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04
169화 전술은 결국 거기서 거기다
“꽤 하는군.”
고진천은 마법사를 통해 시에라 제국과 터그람 왕국간의 전투 상황을 전달 받고 미소를 머금었다. 병력의 피해가 적지는 않았지만 터그람 왕국 입장에서는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이쪽에서 당한 거 써먹은 거밖에 안 되잖아요.”
이실라 론 카말 공주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입술이 쭈욱 튀어나와 있었다. 사실 그녀 입장에서는 그리팔 후작이 예뻐 보일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 카말 왕국을 유린했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평가절하에 진천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전술은 있는 거 써먹는 거다. 새로운 걸 찾는 게 아니지.”
“하지만 가우리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 써먹어 본 걸 잘 적용한 것뿐이다. 그걸 이쪽에서 몰랐던 것뿐이고.”
진천의 말에 이실라 공주의 입은 더욱 삐죽하게 나왔다. 물론 그녀의 불편한 마음을 보듬어 줄 진천이 아니었고, 또 별로 그런 걸 신경 쓰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리팔이 잘한 거지. 보통은 이렇게 하기 힘들거든.”
“왜 그렇죠?”
이실라 공주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자 진천이 짧게 답했다.
“쪽 팔리거든.”
“예?”
“당한 걸 써먹는 사람은 드물지. 창피하니까. 명예에 대하여 목숨을 걸수록 안 하지. 왜냐면 이겨도 평생 따라다닐 거니까. 하지만 그리팔은 실리를 선택한 거지.”
진천의 말에 이실라 공주는 의외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복잡한 내용을 담은 눈빛이었다. 순간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대련할래?”
“아, 아니요!”
이실라 공주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진천이 본 그 시선 속에는 그가 우루를 볼 때나 담겨 있던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도 할 줄 알았나?’
종종 그가 보내던 눈빛이기에 잘 알 수 있었다. 가끔이지만 우루도 그에게 그런 시선을 보내기 때문이었다.
간혹 수군거리는 말 중에 우루와 진천을 두고 하는 말이 ‘도긴개긴’ 이었는데 진천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우루보다 낫다고 항상 생각하기에.
“어쨌든 실리를 택한 만큼 시에라 제국은 머리가 복잡해졌겠어. 이걸로 그리팔이 어떠한 경로든 우리에 대해 알렸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고 말이지.”
진천의 말에 이실라 공주가 열을 내며 말했다.
“맞아요! 중요한 건 그거지요!”
“뭘 중요할 것까지야.”
열을 내는 이실라 공주와 달리 진천은 그저 덤덤했다. 사방에 시에라 제국 병사들이 그득해졌는데도 화가 안 나는 모양이었다.
그런 진천의 태연한 모습에 이실라 공주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화도 안 나세요?”
“화? 왜”
진천이 왜 어느 대목에서 화를 내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이실라 공주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붙였다.
“우리를 이용한 거잖아요!”
“정확히 말해라. 우리가 아니라 나다.”
“어쨌든요!”
이실라 공주의 반발에 진천이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화내야 하는 걸까?’ 하는 표정을 지은 채로 말이다. 하지만 결론은 아니었다.
“별로.”
“왜요? 성인군자도 아니시면서…….”
순간 이실라 공주는 뒷말을 삼켰다.
성인군자도 아닌 사람에게 너무 대들었다는 자책감이 뒤늦게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후환도 두렵고 말이다.
“이도 저도 아니니까.”
“예?”
“우리와 터그람 왕국의 사이 말이야.”
순간 진천의 말이 이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는 게 당연한 거다. 그나마 서신을 보낸 걸 보면 뒷감당도 자신이 하겠다는 의미고.”
“그게 그렇게 되나요?”
“터그람 왕성에서 온 게 아니라 그리팔 후작에게서 온 거니까.”
“와…….”
이실라 공주는 진천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런 복잡한 걸 예상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진천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예.”
“강아지 몇 마리 더 달려든다고 호랑이가 몸을 사리지는 않는 법이지.”
“…….”
이어진 비유에 이실라 공주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 어떤 설명보다 더 와닿았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진천이 가르치듯 말을 이었다.
“명심하라. 자존심이나 배려가 승리를 가져다주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진천의 말에 이실라 공주가 귀를 기울였다.
“대련이다.”
“…….”
그날 그녀는 피 떡이 되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자신의 주둥이를 자유분방하게 둔 것에 대해.
자비는 없었다.
예상대로 진천은 성인군자는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
시에라 제국군이 다시 전선에 나선 것은 이틀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뒤였다. 소울아머 유저의 상실로 인해 전략의 재수정이 불가피했기 때문이었다.
카르반 루 로어 후작은 전장을 바라보며 불편한 심기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새 뭘 많이 만들어 두었군.”
그의 투덜거림에 참모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중간 중간 소규모 접전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그냥 두면 적들이 수비를 위한 공사를 수월하게 하니까 집적거린 거에 불과했다.
오히려 초반에는 견제를 위해 병력을 보냈다가 크게 손해를 입기도 했다. 이미 예상을 하고 매복을 시켰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후의 견제는 시늉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진입을 유도하는 형태가 되어 보입니다.”
“그렇군.”
딱 봐도 진입로를 한정시켜 버린 형태로 공사를 끝냈다. 그렇다고 크게 뭘 한 건 아니었지만 듬성듬성 목책을 세워 둔 것만 해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걸 무시하자니 목책을 무너트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그렇다고 돌아가자니 적의 의도를 따르는 것 같은 찜찜함이 있었다.
