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72
237화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
“얘기 들었어?”
“뭐 그거?”
“그래 그거.”
시에라 제국 국경수비대원들은 주변을 의식하며 말을 나누고 있었다.
“이전 전쟁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지 않아?”
“확실히 이런 건 처음이니까.”
“또 바빠지겠구만.”
카말 왕국 방면의 군단이 괴멸되었으니 아마도 다시 병력을 짜서 보낼 것이 뻔했다. 그때 처음 말문을 열었던 병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멈추지는 않겠지?”
“에이. 새로운 황제 폐하의 이름을 걸고 하는 전쟁인데 여기서 멈추겠어?”
“그건 그렇지.”
다들 이번 전쟁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국경의 일개 병사라 할지라도 모를 리가 없었다. 오히려 최근 병사들의 잦은 이동을 보며 주워들은 게 있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여하간 길어지겠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다행이라는 동료의 말에 병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국경수비만 하면 되니 말이야.”
“아아, 흐흐흐 그렇지.”
국경수비대의 특성상 누가 쳐들어오면 몰라도 징집에서 예외였다. 전쟁에서 그들이 칼을 들고 싸울 일이 있다면 누가 쳐들어올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드물었다.
물론 카말 왕국이 옛날 몇 번 미친 듯 밀고 올라왔던 적도 있었지만 그건 사실 시에라 제국 국경이라기보다는 커그람 왕국이 빼앗긴 영역으로 치고 올라온 것이 전부다.
점령지를 되찾아 간 것 뿐이었다.
진정한 의미로 침략을 당한 것이 아니다. 전투에서 국지적으로 밀린 경우는 있어도 전쟁에서 제대로 힘을 써서 패한 적이 없는 것이 시에라 제국이었다.
이전 원정 실패 때에도 제국 내의 문제로 스스로 물러갔었고, 또 그때마다 삼국은 추격은커녕 자극할까 봐 퇴각하는 시에라 제국 병력을 바라만 보았다.
심지어 그 카말 왕국도 말이다.
“그런데 확실히 그 가우리라는 나라가 문제긴 한가 보지?”
“으음.”
이쪽에서도 소문이 파다했다.
가우리라는 제국이 있어 남부 삼국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전력이 상상보다도 높다는 것 말이다.
“그런데 실체가 없다는 말도 있기도 하고.”
“실체가 없다는 게 말이나 돼? 뭔가 있겠지. 북부 놈들이 협상을 받아들여 조용히 있는 이유가 바로 남부 쪽에 비밀리에 지원 중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렇긴 한데.”
그렇게 말을 주고받던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울리는 것 같지 않아?”
“울리기는 뭐가…….”
말을 하다 말고 신경을 발바닥에 집중해 보았다. 무언가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소리.
“지진인가?”
병사 하나가 살짝 걱정되는 듯 입을 열었다. 그때 망루 위에서 놀란 음성이 튀어나왔다.
“어? 어어?”
“뭔데!”
뭔가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망루를 올려다보며 묻자 대답이 들려왔다.
“뭔가 온다! 먼지 구름이……”
먼지 구름이라는 말에 아래에서 말을 주고받던 병사들도 망루 위의 병사가 가리킨 방향을 응시했다.
그 쪽에는 작은 숲이 있었다.
그런데 그 숲에서 먼지구름 같은 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말?”
왠지 울림이 수많은 말발굽 소리와 비슷했다.
“퇴각하는 병력이 있나?”
본진이 괴멸되었다 하지만 카말 왕국 쪽에는 보급대와 그에 상응하는 병력이 전개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보고는 없었잖아.”
문제는 그렇다 해도 사전 연락이 있기 마련이었다.
“적 아니야?”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그때 망루 위에서 외침이 터져나왔다.
“적이다!”
“이런 빌어먹을!”
국경 수비대 요새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병사들도 당황한 얼굴로 병장기를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농담처럼 전쟁이 나도 전투를 할 수가 없다던 그들이었지만 국경수비대 병력은 정예였다. 타종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그들은 각자 자리를 잡아갔다.
요새라 하지만 수비적인 형태가 아닌 공격적인 형태로 지어진 탓에 성벽의 높이가 높지 않았다. 거기에 요새의 문도 넓었다. 병력의 출동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수용규모 이만오천의 요새였지만, 이건 상시 수용규모가 아니었다. 전쟁을 위해 떠나는 이들을 위한 역할이 더 컸기에 실제 수비병력의 숫자는 오천여에 불과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인근에 기병부대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전에 카말 왕국에서 보낸 것으로 최종 확인이 된 병력에 의해 요새 몇 개가 무너졌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후 고강도의 훈련을 받기도 했고 전술적인 점검도 받아 그때와는 달랐다.
그러나 긴장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이기는 전쟁이라도 죽어 나가는 이들의 다수는 병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지금 저 병력이 카말 왕국에 진군해 있던 군단을 무너트린 이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설마 진짜 오는 거야?”
“시늉만 하는 것 아닐까?”
요새벽 위에 올라 긴장된 얼굴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방향을 바라보는 병사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젠장, 제대로 미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라고!”
다들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공포를 누르기라도 하려는 듯 일부러 소리 높여 욕설을 뱉었다. 그러나 점차 먼지구름이 걷히며 그 말수는 줄어들었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마냥 울려 퍼졌다.
떠들던 이 이 없이 다들 입을 다물은 탓인지 그 작은 소리가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얼마나 쳐들어온 거야?”
