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098
163화 내조의 여왕
전선으로 나온 그리팔 파샤 후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허허허 역시 대단하구먼.”
“가우리 말입니까?”
“그래.”
이미 직접적으로 그들을 겪어봤던 그리팔 후작이었기에 그의 발언에 참모들은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적을 알지 못하면 그 전쟁은 어려운 법이지만 가우리의 경우는 더 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지.”
그리팔 후작은 기억했다. 빛과 함께 번쩍거리며 나타나던 수많은 기마들을.
물론 술법사들은 은신부를 이용한 전술이라고 했지만, 그리팔 후작은 그게 전부일까 하는 의심을 했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도 그 무지막지한 파괴력과 돌진력은 그의 생애에 있어 처음 겪는 것이었다.
그걸 지금 시에라 제국이 감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았다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우리도 작전에 들어간다.”
그리팔 후작의 말에 참모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비를 하라는 것으로 알았는데 작전에 들어간다 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때론 패배에서 배우는 법이지.”
그리팔 후작이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참모들은 그의 말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치부를 밝히는 총사령관의 얼굴을 보기에는 미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팔 후작은 별로 창피하지 않다는 듯 말을 계속 이었다.
“보급이 문제가 된 지금 저들은 곧 주변 약탈에 나설 것이다.”
“예.”
“전 여유 병력을 동원해서 사냥에 나선다.”
그리팔 후작의 말에 참모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적들을 자극하는 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식으로 적을 자극하는 것은…….”
참모들의 우려에 그리팔 후작이 픽하니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 겐가? 사냥의 대상은 시에라 제국이 아닐세.”
일종의 혼란을 유도하기 위한 작전으로 생각했던 참모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먹을 게 부족하면 사냥을 해서 충당할 것이고 화살이 부족하면 현지에서 대를 깎을 게 뻔하다. 망가진 병장기를 녹여 화살촉이나 창촉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럼?”
“시제라 제국군이 자급자족을 할 수 없게 사냥꾼 출신들을 대거 동원해서 짐승들을 싹 잡아들인다. 그리고 화살대로 쓸 만한 것이 있으면 수거를 하고 여의치 않으면 모조리 태우도록 한다. 창대가 될 만한 것들도 마찬가지.”
“아!”
그리팔 후작의 설명에 참모들이 이해했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우물과 냇물을 메워라! 물론 전부는 아니다. 일부에는 독을 풀어라.”
카말 왕국을 공략하면서 당했던 것.
그리팔 후작은 그것들을 모두 시에라 제국에게 그대로 보여 줄 작정인 것이다.
참모중 하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하면 전쟁이 끝이 난다 해도 문제가…….”
그리팔 후작은 걱정을 토로하는 참모의 말을 끊었다.
“망하는 것보다 낫다.”
“그건 그러하오나…….”
“상대는 제국이다. 이 정도 각오 없이 무슨 전쟁을 하는가. 우리 것을 아끼며 싸울 상대가 아니란 것이다.”
그리팔 후작의 발언에 참모들은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이기고 나서 고달픈 게 나은 게 아닌가? 지고 망국의 백성으로 고달픈 것보다 말이다.”
그리팔 후작의 말에 참모들은 더 이상 반문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리팔 후작이 다시 말했다.
“말 먹이조차 남기지 말아라. 이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당해본 이들만 아는 법이지.”
“명 받들겠사옵니다. 소각 작전이라 칭하면 되겠사옵니까?”
“아니.”
그리팔 후작이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이 전술은 이미 이름이 있느니라.”
“무엇이옵니까?”
“들판의 모든 것을 비운다하여 청야전술이라 한다.”
참모들이 받아 적었다.
큰 후유증을 담보로 하는 배수진의 전술이 그리팔 후작의 손에서 다시 펼쳐지기 시작했다.
***
쉬람 마잘 공작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런 그에게 고운 자태의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좀 더 쓰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예? 그래서 절반으로…….”
“알지요. 하지만 우리도 나누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동맹에게 과실을 나누어야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걸 카말 왕국이나 다른 곳에 요구할 생각은 없으나 이런 것은 조금 더 베푸시는 것이 좋다 생각합니다.”
쉬람 공작은 똥 씹은 얼굴을 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바사 왕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려 했다. 솔직히 기존 마나석 공급 가격의 절반이라 했지만 이쪽에서 남겨 먹는 게 좀 많기는 했다.
그러나 이것도 능력은 능력 우기려면 우길 수도 있지만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럼 유니아스 황후께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쉬람 공작을 상대하던 여인은 바로 로셀린 왕의 누나이자 고진천의 두 번째 부인인 유니아스였던 것이다.
“삼 할이면 좋을 듯합니다.”
“그, 그건……. 많이 남기는 하지만 그게 사실 전쟁 이후의 국가 재건을 위해서는 필요한 재화이옵니다.”
“압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차분한 얼굴로 차를 입가에 가져가며 말을 하는 그녀가 내뱉는 말 어디에도 강압은 없었다. 그러나 말을 듣는 쉬람 공작 입장에서는 더없이 부담이었다.
‘차라리 열제님이 낫지.’
그 양반이라면 왠지 ‘그러던지.’ 하고 휙 나갈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앞의 여인은 하나하나 조목조목 짚어 가며 말을 하는데 반발하기도 어려웠다.
