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8
강철의 열제 118화
진천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자 동강난 검이 파열음을 울리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 모습에 기사들은 동시에 소드를 고쳐 쥐었으나 그 이후는 어떠한 행동으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주르르륵.
허공에 치켜든 팔.
진천의 주먹에서 붉은 핏물이 팔을 타고 똬리를 틀듯이 흘러 내렸다.
굳게 다문 입술.
백여 명의 기사들 앞에 무기도 없이 걸어와 있음에도 두려움하나 없는 당당함. 그리고 자연스럽게 좌중을 내려 보는 눈빛에 기사들은 저절로 그 하나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천의 눈이 허공에 들린 주먹으로 향했다.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르더냐.”
뜻 모를 질문을 던진 진천의 눈은 흐르는 붉은 피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흐르는 붉은 피가 너희와 다르냐고 물었다!”
후우웅!
거대한 진동이 진천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나아갔다. 기사들은 등 뒤의 땀이 일순간에 식는 것을 느꼈고 병사들은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너희와 다른 것은 단 한 가지.”
진천의 눈이 주먹에서 옮겨와 기사들과 병사들을 향해 훑어보듯이 움직였다.
“난 강하다!”
오만함이 담긴 한마디.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오만하다 여기고 있지 않았다. 진천은 천천히 팔을 내리고 등을 돌리며 다시 한마디를 조용히 말했다.
“단지 그뿐이다.”
진천은 등을 돌려 천천히 다시 고윈 남작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아악!”
그의 등 뒤로 하딘 자작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진천은 걸음을 계속 옮겼다.
피슉!
짧은 섬광이 지나쳤다.
툭.
허공을 날던 하딘 자작의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지자 뒤늦게 몸통에서 갈 길을 잃은 피분수가 대지를 향해 뿌려졌다.
고윈 남작은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혔다는 듯이 인상을 슬쩍 쓰고는 소드에 남아있는 피를 바닥에 뿌렸다. 그의 뒤로는 진천이 천천히 걸어가 의자에 앉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이 순간 모든 이들의 눈에는 진천의 모습이 그 어떤 인간보다도 당당해 보였고, 대지에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쓰러져 있는 하딘 자작은 그 어떤 인간보다도 추악해 보였다.
하지만 그로서는 어느 누구도 동조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선택할 것은 없었을 것이다.
찰칵.
고윈 남작의 소드가 차가운 날을 숨기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간헐적인 단발마가 울렸다. 디너드 백작 사병출신의 조장들의 비명소리였다.
자유기사들은 하이안 왕국의 귀족들에게 버림받은 자들이 많았다. 귀족가문에서 몰락당한 자부터 눈 밖에 난 자, 그리고 상당수는 고윈 남작이 백작가였을 때 그의 휘하에 있던 기사들이었다.
“고윈 남작님을 뵙습니다.”
중년의 기사가 앞으로 나와 소드를 뒤집어 고윈 남작에게 군례를 올렸다. 그러자 하나둘 그에게 예를 올리는 기사들의 모습이 이어졌다.
“난 버림 받았다.”
고윈 남작의 침중한 음성이 흘렀다.
“우리들의 흘린 피는 가치 없는 피였다.”
바라보는 병사들의 가슴이 아려왔다. 그들 중에는 노예출신들도 있었고, 귀족들의 횡포에 전 재산을 뺏기어 전쟁터로 끌려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이 무기를 들고 목숨을 걸고 싸워온 전장은 타국이었다.
“이곳 역시 가치 없는 전장이다.”
병사들과 기사들의 눈이 피로 얼룩진 호화스러운 식탁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쪽에 무릎 꿇려진 디너드 백작과 니미얼 남작 등에게로 향했다.
“씨팔.”
어느 병사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피는 돈을 벌어주는 수단이었음을.
어떤 병사는 뜨거워진 눈시울을 닦으며 아픈 가슴을 부여잡았다. 어떤 병사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무기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들고 있는 무기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너희들은!”
고윈 남작의 목소리가 마나를 담고 울려 퍼졌다.
이제는 간간히 들리던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고윈 남작의 목소리는 고요를 타고 파도처럼 흘렀다.
“버림받았다!”
이들도 알고 있었다.
“나도 버림받았다!”
고윈 남작의 목소리엔 한이 담겼다.
“우리에게 내일은 무엇인가!”
어둠이 가렸다.
“이것이 삶인가!”
그들은 움직이는 시체였다.
정적이 흘렀다.
침통함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누군들 몰랐겠는가. 알기 때문에 고윈 남작을 따랐던 것이다.
적어도 의미 없이 죽어 나가는 이들을 줄이기 위해 더 많은 전공을 높일 수 있음에도 항상 부대를 물리며 백작에서 자작으로 자작에서 남작으로 떨어지면서까지 함께 살아온 그를 따랐던 것이다.
그런 고윈 남작이었기에 병사들의 마음은 더욱 슬펐다. 알지만 쉬쉬했던 사실을 밝혔을 때 이들에게 주어질 것은 좌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병사들과 기사들은 고윈 남작의 귀환을 반기면서도 아픔을 준 그에게 원망을 보내고 있었다.
“끄흐흑! 우리 보러 어쩌라는 것입니까! 남작님께서 왕이 되시렵니까!”