누군가가 허탈한 음성을 뱉었다.
작은 숲을 지나 그들의 앞에 나타난 기마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걸 떠나 저 정도의 기마병력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맨발로 걷는 병사들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젠장 장거리 정찰대는 뭐했기에!”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미 적은 눈앞에 와 있었다.
기마대열을 뒤따르는 카말 왕국의 기사들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허옜다. 그들을 이끌고 말을 달리던 이실리 론 카말 공주의 얼굴 역시 다르지 않았다.
‘미친 정말 이대로 전투를 벌이는 거야?’
지금도 적진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시에라 제국을 향한다는 명령을 듣고서는 오히려 흥분했었다.
가우리의 무력을 본 이상 그들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러나 그 생각이 ‘이건 미친 짓 같다.’ 로 바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먹고 자는 시간까지 달렸다.
말을 달리면서도 반쯤 몽롱해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달렸다. 물론 일부 낙오한 기사들도 있었고, 그 중 불행히도 세상을 뜬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많은 예비 마를 끌고 가는지 모르겠다고 농담을 던지던 이들도 이제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달리며 갈아타고 또 갈아탔다.
그러고도 말이 지치면 쉬었다. 그때가 사람도 쉬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달리며 배고프면 한 손으로 곡물 몇 줌과 육포 그리고 물을 번갈아 마시며 달렸다.
그렇게 미친 듯이 밤과 낮을 질주하여 시에라 제국 국경을 넘었다. 솔직히 이때쯤 한 번은 쉬어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지금보다도 더 악착같이 달렸다.
심지어 적의 장거리 정찰대를 만났을 때는 더욱 장관이었다. 익숙한 듯 병력들이 좌우로 퍼지더니, 수가 적다고는 하지만 족히 오백은 되어 보이는 정찰대를 한 방에 싸 먹어 버리고 다시 달렸다.
시에라 제국의 술법사들이 서신을 날릴 기회는 사전부터 차단되었다.
그리고 달리고 달려 지금 시에라 제국의 요새가 눈에 들어왔다.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다급함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걸 느낀 이실라 공주가 식식 거리는 숨을 모라쉬며 허연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미친. 우리도 믿기지 않는데 놀랐겠지.”
그대로 달려 나갔다.
선두에서 화살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한줌 남은 기운까지 끌어모았다. 이제 전투의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두두두 두두두!
고진천이 활을 쏘아내고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따로 명령은 없었지만 알아서 기마전력의 일부가 양옆으로 퍼지며 요새벽을 둥글게 에워싸듯 나아갔다.
그들로부터는 쉬지 않고 화살이 쏘아졌다.
예상대로 적들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오듯 쏟아지는 화살비를 뚫고 대응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갑주는 괜히 입는 게 아니었다.
적당히 막고 나머지는 갑주를 믿고 달렸다.
지척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성문이 닫혔다. 바보 아닌 이상 성문부터 걸어 잠그는 것은 당연했다.
그때 진천의 머리 위를 스치고 새하얀 덩어리가 날아갔다.
그게 성문에 부딪히는 순간 뭔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쩌저저정!
물론 성문이 진짜로 갈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새하얗게 얼어붙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오히려 더 단단하게 만든 것 같을 수도 있었다.
그때 진천의 옆으로 말을 달려온 을지우루가 대궁을 들어올렸다. 움직이는 공성병기라고까지 불리는 그 대궁이 팽팽히 당겨졌다. 그리고 창대라고 해도 좋을 크기의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갔다.
콰아앙!
굉음이 울려 퍼질 때 즈음 또 한 대의 거대화살이 날았다.
쾅!
그리고 석대쯤 성문에 틀어박히며 새하얀 얼음벽에 큰 균열을 만들 때쯤 우루의 외침이 퍼졌다.
“까부수시라요!”
진천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환두대도를 양손으로 쥐고 달리는 퓨마 위를 박찼다.
가장 선두에 가장 높은 위치로 날아오른 진천을 향해 적들의 화살이 집중되어 쏟아졌다. 몇 개는 그대로 튕겼고 몇 개는 갑주를 비집고 피부에 박혔다.
그러나 진천은 환두대도를 하늘로 올렸다가 떨어지는 순간 내리그었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성문이 부서졌다.
콰콰콰쾅!
“히, 히이익!”
하얗게 얼어붙었던 성문이 단번에 부서져 내리는 것을 보며 요새 안에 대기하고 있던 시에라 제국의 병사들이 부서져 내리는 얼음덩이들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서져 내리는 성문조각들 사이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투구와 갑주에 사방으로 뻗은 다섯 개의 뿔을 가진 형상을 본 그들은 공포에 질렸다.
당장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뿜어내는 기운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던 것이다. 아니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성벽 위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과도 같은 외침은 그가 보통이 아니라는 예상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괴, 괴물이야!”
“성문이 어떻게 한 방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였다.
왜냐면 그를 막아야 할 병사들이 성문처럼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바로 고진천이다.”
투구 사이로 허연 이빨이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밝혔지만 그게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의 뒤로 마치 배경처럼 펼쳐진 기마들이 미친 듯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사내가 풀쩍 뛰어 올랐다.
이번에는 마찬가지로 육중한 갑주를 두른 말이었다.
“달려 보자 강쇠야.”
“푸히히히!”
말조차 주인을 닮았는지 괴음을 내뱉으며 시에라 제국 병사들을 향해 내달려 왔다.
얼어붙은 병사들의 뒤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막아라! 들어오게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