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03
168화 허를 찌르다
전투가 벌어지고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균형은 무너지고 있지 않았다.
“이거 재미있게 부대를 구성했군.”
“신병을 뒤로 뺀 듯합니다.”
카르반 후작의 말에 어반 백작이 살짝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절반 이상이 신병이다. 그런데 지금 전선을 보면 전혀 밀리지 않는 것이 정예병들로만 구성한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일단 밀리지 않겠다는 거지. 정예병을 잃더라도.”
“그런 듯합니다.”
“과감한 선택이군.”
“신병은 간접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전장이라는 상황에 익숙해지면 신병도 쓸만해지니까.”
카르반 후작의 대답에 어반 백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신병이 괜히 신병이겠는가.
전장에 휩쓸리기 쉬우니 신병인 거다. 그런데 그리팔 후작은 정예병을 소모하더라도 신병들에게 전장의 익숙함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시간을 만든 것이다.
말은 쉽지만 꽤 과감한 선택이다. 터그람 왕국 입장에서는 말이다. 인적자원이 풍부한 시에라 제국에서나 쓸 법한 활용법을 그리팔 후작이 해내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기존 병사들에게 신병을 붙여 머릿수를 맞추는 것으로 활용한다. 왜냐면 정예병 그 자체의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단기전으로 가기 싫다는 이야기야. 시간을 끌어 보겠다는 거지.”
카르반 후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을 끄는 것에는 여러 목적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뒤가 근질거리는 상황이었다.
“확실히 뭔가가 있다는 건가.”
자꾸만 그 밀서가 떠올랐다.
그리팔 후작이 미소를 머금으며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생각보다 전선의 상황은 좋았다. 수가 많다는 건 꽤 병사들에게 안도감을 주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전선이 밀리지 않는다는 점은 사기 진작에도 좋았다.
물론 참모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왜냐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정예병사들이 전장에서 쓰러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예병 일만과 신병 삼사만을 두고 선택하라면 누구나 일만을 선택할 것이다. 그만큼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 표정들 말게. 저 앞에서 싸우는 이들도 처음에는 다 신병이었으니.”
그리팔 후작의 느긋한 답변에 참모들은 자신들의 속내가 들킨 것이 창피한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팔 후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만 막으면 되네. 지형도 우리가 유리하니까 놈들이 조급해서 치고 나오는 순간만 막으면 이길 수 있으니까.”
“카르반 후작이 저돌적인 성격이라지만 이런 대회전에서까지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참모들의 의견을 들을 줄 아는 이니까 말입니다.”
“그렇지. 그런데 지금 카르반 후작의 머리는 꽤 복잡할 걸세. 참모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예?”
참모 중 하나가 멍한 표정으로 되묻자 그리팔 후작이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들도 불안한데 저들은 어떻겠는가? 막말로 태반이 신병인 것을 저들도 아는데 말이야.”
“그야…….”
“더 밀어 붙이려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옵니다.”
“아무리 카말 왕국에서 무너졌어도 나 그리팔일세.”
그리팔 후작의 말에 참모들이 입을 닫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 그리팔 후작이 사령관으로 내려온 뒤 시에라 제국 진영의 움직임에 신중함이 깃들었다. 또 그가 간단하게 짜낸 전술은 꽤 먹혀 들어갔고 말이다.
“밀서. 아마도 지금 저들의 머리에는 밀서가 남아 있을 것이야.”
“아!”
그리팔 후작의 말에 다들 안색이 환해졌다. 복잡했던 마음이 한 번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그리팔 후작이 그리는 그림이 어떤 것이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딱 봐도 장기전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야. 물리치는 것보다는 버티는 느낌일 테지.”
그리팔 후작의 말에 참모들이 입을 열었다.
“놈들은 분명 후방에 남은 변수가 신경 쓰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 무리를 할 것이 뻔합니다. 소울아머 유저 전력이 앞서니 말입니다.”
“그래. 그리고 그 순간을 잘 잡아야겠지.”
그리팔 후작의 말에 참모들이 긴장된 얼굴로 전장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날의 전투는 저녁이 되며 소강상태를 이루다가 각자의 진영으로 되돌아가며 끝이 났다.
다음날 시에라 제국군의 총공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전날과 다른 점이라면 소울아머 유저들이 직접 병력을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올 게 왔군.”
그리팔 후작이 전장을 살피며 쓴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눈앞에 전날과 달리 어느 정도 버티다가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하는 터그람 왕국군의 모습이 펼쳐졌던 것이다.
카르반 후작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거 아무래도…….”
“그리팔 후작이 병력을 교체한 듯합니다!”
“그런 것 같군.”
카르반 후작이 이를 갈았다.
처음에는 전날과 같이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어이없이 일순간에 말이다.
“교대로 활용하려 했던 것일까요?”
“그럴 리가…….”
카르반 후작의 뒤쪽에서 참모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상황은 좋지만 왠지 적장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전투는 기셉니다. 한번 무너지면 되돌리기 쉬운 게 아닙니다.”
한 참모의 말대로 전투는 기세다. 무너지면 되살리기 힘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말대로 소울아머 유저들이 병력을 이끌고 종횡무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찜찜함은 남아 있었다. 그때 어반 백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소울아머 유저들을 뒤로 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응?”
카르반 후작은 어반 백작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그 역시 찜찜하기는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조심스럽게 전투를 수행했었다.
차라리 지금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밀어붙이는 게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반 백작의 소울아머 유저를 빼자는 말은 조금 의문이었다.