어느 병사의 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이안 왕국 중앙 귀족원 놈들을 먼저 죄다 죽입시다!”
“차라리 그게 의미 있겠습니다!”
“차라리 그것이 희망이 있겠습니다!”
병사들의 소요는 점점 커졌다.
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점을 잘 알고 있던 기사들은 분루를 삼키며 그들의 분노와 슬픔을 듣고만 있었다. 자신들은 기사지만 어차피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신세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정녕 그것을 원하는가, 매의 군단이여!”
고윈 남작의 목소리가 소란 속에 울려 퍼진다.
병사들의 얼굴에는 흥분이 담겨 있었다. 비참함을 벗어나려는 마음이 폭발해 있었다.
“그 이후 신성제국과 연방제국 그리고 해상제국에 의해 비참하게 끝을 보고 싶은 것인가!”
“그러면 어찌 하란 말입니까!”
“차라리 말을 꺼내지 마시지 그랬습니까!”
병사들의 울분과 답답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한 번 터진 울분의 파도는 도저히 멈추지 않았다.
“나를 믿는가!”
고윈 남작의 피를 토하는 듯한 음성이 이만여 정병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터져 나오던 울분들은 삽시간에 사그라지고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믿느냐 물었다, 제군들!”
다시 한 번 울려 퍼진 목소리.
스르렁.
맨 처음 나와 예를 올렸던 기사가 소드를 뽑아 들며 외쳤다.
“여기 쉬폰 디크로이는 기사의 명예를 걸고 고윈 남작님의 뜻을 따를 것을 맹세 합니다.”
“일리언 피질런은 기사의 명예를 걸고 고윈 남작님의 뜻을 따를 것을 맹세 합니다.”
“지금까지 저희의 목숨을 책임져 주셨으니 끝까지 책임져 주십시오!”
기사들의 맹세와 더불어 투박하지만 진실된 일반 병사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들의 목소리는 마치 물 위에 떨어진 물감처럼 빠르게 번져나갔다.
고윈 남작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 삶은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 어느 누가 이런 목소리를 들어 보았겠는가.’
고윈 남작은 감았던 눈을 뜨고 한 손을 하늘로 번쩍 들어 올렸다.
“나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선택이다!”
“따르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총사령관님!”
고윈 남작의 얼굴은 평소 그답지 않게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병사들의 얼굴에도 희망이 떠올랐다. 하늘로 솟은 고윈 남작의 주먹이 핏줄이 서도록 강하게 쥐여졌다. 잠깐 숨을 들이쉰 그가 병사들의 마음을 받아 외쳤다.
“지금껏 팔려 다닌 신세!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을 팔 것이다!”
그의 음성에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다 말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불신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의미에 대한 무언의 추궁이었다.
고윈 남작이 그들의 침묵에 답하였다.
“우리 자신을 팔아, 우리의 자유와! 살아가는 의미와! 우리의 내일을 산다!”
화아악!
마치 진공 상태처럼 숨소리 하나 없는 고요. 몇 초간의 고요이후 폭풍이 불어 닥쳤다.
“우와아아아아아!”
북받친 함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저마다 무기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고윈 남작의 결정에 환호를 올렸다. 마치 마약을 한 인간처럼 광기를 보이듯 환호를 터트렸다.
고윈 남작이 걸음을 옮기며 다시 한 번 각인시키듯 주먹을 하늘로 찌르며 외쳤다.
“우리의 자유와!”
“자유와!”
“살아가는 의미와!”
“의미와!”
“우리의 내일을!”
“내일을!”
“우리의 목숨을 걸고 바꾸어 보겠는가, 제군들!”
“우와아아아아아!”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그저 붉게 오른 함성이 대지를 울릴 뿐이었다.
고윈 남작은 그들의 함성을 등에 업고 천천히 돌아서서 진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진천의 앞에 당도 하자 함성도 잦아들었다.
“…….”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스륵.
고윈 남작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 레비언 고윈은 오늘부터 가우리의 깃발 아래 매의 군단과 더불어 따르겠습니다.”
고윈 남작의 나지막하면서도 신념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진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윈 남작을 지나쳐 병사들에게 두어 발자국 걸어갔다. 진천이 멈추어 서자 고개를 들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고윈 남작이 그에게 예를 올렸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이미 그전에 보여주었던 모습에서 이미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하다가 죽어도, 즐거이 죽을 수 있게 해주마.”
진천은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뒤를 돌아 고윈 남작에게 갔다. 그리고 외쳤다.
“레비언 고윈에게 대사자의 지위를 내리며, 그대들의 목숨을 걸고 얻고자 한 것을 주겠다. 자유와, 살아가는 의미와, 너희들의 자손에게 미래를 열어 주겠다. 더불어…….”
진천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가우리라는 이름 안에서 영광된 삶이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디너드 백작이 머물던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이제는 남작이 아닌 고윈 대사자의 음성이 웅장하게 흘러 나왔다.
“만천(萬天)의 지존이자 만인(萬人)과 만물(萬物)을 포용하시는 열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그 이름 아래에 기사의 도리를 지키며 이를 따르는 모든 이의 선봉에 신 레비언 대사자의 이름이 가장 먼저 거론될 것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고윈 대사자의 음성과 매 군단의 함성이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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