이니까.”
한쪽에는 카말 왕국 출신 기사들이 늘어져 있었다. 길잡이 역할을 하기 위해 따라온 이들로 쉬람 마잘 공작의 아들인 카마쉬 마잘도 함께 왔다.
물론 이실라 공녀도 따라와 있었다.
위험한 작전이라 해서 말렸지만 놀면 뭐하냐는 말 하나 던지고 따라온 것이다. 더욱 웃긴 건 바사 왕은 많이 죽이고 오라는 덕담까지 한 것이다.
고진천은 딱히 별말 없었다.
‘그러던가.’ 이게 전부였다.
다만 처음 타는 퓨마이기에 고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마와는 비할 대 없이 거친 것이 퓨마였다.
퓨켈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퓨마만 되도 그 흉성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달리 마물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여기까지 오면서 다들 시달렸던 것이다.
기사라는 것이 창피할 정도로 말이다.
“일단 여기서 이틀 쉰다 했으니 우리도 몸 좀 풀어 두자고.”
“그래야지.”
터그람 왕국 국경을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전투가 일상이 될 것이 뻔했다. 그걸 버티기 위해서라도 쉬어야만 했다. 그렇게 다들 전투를 앞두고 마지막 휴식을 취했다.
***
“빠르군.”
디바인 퍼스 백작은 바다를 가르는 배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진작 이런 배를 만들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이제라도 만들었으니 된 거 아닌가?”
그들이 타고 있는 배에는 항상 달라붙는 별명이 있었다. 술법사를 갈아 만든 배.
말 그대로 풍계술법을 쓸 줄 아는 술법사들을 총 동원하여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술법사만 동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빠른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선체의 형태도 중요했다.
다만 기동을 위해 술법사의 비중이 크다 보니 일반 전투원의 숫자는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장거리 전투에 술법사들을 많이 동원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이 속도로 반년 안이라 했지?”
“운이 좋으면 더 빠를 수도 있지만 방향을 잘못 잡으면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제국에 도착할 때 표류기간이 일 년에 가까웠다 하니까요.”
“일 년을 바다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 더 신기하군.”
“듣기로는 원래 해적들이라 일년 대부분을 바다에서 살아왔다더군요. 절인 야채라든지 뭐 배 위에서 조금이지만 야채를 키우기도 했다니까요. 거기다가 보급선이었다고 했으니 물자는 충분했겠지요.”
“그렇다라면야 뭐 이해할 수도 있고.”
“이렇게 멀리 오면 서신 오가기도 쉽지 않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거야. 그건.”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에라 제국 소속 탐험대는 바다를 가로 지르고 있었다.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대륙을 향해 말이다.
***
터그람 왕국 방어선은 시시각각으로 밀리고 있었다.
나름 잘 버티던 요새도 있었지만 시에라 제국군은 결코 무리하지 않았다. 일부 병력을 두어 전면포위를 하고 나아갔던 것이다.
거기에 그 병력들은 계속 순환을 시켰다.
전투를 치른 뒤 휴식이 필요한 병사들로 하여금 재배치하고 충분히 쉰 병사들이 다시 전장에 나아가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실전이 필요한 신병들을 후방에서 받아 투입시키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버티던 요새들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물품을 나르던 시에라 제국 병사들이 두런두런 말을 나누었다.
“요즘 보급이 좀 줄어든 거 같지 않아?”
“그러게. 현지 조달 비중을 높이라고 할 정도면 뭐가 잘 안돌아가나?”
“안 돌아가긴 이 정도면 파죽지세지.”
그때 병사 하나가 목소리를 줄이며 입을 열었다.
“카말 쪽이랑 필리어리 쪽은 대패를 했다던데.”
“뭐? 진짜?”
그 말에 병사들이 놀란 눈을 했다.
“이번에 보급대에 따라온 이들 중에 아는 얼굴이 있어서 보급이 왜 줄어 가냐 물어보니 군단 재편을 준비 중이라고 그러더라고.”
“필리어리 왕국이야 그렇다 쳐도 카말 왕국까지?”
부유한 필리어리 왕국의 국력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반면 카말 왕국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툭 치면 억 하고 넘어갈 거라 보는 병사들이 많았다.
실제 그때 전쟁을 벌였던 당사국인 터그람 왕국이 지금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동맹군으로 합류한 쪽이 녹록치 않나 봐.”
“그 뭐더라? 가우리?”
“그래 거기.”
“젠장 이거 전쟁 길어지는 건 아니겠지?”
“글쎄다. 그건 모르지만…….”
“그래도 이번은 이전 전쟁이랑 달리 동원되는 병력도 다르고 물자도 다르잖아. 이 전쟁 끝나면 거의 대륙 통일에 가까워지는 거니 우리도 편해지지 않겠어?”
“그러면 다행이고.”
그렇게 병사들은 두럳두런 대화를 나누며 보급물자를 옮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