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06
171화 대어를 낚으려면 미끼도 커야 한다
시에라 제국의 소울아머 유저들이 전선으로 흩어지자 전황이 눈에 뜨이게 변하기 시작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구나.”
그리팔 후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삼만의 병력을 희생양 삼고 또 은퇴하거나 은퇴를 앞둔 소울아머 유저들의 목숨을 담보로 시에라 제국의 소울아머 유저를 줄였다.
그럼에도 아직 전황을 뒤바꿀 정도의 힘이 있다는 게 부러울 따름이었다.
“빌어먹을 놈들! 소울아머 유저들만 더 지원해 줬어도!”
참모 중 하나가 울분에 찬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 그리팔 후작이 이끄는 병력에 소울아머 유저는 처음에 넷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그리팔 후작이 직접 끌어모은 수였다.
그게 은퇴를 앞두거나 은퇴한 이들이었다.
물론 국가의 존립이 흔들리는 상황이기에 은퇴란 것은 이미 의미가 없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끌어모으는 것까지 터그람 왕국은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무가에서는 은근히 바라는 모습도 보였다.
나이든 소울아머 유저란 말은 즉 일가를 세운 이들이라는 말이었다. 그 구심점이나 마찬가지인 이들이 사지로 나간 이후라면 그 자리를 차지해 볼 수 있을까 하는 얄팍한 계산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도 국가가 살아남아야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는 이들의 공통점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그들 덕에 적들의 소울아머 유저의 수는 이제 비슷해졌다. 문제는 로우급이라 불리는 유저들이었다.
비록 소울아머 유저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일반 병사들에게는 똑같은 괴물일 따름이었다.
그래도 기사들을 잔뜩 모은다고 소울아머 유저를 막기는 힘이 들지만, 로우급을 상대로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저쪽도 소울아머를 운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우리는 더 빠른 시간 안에 힘이 빠질 것이고 말이야.”
그리팔 후작이 덤덤하게 내뱉은 말에 참모들은 얼굴을 붉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적 소울아머 유저를 오늘도 다수 잡아내었다.
이것만해도 큰 전과였다.
물론 그 때문에 희생한 소울아머 유저가 셋이다. 물론 그 이상의 적 소울아머 유저를 잡아내었다. 그러나 단순 비교할 수 없다는 점이 뼈아팠다.
이마저도 다시는 써먹기 힘든 방법이었다. 시에라 제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같은 수에 당할 리도 없고 말이다.
“오늘 결판이 나겠구나…….”
그리팔 후작이 점점 저물어져가는 하늘을 보면서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때 무언가를 생각했는지 갑자기 그리팔 후작이 뒤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호위기사단!”
“예!”
“그대들의 목숨은 누구의 것인가!”
커다랗게 울려 퍼진 그리팔 후작의 질문에 그의 뒤에 도열해 있던 호위기사들이 일제히 외쳤다.
“오직 후작님을 위한 목숨입니다!”
기사들이 추호의 흔들림 없이 귀중한 목숨을 후작을 위한 것이라 외쳤다. 그러자 그리팔 후작은 그들의 대답보다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다!”
단호하게 틀렸다 외친 그리팔 후작이 자신의 가슴팍을 탕탕 두들기며 다시 말했다.
“내 것이 아니다!”
호위기사들은 그리팔 후작의 부정에도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어떠한 명령이라도 듣겠다는 듯.
“그대들의 목숨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목숨이니라!”
누구는 그리팔 후작에 대해 전술은 뛰어나나 영웅놀이에 심취한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이들은 달리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 영웅 흉내를 내는 것을 좋아하는 이가 아니었다.
“나를 따르라! 나를 지켜라!”
그 말을 외친 그리팔 후작은 오히려 반대로 본인을 지키라 외치며 말을 몰았다. 그런데 그 방향은 그가 가야 할 길이 아니었다.
난전 속.
접전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누가 말릴 시간도 없었다. 참모들이 당황하는 사이 호위기사단이 두말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그리팔 후작을 지켜야 하는 호위기사들이 위험천만한 곳을 향하는 그를 따른다는 건 한 가지이유뿐이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사령기를 세워라! 절대로 흔들리지 마라!”
호위기사들 사이에서 비장미 넘치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아…….”
참모들이 질린 얼굴을 했다.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향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던 것이다.
그리팔 후작은 시에라 제국의 카르반 후작처럼 본인의 무력이 높은 이가 아니었다.
그저 저 나이대의 노인보다 조금 더 건강할 뿐인 노장이었다. 그는 머리로 승부하는 이였다.
그런 그가 접전이 이루어지는 전장을 향해 달린다는 것은 그 스스로가 미끼가 되겠다는 의미였다.
참모 중 하나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영웅 놀이를 좋아하시는 게 아니야.”
다른 참모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팔 후작께서 그려 왔던 영웅처럼 할 수 있기를 원하시는 거야. 목숨을 초개처럼 던질 수 있는 그런 영웅처럼 용기를 내고 싶어 하셨던 거야.”
그제야 참모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고 보면 그의 소설에서 나오는 영웅들은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스스럼없이 던져 나라를 구했다.
사실 시에라 제국이라는 거대한 적 앞에 선 터그람 왕국이었기에 그의 소설은 항상 인기가 있었다.
현 시대 상황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때보다 달려 나가는 그리팔 후작의 모습이 커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호위기사들 역시 말이다. 그런 그들의 뒤를 뒤로 빠졌던 소울아머 유저들이 다시 섞여들었다.
큰 미끼에는 큰 고기가 걸리는 법이었다.
“그리팔 후작께서 오셨다아아!”
“와아아아!”
“터그람 만세!”