“신병을 던지고 우리 소울아머 유저들을 사냥할지도 모릅니다!”
어반 백작의 말에 순간 카르반 후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전선에 소란이 일었다.
기다란 창대에 불쑥 튀어 오른 것은 누군가의 머리통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도 잘 아는 이의 것이었다.
“이런 그리팔 이 개자식!”
순간 카르반 후작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 머리통은 바로 시에라 제국의 소울아머 유저의 것이었다.
어반 백작의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놈들이 몰이사냥을 하고 있습니다!”
“벌써 세 명째입니다!”
참모들이 환한 얼굴로 환호를 터트렸다. 그러나 그리팔 후작의 얼굴은 조금 착잡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전날과 달리 정예병을 빼고 신병을 넣었다. 처음에는 사기도 좋았다. 전날도 막았으니 오늘도 막을 수 있다며 들뜬 마음에 부채질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파탄이 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시에라 제국의 소울아머 유저들이 직접 길을 뚫으며 휘젓기 시작했다. 그걸 그리팔 후작이 역으로 이용했다.
이쪽의 소울아머 유저는 아홉이었다.
물론 그중 둘은 완전한 소울아머 유저는 아니었다. 자칫 운용을 잘못하면 잡아먹힐 정도의 미숙함이 남아 있는 이였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아홉을 셋으로 나누어 사냥을 한 것이다.
“아직 부족해.”
그리팔 후작은 적의 소울아머 유저의 숫자를 절반까지 줄이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그래야 대충 그림이 나왔다. 로우급 유저도 감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또다시 소울아머 유저의 목 하나가 창끝에 매달려 솟구쳤다.
“후방 병력을 투입하게.”
조금 이른 감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에라 제국군도 이쪽의 목적을 눈치챈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기하던 정예병들이 다시 전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와장창!
막사로 들어선 카르반 후작이 투구를 집어 던졌다. 한쪽에 세워두었던 병장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투구와 함께 바닥에 나자빠졌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참모들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된다 생각하나! 오늘만 일곱이야! 일곱! 로우급 유저도 셋이고!”
사냥당한 소울아머 유저의 숫자다.
터그람 왕국의 소울아머 유저들은 병사들의 목숨으로 시간을 끌며 이쪽 소울아머 유저들을 학살했다. 아무리 소울아머 유저라 해도 삼 대 일이다.
물론 카르반 후작이 말한 일곱 중 둘은 생명을 불태우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소울스톤을 돌리는 순간 그대로 터그람 왕국의 소울아머 유저들은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 도주해버렸다.
“적의 숫자도 오늘 삼만이나 줄었습니다.”
“그 삼만의 대부분이 무지렁이인 걸 모르나! 게다가 철수하면서 아군도 일만이나 잃었어!”
카르반 후작의 노성에 참모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게다가 놈들의 사기는!”
터그람 왕국 쪽은 병사들을 제물로 삼기는 했지만, 전장의 꽃인 소울아머 유저들을 대대적으로 잡아 내며 창끝으로 밀어 올려 전시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아마도 적진은 지금 잔치를 벌이고 있을 것이 뻔했다.
무지렁이 같은 병사들일지라도 소울아머 하나의 목숨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고 있으니 말이다.
“후우.”
아무리 적 병사들의 수를 삼만이나 줄였다지만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 아직도 아군의 수는 적군에 비해 열세였다.
남은 병력은 육만이 안 된다. 전 날 전사자가 삼천이었다.
팽팽히 맞섰기에 양측의 피해는 미미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만 양측 합쳐 사만의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이쪽은 육만이 안 되고 적들은 아직 칠만이었다.
그러나 소울아머 유저의 피해가 너무 크다. 또 한 가지. 적들의 정예 병력 소모가 적다는 점이다. 반면 이쪽은 길을 뚫기 위해 정예병들을 대거 동원해서 전사자 일만의 대부분이 그들이었다.
신병 비율이 갑자기 높아져 버렸다.
거기에 사기도 바닥이다.
“그리팔!”
카르반 후작이 분노에 떨었다.
“고생들 했느니라.”
“가, 감사합니다!”
“이런 팔 하나는 어디 두고 왔나?”
“시에라 제국놈들이 구걸하기에 대가리 떼 오는 대신 줘 버렸습니다요!”
그리팔 후작은 팔 하나 없는 병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병사들을 직접 위무하고 다녔다. 삼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생겨났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적들의 기세에 암담했던 터그람 왕국 병사들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제군들의 희생이 있었으나 적 소울아머 유저들을 다수 벨 수 있었느니라. 그대들이 모두 영웅이다!”
그리팔 후작의 한마디, 한마디가 병사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상처가 중해 숨이 너어가는 병사의 손을 잡고 울기도 했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 주었다.
심지어 한 잔 정도지만 술도 돌렸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던 그리팔 후작이 막사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감정은 착잡함이었다.
“삼만이라…….”
삼만에 적병 일만과 소울아머 유저 열둘을 바꾸었다.
남는 장사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병들의 목숨을 댓가로 준 사실은 어디 가지 않는다.
그게 가슴을 찔러왔다.
“약한 게 죄인 게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리팔 후작은 한가득 짐을 마음에 담은 표정이었다. 그는 다시 지도를 펼쳤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카르반 후작.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밤이 넘어가도록 그리팔 후작은 전장 지도를 펼치고 계속 전술에 몰두했다. 삼만의 희생을 무의미하지 않게 만들겠다는 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