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11
176화 해 보니 이해되는 것
그리팔 파샤 후작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서신을 가져온 술법사와 참모들은 그런 그리팔 후작을 긴장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그리팔 후작이 입을 열었다.
“프라임 공작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을 가능서이 크다는군.”
순간 정적이 흘렀다.
최악의 경우에 그가 이쪽으로 향할 수 있다는 점을 상정해 두고는 있었지만 현실이 되자 충격이 컸던 것이다.
“그럼 본국에서 지원이 오는 겁니까?”
참모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그리팔 후작은 말없이 서신을 돌렸다.
“하아.”
“이런 씨…….”
서신이 도는 동안 김빠진 탄식과 미처 튀어나오지 못한 욕설 등이 비어져 나왔다.
“여기서 물러서면 뭐가 된다는 말입니까? 후방으로 갈수록 지형적으로 방어에 불리해 집니다!”
“맞습니다! 여기서 방어를 위해 준비를 얼마나 했는데…….”
“무엇보다 이건 좌천입니다!”
결정적인 내용은 좌천이나 마찬가지인 명령이었다. 칼라일 론 마샤 공작의 부대에 합류하라는 내용.
시에라 제국의 본진을 꺾은 그리팔 후작에게 있을 수 없는 예우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팔 후작은 참모들의 분노에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구나.”
그리팔 후작의 말에 참모들은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내었던 것이다. 그리팔 후작이 총사령관에 임명될 때부터 왕도는 시끄러웠다.
패장을 다시 쓴다는 말부터 카이거 왕이 무리를 하고 있다는 말까지 말이다.
말은 다 번지르르했지만 결론적으로 귀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던 것이다. 왕권이 흔들린 지금이 기회라도 된다는 듯 말이다.
귀족들은 처음부터 동맹파기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나뉘었던 영토를 획득하는 것보다 시에라 제국의 위협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생각.
셋 중 하나가 위태로워지면 둘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준다는 것이 귀족들 입장에서는 큰 메리트였던 것이다.
필리어리 왕국에 비해 터그람 왕국은 국경선이 자주 바뀌는 편이었다.
쉽게 말하면 삼국 중 가장 구멍이 바로 터그람 왕국이라는 말이었다. 물론 그 기본 전략이 약간 괘를 달리하는 부분도 있었다. 땅은 내주어도 백성과 재물은 주지 않는다는 것.
카말도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다만 카말의 경우에는 전 영토가 전쟁터였던 경우가 많았기에 국가 자체가 기동전에 익숙했다.
심지어 농담 삼아 하는 말 중에는 카말 왕국은 맘만 먹으면 하루도 안 되어 전 백성이 짐 싸들고 피신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카말 왕국의 백성들은 모두가 피란을 위한 준비태세가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각자 집안에 비상식량 등 만일의 사태에 항상 대비하여 짐을 싸 놓고 있었다.
카말 왕국 국민에게는 이게 일상이었다.
일종의 군과 백성 간의 공동체 의식이 있는 편이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가 단순히 기동전에 익숙하다는 면보다는 귀족들 간의 영토를 하사받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카말 왕국에는 영지세습을 하는 귀족이 거의 없었다.
초기에는 있었지만 시에라 제국과의 전쟁에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영지를 귀족에게 세습시키는 행위가 없어졌다.
태생 자체가 버림받은 지역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터그람 왕국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가 도주도 못한 채 포로로 잡힌 백성들이 초기에는 많았다. 그들에게 터그람은 동맹이자 아군이었으니 말이다.
반면에 터그람 왕국에는 아직도 세습 귀족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왕가에서 내세우는 전략에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 역시 생존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영지민을 이끌고 후방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터그람 왕국의 귀족들에게 자신의 영지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은 바로 양 동맹군들의 수복작전이었다.
그러다 보니 카이거 왕의 카말 왕국 영토 공략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또한 전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말 왕국 지역에 영지가 있던 이들은 적극적으로 찬성을 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카이거 왕의 주장에 힘을 실어 줬던 것이다.
실제 그들이 전쟁을 행하며 올린 공이 적지도 않았다.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쟁을 행했던 것이다. 당연히 공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카말 왕국 정벌에 더욱 힘을 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실패로 돌아간 지금 그들의 전력 역시 대거 깎여나가 버렸다.
그러니 카이거 왕의 목소리를 받쳐 줄 만한 힘이 모자란 것이었다. 그리팔 후작은 그 부분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래도 전하께서 후작님을 걱정해서 내리신 명령일 것이옵니다.”
“그렇습니다.”
몇몇 참모들이 조심스럽게 카이거 왕을 두둔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곳을 사수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명령을 따라야겠지.”
그리팔 후작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리자 참모들은 다들 고개를 떨어트렸다. 어차피 지원 없이 적을 막기는 요원했기에 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그의 결정은 그날 저녁이 지나기 전에 번복이 되었다. 정찰을 나갔던 부대원들이 전부 되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
바닥에 즐비한 시신들. 그 시신들은 모두 터그람 왕국의 정찰병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시신 근처에서 서성이는 이들은 모두가 시에라 제국의 기사들이었다.
“정말 이걸로 놈들이 움직이지 못하겠습니까?”
시에라 제국의 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기사들의 장으로 보이는 이가 입을 열었다.
“글쎄.”