그리팔 후작과 그의 호위기사단 일백이 전장을 누비기 시작하자 사기는 급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팔 후작은 전선의 사기를 높이는 데에 만족하지 않았다.
“시에라의 개들을 몰아내자! 나를 따르라!”
전진했다.
시에라 제국의 병사들을 뚫고 전진해 나갔다.
호위기사들은 피 칠갑을 하고 쉴 새 없이 적을 베어 넘겼다. 그 뒤를 병사들이 기세를 높이며 따랐다.
반면 시에라 제국군은 갑자기 들이닥친 그리팔 후작의 진격에 연신 밀렸다.
그런 그리팔 후작을 본 카르만 후작이 이를 갈았다.
“미친 거 아닌가?”
처음 그리팔 후작이 나섰을 때만해도 전황을 다잡기 위한 연극으로 보였다. 총사령관이 나서면 그만큼 사기가 오르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거기에 멈추지 않고 접전이 이루어지는 최전선까지 내려와 직접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몸이 움찔거렸다. 그만 잡으면 끝나는 전투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리팔 후작에게 당한 것이 많았다.
함정일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설마 하는 사이 진영을 양단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그리팔 후작이 보여 줬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 과감함 때문인지 시에라 제국의 진영은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러나 그의 과감함은 많은 시선을 이끌었다. 전선으로 흩어졌던 소울아머 유저들이 일제히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잡기 위해서 말이다.
로우급 유저들까지 모은다면 충분했다.
비록 소울아머 유저가 한둘 적을 수 있지만 아직 이쪽의 소울아머 유저가 힘이 많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 로우급은 아직 숫자가 있다.
“오호라?”
카르반 후작이 눈을 빛냈다.
그리팔 후작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말이다.
“저놈을 잡는다!”
“하지만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놈의 함정이니라! 그리고 자신을 미끼로 던져 제국의 소울아머 유저들을 불러 모으고 있지 않느냐!”
카르반 후작의 외침에 뒤따르던 참모장 어반 백작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소울아머 유저들이 빠진 전선이 다시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놈이 위험한 도박을 하는 거야! 그러니 잡아야지!”
카르반 후작이 말을 몰라 달렸다. 그리고 흥분된 얼굴로 그리팔 후작을 향해 나아갔다.
“위험한 도박이라는 건 말 그대로 다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생에 마지막 깨달음으로 남겨 주마!”
롱소드를 휘둘렀던 그리팔 후작이 잠시 기우뚱했다.
“어이쿠! 이거 평소에 칼 한 번 더 잡아 볼 걸 그랬구먼! 허허허!”
그리팔 후작이 멋쩍은 표정으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의 모자란 무력은 곁을 따르는 호위기사들이 매워 주었다. 이미 많은 적을 베어 넘기느라 호위기사들의 수가 많이 줄어 있었다.
그럼에도 흔들림은 없었다.
“그리팔! 네놈의 목을 가져가야겠다!”
그때 한쪽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시에라 제국의 소울아머 유저였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이쪽저쪽 사방에서 그를 향한 욕심이 담긴 외침이 연달아 나왔다.
“역시 나만 한 미끼가 없지?”
그리팔 후작이 옆을 바라보며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무뚝뚝하게만 보였던 그의 호위기사대장이 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받았다.
“원래 큰 고기를 낚으려면 미끼도 커야 하는 법이잖습니까.”
“껄껄껄! 명언이로다아!”
그리팔 후작이 크게 웃었다.
그 사이 소울아머 유저가 그의 앞으로 육박해 왔다. 하지만 그를 반긴 이는 따로 있었다.
“어딜 기어오느냐.”
지금까지 호위기사들 속에 은신하며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참아 내며 기다리던 터그람 왕국의 소울아머 유저였다.
물론 잠시의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콰캉!
소울포스가 부딪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상대방 역시 갑자기 소울아머 유저가 튀어나왔음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콰쾅! 쾅!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는 사이 또 다른 소울아머 유저들이 달려왔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이쪽에서도 소울아머 유저들이 달려 나가 맞이했다.
이쪽의 소울아머 유저는 다섯인데 반해 시에라 제국의 소울아머 유저는 이제 셋이었다.
그러나 로우급 유저 예닐곱이 달려들어 혼전을 이루자 전황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쪽이 불리하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그리파아아알! 펜대나 잡을 놈이 칼을 잡았구나!”
카르반 후작이 포효를 터트리며 나타났다.
“어이쿠! 대어가 왔구나! 대어가 왔어!”
그리팔 후작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이다.
시에라 제국의 총사령관과 터그람 왕국의 총사령관이 전장 한복판에서 조우한 것이었다.
“놈 잔머리를 잘 썼더구나.”
“그건 전술이라 부르는 거라오. 잔머리로 생각하니 당하는 게지.”
카르반 후작의 말에 그리팔 후작이 태연히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그리팔 후작의 말에 카르반 후작이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과감한 건 좋았지만 너무 깊게 들어왔다. 그건 알지?”
“원래 대어를 낚으려면 깊은 물에 가야 하는 법이라오. 그것도 모르시나? 아니면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인가?”
한마디도 지지 않고 이죽거리는 그리팔 후작의 발언에 카르반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히 왕국의 후작 주제에 대제국의 후작에게 그따위 어투라니. 예의도 없군!”
“지랄도 풍년이라오.”
“뭐?”
“아, 그런 거 있지. 우루라는 양반이 해 준 말이야.”
이제는 아예 대놓고 반말이다.
“네놈!”
“막말로 니들에게나 제국이지 우리에게는 개잡놈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말이다!”
순간 그리팔 후작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일갈을 터트렸다. 무인도 아닌 그리팔 후작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기세가 카르반 후작을 압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