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35
200화 가치를 증명하라
진천의 말이 이어질수록 좌중의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그러면서도 묘한 부담감이 늘어갔다.
그것을 눈치챈 진천이 다시 말했다.
“부담스러운 표정이구려.”
“그게…….”
진천의 말이 다시 이어지자 다들 떡이라도 먹고 걸린 표정을 지었다.
“내 다시 말하겠소. 이 일은…….”
재차 말을 이을 때 바사 왕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부담스러운 건 맞는데, 그게 작전보단 말투가 좀…….”
“…….”
진천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동시에 우루와 다른 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고, 무덕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순간 진천과 무덕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무덕이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하며 중얼거렸다.
“그게 공식석상에서 너무 편히 말씀하시는 건 예의가 아니어서…….”
무덕의 중얼거림에 이어 바사 왕이 다시 입을 달싹였다.
“안 하던 짓을 하시니 영 자리가 불편한 게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순간 무덕이 바사 왕을 노려봤다. 물론 바사 왕은 시선을 회피했다. 그때 헤머튼 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자리는 외교적이라기보다는 동맹군의 전략적 판단을 하는 자리이니만큼 총사령관으로서 평소대로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음…….”
진천이 헤머튼 왕의 말을 받고는 다시 무덕을 슬쩍 바라보았다. 물론 무덕은 시선을 회피했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각자의 판단이 궁금하군.”
진천이 편히 말을 놓자 다들 얼굴이 펴졌다. 필리어리 왕국의 헤머튼 왕이 입을 열었다.
“일리는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밀고 올라갈 여력만 된다면 말입니다. 지금 저들이 병력을 모아놓고는 있지만 실제 그 구성이 처음 진공해 올 때보다는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바사 왕 역시 같은 의견을 두었다.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이 총사령관으로 추대된 이를 보면 점령전보다 보급이라든지 그런 쪽에서 경력을 쌓아 온 이였습니다. 지금 전체적으로 세 국가의 전선에서 시에라 제국이 타격을 입은 상황인지라 병력의 수급은 둘째 치더라도 고급 병력이나 지휘관의 인선에 부족함이 있기는 합니다.”
헤머튼 왕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제대로 된 지휘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임 황제의 힘을 실어 주기 위해 프라임 공작이 나서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첫 전투의 결과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현 상황에서의 지휘관들은 실제 남하를 위한 인선이라기보다는 다음 지휘관이 도착했을 때 제대로 된 병력을 맞춰 주기 위한 인사에 가깝습니다.”
이어지는 보고는 할 만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헤머튼 왕은 조심스런 의견을 내뱉기도 했다.
“문제는 아군입니다. 일시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시에라 제국과 비등한 수준을 만들 수는 있지만 이쪽은 계속해서 병력을 뽑아 낼 여력이 없다는 것이 문젭니다.”
“그렇습니다. 특히 우리 입장에서는 창피한 일이지만 이번 시에라 제국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은 가우리의 지원이 컸습니다. 이미 우리는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터그람 왕국과의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던 카말 왕국의 솔직한 발언이 이어졌다. 그러나 바사 왕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 생각으로는 밀고 올라가는 것이 답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헤머튼 왕도 어느 정도 공감은 하고 있었지만 바사 왕이 이렇게 쉽게 결정을 내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바사 왕이 헤머튼 왕을 보며 솔직한 속내를 밝혔다.
“솔직히 이전까지의 전쟁 상황은 그저 버티기였습니다. 막고 또 막다 보면 언젠가는 상황에 변화가 있겠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가우리가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걱정도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헤머튼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리어리 왕국 역시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바사 왕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우리와 가우리는 입장이 다릅니다. 우리는 생존이 걸린 전쟁이란 겝니다. 솔직히 언제까지 이런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지 모른다는 거죠.”
바사 왕의 말에 헤머튼 왕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당사자인 진천과 일행들을 두고 가감 없이 말하는 바사 왕의 모습에 헤머튼 왕은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이 자리는 속내를 숨기는 자리가 될 수가 없었다.
각자의 목적이 있다지만 가우리 입장에서는 승자와 대화를 나누어도 된다. 혹은 어려운 두 왕국의 상황을 핑계로 야금야금 숨만 이어 줘도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가우리는 그들이 봐도 최선을 다해 주고 있었다.
아니 진천이 직접 전선에 뛰어 들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감격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다만 이 모습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장담하지 못했다.
잠깐이지만 진천이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자를 돕는 이는 아니었다.
의지가 있는 자를 돕는 이였다.
그렇다고 의리만 따지는 바보는 아니었다. 힘이 있으니 의리를 믿어 주는 것뿐이다.
힘이 없으면 그저 이런 저런 변명과 함께 도와주는 시늉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하루하루 직접 대련을 유도하는 것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는 압박이다.
스스로 일어서라는 것이다.
그 정도도 모른다면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었다.
그때 진천이 입을 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말을 꺼냈던 바사 왕이 헤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본인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진천이 주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내 병사들에게 다른 나라 가서 피 흘리라는 명령일 뿐이다.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전쟁을 통한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기도 하고.”
“그건 그렇습니다.”
진천의 말에 말없이 앉아 있던 연휘가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곁들였다.
“또는 이 전쟁에서 죽은 누군가의 가족은 군주의 탐욕 때문에 희생되었다 생각할 수도 있다.”
