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53
218화 그냥 울었다
외성이 무너지고 이제는 내성까지도 뚫렸다.
“후작님! 어서 올라가셔야 합니다!”
호위기사들이 내성의 첨탑 위에서 진두지휘하던 그라필 후작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고생들이 많군.”
차분한 음성을 내뱉는 그리팔 후작이 답답했는지 호위기사들이 다시 재촉했다.
“지금 놈들이 성벽 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어서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래야지. 올라가야지.”
어차피 피할 곳은 없었다. 내려갈 곳도 없었다. 하지만 호위기사들은 그들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리팔 후작 역시 빼지 않았다. 그가 몸을 피한다고 해서 무어라하는 사람도 없었다.
조금의 시간.
그가 몸을 피하는 것이 적들에게 저항한다는 의지의 표현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팔을 잡아라!”
“저기다!”
내성 문을 열고 성벽 위로 올라온 시에라 제국의 기사들이 일제히 그리팔 후작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리팔 후작이 지휘하는 모습을 지금까지 보았으니, 그가 있는 곳을 모를 리 없었다. 이 전투는 그리팔 후작을 잡으면 끝이 나는 전투였다.
그걸 모를 리 없었기에 시에라 제국의 기사들은 기를 쓰고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왔다. 반대로 터그람 왕국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그 발걸음을 막기 위해 분투를 했다.
물론 막지 못할 것을 알고는 있었다.
막는다해도 무언가 변화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그마한 희망은 그저 자기 위한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그러나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발걸음을 옮긴느 그리팔 후작이 발아래 펼쳐지고 있는 지옥도를 내려다보았다. 그 아래에서 적의 창칼에 찔려 누워 숨을 헐떡이는 이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픔에 얼굴을 일그러트리거나 숨을 몰아쉬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리팔 후작이 먼저 그들에게 미소를 던져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하다. 내 그대들을 기억하겠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전달되어지는 감정이었다.
누군가 바닥에 누워 입술을 달싹였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입술 모양으로 보아 알 수 있었다.
원 없이 싸웠네.
이제야 좀 쉬겠네.
먼저 갑니다.
한 명 한 명 입술을 달싹이는 걸 읽어 가며 그리팔 후작은 걸음을 옮겨 나갔다.
시선이 마주치고 미소를 교환하는 모습이 마치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비장미 넘치는 전사들의 미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축제 때나 볼 수 있는 그런 평화로운 미소들이었다.
“그대들의 안식에 축복이 있기를…….”
그리팔 후작이 조용히 그들을 향해 축복을 던지며 첨탑 아래에 있는 돌다리를 건너 내성 벽 중앙에 위치한 내성으로 나아갔다. 그가 건너가는 모습을 본 기사와 병사들이 다리로 우루루 몰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루루하며 무너지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다리가 무너진 것이다. 아니 무너트린 것이다.
“허허허.”
허허롭게 웃는 그리팔 후작의 귓가로 다리를 무너트린……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는 작은 활로마저 스스로 무너트린 이들의 환호성이 울려왔다.
다리와 연결되었던 문이 닫히고 있었다. 비로소 그리팔 후작이 뒤를 다시 돌아보았다.
닫히는 문사이로 환호성을 질렀던 이들이 몰려드는 시에라 제국의 병력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온몸에 적의 무기를 박고도 버티는 기사.
마치 애인마냥 적들을 부둥켜안고 무너진 다리 아래로 뛰어내리는 병사.
식사를 담당하던 이였는지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냄비를 휘둘러 시에라 제국 병사의 머리통을 통쾌하게 후려갈기고는 웃으며 떨어져 내린다.
그 사이로 세상이 세로로 닫혀갔다.
구구궁!
짧았던 바깥의 풍경이 그렇게 어둠으로 바뀌었다.
“가세나.”
그리팔 후작이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빨리 했다. 닫혔던 세상의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자 하는 의지였다.
그가 밀어 넣어 버린…….
이 참담한 전쟁의 희생자들의 마지막을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의지였다. 빨랐던 걸음이 이제는 달음박질이 되었다. 양 옆으로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몇 개나 있는지 모를 계단을 밟아 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헐떡거렸지만 발걸음은 오히려 더 빨라졌다. 그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의 발걸음이 오히려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후욱! 훅! 훅!”
그리팔 후작이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태양의 따듯함이 그의 머리 위를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으로 다시 연결된 문이 빛으로 가득해 눈이 부셨다.
그 빛을 열고 올라섰다.
다시 펼쳐진 세상은 여전히 지옥이었고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리팔 후작은 그 풍광을 보며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팔 후작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잠시 숨이 멈추는 듯하더니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터그람의 영우들이여! 내가 보고 있노라!”
지켜만 볼 수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남아 그들의 마지막을 눈동자에 담겠다는 외침이었다. 어차피 그가 칼을 든다해서 이름난 무장처럼 활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가 지켜본다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았다. 적어도 그는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약속대로 함께 하겠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뿐이었다.
