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00
165화 보슬비에 젖어 들면…….
“이런 미친 말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기사가 사람이 아닌 말에게 칼을 휘둘러 갔다. 순간 축 늘어진 시체의 다리를 물고 있던 말이 응시하자 기사가 몰던 말이 코앞에서 멈칫했다.
마치 절벽이라도 앞에 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전마는 오줌까지 지리고 있었다.
당연히 칼을 빼들고 말을 몰아가던 기사는 몸이 앞으로 쏠리는 것을 가까스로 추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 패착이었다.
콰직!
다시 말이 고개를 휘두르며 물고 있던 기사의 시체를 무기삼아 균형을 잡던 기사의 몸뚱이를 후려친 것이었다. 기사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낙마했다.
더 웃긴 것은 등이 비자 오줌을 지렸던 말이 미친 듯이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끄으으…….”
바닥에 떨어진 채 비비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던 기사에게 그늘이 드리워졌다.
“허억!”
“푸릉.”
말이 콧김을 뿜어내며 서 있었다. 기사는 두 다리를 잘라 내기라도 하려는 듯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말은 그대로 두 발을 들어올렸다.
거기까지 본 레이먼 남작이 눈을 찌푸렸다. 차마 볼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퍼석!
아니나 다를까.
들려진 앞다리가 그대로 내려찍히며 기사의 머리통과 상체를 그대로 밟아 터트린 것이었다.
“무슨 말이…….”
레이먼 남작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미물에 불과한 말을 보고 말이다. 왜냐면 기사의 머리를 밟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이와 혀를 내빼 주둥이를 적시는 것이 마치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낸 맹수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몫이다.”
묵직한 음성. 그러자 말이 불만을 털어내듯 투레질을 하며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물러났다. 마치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젠장.”
순간 레이먼 남작은 화가 솟구쳤다.
말에게 잠시나마 긴장했던 자신이 창피했던 것이다.
“네놈!”
그 창피함을 숨기기라도 하듯 레이먼 남작이 노호성을 터트리며 말을 몰아 달렸다.
“로우급이군.”
사실 소울아머의 외형상 차이는 없었다. 다만 로우급은 처음부터 활성화된 갑주마냥 입고 있다가 힘을 불어 넣는다는 차이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구분해 냈다는 것이 놀랍기도바 로우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덤덤해 보이는 모습에 불안감이 느껴졌다.
일단 외형도 남달랐다.
다른 습격자들과 달리 갑주에 여러 개의 뿔이 달려 있었다. 투구에 셋 양 어깨에 둘. 다섯 개의 뿔을 달고 있는 것이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뽑은 칼이다.
레이먼 남작은 혼신의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적이 보통이 아닐 거라는 판단을 한 것이 그뿐만은 아니었는지 그의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 와중에 한 명은 또다시 그 괴물 같은 말에게 습격을 당해 낙마했다. 타고 있는 말의 옆구리에 뒷발이 그대로 날아가 박힌 것이다.
그러나 그걸 보고 놀라 할 틈이 없었다. 먼저 기사 하나가 견제를 위해 왼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리고 레이먼 남작은 그대로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강쇠를 한쪽으로 보낸 고진천은 옆으로 달려드는 기사를 보지도 않고 그대로 팔을 휘둘렀다.
쩡!
찔러 오던 롱소드가 그대로 반으로 동강이 났다. 이어 진천이 허벅지에 힘을 주자 퓨마가 알아서 성큼 뛰듯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휘둘렀던 팔을 다시 앞쪽으로 휘둘렀다.
콰직!
순간 기사의 투구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찌그러지면서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투구만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목까지 돌아가 버린 기사가 휘청거리며 말 위에서 떨어져 내릴 때, 레이먼 남작의 소울포스를 담은 롱소드가 진천의 옆구리를 향해 베어져 왔다.
그것을 진천은 들고 있던 환두대도로 튕겨 내었다.
레이먼 남작 입장에서는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레이먼 남작은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연이어 롱소드를 휘둘러왔다.
그러나 그 맹렬한 공격도 진천에게는 하나도 닿지 못했다. 짧게짧게 튕겨 내며 뒤쪽으로 돌아오는 기사를 향해 반대편 손으로 허리춤의 손도끼를 뽑아 던졌다.
뻐걱!
뒤쪽으로 습격해 오던 기사 역시 제대로 무기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가슴팍에 손도끼를 박은 채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으아아아!”
레이먼 남작은 온몸의 소울포스를 끌어올리며 함성과 함께 말 위에서 몸을 튕겨 냈다. 그 힘이 얼마나 컸는지 그를 태웠던 말이 척추가 우직 하고 부러져 나갔다.
마치 화살처럼 쏘아져 나간 레이먼 남작이 이 일격에 모든 걸 담는다는 듯 롱소드를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그러나 그가 내리그은 롱소드는 점점 목표물에서 멀어져 갔다.
그가 피한 것은 아니었다.
“비, 빌어먹을…….”
레이먼 남작은 발아래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자신의 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몸을 날렸던 곳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허공에 떠 있는 것은 똑같았다.
레이먼 남작은 자신의 명치 근처를 꿰뚫고 있는 거무튀튀한 창대를 보았다.
기병창이었다.
길이가 긴 만큼 자신의 몸무게 때문에 낭창거렸다.
그럴 때마다 창대에 꿰뚫린 명치 근처가 아파왔다. 명치에서 베어져 나오는 피를 보며 레이먼 남작이 허무한 눈으로 진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 어느새…….”
창을 뽑아드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런 레이먼 남작에게 진천이 담담히 답해 주었다.
“눈 깜짝할 새.”
“…….”
레이먼 남작은 고개를 천천히 떨구면서도 이걸 듣고 웃어야 하나 화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다. 그 자체가 그냥 어이없었다.