이어지는 진천의 발언에 바사 왕과 헤머튼 왕은 당혹해 했다. 이런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그저 그들이 걱정했던 부분은 귀족들의 반발 등이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진천은 그들이 염두에 두지 않고 있던 부분을 꼬집은 것이다.
“전쟁이 그런 거지. 백 번 이기고 천 번 이겨 봐야 피 흘리는 쪽에서 보면 다 같은 개새낀 거거든.”
바사 왕은 진천의 말에 깊게 와 닿았다.
한때 공국 초기 벼랑 끝에 밀렸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이거였다. 바사 왕의 영달을 위해 생목숨을 사지로 밀어 넣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 많은 이들이 바사 왕의 진위를 알아주었다. 물론 그것을 위해 항상 위험한 자리에 섰다. 그렇기에 지금 진천의 말을 일부라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감은 공감이라 쳐도 진천이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는 군주였다는 것은 그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인정하지. 난 우리 백성 누군가에게 개새끼일 수 있다. 하지만 군주란 알면서 행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 전쟁이다. 단!”
진천이 두 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도와줄 가치가 있는 이들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납득을 시킬 수 있으니까. 내 백성에게도 그리고 내 동맹에게도.”
진천의 말에 헬리오스 바이칼 공작을 비롯한 동맹들이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말투는 거만하고 행동은 거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항상 그들을 아래로 내려다보지 않는다. 받은 만큼 줄 줄 알고 또 주는 만큼만 생색낸다.
‘함께’ 라는 단어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 준다.
어쩌면 이 바닥에서 가장 합리적인 군주일지도 몰랐다.
“자. 이제 선택은 그대들이 하는 것이다.”
진천이 공을 떠넘겼다.
침묵이 흘렀다. 그들도 이제 알 수밖에 없다.
지금 이들의 선택에 따라 가우리의 행동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갑자기 병력을 뺀다든지 동맹을 철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쯤은 모를 수가 없었다.
바사 왕이 헤머튼 왕을 바라보았다.
헤머튼 왕의 얼굴은 복잡했다. 하지만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들어 바사 왕을 본 순간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굳어 있는 바사 왕의 얼굴.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해져서 굳어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무언가 이미 결단을 내렸기에 짓고 있는 표정이었다.
바사 왕이 말했다.
“내 별명이 미친놈입니다. 개새끼란 욕 하나 더해진다 해서 더 나빠질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난 나름 나쁜 이미지는 아닌데…….”
헤머튼 왕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뱉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좌중울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워낙 이미지가 좋으니 한번 미친 짓을 해도 적당히 희석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결정은 내려졌다.
헤머튼 왕이 말했다.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겠습니다. 왕실의 국고를 탈탈 털어 돈지랄을 해 보지요. 쌓아 놔 봐야 망하면 뭐합니까.”
국고를 턴다는 말에 바사 왕이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헤머튼 왕이 탁자를 ‘탕!’ 하고 내려치며 외쳤다.
“백성들을 모두 돈으로 매수하겠소이다! 창, 칼 들려 내보내는 게 아니라 싸우다 죽어도 먹고사는 데 문제없게 하리다! 믿을 수 없는 충성 대신 돈으로 가치를 사면 그만!”
헤머튼 왕의 말에 바사 왕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돼지도 다 잡았는데…… 돈 없는 것도 서러운데 이런 것도 비교되겠네.”
허탈함을 넘어 울상까지 지었다. 그러나 결정은 내려졌다.
“까짓 난 지금 해 왔던 것처럼 몸을 때우겠습니다. 진격하는 그 선봉에 제가 서겠습니다!”
헤머튼 왕에 이어 바사 왕까지 진천의 작전에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자 진천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자, 크게 놓고 크게 먹지.”
“폐, 폐하!”
무덕이 당황했다.
“가용 병력을 총 동원한다.”
“으어어!”
무덕이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어버버했다. 하지만 이미 내뱉어진 말이다. 지엄한 군주의 선언이었다.
그런 무덕에게 휘가람이 위로를 했다.
“머릿수보다는 전쟁이 길어지는 것이 더 손해 아니겠습니까? 뽑은 만큼 털면 됩니다. 딱 보니 신성제국보다 먹을 게 더 많아 보이지 않습니까?”
“끄으응.”
무덕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무덕에게 진천이 입가를 올리며 말했다.
“이것으로 네 죄를 사하노라.”
“차라리 패시옵소서!”
무덕이 울부짖었다.
그때 바이칼 공작이 거들었다.
“로셀린 왕국에도 추가 파병을 건의하겠나이다. 필요하다면 동부 군단을 모두 끌어오지요.”
동부의 무신. 로셀린 왕국의 영웅인 바이칼 공작의 말이다. 그 무게 역시 한 나라의 왕에 견주어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괜찮겠습니까? 시에라 제국에서 보낸 이들이 대륙에 들어와 있습니다. 만약 다른 나라들이 알게 되면 다른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후다닥 해치우면 될 것 아닌가?”
바이칼 공작은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쯤 되자 말린 왕국도, 하이안 왕국도 동참을 선언했다. 그들의 선언에 바사 왕과 헤머튼 왕은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선택에 동맹들도 제대로 응해 줬다.
이 전쟁, 할 만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두 왕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