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33
198화 한밤의 방문자
라임 십팔 왕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습격 때 을지수호와 강구신 일행들의 실력이라면 토벌대 총사령관의 목을 딸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습격이라는 행위에 충실한 결과만을 얻어 왔을 뿐이다. 물론 이미 낮의 일전과 지금의 습격으로 성과는 충분했다.
그때 강구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맘에 안 들어?”
“아닙니다~!”
순간 라임 왕자가 바짝 군기가 선 모습으로 대답했다.
“뭘 얼굴 보니 응가 하다가 자르고 나온 표정이구만.”
“꼭 그렇게까지는…….”
구신의 말에 라임 왕자는 부정하지는 못했다.
누군가 때문인지 거짓말을 하면 왠지 훈련의 강도가 더 강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모호한 대답을 뱉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아까 거기서 총사령관 모가지 딱 따 버리고 병력 확 와해시키면 좋지. 토벌 흐지부지되고 또다시 모이기 전에 우린 확장도 하고. 그치?”
“그런가요?”
“퍽이나 그렇겠다.”
“왠지 아닌 것 같기도 했습니다.”
라임 왕자가 재빨리 말의 방향을 틀자 구신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 대답하는 것 하고는.”
“이상해서 죄송합니다!”
“먼저 말한 대로 하면 아마 다음 번에는 지금보다 더한 병력을 동원하지 않겠냐?”
구신의 말에 라임 왕자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이번에 당한 것이 크기 때문에 어차피 그리 결정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봤자지. 막말로 토벌대 사령관으로 오자마자 털렸는데 그걸 그대로 보고하겠다? 딱 들으니 프라임 공작 견제한답시고 알아서 병력 모아 왔는데.”
구신의 말에 라임 왕자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의 측근들이 곁에 있었다면 설명이라도 해 주었겠지만 지금 그의 곁은 호위무사 외에는 없다.
그들은 지금 각지로 흩어져 구 일루이먼 왕국의 잔재들을 만나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한 명이라도 더 인재를 모아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정치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던 라임 왕자였기에 이런 부분까지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딱 우리가 작전을 잘 써서 타격을 입은 걸로 인식할 거란 말이지. 보고도 그렇게 하고.”
“기사병력을 그렇게 잃고도 말입니까?”
“함정에 당했다고 하겠지 뭐. 이곳에 오며 나름 입지 세우려고 했는데 짤리게 생겼으니 알아서 포장할 거다. ‘내가 당하기는 했는데 이건 선발대로 온 놈들이 제대로 못해서 함정에 빠진 거다. 명예회복하겠다.’ 뭐 이런 식일걸?”
“그래도 우리 병력수준을 크게 과장해서 당했다고 변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센 놈이 올 건데? 지보다 더 병력 잘 운용하는 놈이 오던가.”
“그렇겠네요. 황실 입장에선 이쪽에서 잡음이 나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야금야금 잡아먹는 거다. 축차투입 축차소모.”
구신의 말에 라임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의문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갈까요? 사실 이번 습격 때도 희생이 없었잖습니까. 내부 안내를 위해 회유했던 포로들 빼고 말입니다.”
야금야금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결과다.
이번 습격 때도 실제로 죽은 거라고는 낮에 선발대 인원 중 협조하기로 해서 끌고 갔던 시에라 제국 인부들이 전부였다.
“우리가 왜 시체들을 끌어모았겠어?”
“시체요? 아. 그럼 그게 다?”
부상자 막사와 패잔병 막사에서 죽은 진짜 시에라 제국 병사들의 시신을 끌고 나와 적당히 던져 놓았기에 아마 이쪽도 희생이 좀 있는 것으로 알 것이다.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습격을 하고 물러가면서 미리 낮에 챙겨 두었던 시에라 제국병을 대충 일루이먼 부흥군으로 위장해서 뿌렸다.
“그리고 포로 중 일부는 화살받이로 쓸 거니까. 이쪽 피해가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거다.”
“화, 화살받이 말입니까?”
“왜? 비인간적이냐?”
구신의 말에 라임 왕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걸 따질 입장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화살받이라지만 전쟁 중 투항병을 병사로 활용하는 경우는 허다했다.
다만 무장을 제대로 챙겨 주냐 안 챙겨 주냐의 차이일 뿐이다.
“일단 며칠간을 즐기라고.”
“정말입니까?”
구신의 말에 라임 왕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 라임 왕자에게 구신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엄. 힘든 훈련일수록 즐기는 마음을 가져야 이겨 낼 수 있는 거야.”
“…….”
기승전훈련이었다.
라임 왕자의 얼굴은 다시금 썩어갔다. 확실히 남 처지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
그리팔 파샤 후작이 이끄는 터그람 왕국군은 내성에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내성의 규모에 비하여 명력수가 많은 탓인지 병력의 밀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성공적인 후퇴를 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이를 위한 희생이 적지 않았다.
부상병들 그리고 많은 재능 넘치는 기사들. 그들이 있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경계범위에 비해 병력이 많은 것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 군요.”
참모의 중얼거림에 그리팔 후작이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일세.”
경계범위가 줄은 만큼 많은 병사들이 무리하지 않고 휴식을 충분히 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휴식을 취할 공간 역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다들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들을 보면, 죽음을 앞두고 저항 중인 이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일부는 기적적인 승리를 조금이나마 상상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팔 후작의 작전이 모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그 두려운 소울아머 유저들이 외성벽이 무너지면서 함께 매장 당하는 모습들을 목격했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그들이 잔해를 해치고 불사신처럼 다시 몸을 일으키는 모습도 보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병사들은 희망을 보았다.