기사단장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한 것은 바로 적들의 정찰부대를 괴멸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목적이 적들의 후퇴를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정찰부대를 괴멸시키는 것과 후퇴를 막는 것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명확하지는 않았다.
그때 그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마도?”
“고, 공작 각하!”
그들에게 모호한 대답을 해 준 이는 바로 프라임 론 아가드 공작이었다.
프라임 공작이 마치 산책을 하듯 시체 주변을 거닐며 다가오고 있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전쟁에서 가장 전과가 확대되는 시기가 후퇴하는 때라는 걸 알지 않은가?”
프라임 공작의 질문에 기사단장은 물론이고 질문을 던졌던 기사 역시 부동자세를 취한 채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냥 정찰대 일부만 처치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일대의 모든 정찰대를 싹 잡아 죽였으니 아마 곤란할 거야. 벌써 이 인근에 병력이 배치가 된 것이명 어쩌나 하고 말이야.”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번에 이쪽 인근에서 가우리의 병력이 우리 쪽 정찰부대를 싹 쓸고 다녔지 않은가?”
프라임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은 얼굴을 붉혔다.
“그렇습니다.”
프라임 공작에게 대답을 한 기사단장은 원정군에서 차출된 기사단장이었다. 인근 지리에 대해 잘 아는 이가 필요했기에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한동안 터그람 왕국 내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결코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그때 어땠던가?”
“쥐새끼 같은 놈들이라…….”
“탓하려는 게 아냐. 어땠냐고 묻는 거라네.”
프라임 공작이 재차 묻자 기사단장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갑갑했습니다. 일단 부대 간의 연락이야 서신을 주고받으면 되었지만 정찰대가 지속적으로 요격을 당하니 적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 답답했습니다. 처음에는 적의 병력의 수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으니 말입니다.”
대답을 하던 기사단장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프라임 공작의 질문에 답하다 보니 조금 전 의문을 가졌던 것에 대한 답변이 자신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 표정 보니 답 나왔구먼. 어차피 우리는 조금의 시간만 있으면 되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본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프라임 공작이 소울아머 유저 병력과 기사단을 이끌고 먼저 이곳에 당도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온 것이기에 무모할 수 있다고도 하겠지만, 실제 병력의 대부분이 소울아머 유저란 것을 보면 결코 무모하다고 볼 수 없었다.
소울아머 유저와 로우급 유저를 합친 수가 백 단위다.
이건 제국 역사상 단일 부대로 구성했던 적이 없는 숫자였다. 이게 다 프라임 공작이 움직였기에 가능한 구성이었다.
“만에 하나 터그람 왕국이 몸을 사리면서 병력을 빼 가면 꽤 많이 귀찮아지는 거거든. 거기에 그리팔 후작 그 친구가 하는 짓은 꽤 귀찮기도 하고.”
“아닙니다. 공작 각하가 계시는데 그리팔 후작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그래서 말했잖은가. 귀찮다고.”
프라임 공작이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자 기사단장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예.”
“빨리 여길 밀어야 필리어리 왕국이나 카말 왕국도 밀지 않겠는가?”
프라임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은 물론이고 기사 역시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들의 대답을 들으며 미소 짓던 프라임 공작이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렇게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받았을 때는 뭐 이런 짓을 하는 거지 했는데 막상 생각해 보니 꽤 효율적인 작전이기도 하더라고.”
“그렇지만 조금 무모한 작전이기도 합니다. 물론 공작각하께서 무모하다는 건 아닙니다.”
“그리 생각하나?”
프라임 공작이 되묻자 기사단장이 힘주어 답했다.
“공작 각하와 노블 기사단 아닙니까.”
‘푸흐흐! 여하간 귀찮아도 쥐새끼 한 마리 도망치지 못하도록 잘 살피게나.”
기사단장의 답변에 프라임 공작이 푸들거리는 웃음을 흘려 내며 손짓을 했다.
“알겠습니다!”
기사단장과 기사는 프라임 공작과 말을 섞은 것이 영광이라는 듯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그들이 가는 모습을 보던 프라임 공작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게 말이야. 나니까 이런 짓을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쪽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라는 판단이 든단 말이지.”
말은 안했지만 직접 그들이 써먹은 방법을 쓰고 나니 더욱 궁금해졌다. 가우리라는 나라의 무장들에 대해서 말이다.
전술을 머리로 굴릴 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행할 때는 다른 부분이 많았다. 겉으로만 듣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방금 중얼거린 말처럼 말이다.
“뭐, 언젠가는 만나겠지.”
프라임 공작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다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나가며 기지개를 폈다.
“오랜만에 나오니 좋긴 좋구먼.”
전장에서 맡아지는 피 냄새가 그리웠다는 듯한 음성이었다.
***
“추가로 나간 정찰대 역시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약간의 낌새라도 느껴지면 복귀하라는 명령을 했음에도?”
“예.”
참모진의 답변에 그리팔 후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에 덩달아 참모진들의 표정 역시 어두워졌다. 그때 참모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어제 정찰 결과를 봤을 때 아직 적의 본대가 도착하기에는 이른 시점입니다. 적들이 우리의 혼란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빨리 철수 작전을 시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의 공격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다 뒤를 당하면?”
그리팔 후작이 질문을 던지자 참모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렇게 되면 정말 답이 없다. 확률이 적다는 것이지 아예 가능성이 없다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입을 다문 참모들을 보며 그리팔 후작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허허허. 허허허허.”
공허한 웃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