성내가 진동을 했다.
“뭐, 뭐지?”
시에라 제국 기사들과 병사들이 살짝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성 안쪽에서부터 울려 퍼져 오는 진동음에 놀란 것이다.
“지, 지진인가?”
“아니야. 저건…….”
우웅 하는 느낌으로 떨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진으로 착각할 만도 했다. 하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살짝 질린 얼굴이었다. 누군가가 대답을 대신했다.
“함성…….”
그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진동음을 만들어낸 그 함성이 울려퍼졌다.
우와아아아아아!
누가 봐도 끝이 보이는 패자가 내는 함성소리였다. 하나의 목소리처럼 울려 퍼진 함성이 사방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
내성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프라임 공작이 걸음을 멈추어 서고 함성을 들었다. 그와 함께 온몸을 훑듯이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의 파동을 느꼈다.
“대단하지 않은가?”
프라임 공작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참모들이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 그러하옵니다.”
“누가 보면 우리가 지고 있는 줄 알겠어. 크하하핫!”
뭐가 그리 즐거운지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는 프라임 공작의 모습에 참모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그들은 이 진동음을 듣는 순간 또다시 뭔가 일이 벌어지는가 하고 심장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이었다.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 미친 것 같은 함성을 듣고 등줄기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프라임 공작의 말대로 이기는 건 시에라 제국인데 말이다.
죽어가는 이들의 악다구니와는 또 달랐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그들의 귓가로 프라임 공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시간이 흘러서 말이지.”
“예.”
“이 전쟁도 역사의 한 줄이 되겠지?”
“그, 그러하옵니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담지 못할 향취니까. 전장이라는 미친 짓이 만들어 내는 최고의 향취지.”
프라임 공작의 말에 참모들은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걸 말로 설명한다 한들 누가 이해를 하겠는가. 거기에 글로 표현한다 해도 어떻게 표현을 하겠는가.
“영광된 자리야. 평생 기억에 남길 만한…….”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프라임 공작의 등 뒤로 뜨거운 열이 만들어내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소울포스와는 달랐다.
이 짜릿한 전장의 풍광에 그의 기백이 동조한 결과였다.
프라임 공작의 발걸음이 거침없이 안쪽으로 향해 나갔다. 그리고 이내 빨라졌다.
“고, 공작님!”
“사령관님!”
“더는 못 참겠네.”
그 말을 남기고 프라임 공작이 달리며 허리춤에 걸어두었던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흥이 넘치는 발걸음이었다.
마치 남들이 벌이는 축제를 보고 참지 못하고 뛰어드는 아이의 발걸음과도 같았다.
“나 프라임 론 아가드가 여기 있다!”
쩌렁한 외침이 내성을 진동했다.
흥이 넘치는 만큼 유쾌함이 담긴 외침이었다. 그가 롱소드를 휘두르며 다시 외쳤다.
“같이하자꾸나!”
피로 만든 축제에 그가 끼어들었다.
“프라임.”
흥에 겨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프라임 공작의 모습을 보며 그리팔 후작이 젖은 듯한 눈동자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승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낭만이겠지만 패자의 입장에서는 아니다.
그러나 그리팔 후작은 침통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장하다는 감정을 담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이름 하나만으로도 무기를 든 자들이 오금이 저리는 이가 바로 프라임 공작이었다. 그런데 그런 프라임 공작을 피하는 터그람 왕국의 이들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마치 꿀을 발견한 개미떼마냥 달려들고 있었다.
소울아머 유저만 보아도 병사들은 알아서 피한다. 기사들도 일단 피하거나 시간을 끄는 쪽으로 대응을 한다. 그게 전장의 법칙이었다.
무기를 맞대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저 아래에서 싸우는 이들은 달랐다. 죽을 줄을 알면서도 나아가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서 달려드는 것도 아니다.
그냥 싸우는 거다. 허공을 베더라도 닿지 않더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싸우는 거다.
의도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죽이 튀어나온 프라임 공작을 향해 터그람 내성 밖에 스스로를 던진 병사들과 기사들이 오직 그 하나를 향해 쐐기꼴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그런 프라임 공작의 주변으로 피분수가 퍼졌다. 웅덩이가 금세 작은 호수마냥 변했다. 그리고 프라임 공작이 나아가자 작은 강물 마냥 피가 흘렀다.
아니 그냥 붉은 강이다.
“어흐흐흐흐!”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팔 후작이 바라보니 전장을 내려다보는 참모진 중 하나가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비참해서가 아니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불쌍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저렇게 의미 없음에도 달려드는 이들을 보며 터트리는 이유모를 감정이었다. 그냥 북 받힌 울음일 뿐이었다.
그리팔 후작이 말했다.
“울지 말게. 그저 지켜보게. 그리 울면 우리 영웅들의 마지막을 제대로 보지 못하지 않는가.”
그렇게 말을 하며 웃음을 머금은 그리팔 후작도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