막말로 도움 받는 처지이기도 했고.
“우리가 욕심 부린다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만,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토와 미래를 위해 싸우는 전쟁이 아닙니다. 사실 안지 오래된 혈맹도 아닌 최근에 관계가 생긴 동맹을 위한 전쟁에 우리 병사들이 피를 뿌리는 일입니다. 욕심 부려야 마땅합니다.”
쉬람 공작이 김빠진 얼굴을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마나석으로 막대한 이윤을 얻는 것은 알지만 대놓고 욕심을 부려야 마땅하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쉬람 공작은 혹시나 하는 얼굴로 한쪽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젊디젊은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부릅뜬 눈을 보는 순간 다시 찔끔하고 말았다.
그녀는 바로 열제의 첫 번째 부인 을지였다. 그때 유니아스 황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대신…….”
“예.”
“물량을 늘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
“박리다매라 한다지요?”
“예에?”
유니아스 황후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멍한 표정을 짓는 쉬람 공작에게 황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보다 더 벌게 해 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울절께는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운송 문제 말입니다.”
“……그리하겠사옵니다.”
쉬람 공작이 굴복했다. 아직 리셀에게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걸 대신 들어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더 벌게 해 준다는데 버텨 봐야 손해다.
쉬람 공작의 항복에 유니아스 황녀가 바사 왕을 보며 말했다.
“피 흘려 싸우는 전장터에 이문을 가지고 논의하게 된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니겠습니까? 으허허허!”
바사 왕은 그저 호탕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 눈알 빠지는 줄 알았네.”
을지가 양쪽 눈가를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그녀의 역할은 고진천 대용이었다. 딱 분위기 잡고 앉아 있는 것.
그리고 거래는 유니아스가.
을지가 상대하던 이가 누군가. 바로 고진천이다. 당연히 그녀에게 풍기는 위엄은 남달랐다. 어려서 본 이들이 다 백전노장들이니 자연스럽게 베인 것이다.
유니아스가 을지에게 칭찬의 말을 던졌다.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물량을 늘인다니요?”
을지가 약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유니아스가 대답했다.
“이참에 더욱 활성화 시키려 합니다.”
“예?”
“중계무역.”
“어?”
멍한 표정을 짓는 을지를 보며 유니아스가 잔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나고도 이쪽은 많은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로 몰리는 재화의 소모를 더욱 빨리 한다면 더 많은 상인들이 몰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 참여한 동맹국에게 우리가 직접 중계를 해 주어 이문을 주면 됩니다.”
유니아스의 말에 을지가 탄성을 흘렸다.
“아하!”
“동맹을 굳건히 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재화이니까요.”
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긴 폐하께서 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게 잘 나눠 먹는 거라 하셨지요.”
“……예.”
유니아스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표현이 저렴할 뿐.
그때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중계무역이니 만큼 우리도 좀 남겨야겠지만요.”
“얼나마요?”
“삼 할로 받아 오니 오 할로 주면 되겠네요.”
“헐?”
을지가 이상한 소리를 내자 유니아스가 해맑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시세에 비한다면 이 할 오 푼입니다. 아마 엄청난 물량이 밀려올 겁니다.”
카말 왕국에서 평소 가져오는 비용이 원래 마나석 가치의 절반이다. 그걸 동맹국 입장에서 반에반 가격에 받을 수 있는 기회인데 싫어할 리가 없었다.
앉아서 막대한 재화를 해먹는 유니아스를 보며 을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며칠 후 로셀린을 비롯한 동맹국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
한동안 닥치는 대로 털고 부수고 해서인지 시에라 제국군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일단 보급부대의 규모가 더욱 커졌고, 터그람 왕국도 숨고르기를 하느라 반격은 꿈도 못 꾼 탓에 대규모 토벌대가 구성된 것이다.
“크게 털디요?”
을지우루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의 말에 진천이 솔깃했는지 말을 받았다.
“그럴까?”
“참으시지요.”
순간 끼어든 목소리에 진천과 우루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연휘가람이었다.
“물욕이 앞서면 화가 되는 법입니다.”
“큼.”
휘가람의 말에 진천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니라고는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이 무리를 이끄는 건 진천이지만 전체적인 방향을 꾸미는 건 휘가람이었다.
“그럼 추적대를?”
“그것도 좋지 않습니다. 대충 규모를 보니 만 오천에서 이만 가량으로 세 개의 부대를 꾸몄다 합니다.”
“쯧.”
붙으면 이길 자신은 있다.
그러나 병력의 소모가 걱정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알짜 중에 알짜였다. 처음 병력의 수가 일만이었지만 지금 숫자는 구천이 조금 안 된다.
보급품을 털어 마법진을 통해 내 보낼 때마다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병력 보충은 없었다. 묵갑귀마대나 일반 개마기병이나 모두 고급 병종이었기에 무한정으로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본국을 지킬 병력도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후방교란이었기 때문에 추가지원 없이 진행을 해 왔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이들의 약점은 인구였다. 시에라 제국처럼 백만 이백만 병력을 뚝딱하고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그럼 이쯤 손 털자는 건가?”
진천이 되묻자 휘가람이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설마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