물론 뭔가 술수를 부리기에는 이미 많은 부분을 불태워 버린 탓에 예상할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참모진의 의견대로 공성병기로 일단 때리고 가야겠군.”
“일단 그게 안전하긴 합니다.”
물론 공성병기로 때리고 간다 해서 장애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인 압박은 줄어든다.
“그럼 시작하게.”
잠시 후 뿔고동소리와 함께 공성병기에서 쏘아진 바위와 거대화살이 얼기 설기 만들어 놓은 목책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참모진의 말을 잘 듣는군.”
“저번에 당한 것 때문에 찜찜했던 모양입니다.”
“어쩔 수 없지. 우리도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이쪽도 준비한 것이 있었다.
바로 수성 병기들을 끌고 내려온 것이다. 어차피 이곳에서 밀리면 요새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쪽의 지대가 높아 이쪽의 사거리가 더 멀다는 점이었다.
마찬가지로 바위와 발리스터의 화살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콰직!
“히이익!”
“달려! 달리란 말이다!”
옆에서 함께 달리던 동료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바위에 짓뭉개지는 모습에 시에라 제국 병사들이 몸을 움츠리자 독전대가 윽박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에 다시 병사들은 방패를 들어 올리고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어 목책이 부서진 잔해 쪽으로 올라섰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내, 내 발!”
큰 함정은 아니었지만 목책이 없던 공터를 달리던 병사들이 다리를 움쳐쥐고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살짝 지푸라기와 흙으로 덮었던 곳에 송곳 같은 것들을 세워 두었던 것이다. 워낙 기초적인 것이라 기사들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얇은 가죽신만 신은 병사들에게는 나름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그 모습에 목책을 향한 자신들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을 빨리했다.
“나가자!”
“와아아아!”
함성이 울려 퍼지며 목책을 뛰어 넘은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갔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향해 화살이 그야말로 비처럼 쏟아졌다. 지휘관들이 외쳤다.
“여기만 지나면 된다! 전속으로 달려라!”
지휘관들의 독려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나갔다. 그때였다.
“어헉!”
바닥이 훅 꺼지며 병사들이 일제히 빨려 들어갔다.
비명이 터졌다.
“아악!”
“억!”
안도했던 것도 잠시 목책 뒤로 달리다 보니 함정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목책이 없던 곳과 달리 깊게 파여진 함정이었다.
그 안에 빠져든 병사들은 투박하게 깎인 말뚝에 걸쳐져 버둥거렸다. 일부는 말뚝에 꿰였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미, 밀지 마! 함정이야!”
“제, 젠장!”
뒤쪽에서 밀어붙이는 힘에 밀려 떨어진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말뚝 위를 벗어나려던 동료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먼저 떨어진 이들은 동료에 의해 오히려 말뚝에 박혀들어 버렸다.
“끄아악!”
“개새끼!”
악다구니를 쓰는 목소리가 발아래에서 들려왔지만 그 병사들도 다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뒤에서는 아직도 아군 병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마치 지진나기 직전에 설치류들이 절벽위에서 바다로 뛰어드는 모양처럼 말이다. 심지어 구덩이의 반대편은 의도한 것처럼 깎아지른 절벽마냥 매끈했다.
“젠장.”
무너진 목책 위에서 그 모습을 보던 지휘관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진짜 함정이었다. 자세히 보니 일부 목책이 부서지면서 무너진 구덩이들도 있었다.
“이것 때문에 미친 듯이 화살을 쏘는 거였나…….”
무너졌다 해도 목책의 잔해는 시야를 가리기에 충분했다. 그 와중에 화살이 갑자기 집중됐으니 빠지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함정은 오래지 않아 메워졌다.
아군의 시신으로 말이다.
“빌어먹을.”
욕설을 뱉은 지휘관들은 아군을 밟고 지나는 병사들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얕은 수를 쓰다니.”
카르반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수가 엄청나게 많지는 않지만 아직 제대로 붙지도 않았는데 족히 천 이상의 병사들이 소모된 것이다.
거기에 함정 때문에 방패병들이 꺼지며 노출된 병사들이 화살을 맞은 것까지 계산하면 얼추 이삼천은 넘어갔다.
“그래. 어디 잔재주가 어디까지 가는가 보자!”
하지만 그의 표정은 분노하기보다는 서늘했다.
카르반 후작이 자신의 애검을 뽑으며 말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총력전이었다. 그리고 더는 참고 기다릴 수도 없었다.
“나를 따르라!”
그가 외치자 깃발이 솟구쳤다.
“와아아아!”
그때 뒤쪽의 진영에서 함성과 함께 막사를 헤치고 족히 이만은 되는 병력이 달려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함성소릴 들으며 그리팔 후작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보급을 위해 끌고 왔던 병력이 왔구먼.”
병력이라 했지만 노예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방패와 갑주를 입혀 선두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짜 정예병은 진지에 숨겨 두었던 것이고 말이다.
이전 전투에서 신병으로 바꿔치기 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결국 목책 뒤에 숨겨 둔 함정에 빠진 이들은 비전투 요원에 가까운 병력이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참모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이, 이런!”
“허어, 놈들이 저런 수를…….”
“어차피 총력전인 건 예상하지 않았는가? 병사들을 독려하게. 어쨌든 서전은 우리가 잡았네.”
그리팔 후작이 담담하게 말하자 참모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병력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전투의 불길이 더욱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