분명 불사신처럼 몸을 일으킨 그들이었지만, 내성을 바라보며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후퇴를 하였다. 사람같이 보이지 않던 이들이 조금은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병사들의 마음속에도 희망이 조금이나마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이들이라면 섣부른 희망 따위는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이들은 없었다.
죽음을 각오했다 해도 살아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는가. 혹시라도 터그람 왕국에서 지원군이 당도할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이렇게나 선전을 하는데 말이다.
그런 병사들의 표정을 보며 그리팔 후작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이틀이 지났군. 저쪽은 어떨까?”
“그래도 소울포스의 소모가 컸으니 하루나 이틀의 시간을 더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루나 이틀이라.”
외성의 잔해 위에 드문드문 보이는 시에라 제국의 병사들을 보며 그리팔 후작이 남아 있는 시간을 곱씹어 보았다. 마음 같아선 열흘이고 보름이고 더 버티고 싶지만 소울아머라는 절대적인 무력차가 있었다.
사실 이것도 기적이었다.
“좀 들어가서 눈 좀 붙이시지요.”
“어차피 죽으면 계속 감고 있을 눈.”
“아무리 그래도 뜨고 싶을 때 뜰 수 있는 상태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참모의 말에 그리팔 후작이 빙그레 웃었다.
“그 말도 맞구먼.”
“하루라도 괴롭히기 위해서는 후작님께서 팔팔하셔야 합니다.”
참모의 말에 그리팔 후작이 웃음을 머금고 몸을 일으켰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놈들을 더 괴롭히기 위해서라도 좀 들어가 볼까나?”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팔 후작은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을 올랐다. 그가 지금 머무르는 곳은 내성에서도 가장 높은 첨탑이 있는 곳이다.
적진이 한 눈에 모두 들어오는 탁 트인 공간이다. 넓은 시야에 비해 노구를 이끌고 오르기 힘들다는 게 함정이지만 나름 나쁘지 않았다.
첨탑 위 숙소에 도착한 그는 갑주 일부를 푸르고 그대로 몸을 누였다.
남아 있는 갑주의 무게 때문인지 아니면 살아 있는 이들의 목숨에 대한 무게 때문인지 그의 몸은 침상 위에 오르자마자 마치 바닥으로 끌어내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독한 피로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후우우우.”
누운 채 바닥으로 꺼져 가는 느낌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였다. 그가 있던 공간 옆에 갑자기 일렁이기 시작했다. 순간 그리팔 후작이 칼을 잡아채었다. 하지만 문 앞의 호위를 부르지는 않았다.
“가우리?”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사람이 몸을 나타냈다. 복장은 꽤 익숙한 것이었다.
“맞군. 가우리의 술법사. 아니 마법사라 부르던가?”
카말 왕국에 구금되어 있을 때 보았던 마법사들의 복장과 거의 같았다. 그리고 그의 중얼거림에 몸을 드러낸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맞사옵니다.”
“허허허. 이거 참. 예상치도 못한 손님이 와서 반갑긴 한데. 상황이 이러다 보니 착잡하기도 하군.”
이곳은 터그람 왕국군의 최고 지휘관이 있는 심처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가 숨어 있었다는 것이 영 씁쓸했던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우리가 모자란 걸 어딜 탓하겠는가.”
경계를 할 법도 하지만 그리팔 후작은 그러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들을 경계할 이유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간 보여 주신 전과에 찬사를 보낸다 하셨습니다.”
“생목숨을 밀어 넣어 시간을 번 것뿐이네.”
그리팔 후작은 마법사의 공치사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누군가의 음성이 울려왔다.
[그것도 재주 아니겠소?]
그리팔 후작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귀에 익숙한 음성이었고, 또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이의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우리의 재상께서?”
놀란 그리팔 후작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대무덕의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는 수척하지 않구려.]
마법사가 수정구를 내보이자 그 안에 그리팔 후작이 찾았던 이의 얼굴이 비추어 지고 있었다. 바로 무덕이었다.
“신기하군요. 그 안에 들어가 계신 것은 아닐 것이고, 이게 가우리 마법사들의 재주인 겝니까?”
술법사의 서신 외에는 소식을 주고받을 방법이 없었기에 이런 방식의 마법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렇다네. 꽤 편하더구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말이야.]
“하하하! 이거 획기적입니다. 이것만 있어도 온 병력을 하나로 다룰 수 있겠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네. 정신없을 때 얼굴 보고 뭘 하겠는가.]
그리팔 후작의 말에 무덕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참, 살아생전 다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게 다 자네 재주가 뛰어나서 가능한 거라네.]
무덕의 말에 그리팔 후작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 모자란 인사에게 금칠을 하시는군요. 그래도 이리 다시 만나니 참 좋습니다.”
[그래도 대화는 직접 마주하고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허허헛, 그야 그렇지만 상황이 이런지라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카말 왕국에 있을 때 적적하지 않게 많이 놀아 주셨는데 말입니다.”
[하핫! 나도 꽤 대화가 맞아 즐거운 시간이었다네. 그래서 말일세.]
“예.”
무덕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살았으면 좋겠네.]
“…….”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