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34
199화 긴급회의
“푸흐흐흣.”
그리팔 후작의 입에서 흐트러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침묵을 뚫고 나온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소리를 뚫고 무덕의 웃음소리 역시 흘러나왔다.
[흐흐흣. 미안하네. 내가 사람을 웃기는 재주까지 있는 줄은 몰랐구먼 그래.]
“아닙니다. 그냥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군요.”
[이미 준비는 되어 있네. 다시 시작할 수 있네.]
“이 철통같은 상황에서 말입니까?”
[그렇네.]
그리팔 후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믿기 어렵지만 허언을 할 이들이 아니었다. 그런 그리팔 후작에게 무덕이 다시 말했다.
[살게나.]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무덕의 말에 그리팔 후작이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하긴 그렇겠지.]
“저도 살고 병사들도 살리고 싶스비다. 그래서 죽자고 한 것이고 말입니다.”
죽음이란 건 오묘했다. 그게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는 죽음을 피하려면 더 빨리 다가오는 법이다.
그래서 죽자고 했다.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일 자세가 된다면.
그런 병사들이라면 그 안에서 활로가 생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담담하게 울려 오는 그리팔 후작의 목소리를 무덕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사실 절망 같은 상황 앞에 병사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차피 죽는 거 멋지게 죽어 보자고. 다행히 병사들이 웃어 주더군요. 죽어가는 순간에도 용맹스러웠고 말입니다.”
[그렇더군.]
무덕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도 전장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도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어쩌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
“그리고 성벽에서 죽어간 이들도 자신들이 아니라 동료들이라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으며 죽었을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팔 후작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새겨졌다. 주름진 노안은 축축해졌다.
“나 때문입니다.”
맥이 탁 풀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자책, 허무함, 씁쓸함이 뒤섞여 있었다.
“내 한 마디, 한 마디를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무게가 느껴졌다.
수많은 믿음과 생명이 양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그리팔 후작의 한 마디에 목숨을 던지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팔 후작이 시선을 돌려 첨탑 밖의 풍경을 담았다.
분주히 오가는 불빛.
소소한 웃음을 흘리는 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눈동자에 담아가던 그리팔 후작이 입을 열었다.
“제 임무는 저들이 품고 있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 주는 것입니다.”
[그렇군.]
“죄송합니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슴니다.”
그리팔 후작의 말에 무덕은 입을 닫았다. 그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무덕이 입을 열었다.
[건투를 비네.]
그리팔이 웃었다.
***
대무덕은 꺼진 수정구를 보고 있었다.
아쉬움 가득한 표정이었다.
“왜 그냥 물러서셨습니까.”
통신을 연결했던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무덕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라도 같지 않았을까?”
“예?”
“저 상황이라면 말이네.”
무덕의 말에 마법사는 입을 닫았다. 무덕이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침몰하는 배라 해도 선장은 끝까지 남아 있는 법이네. 먼저 몸을 빼지 않는 법이지. 진짜 선장이라면 말이야.”
무덕의 말에 마법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현장은 철수를 합니까?”
마법사의 말에 무덕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 상황을 보아 다시 설득하지. 어디서 들었는데 복수라는 행위를 하는 것은 인간뿐이라더군. 그 생각이 들 때 즈음 다시 물어보아야겠지.”
무덕의 말에 마법사가 고개를 숙였다.
보고를 들은 고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가 갔으니 말이다. 다만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차피 남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인재라면 영입에 꺼릴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전에는 그 귀함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과의 일전에서 크게 패했고 당시에는 큰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에라 제국과 전투를 벌여 오면서 뒤늦게 그 매력을 보게 된 것이다.
“일단 그런 상황이라면 시에라 제국이 이긴다 해도 꽤 볼만하겠군.”
“그럴 겝니다. 물론 그래 봐야 지휘부가 온전하니 큰 의미는 없겠습니다만.”
무덕의 대답이었다.
제대로 된 지휘관 아래의 병사가 무서운 것이지 머리 숫자만 많은 병사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하긴 그렇지.”
진천이 고개를 끄덕이곤 지도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필리어리 왕국 쪽은 어떻지?”
“시에라 제국 쪽에서 병력들이 지속적으로 충원이 되고 있어 대치만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쪽도 마찬가지고.”
카말 왕국 쪽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쪽은 오 만여 병력을 격퇴했지만 선발대에 가까운 병력이기에 충원이 더 빨랐다. 잠시 지도를 살피던 진천이 입을 열었다.
“수호와 라임 왕자던가? 그들의 상황은?”
진천의 질문에 카말 왕국 쪽 참모들이 설명을 풀어놓았다. 예상대로 잘해 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구 일루이먼 왕국 잔여 세력이 조금씩 움직일 기미가 보인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뿐 아니라 병탄된 지 오래되지 않은 지역들도 조금씩이지만 들썩인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다만 불만이라든지 그런 것이 조금씩 누적이 되고는 있지만 움직임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것 역시 일부 배신자들 때문에 사전에 불만 등이 적발되어 알려진 것이고 말입니다.”
“배신자들이 설친다는 것은 불씨는 충분한데 확신이 없다는 것이지.”
배신자들은 대부분 기회주의자다.