하나 있는 로우급 유저를 직접 척살한 진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장내는 정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적들의 수가 세 배에 가까웠지만, 진천이 이끄는 병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일당백이라는 것이 단지 비유가 아니라 실제에 가까운 병력이 바로 이들이었다.
물론 비율로 따져서 천 명이 십만을 이기기는 어렵겠지만 소수일 때는 가능했다. 실력뿐 아니라 무장에서부터 차이가 나기도 했고 말이다.
그때 이실라 론 카말 공주가 다가오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한탕 더 할까요?”
피가 범벅이었지만 굉장히 들뜬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리를 뜬다.”
“알갔습니다!”
“기왕이면 주변에 선물도 좀 뿌리도록.”
“네!”
이실라 공녀는 힘차게 대답하고는 뒤둘아보며 외쳤다.
“카마쉬! 선물 남기고 뜨자!”
“예!”
이실라 공녀의 말에 카마쉬 마잘 등 그녀의 호위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녀가 말한 선물을 남겼다. 그리고 모두 발발굽에 천을 감싸 매고 조용히 자리를 이탈했다.
“이쪽입니다!”
연락이 끊어진 정찰부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하늘 위를 맴도는 독수리 떼 덕분이었다.
“근처를 확인하라!”
주변 풀숲으로 병사들이 흩어져 갔다.
이어서 정찰대를 이끌고 그대로 말을 몰아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달려간 지 오래되지 않아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끼히힝!
“어억!”
“조, 조심해!”
연달아 말의 울음소리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의 동시에 숲을 향해 달리던 기마들의 발걸음이 멈춰 버렸다.
조심스럽게 접근한 이들이 바닥에 나뒹구는 이십여 기의 기마와 병사들을 보았다.
“이런 빌어먹을.”
그들의 눈에는 말굽에 박힌 쇳조각이 들어왔다. 철질려였다. 물론 말굽 때문에 깊이 박히지는 않았지만 놀란 말들이 날뛰며 병사들이 대거 낙마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몸에 철질려가 찍혀 부상을 입은 이들도 나왔다. 그걸 보며 추적대 병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
카르반 루 로어 후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연달아 날아오는 보고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추격해서 잡아 죽이라 보냈더니 눈먼 봉사가 되어버린 꼴이라니…….”
벌써 희생자가 사천이 넘었다.
거기에 로우급 소울아머 유저도 벌써 열 명이나 죽어 나갔다. 아무리 소울아머 유저보다는 많다 해도 로우급 자체가 차지하는 전력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더 심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도 제대로 싸워서 생긴 피해가 아니라 적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정찰대를 보내다 생긴 피해라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여태 보급품을 터는 것에 열중하던 적들이 이제는 정찰 병력만 골라서 요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토벌대의 효율이 많이 떨어져…….”
참모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자 카르반 후작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가지가지 하는군.”
숫자만 봐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런 피해라면 추가 정찰 병력을 꾸리는 것 자체가 고욕일 것이다.
나가면 연락이 끊어지는데 누가 정찰을 나가겠는가.
거기에 규모를 늘리면 효율은 떨어진다.
일부 천여 명으로 규모를 늘려 위력정찰을 시도한 부대도 있기는 했다. 그 결과로 해당 부대는 먼저 말한 사망자 인원 중 오백에 달하는 피해를 입고 쫓기듯 되돌아왔다.
척후들만 죽이고 사라지다가 나중에는 밤중에 막사의 경비를 죽이고 달아나는 식으로 피해만 입다가 결국 화공에 당해 병력의 상당수를 잃고 잠도 못 자고 패잔병마냥 쫓겨 왔던 것이다.
문제는 토벌대뿐만이 아니었다.
보급을 위한 병력의 정찰대라든지 점령지를 돌아다니는 모든 부대에도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알아낸 건.”
“예?”
“사천이나 죽어 자빠졌으면 뭐라도 건졌을 것 아닌가!”
카르반 후작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참모장이 허둥거리며 보고를 이어갔다.
“적들이 아무래도 병력을 소수로 나눈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그런데 지금 습격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을 종합하면 최소 오십에서 적어도 백여 개로 나뉜 것 같다고 합니다.”
“미친놈들이라고 하기에는 결과가 너무 명확하니 할 말도 없군.”
완전 장악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시에라 제국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곳에 들어와서 병력을 오십 개에서 백여 개로 쪼갰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피해가 너무 커 이걸 미친 짓이라 치부도 하지 못했다.
“거기에 적어도 전원 기사급 이상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기사들을 일만에 가깝게 동원해서 하는 짓이…….”
역시나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기사라면 고급 병종이다.
물론 시에라 제국 쪽에서는 소울아머의 등장으로 인해 어느 정도 퇴색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기사는 기사다.
그냥 돌격이 전부인 중장기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병력을 일만이나 동원한 저력은 둘째 치고라도 그런 고급 병력을 이렇게 후방에서 집적거리는 데에 소모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이 역시 할 말이 없어진 것이 그 효과가 너무도 컸다. 토벌대는 굼벵이로 볌했고, 보급은 더 느려졌으며 이제는 주둔지의 병력도 경계를 올리는 바람에 피로가 급증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눈이 먼 상태에서 터그람 왕국의 병력이 우회해서 습격이라도 하면 낭패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외적으로 터그람 왕국과 카말 왕국은 동맹이 단절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생각했을 때 그걸 다 믿기는 어려웠다. 거기에 지금 벌어지는 일만 해도 솔직히 이제는 거짓으로 동맹단절을 한 건 아닌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머리를 짜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머리를 짜내란 말이다!”
결국 지휘막사에서 한바탕 큰소리가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이어서 참모들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쫓기듯 막사를 빠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