실리를 따지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반란을 일으킨다 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했기에 이상주의자들의 등을 찌른 것이다.
까칠한 턱을 매만지던 진천이 입을 열었다.
“지휘부를 소집해. 필리어리 쪽에서도 넘어오라고 하고.”
진천의 명령에 무덕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기름을 부으려 하시는군요.”
무덕의 말에 진천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기름은 잘못 부으면 꺼지지. 기왕이면 독주를 부어야 하지 않겠나?”
“화끈하게 타겠습니다.”
무덕의 말에 진천이 한쪽에 일렁이고 있는 촛불을 보며 대답했다.
“홀랑 태워 줘야지. 정신없게. 온 세상이 다 타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도록.”
진천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무덕의 미소가 진해졌다.
바사 론 카말 왕은 전령의 보고를 듣고 달려오며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카말 왕국 필리어리 왕국 그리고 가우리와 동맹들의 모든 수뇌부가 한자리에 소집됐다. 갑작스러운 소집 때문인지 모인 이들의 얼굴 위로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들은 게 있소?”
필리어리 왕국의 헤머튼 리어 2세가 궁금증을 지우지 못하고 바사 론 카말 왕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바사 왕 역시 언질을 받은 것이 없기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도 들은 게 없어서…….”
“그렇소? 분위기를 보니 뭔가 큰 게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오만.”
“참모진을 통해 들은 바로는 소집 전에 각 전선의 상황에 대한 보고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으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고진천이 입을 열었다.
“급작스럽게 불러 모은 점에 대해 사과를 드리리다.”
“아닙니다.”
“걱정 마십시오.”
의례적인 말이 오갔다. 이야기를 할 만한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진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터그람 왕국 전선에 대해 알고들 계실 거요.”
“예.”
“그렇습니다.”
가우리측이 입수한 전장 영상은 바사 왕은 물론이고 필리어리 왕국의 헤머튼 왕에게까지 공유되고 있었다.
물론 헤머튼 왕의 경우 최측근과 함께 영상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아직은 가우리의 능력에 대해 대외적으로 감추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시에라 제국 내의 상황 역시 전달 받으셨을 것이고…….”
말끝을 흐리며 진천이 주변을 훑자 다들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금부터 긴급하게 소집된 이 회의에 대한 목적이 밝혀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길게 끌지 않겠소.”
진천의 말에 다들 귀를 기울였다.
“치고 올라갑시다.”
순간 다들 귀를 의심했다.
“예?”
“치고 올라간다면…… 각국에 진주해 있는 시에라 제국군을 몰아내자는 말씀이십니까?”
필리어리 왕국의 헤머튼 왕이 확인하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진천이 고개를 슬쩍 저으며 정정해 주었다.
“치고 올라가자는 말이오.”
“그러니까 그게…….”
헤머튼 왕이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으려 할 때 바사 왕이 흥분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시에라 제국 본토를 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그 말 맞습니까?”
놀란 헤머튼 왕이 바사 왕과 진천을 번갈아 가며 보면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게 바사 왕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천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을 직접 치고 올라가자는 말씀이십니까? 진정으로?”
“원래 전쟁은 남의 땅에서 해야 제 맛이디요. 땅 따먹는 재미도 있고 말입네다.”
우루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하, 하지만 제국에는 아직도 상비군이 백만여 명 넘게 있습니다!”
필리어리 왕국의 헤머튼 왕이 비명을 내뱉듯이 말했다.
“그 병력이 전부 남쪽에 배치되어 있소?”
진천이 묻자 필리어리 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건 아니지만…….”
“이번 터그람 왕국에서의 전투를 보면 특이점을 알 수 있을 것이오.”
진천의 말에 헤머튼 왕이 조심히 질문을 했다.
“특이점이라면?”
“손발이 아직 안 맞는다는 것이오.”
“그건 사실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터그람 왕국에서 벌어질 전투야 터그람 왕국 내에 진주해 있는 병력을 먼저 소집해 벌인 것이기에 손발을 맞출 시간이 없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는 말이오. 그 시간을 줄 필요가 없지 않소?”
진천의 말에 헤머튼 왕이 입맛을 다셨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맞는 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손발을 맞췄던 병력들은 초전에 박살이 나 버렸다. 그러니 당연히 후속 병력은 그게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시간이 해결해 주니 말이다. 그런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말인데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터그람 왕국에 와 있는 프라임 공작이 시에라 제국에서는 가장 큰 난관이지 않겠소?”
“그렇습니다.”
“그럼 그가 터그람을 털 때에 우리가 치고 올라가는 것이 더 수월할 것이오. 그리고 그 시점을 타서 제국 내부에 자리 잡은 일루이먼 왕국 부흥군이 휘저을 것이고.”
“으음.”
충분히 일리가 있다. 순간 혼란이 찾아올 수 있다.
특히 시에라 제국처럼 외침에 익숙지 않은 나라는 말이다. 항상 때려만 봤지 맞아본 적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시에라 제국이 두려운 것은 많은 병력이 아니지 않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병력도 두렵기는 하지만 진짜는 소울아머를 위시한 고급 병력이었다.
“여기 사람들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듯 저쪽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오. 이 틈을 타자는 것이오.”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